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6,298자)
육십갑자와 일주 — 같은 일주, 다른 삶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마을회관 앞 게시판에 공고가 붙은 건 화요일이었다. 리조트 사업 주민 설명회 및 故 민병철 이장 추모의 시간. 목요일 저녁 일곱 시. 시행사 로고가 공고 맨 아래에 찍혀 있었다. 초록색이었다.
미연은 그 로고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도해의 책상 위에 있던 봉투의 로고와 같았다. 밭둑 평상 위의 봉투에도 있었던 것 같은 로고였다. 같은 회사가 이 마을에 보내는 서류는 다 이 봉투에 담겨 오는 것이었다. 그러니 같은 로고라는 건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다. 미연은 그 사실을 공책에 적었다. 같은 로고는 근거가 아님. 다만 같은 회사임.
목요일 저녁, 회관 안은 사람들로 꽉 찼다. 접이식 의자가 서른 개쯤 놓였는데 그걸로 모자라 뒤쪽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앞쪽 단상에는 이장의 영정이 놓였고, 그 옆에 대형 화면이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리조트 조감도가 떠 있었다. 산자락을 따라 지붕 낮은 건물들이 계단식으로 늘어서 있었고, 맨 아래 넓은 주차장 자리에 할머니의 밭이 있었다. 조감도 속에서는 밭이 아스팔트 회색이었다.
할머니는 오지 않았다. 정우가 왔다. 미연은 정우 옆자리에 앉았다. 승수는 맨 뒤 벽에 기대 서 있었다. 회관 입구 쪽에는 엄마가 왔던 날 카페에서 수첩에 무언가를 적던 그 기자가 앉아 있었다. 목에 건 출입증에 충청새벽 윤지호라고 적혀 있었다.
추모 묵념이 먼저 있었다. 일 분 동안 회관 안이 조용했다. 미연은 눈을 감고 분향소 위패의 생년월일을 떠올렸다가, 얼른 지웠다. 이장의 아내는 앞줄에 앉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다음은 시행사 직원의 설명이었다. 정장을 입은 삼십 대 남자가 화면을 넘기며 일자리와 도로와 땅값을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땅값에서 고개를 들었다. 직원이 마지막 화면을 띄웠다.
“그리고 이번 사업의 입지와 배치에 대해서는 지역에서 오래 활동하신 도해 원장님께서 자문을 맡아 주셨습니다. 원장님, 한 말씀.”
도해가 일어섰다. 오늘도 개량 한복이었다. 도해는 마이크를 받고 단상 앞으로 나와서 영정 쪽으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민 이장은 내 오랜 친구입니다. 이 마을이 잘되기를 누구보다 바랐던 사람이에요. 이 리조트 터는 산의 기운이 아래로 내려와 모이는 자리라, 마을에 복이 고이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복을 막는 기운이 있으면 일이 이렇게 됩니다.”
회관 안이 웅성거렸다. 몇몇 사람의 고개가 정우 쪽으로 돌아갔다. 정우는 앞을 보고 있었다. 무릎 위에서 주먹이 하얗게 쥐어져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미운 게 아니라 타고난 기운이 그런 거예요. 壬戌 일주. 괴강에 백호가 겹쳤어요. 물이 살기를 품은 형국이지요. 그런 기운은 본인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러니 주변이 조심해야 하는 거예요.”
누가 박수를 쳤다. 한 사람이 치자 몇 사람이 따라 쳤다. 박수는 금방 멎었는데 멎은 뒤의 조용함이 더 컸다.
미연은 일어섰다. 무릎이 접이식 의자에 부딪혀 의자가 뒤로 밀렸다. 쇠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에 회관 안의 얼굴들이 일제히 미연을 보았다. 정우가 미연의 소매를 잡았다. 미연은 그 손을 놓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정우의 손이 따라오다가 떨어졌다.
“저 잠깐만요. 저기 화이트보드 써도 돼요?”
시행사 직원이 당황해서 도해를 보았다. 도해는 웃었다. 그 웃음에 여유가 있었다.
“아, 그 집에 사는 학생. 써요. 공부한 거 한번 보여 줘 봐요.”
*
화이트보드는 단상 옆 구석에 접혀 있었다. 미연은 그걸 끌어다 화면 옆에 세우고 마커를 집었다. 마커 뚜껑을 여는 손이 떨렸다. 뚜껑이 바닥에 떨어져 굴러갔다. 맨 앞줄 아이 하나가 그걸 주워 주었다. 미연은 고맙다고 말하고 보드 맨 위에 적었다.
일주. 태어난 날의 두 글자.
“천간이 열 개, 지지가 열두 개예요. 둘을 하나씩 짝지으면 백이십 개가 될 것 같은데, 육십 개밖에 안 나와요. 양의 천간은 양의 지지하고만, 음의 천간은 음의 지지하고만 짝을 지어서요. 그래서 육십갑자예요. 갑자, 을축, 병인, 이렇게 예순 개가 돌아서 다시 갑자로 와요. 환갑이 그래서 예순한 살이고요.”
