17화(6,434자)

지장간·통근·투간 — 겉으로 보이는 글자와 그 뿌리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11월로 들어서자 거북바위의 돌이 먼저 겨울을 알았다.

아침 아홉 시에도 바위 표면은 손바닥을 대면 저릿할 만큼 차가웠고, 틈에 낀 솔잎에는 밤새 내린 서리가 하얗게 남아 있었다. 미연은 편의점에서 산 핫팩 네 개를 주머니에서 꺼내 그중 두 개를 승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승수는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한 개를 무릎 바깥쪽에, 한 개를 안쪽에 정성껏 붙였다.

“이건 근거가 보이는 선물이네요.”

“선생님 무릎이 아까 계단에서 소리 냈어요. 제가 들었어요.”

“무릎도 말을 해요. 미연 씨 다리처럼.”

정우가 접견실 유리 너머에서 말해도 돼요, 한 지 하루가 지났다. 미연은 첫 면회에서 정우가 한 말을 공책 맨 앞장에 적어 두었다. 그날 쉼터에서 이장이 위조라는 말을 했어요. 아홉 시 반에 위조가 뭐냐고 전화했어요. 네 아버지한테 물어보라고 하고 끊었어요.

어젯밤 할머니는 건넌방 문 앞에 서서 한 번 더 물었다. 무슨 얘기야. 미연은 형사님한테 먼저 말씀드리고, 그다음에 다 말씀드리겠다고만 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 끄덕임이 미연의 등에 밤새 얹혀 있었다. 할머니는 오늘도 새벽에 밭에 나가 아무것도 심지 않은 고랑을 괭이로 다시 갈았다.

미연은 그 공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오늘 오후에 경찰서에 갈 생각이었다. 그 전에 배우고 싶은 게 있었다.

“선생님, 오늘은 뭐예요?”

“지지 속에 든 걸 볼 거예요.”

승수가 공책을 끌어다 승수와 미연의 지지 여덟 글자를 아래로 나란히 적었다. 그리고 글자마다 옆에 작은 글씨를 붙였다.

승수 酉 庚 辛 午 丙 己 丁 未 丁 乙 己 卯 甲 乙

미연 申 戊 壬 庚 酉 庚 辛 子 壬 癸 未 丁 乙 己

“지지 한 글자 안에는 천간이 숨어 있어요. 하나가 들어 있기도 하고 셋이 들어 있기도 하지요. 이걸 지장간이라고 불러요. 땅 지, 감출 장, 천간의 간. 지지에 감춰진 천간이라는 뜻이에요.”

“땅 속에 숨은 하늘이네요.”

“그렇게 불러도 좋아요. 순서가 있어요. 맨 앞은 여기, 지난 계절이 남기고 간 기운이에요. 가운데가 중기, 다음 계절을 준비하거나 섞여 있는 기운이고요. 맨 뒤가 정기, 그 달의 본래 기운이에요. 예를 들어 申은 가을이 시작되는 달인데, 여름 끝의 흙인 戊가 아직 남아 있고, 가운데 壬이 있고, 본래 기운은 庚이에요.”

미연은 申 옆에 적힌 세 글자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자기 연지였다. 거기 壬이 하나 숨어 있었다.

“제 申 안에 제 일간이랑 같은 글자가 있어요.”

“그게 뿌리예요. 천간에 있는 글자가 지지 속에서 같은 기운을 만나는 걸 통근이라고 해요. 뿌리 근 자를 써요. 나무가 땅에 뿌리를 박듯이, 하늘에 뜬 글자가 땅에 발을 디디는 거지요.”

“그럼 저는 子에도 壬하고 癸가 있으니까 뿌리가 두 개예요?”

“申과 子 두 군데요. 子는 물이 가장 왕성한 한겨울 한가운데라 뿌리가 깊고, 申은 물이 막 태어나는 자리라 뿌리가 가늘지만 살아 있어요.”

