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6,068자)

생지 인신사해 — 시작하는 네 글자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엄마가 두고 간 장조림은 사흘 안에 먹어야 했다. 미연 혼자서는 사흘 안에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다. 미연은 반찬통 하나를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할머니 집으로 갔다. 핑계가 필요했다. 정우가 경찰서에서 몇 시에 돌아왔는지, 할머니가 밥은 먹었는지, 그런 걸 묻는 핑계.

대문은 열려 있었다. 마당 빨랫줄에 정우의 회색 후드 티셔츠가 걸려 있었고, 툇마루 위에 커다란 등산 배낭이 지퍼가 반쯤 열린 채 놓여 있었다. 배낭 옆에 옷가지가 개켜져 쌓여 있었다. 방 안에서 할머니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못 가!”

“할머니.”

“가면 다들 네가 했다고 한다. 도망갔다고.”

“있으면요? 있으면 할머니까지 욕먹어요. 어제 슈퍼 아줌마가 할머니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알아. 내 귀로 들었어.”

정우가 방에서 나왔다. 손에 운동화 한 켤레를 들고 있었다. 미연과 눈이 마주치자 잠깐 멈칫했지만, 운동화를 배낭 옆에 내려놓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할머니가 방문 문지방을 짚고 따라 나왔다.

“어디로 갈 건데. 서울 네 아버지한테?”

“아니요.”

“그럼 어디.”

정우가 대답하지 못했다. 미연은 장조림 봉지를 든 채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했다. 할머니가 미연을 보았다.

“아가씨, 너도 말해 봐. 얘가 지금 가는 게 맞아?”

미연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셋 다 미연을 보고 있었다. 할머니, 정우, 그리고 빨랫줄 위에서 바람에 한쪽 소매를 흔드는 후드 티셔츠까지.

“저는…… 모르겠어요. 제가 정할 일이 아니라서요.”

말해 놓고 나니 승수의 말투였다. 할머니가 혀를 찼다.

“그 양반한테 배워서 말하는 것도 똑같아지네.”

“장조림 가져왔어요. 엄마가 해 준 거예요. 사흘 안에 먹어야 해요.”

미연은 봉지를 툇마루에 내려놓았다. 정우가 그 봉지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웃음이 금방 꺼졌다.

“버스 두 시 차예요.”

정우는 배낭을 어깨에 메지 않고 툇마루에 둔 채 대문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피우러 가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문지방에 주저앉았다. 미연은 할머니 옆에 앉았다. 장조림 봉지 속에서 반찬통 뚜껑이 햇볕을 받아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

승수는 마을회관 앞에 있었다. 회관 안에 이장의 분향소가 차려져 있었다. 하얀 국화가 영정 사진 둘레에 층층이 쌓여 있었고, 향 연기가 천장 쪽으로 가늘게 올라갔다. 사진 속 이장은 조끼 대신 양복을 입고 웃고 있었다. 회관 앞에서 정우의 가슴팍을 찌르던 얼굴과 같은 얼굴인데 다른 사람 같았다.

승수가 향을 올리고 절을 했다. 미연도 따라 했다. 무릎을 꿇을 때 승수의 무릎에서 작게 뚝 소리가 났다. 상주 자리에는 이장의 아내로 보이는 중년 여자와 이십 대 후반쯤의 딸이 앉아 있었다. 딸은 미연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아내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

분향소를 나오기 전에 미연은 영정 아래 위패를 보았다. 이름 아래 작은 글씨로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다. 1964년 8월 21일.

밖으로 나와 회관 담벼락에 기대 섰을 때, 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꺼내 만세력을 열고 있었다. 손가락이 숫자를 누르는 동안 이게 잘하는 짓인지 묻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렸다. 그 목소리보다 손가락이 빨랐다. 엄마 문자에 답장을 썼다 지우던 그 손이었다.

甲 壬 壬 辰 申 寅

셋째 칸이 壬寅이었다. 미연은 화면을 오래 보았다. 엄마와 같은 일주였다. 그리고 카페에서 기자가 소리 내어 읽던 그 이름, 연쇄살인범과도 같은 일주였다.

“뭘 봐요?”

승수가 옆에 와 있었다. 미연은 화면을 끄지 않고 승수 쪽으로 돌렸다. 승수는 화면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그냥 손이 먼저 갔어요.”

“왜 봤어요?”

“모르겠어요. 정우 씨는 다들 사주를 뽑아 봤잖아요. 근데 돌아가신 분 사주는 아무도 안 봐요. 그게 이상했어요.”

승수는 한참 분향소 쪽을 보았다. 향 냄새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그건 어디에도 말하지 말아요. 단톡방에도, 정우 씨한테도.”

“네.”

“말하는 순간 그분은 또 하나의 글자가 돼요. 그분 가족한테는 지금 그분이 글자가 아니라 사람이어야 하니까.”

미연은 공책을 꺼내 맨 뒷장 구석에 작게 적었다. 이장님 壬寅. 엄마와 같음. 말하지 않음. 그리고 그 줄 위에 펜으로 네모를 그어 가두었다.

*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논둑을 따라 나 있었다. 벼를 벤 논바닥에 볏짚 뭉치가 하얀 비닐에 싸여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승수가 걸으며 공책을 펼치라고 했다.