뒤쪽에서 누가 아, 하고 소리를 냈다. 환갑을 치른 사람 같았다.
“태어난 날도 이 예순 개 중 하나예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 예순 명 중 한 명은 저랑 일주가 같아요. 제 일주는 壬子예요. 대한민국에 저랑 일주가 같은 사람이 팔십만 명 넘게 있어요.”
웃음이 몇 군데서 터졌다. 미연은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손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그 팔십만 명이 다 같은 사람인지 보여 드릴게요. 유명한 사람들로요. 다 돌아가신 분들이에요.”
미연은 보드에 한 줄씩 적어 내려갔다. 승수에게 받은 인물 표는 주머니 속에 있었는데 꺼내지 않았다. 이 열흘 동안 몇 번을 들여다봤는지 셀 수 없었다.
丙寅 간디 / 히틀러
“인도를 비폭력으로 독립시킨 간디, 그리고 유대인 육백만 명을 학살한 나치 독일의 히틀러. 일주가 둘 다 丙寅이에요.”
회관 안이 조용해졌다.
庚午 이순신 / 스탈린
“임진왜란 때 바다를 지킨 이순신, 그리고 소련에서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몬 독재자 스탈린. 둘 다 庚午.”
丁亥 헬렌 켈러 / 찰스 맨슨
“보지도 듣지도 못하면서 대학을 마치고 평생 장애인 권리를 위해 세계를 다닌 헬렌 켈러. 그리고 미국에서 사이비 집단을 만들어 추종자들에게 살인을 시킨 찰스 맨슨. 둘은 일주만이 아니라 태어난 시의 두 글자까지 같아요. 戊申.”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미연은 다음 줄을 적었다.
己酉 오드리 헵번 / 제프리 다머
“「로마의 휴일」의 배우이자 말년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아이들을 돌보며 보낸 오드리 헵번. 그리고 미국에서 열일곱 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제프리 다머.”
辛酉 마릴린 먼로 / 김일성 乙酉 존 레논 / 알 카포네 甲戌 이소룡 / 무솔리니
“배우 먼로와 북한의 김일성. 비틀스의 존 레논과 시카고 갱단 두목 알 카포네. 무술 배우 이소룡과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
미연은 마커를 내려놓지 않고 한 줄을 더 적었다. 이번에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癸酉 유관순 / 전두환 / 차우셰스쿠
미연은 뒤쪽 벽을 보았다. 승수가 팔짱을 낀 채 미연을 보고 있었다. 지난번 포스트잇으로 이름을 가렸던 그 명식이었다. 壬寅, 壬子, 癸酉.
“열일곱 살에 만세를 부르다 감옥에서 죽은 유관순. 그리고 군대를 끌고 정권을 빼앗고 광주에서 시민들을 죽여,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전두환. 그리고 루마니아라는 동유럽 나라를 이십 년 넘게 독재하다 처형당한 차우셰스쿠. 셋 다 癸酉예요.”
회관 맨 뒤에서 누가 낮게 말했다. 전두환이랑 유관순이 같다고? 그 말이 퍼져 나갔다. 웅성거림 속에서 미연은 마지막 줄을 적었다. 보드 맨 아래, 조금 떨어진 자리였다.
丙申 빈센트 반 고흐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 둘은 일주만 같은 게 아니에요. 태어난 달의 계절도 같고, 시주까지 같아요. 丙申일 甲午시, 卯월. 여덟 글자 중에 다섯 글자가 같아요. 한 사람은 평생 그림을 그리다 서른일곱에 죽었고, 한 사람은 상대성 이론을 만들었어요.”
미연은 마커 뚜껑을 닫았다.
“저는 이 사람들을 처음에 이름 가리고 봤어요. 이름 가리고 보면 아무것도 못 맞혀요. 이름 보고 나면 다 맞는 것 같아요. 그건 글자가 맞는 게 아니라 제가 맞는 글자만 고르는 거예요.”
그리고 도해 쪽을 보았다.
“정우 씨 일주는 壬戌이에요. 찰리 채플린이랑 같아요. 콧수염 붙이고 지팡이 짚고 뒤뚱뒤뚱 걸어서 세상을 웃긴 사람이요. 그리고 壬戌은 납음이라는 옛날 분류로는 큰 바다의 물, 대해수라고 불러요. 피 볼 살이라는 이름도 있고 큰 바다라는 이름도 있어요. 어느 이름을 고르느냐는 글자가 아니라 부르는 사람이 정해요.”
*
회관 안은 오래 조용했다. 시행사 직원이 화면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윤지호 기자의 펜이 수첩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해가 마이크를 들었다. 웃음은 그대로였는데, 이번에는 그 웃음 끝이 조금 내려가 있었다.
“공부 많이 했네. 근데 학생, 일주 하나로 사람을 다 보는 게 아니야. 여덟 글자를 다 봐야지.”
“네. 그래서 일주 하나로 정우 씨를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웃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미연 쪽 웃음이었다. 앞줄의 아이가 따라 웃다가 엄마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도해의 얼굴이 처음으로 붉어졌다.
“학생이 그 집에 정이 들어서 그래. 그 집 아이가 무슨 짓을 했는지 학생이 알아?”