미연은 자기 표에 작은 뿌리를 두 개 그렸다. 연필 끝이 차가워서 손가락이 둔했다. 그러다 승수의 표로 눈을 옮겼다. 酉, 午, 未, 卯. 그 옆의 작은 글씨들을 하나씩 짚었다. 庚, 辛, 丙, 己, 丁, 丁, 乙, 己, 甲, 乙.

미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선생님 표에는 물이 하나도 없어요. 지장간까지 다 봐도.”

“없지요.”

“그럼 선생님 癸는 뿌리가 없어요?”

“제 기운으로 된 뿌리는 없어요.”

승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미연은 그 아무렇지도 않음이 이상했다. 한여름에 태어난 빗물 하나가 땅 어디에도 발 디딜 데 없이 떠 있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럼 어떻게 버텨요?”

“이쪽을 봐요.”

승수가 酉를 짚었다. 庚, 辛.

“쇠가 물을 낳지요. 금생수. 酉 안의 쇠가 나를 낳아 주는 쪽이에요. 월간의 庚도 그렇고요. 내 뿌리는 아니지만, 나를 받쳐 주는 땅이 있어요. 뿌리만 힘인 게 아니에요.”

승수는 제본한 종이 뭉치에서 『자평진전』을 꺼냈다. 「열 천간이 때를 얻어도 왕하지 않고 때를 잃어도 약하지 않음을 논함」이라는 긴 제목의 편이었다.

是故十干不論月令休囚,只要四柱有根,便能受財官食神,而當傷官七煞。

“시고십간불론월령휴수, 지요사주유근, 변능수재관식신, 이당상관칠살. 그러므로 열 천간은 태어난 달에서 쉬거나 갇혀 있다 해도, 사주에 뿌리만 있으면 재물과 관직과 식신을 감당하고, 상관과 칠살에도 맞설 수 있다.”

“월령이 안 좋아도 뿌리가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이 책은 뿌리를 그만큼 무겁게 봐요. 계절보다 뿌리라고 말할 때도 있지요. 다음 문장이 더 재밌어요.”

長生祿旺,根之重者也;墓庫餘氣,根之輕者也。得一比肩,不如得支中一墓庫,如甲逢未、丙逢戌之類。乙逢戌、丁逢丑,不作此論,以戌中無藏木,丑中無藏火也。

승수가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다. 장생녹왕, 근지중자야. 묘고여기, 근지경자야. 득일비견, 불여득지중일묘고, 여갑봉미, 병봉술지류. 을봉술, 정봉축, 부작차론, 이술중무장목, 축중무장화야.

“장생과 녹과 왕지는 무거운 뿌리고, 창고와 남은 기운은 가벼운 뿌리다. 그런데 천간에 같은 편 하나를 얻는 것보다 지지에 창고 하나를 얻는 게 낫다고 해요. 甲이 未를 만나고 丙이 戌을 만나는 것 같은 경우요. 乙이 戌을 만나고 丁이 丑을 만나는 건 같이 논하지 않는다고 하고요. 戌 안에는 나무가 없고 丑 안에는 불이 없으니까.”

미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甲이 未를 만나요?”

미연은 자기 표로 돌아갔다. 연간에 甲, 시지에 未. 未 옆에 작게 적힌 丁 乙 己 가운데 乙이 있었다.

“제 甲이요! 저 숲에서 나무 배운 날부터 제 큰 나무는 뿌리가 어디 있나 했는데. 未 안에 乙이 있으니까 가벼운 뿌리가 있는 거네요.”

“이 책 기준으로는 그래요. 다만 미연 씨 甲은 연주에 있고 未는 시주에 있어요. 맨 왼쪽과 맨 오른쪽, 멀리 떨어져 있지요. 그 거리를 얼마나 따질지는 사람마다 달라요. 거기까지 알아 두면 돼요.”

“근데 이거 신기해요. 겉으로는 하나도 안 보이는데 안에 다 들어 있어요.”

“그래서 비 오던 날 정자에서 셋째 줄로 넘어가기 전에 그렇게 기다리라고 한 거예요. 천간만 세면 승수는 물이 하나뿐인 사람이 되고, 미연 씨는 나무가 하나뿐인 사람이 돼요. 지장간까지 보면 그림이 달라지지요.”

