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6,067자)

왕지 자오묘유 — 한가운데 네 글자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페인트는 시너로도 다 지워지지 않았다.

미연과 정우는 아침 일곱 시부터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정우가 읍내 철물점이 문을 열자마자 사 온 시너 한 통과 철수세미 두 개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시너를 묻힌 걸레로 문지르면 붉은색이 번지면서 분홍이 되었고, 철수세미로 긁으면 붉은색과 함께 원래의 파란 페인트까지 벗겨졌다. 한 시간이 지나자 철문 위의 두 글자는 붉은 글씨에서 분홍 얼룩으로, 분홍 얼룩에서 파란 바탕이 군데군데 벗겨진 흉터로 바뀌어 있었다. 글자는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벗겨진 자리가 글자 모양 그대로였다.

“이거 그냥 문을 새로 칠해야겠는데요.”

“무슨 색으로요?”

“파란색이요. 원래대로.”

“그럼 또 쓰면요?”

정우는 대답하지 않고 시너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손바닥에는 어젯밤 묻은 붉은 페인트가 아직 손금 사이에 남아 있었다.

대문이 안에서 열리고 할머니가 나왔다. 할머니는 철문의 흉터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걸레를 든 정우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 해.”

“금방 지워요.”

“그냥 둬. 동네 사람들 다 보라고 둬.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이 동네가 어떤 동네인지 다 보라고.”

“할머니, 이거 보는 사람마다 저 쳐다봐요.”

“쳐다보라 그래. 너는 고개 들고 다녀.”

할머니는 걸레를 빼앗아 시너 통 위에 걸쳐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우와 미연은 서로를 보았다. 정우가 먼저 웃었고, 미연도 따라 웃었다. 시너 냄새 때문인지 머리가 조금 띵했다.

“할머니 이기는 사람 본 적 있어요?”

“할아버지요. 딱 한 번. 보일러 놓을 때.”

*

마을 단톡방은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할머니 휴대전화는 진동이 멈추지 않아서 결국 할머니가 화장대 서랍에 넣어 버렸다. 미연은 할머니 허락을 받고 그 서랍을 열어 단톡방을 훑었다. 낙서 사진이 벌써 올라와 있었다. 그 아래에 누가 썼다. 이게 다 업보지.

그리고 그 아래 도해의 긴 글이 있었다.

내가 그 아이 사주를 다시 봤는데, 도화살이 끼어 있어. 도화는 子午卯酉를 말하는 거야. 색정과 시비를 부르는 별이지. 이장 일도 그런 시비에서 시작된 거 아니겠나. 젊은 놈이 여자 문제로 어른하고 다투다가…….

미연은 그 글을 두 번 읽었다. 그리고 공책을 펼쳐 정우의 명식을 적었다. 辛巳, 戊戌, 壬戌, 그리고 시는 모름.

子도 午도 卯도 酉도 없었다. 세 기둥 여섯 글자 어디에도.

미연은 서랍을 닫고 마당으로 나갔다. 정우는 대문 앞에서 아직 철문을 보고 있었다.

“정우 씨, 몇 시에 태어났는지 알아요?”

“몰라요. 엄마가 아는데 엄마랑 연락 안 해요.”

미연은 거기서 멈췄다. 정우의 엄마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묻고 싶었는데 묻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근거가 아니었다.

“그럼 시주는 아무도 모르는 거네요.”

“그렇죠.”

“도해 원장도요.”

정우가 미연을 보았다.

“그 사람이 또 뭐라 그랬어요?”

“도화살이 있대요. 子午卯酉. 근데 정우 씨 세 기둥에 그 글자가 하나도 없어요. 있다면 모르는 시주에 있어야 하는데, 그건 아무도 모르잖아요.”

정우가 말없이 미연을 보다가 철문 쪽으로 돌아섰다.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웃는 건지 다른 건지 미연은 알 수 없었다.

*

읍내 도해철학관은 농협 맞은편 건물 2층에 있었다. 계단 입구에 세로로 긴 간판이 붙어 있었다. 작명, 택일, 사주, 궁합.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상담료 오만 원. 계단은 어둡고 좁았고, 올라갈수록 향 냄새가 짙어졌다.

승수에게는 말하지 않고 왔다. 말하면 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왜 가느냐고 물었을 것이고, 미연은 그 질문에 대답할 말이 아직 없었다.

문을 열자 방울이 울렸다. 방은 생각보다 밝았다. 남향 창으로 볕이 들어와 낡은 책상과 책장을 비췄다. 책장에는 한자로 된 제본책들이 빽빽했고, 벽에는 붓글씨 액자가 몇 개 걸려 있었다. 책상 너머에서 개량 한복을 입은 남자가 돋보기를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일흔 가까워 보였다. 머리는 하얗게 셌고 얼굴은 혈색이 좋았다.

“어서 와요. 예약했어요?”

“아니요.”

“괜찮아. 오늘은 한가해. 앉아요.”

목소리가 따뜻해서 미연은 그게 더 불편했다. 단톡방의 글을 쓴 사람이 이렇게 친절할 줄은 몰랐다.