“몰라요. 원장님도 모르시잖아요. 경찰이 찾고 있어요.”
미연은 말을 멈췄다. 한 가지가 더 남아 있었다. 분향소 위패의 생년월일. 네모로 가둬 둔 공책 구석의 한 줄. 이장의 일주는 壬寅이었다.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와 같은 일주였다. 그 사실을 지금 말하면 회관 안의 모든 말이 끝날 것이었다. 도해의 입도 닫힐 것이었다.
미연은 앞줄을 보았다. 이장의 아내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처음으로 미연을 보고 있었다. 젖은 눈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는데요.”
회관 안의 얼굴들이 기다렸다. 승수도 벽에서 등을 떼었다.
“돌아가신 이장님 생신은 다들 아세요. 분향소에 적혀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장님 사주는 아무도 안 뽑아 보셨어요. 정우 씨 건 다 뽑아 보셨는데요. 저는 뽑아 봤어요. 그런데 말하지 않을 거예요.”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장님은 지금 글자가 아니라 사람이라서요. 사모님한테도, 따님한테도. 정우 씨도 마찬가지예요. 글자가 아니라 사람이에요.”
미연은 마커를 보드 받침에 내려놓았다. 단상에서 내려오는데 다리가 풀려 계단 하나를 헛디뎠다. 정우가 일어나 미연의 팔을 잡았다. 이번에는 누가 팔을 내밀었고, 미연은 그 팔을 잡았다.
앞줄에서 이장의 아내가 손수건으로 눈을 눌렀다. 그 옆의 딸이 엄마의 어깨를 감쌌다. 딸이 미연을 보며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
회관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찬바람과 함께 오성태 경위가 들어왔다. 뒤로 정복 경찰 둘이 따라 들어왔다. 회관 안의 모든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갔다. 오 형사는 회관 안을 한 번 훑어보고 정우 쪽으로 곧장 걸어왔다. 미연의 팔을 잡고 있던 정우의 손이 굳었다.
“김정우 씨.”
“네.”
“잠깐 밖으로 나갈까요. 여기서 하고 싶지 않아서요.”
정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 형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도 앞쪽 몇 줄에는 다 들렸다.
“이장님 휴대전화 통화 기록이 나왔어요. 마지막 통화가 그날 밤 아홉 시 삼십사 분, 김정우 씨 번호예요. 정우 씨는 여덟 시 십 분쯤 내려와서 그 뒤로 연락한 적 없다고 했지요. 그리고 계곡 쉼터 난간에서 정우 씨 지문이 나왔어요.”
“쉼터는 저녁에 갔다고 했잖아요. 그때 묻은 거예요.”
“그럼 아홉 시 반 통화는요?”
정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미연은 정우의 얼굴을 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키는 얼굴이었다. 할 말이 없는 얼굴이 아니었다.
“김정우 씨, 살인 혐의로 긴급체포합니다.”
오 형사가 미란다 원칙을 읽었다.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 진술을 거부할 권리. 회관 안의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복 경찰이 정우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소리가 조용한 회관에 또렷하게 울렸다. 철컥, 그리고 한 번 더 철컥.
정우가 끌려 나가며 미연을 돌아보았다.
“할머니한테……”
말이 끝나기 전에 문이 닫혔다.
미연은 보드 앞에 서 있었다. 보드에는 미연이 적은 이름들이 그대로 있었다. 간디와 히틀러, 이순신과 스탈린, 유관순과 전두환. 방금까지 그 이름들은 회관 안의 모든 말을 이기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이기지 못했다. 글자가 사람을 고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이십 분이 걸렸고, 그 이십 분은 수갑 소리 두 번에 지워졌다.
도해가 마이크를 내려놓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조용한 회관이라 그 혼잣말이 다 들렸다.
“내가 뭐라고 했나.”
미연은 보드 지우개를 집었다. 그리고 내려놓았다. 지우지 않았다.
뒤쪽 벽에서 승수가 걸어 나왔다. 무릎을 짚지 않고 걸었다. 승수는 미연 옆에 서서 보드를 한참 보았다.
“지우지 말아요.”
“아무 소용 없었잖아요.”
“수갑은 증거로 채운 거예요. 증거는 경찰이 다투고, 미연 씨가 다툰 건 글자예요. 둘은 다른 싸움이에요. 미연 씨는 오늘 미연 씨 싸움을 이겼어요.”
“정우 씨는 잡혀갔어요.”
“그래요. 그건 아직 아무도 이기지 못한 싸움이에요.”
미연은 고개를 숙였다. 아까 정우가 삼킨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홉 시 반에 정우가 왜 이장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미연은 몰랐다. 공책의 모르는 것 칸에 셋째 줄이 생겼다. 그 줄을 적는 동안 회관 입구에서 윤지호 기자가 미연을 보고 있었다. 수첩을 덮은 채였다.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은 어두웠다. 대문의 흉터가 가로등 아래 희미하게 보였다. 살인자. 미연은 대문 앞에서 숨을 고르고, 안에 있는 할머니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한참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