“천간은 얼굴이고 지장간은 속마음이네요.”

승수가 웃었다.

“비유로는 좋아요. 사람한테 그대로 옮기지만 않으면.”

승수는 한 가지를 더 짚었다. 승수의 연간에 놓인 己였다.

“이 己는 午 안에도 있고 未 안에도 있어요. 지장간에 숨어 있던 글자가 천간에 얼굴을 내민 걸 투간, 혹은 투출이라고 해요. 숨은 게 드러났다는 뜻이에요. 숨어만 있는 글자보다 드러난 글자가 힘을 더 쓰는 것으로 봐요.”

“숨어 있던 게 드러나면 힘이 세진다.”

미연은 그 말을 따라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공책 앞장의 정우 말이 눈에 걸렸다. 그날 이장이 위조라는 말을 했어요.

미연은 지장간 표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선생님, 도해 원장이 그랬잖아요. 영수 아저씨는 庚子라고. 금백수청, 귀한 사주라고.”

승수가 미연을 보았다.

“그 표를 끝까지 뽑아 볼 거예요?”

미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저씨 생일을 할머니께 여쭤서 네 기둥을 다 세우고, 월령을 찾고, 월령을 찾고, 숨은 글자를 찾고, 그중에서 무언가를 숨기는 사람의 글자를 고르는 자기 손이 너무 쉽게 그려졌다. 꽃집 아인슈타인처럼. 무대의 엘비스처럼.

“아니요. 안 읽을래요.”

“왜요?”

“읽으면 맞는 글자만 보일 것 같아서요. 아저씨가 뭘 했는지는 글자 말고 다른 걸로 알아야 해요.”

승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핫팩 하나를 무릎에서 떼어 미연 손에 쥐여 주었다. 미연의 손가락이 아까부터 하얗게 질려 있었다.

*

경찰서 형사과 사무실은 바깥보다 더 추웠다. 창문이 하나 깨져 테이프로 붙여 놓은 자리로 바람이 들어왔다. 오성태 경위는 자판기 커피 두 잔을 들고 와서 하나를 미연 앞에 놓았다. 설탕이 너무 많아 혀가 아렸다.

“학생, 또 사주 이야기면 나 바빠요.”

“사주 아니에요.”

미연은 공책을 펼쳤다. 거기엔 표도 한자도 없었다. 날짜와 시각과 장소만 적혀 있었다.

“이장님 돌아가신 그날 오후요. 서울 아저씨가 할머니 밭에 와서 서류 봉투를 평상 위에 두고 갔어요. 누런 봉투인데 모서리에 초록색 로고가 찍혀 있었어요. 똑같은 봉투를 도해 원장 책상 위에서도 봤어요. 리조트 시행사 로고예요. 할머니는 그걸 안 열어 보고 무청 더미 위에 얹었어요. 제가 봤어요. 다음 날 오후에 할머니 집에 갔을 때는 그 봉투가 없었어요. 형사님이 농기구 가져가신 그날이요.”

“어머님이 치우셨겠지.”

“할머니한테 여쭤봤어요. 손도 안 댔대요. 그리고 할머니는 그날 밤 내내 집에 계셨어요. 정우 씨는 계곡에서 내려와서 바로 할머니랑 저녁 먹었고요. 그리고 형사님이 정우 씨 잡아간 그 아홉 시 반 전화요. 그것도 이유가 있어요.”

오 형사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정우 씨가 허락했어요. 그날 저녁에 이장님이 정우 씨를 계곡 쉼터로 불러서 할머니 설득하라고 했대요. 안 그러면 네 아버지 위조 일 터진다고.”

“위조?”

“정우 씨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화내고 먼저 내려왔대요. 집에 와서도 걸려서 아홉 시 반에 전화로 물었는데, 이장님이 네 아버지한테 물어보라고 하고 끊었대요. 아버지 이야기라서 지금까지 말 못 했대요.”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다른 책상의 형사 하나가 전화를 받다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오 형사는 의자를 뒤로 젖히며 천장을 보았다.