“뭐가 궁금해서 왔어요? 취업? 연애?”

“둘 다요.”

미연은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자기 생년월일과 시를 말했다. 2004년 9월 30일 오후 한 시 반. 정해 놓고 온 일이었다. 같은 명식을 이 사람은 어떻게 읽는지 보려고.

도해는 만세력 책을 펼쳐 손가락으로 짚어 가더니 종이에 여덟 글자를 적었다. 컴퓨터를 쓰지 않았다. 손이 빨랐고 틀리지 않았다. 甲申, 癸酉, 壬子, 丁未. 미연이 아는 그 명식이었다.

“壬子 일주네. 큰물이 한겨울 물 위에 앉았어. 물이 아주 많아요. 아가씨, 생각이 많지? 밤에 잠이 잘 안 오고.”

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이긴 했는데, 요즘 잠이 잘 오는 이십 대가 몇이나 될지도 생각했다.

“그리고 子가 있고 酉가 있어. 둘 다 도화야. 子午卯酉. 도화가 둘이면 이성이 끊이질 않아. 그런데 다 오래 못 가지. 맞지?”

“선생님, 도화는 연지로 보는 거예요, 일지로 보는 거예요?”

도해가 돋보기 너머로 미연을 보았다. 웃음이 조금 짙어졌다.

“공부했네.”

“조금이요.”

“둘 다 봐. 연지로도 보고 일지로도 보고.”

“그럼 기준이 둘이면 결과도 둘이잖아요. 어느 쪽으로 봤는지 말씀해 주셔야…….”

“아가씨.” 도해가 펜을 내려놓았다. “책은 책이고 사람은 사람이야. 내가 이 일을 사십 년 했어. 사십 년 동안 수만 명을 봤어. 책에 어느 기준이 적혀 있든, 사람 얼굴 보면 나와. 아가씨 얼굴에 연애 고민이 써 있어.”

“저 연애 고민 없는데요.”

“그럼 곧 생겨.”

도해가 웃는 동안 미연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틀렸다고 말하면 곧 생긴다고 하고, 맞다고 하면 거봐 할 것이었다. 어느 쪽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말이었다. 미연은 그 말을 공책에 적어 두고 싶었는데, 도해 앞에서 공책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 집 손자는요? 김정우 씨요. 세 기둥에 子午卯酉가 없던데요.”

도해의 눈이 처음으로 가늘어졌다. 웃음은 그대로였다.

“아, 그 일로 왔구나. 그 집에서 지낸다며. 동네에 소문 다 났어.”

“도화살이 있다고 쓰셨잖아요.”

“시주에 있겠지.”

“시를 모르잖아요.”

“나는 알아. 보면 알아. 그 아이 얼굴 봤어.”

“얼굴로 시주를 아세요?”

“사십 년이라니까.”

도해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책상 위에 서류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누런 봉투였고, 모서리에 초록색 로고가 찍혀 있었다. 미연은 그 로고를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아가씨가 그 집에 정 붙인 거 알아. 착하네. 근데 사람 일은 몰라. 그 집에 귀한 사주는 따로 있어. 아들, 영수. 庚子 일주야. 쇠가 맑은 물을 낳는 사주, 금백수청이라고 해. 서울 가서 크게 될 팔자지. 손자는 아니야. 손자는 살이 끼었어.”

도해가 서류 봉투를 책상 서랍에 밀어 넣었다.

“오늘 상담료는 안 받을게. 공부하는 학생이니까. 대신 하나만 알려 주지. 아가씨 사주에 남의 일에 끼어들면 탈 나는 기운이 있어. 조심해.”

미연은 일어섰는데 다리가 조금 떨렸다. 문을 닫을 때 방울이 다시 울렸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그 방울 소리가 등 뒤에서 오래 따라오는 것 같았다.

*

할머니 집 마루에 승수가 앉아 있었다. 할머니가 내온 식혜를 마시고 있었다. 미연이 대문을 들어서자 승수는 미연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미연이 먼저 말했다.

“도해철학관 갔다 왔어요.”

“그래 보이네요.”

“졌어요.”

미연은 마루 끝에 걸터앉아 철학관에서 오간 말을 하나도 빼지 않고 옮겼다. 도화 둘, 연지인지 일지인지, 사십 년, 곧 생긴다, 얼굴로 아는 시주, 금백수청, 남의 일에 끼어들면 탈 난다. 승수는 끝까지 듣고 나서 식혜 그릇을 내려놓았다.

“진 게 아니에요.”

“말로 졌어요. 한마디도 못 했어요.”

“그 사람 말은 틀렸다고 증명할 수가 없게 만들어져 있어요. 그런 말하고 싸우면 누구든 져요. 이긴 쪽은 그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이 아니라, 그 말을 끝까지 안 믿은 사람이에요.”

“저 반쯤 믿었어요. 생각이 많아서 잠이 안 온다는 거.”

“그건 맞는 말이에요. 요즘 잠 잘 자는 사람이 드물어서 누구한테 해도 맞지요.”

미연은 웃었다. 할머니가 부엌에서 식혜를 한 그릇 더 들고 나왔다.