“학생,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요?”

“네.”

“구속된 아들 살리려고 아버지를 끌어들이는 거예요. 그거 우리 일 하다 보면 많이 봐요. 가족끼리 서로 떠넘기는 거.”

“정우 씨가 떠넘긴 게 아니에요. 지금까지 말 안 하고 버틴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을 감옥에 그냥 두겠어요? 그날 서울 갔다고 진술했어요, 그 사람. 자기 아들 변호사비도 대고 있고.”

미연의 목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다. 숲에서 엄마랑 전화로 싸울 때 올라오던 것과 같은 온도였다.

“형사님은 그게 상식이라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상식이 틀린 경우는 별로 없어요.”

“도해 원장도 그렇게 말했어요. 피 볼 살이 둘이면 피를 본다고. 그것도 그 사람한테는 상식이었어요. 형사님은 그 종이 아직 안주머니에 갖고 계시잖아요.”

오 형사의 손이 저도 모르게 점퍼 가슴께로 갔다가 멈췄다. 미연은 자기가 너무 멀리 갔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말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저 아저씨 사주는 안 봤어요. 일부러요. 보면 제가 맞는 글자만 고를 것 같아서요. 그래서 사주 말고 이걸 가져왔어요. 봉투가 사라진 날짜, 정우 씨가 들은 말. 이건 근거잖아요.”

오 형사는 한참 미연을 보았다. 그리고 미연의 공책을 끌어다 날짜와 시각이 적힌 줄을 손가락으로 따라 읽었다. 읽는 동안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위조라.”

형사는 공책을 돌려주었다.

“학생, 이거 다른 데 말하지 말아요. 단톡방에도, 그 기자한테도. 아니면 이번엔 그 집 아버지가 낙인찍혀요. 학생이 제일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미연은 숨을 멈췄다. 형사 말이 맞았다. 근거가 너무 분명한 말이었다.

“네.”

“그리고 학생.” 오 형사가 일어서며 커피 잔을 구겼다. “그날 그 종이, 안 버린 건 맞아요. 근데 그건 믿어서가 아니라, 누가 그런 걸 만들어 돌렸는지 기억하려고 갖고 있는 거예요.”

경찰서를 나서자 해가 벌써 기울어 있었다. 미연은 정류장 의자에 앉아 손에 쥔 핫팩을 주물렀다. 아침에 승수가 쥐여 준 그 핫팩은 다 식어 딱딱해져 있었다. 미연은 그것을 버리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식은 것도 버리지 않고 갖고 있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

해 질 무렵 읍내 시장 골목 끝, 간판 글씨가 반쯤 지워진 도장 가게 앞에 오성태 경위의 차가 섰다.

가게 안에는 석유난로가 켜져 있었고, 늙은 주인이 돋보기를 쓴 채 나무 도장에 칼을 대고 있었다. 칼끝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고운 나뭇가루가 작업대 위로 떨어졌다. 오 형사는 출입증을 보이고 의자에 앉지 않았다.

“어르신, 지난 9월부터 10월 사이에 박순례라는 이름으로 막도장 판 거 있으세요? 인감 말고, 그냥 나무 도장.”

“이름으로는 기억 못 해. 하루에 몇 개를 파는데.”

“장부는요?”

주인은 칼을 내려놓고 작업대 서랍에서 손때 묻은 공책 하나를 꺼냈다. 날짜와 이름과 값이 볼펜으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주인은 침 묻힌 손가락으로 장을 넘겼다. 9월, 9월, 10월 초.

손가락이 한 줄에서 멈췄다.

주인이 돋보기 너머로 그 줄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공책을 돌려 오 형사 쪽으로 밀었다.

“이 사람이 맡기고 간 건 기억나네. 서울 말씨였어. 어머니 거라고, 급하다고 웃돈까지 줬지.”

오 형사는 그 줄을 휴대전화로 찍었다. 석유난로의 불빛이 화면 위에서 흔들렸다. 그는 사진을 다시 확대해 보지 않았다. 한 번 본 것으로 충분했다.

1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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