“그럼 오늘 배울 거 하면 되겠네요. 子午卯酉예요.”

승수가 미연의 공책을 펼쳤다. 어제 그린 세 무리의 둘째 줄이었다.

“계절의 한가운데에 있는 네 글자예요. 子는 한겨울, 午는 한여름, 卯는 한봄, 酉는 한가을. 계절의 기운이 가장 진하고 순할 때라 왕지라고 불러요. 임금 왕 자를 쓰지요. 그 계절의 기운이 왕처럼 가장 셀 때라는 뜻이에요. 방위도 정확히 북, 남, 동, 서에 하나씩 앉아요.”

“동서남북 한가운데.”

“그리고 생지는 안에 다음 계절이 숨어 있었지요. 왕지는 그 계절 하나만 진하게 들어 있다고 가르쳐요. 섞인 게 적어요. 그래서 子는 거의 물이고 午는 거의 불이에요. 이것도 지장간에서 다시 볼 거예요.”

“도화는요?”

“뒤에 신살을 배울 때 子午卯酉를 도화라는 이름과 엮는 법이 나와요. 복숭아꽃이라는 뜻이에요. 사람을 끄는 기운으로 풀지요. 그런데 그 이름을 어떤 기준으로 붙이는지가 책마다 사람마다 달라요. 연지로 보는 법, 일지로 보는 법, 둘 다 보는 법이 있어요. 그 기준을 안 밝히고 말하면, 미연 씨가 오늘 들은 말처럼 아무 데나 갖다 붙일 수 있지요.”

“그 사람은 둘 다 본대요.”

“둘 다 보면 이 세상 사람 절반쯤은 도화가 있을 거예요. 열두 글자 중 넷이 도화고, 볼 자리가 둘이니까.”

미연은 공책에 그 셈을 적어 보았다. 열두 글자 중 넷, 자리 둘. 정확한 비율은 몰라도 흔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흔한 걸 특별한 것처럼 말하는 법을 오늘 배운 셈이었다.

승수가 인물 표를 펼쳤다.

“왕지를 가진 사람들 찾아봐요.”

“이순신 일지 午, 시지 子. 子랑 午가 한 명식에 다 있어요. 한겨울 물이랑 한여름 불이.”

“둘이 마주 보는 자리예요. 북과 남. 그 마주 봄을 뭐라고 부르는지는 충을 배울 때.”

“윤동주 월지 子, 일지 午. 이것도 둘 다 있어요. 안중근 일지 子. 존 레논 일지 酉, 시지 酉. 마오쩌둥 월지 子, 일지 酉. 고흐랑 아인슈타인은 卯월.”

“미연 씨랑 나는요?”

“저 子랑 酉. 선생님은 卯랑 酉. 卯酉도 마주 보는 거죠? 동이랑 서.”

“잘 봤어요.”

미연은 자기 이름과 승수 이름 옆에 도화 둘이라고 적었다가, 줄을 그어 지웠다. 그리고 그 옆에 기준 안 밝히면 근거 아님이라고 고쳐 적었다.

승수가 인물 표 아래에서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이름 칸이 포스트잇으로 가려져 있었다.

壬 壬 癸 寅 子 酉

“이건 이름을 안 알려 줄 거예요. 오늘은. 왕지가 몇 개예요?”

“子랑 酉. 둘이요. 한겨울에 태어난 癸, 그리고 일지 酉.”

“이 사람 이름은 나중에.”

미연은 나중 목록에 포스트잇 癸酉라고 적었다. 목록이 이제 한 쪽을 넘어가고 있었다.

*

해가 지고 승수가 돌아간 뒤에, 미연은 건넌방 책상 앞에 앉아 오늘 일을 공책에 정리했다. 도해의 말을 하나씩 근거 안 보임 칸에 옮겨 적다가 손이 멈췄다.

책상 위의 서류 봉투. 모서리의 초록색 로고. 도해가 서랍에 밀어 넣던 손.

미연은 그 로고를 어디서 봤는지 떠올리려고 눈을 감았다. 볕이 기울던 밭둑과 검은 승용차, 그리고 서울 아들이 평상 위에 내려놓던 누런 봉투. 할머니가 열어 보지도 않고 무청 더미 위에 얹던 봉투. 그 모서리에 같은 초록색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낫을 빼앗긴 할머니가 빈손으로 평상에 앉아 있을 때 미연은 그 옆에 앉았었다. 무청 더미는 그대로 있었는데 봉투는 없었다.

누가 가져갔을까.

할머니가 치웠을 수도 있었다. 경찰이 가져갔을 수도 있었다. 바람에 날아갔을 수도 있었다.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미연은 그 질문을 근거 안 보임 칸에 넣지 않았다. 모르는 것이라는 칸을 새로 하나 만들고, 그 칸의 첫 줄에 적었다.

평상 위의 서류 봉투. 언제, 누가 가져갔나.

창밖에서 대문 철문이 바람에 한 번 덜컹거렸다. 미연은 그 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가, 철문 위의 흉터를 떠올리고 불을 껐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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