“어제 세 무리로 나눴지요. 오늘은 첫 무리, 시작하는 네 글자예요.”

“寅申巳亥.”

“寅은 봄의 시작, 巳는 여름의 시작, 申은 가을의 시작, 亥는 겨울의 시작이에요. 계절의 문을 여는 글자들이라 생지라고 불러요. 날 생 자, 땅 지 자. 낳는 자리라는 뜻이에요.”

“낳는 자리.”

“계절이 막 태어나는 자리니까 움직임이 많아요. 이전 계절이 아직 다 안 갔고 새 계절이 막 왔으니, 그 사이에서 기운이 들썩이지요. 그래서 뒤에 배울 신살에서는 이 네 글자를 역마라는 이름과 엮어요. 말을 갈아타는 역참의 말. 떠나고 움직이는 글자라고요.”

미연은 걸음을 멈췄다. 툇마루 위의 배낭이 떠올랐다.

“정우 씨 명식에 寅申巳亥 있어요?”

“연주가 辛巳예요. 巳가 하나.”

“그럼 떠날 사람이에요?”

“미연 씨는 지금 뭘 하고 있어요?”

“……뛰고 있어요.”

“그 아이가 떠나려는 건 巳 때문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때문이에요. 이름이 붙은 이유랑 사람이 움직이는 이유를 섞지 말아요.”

미연은 다시 걸었다. 논둑 풀에 맺힌 이슬이 운동화 앞코를 적셨다.

“하나 더 있어요. 생지 안에는 다음 계절이 숨어 있다고 가르쳐요. 많은 책이 寅 속에 丙을 넣어 둬요. 봄이 막 시작하는 자리에 여름의 불씨가 들어 있다는 거지요. 申 속에는 壬이 있다고 하고요. 가을이 시작하는 자리에 겨울의 물이 들어 있다는 거예요. 그 속을 들여다보는 법은 지장간을 배울 때 제대로 할 거예요. 오늘은 시작하는 자리에 다음 것이 벌써 들어 있다는 것만.”

“미연 씨 연지가 申이지요.”

“가을 시작 안에 겨울 물. 저 壬인데.”

“그건 나중에 다시 봐요. 뿌리 이야기니까.”

미연은 나중 목록에 申 속 壬, 뿌리라고 적었다. 목록이 길어지고 있었다.

“유명한 사람들로 볼게요.”

승수가 인물 표를 꺼냈다. 미연은 이번에는 승수가 짚기 전에 먼저 찾았다.

“寅. 간디 일주가 丙寅. 이병철 월지가 寅이고, 잡스도 寅월, 링컨도 寅월.”

“申.”

“엘비스 일지 申, 정주영 일지 申, 이병철 일지 申, 아인슈타인이랑 고흐도 일지 申. 김구는 申월. 그리고 저 연지.”

“巳.”

“김구 일지 巳. 먼로는 巳월에 시주도 巳. 세종도 巳월.”

“亥.”

“헬렌 켈러 일지 亥. 정주영이랑 이소룡이 亥월.”

미연은 이름들을 내려다보았다. 인도의 독립을 이끈 사람, 공장을 세운 사람, 노래를 부른 사람, 앞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데 대학을 마친 사람. 움직이는 글자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중 누가 떠났고 누가 머물렀는지는 글자에 적혀 있지 않았다.

“헬렌 켈러는 어디로 떠났어요?”

“태어난 마을을 떠나 보스턴의 학교로 갔지요. 그 뒤로 평생 강연하러 세계를 다녔고요.”

“그럼 맞잖아요. 亥, 역마.”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이십 년 넘게 살다 돌아왔어요. 김구는 상하이로 망명했고요. 정주영은 소 판 돈 들고 집을 나왔지요. 미연 씨 연지 申은요? 미연 씨는 지금 어디 있어요?”

“……계룡산이요.”

“역마네요.”

“그건 근거 안 보임이에요.”

“그래서 웃자고 한 말이에요.”

미연은 웃었다. 웃다가 논둑에서 발을 헛디딜 뻔했다. 승수가 이번에도 팔을 내밀지 않았다. 미연이 스스로 균형을 잡는 걸 보고 다시 걸었다.

*

휴대전화가 울렸다. 수아였다. 미연은 승수에게 손짓하고 논둑 끝으로 몇 걸음 떨어져 받았다.

“나 그만둘까 봐.”

인사 없이 그 말이 먼저 나왔다. 수아는 연수원 화장실에서 전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물 내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연수 끝나면 부서 배치인데, 나 영업 쪽으로 간대. 인사팀장이 나보고 무대 체질이래. 사람들 앞에서 빛난대.”

“그거 칭찬 아니야?”

“칭찬이지. 근데 나 그 말 듣는데 숨이 막혔어. 평생 조명 밑에 서 있으라는 말 같아서.”

미연은 논바닥의 볏짚 뭉치를 보았다. 하얀 비닐에 싸여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만두면 뭐 할 건데?”

“몰라. 그러니까 무섭지.”

“수아야. 내가 오늘 배운 거 하나 말해 줘도 돼?”

“사이비 그거?”

“응. 계절이 시작하는 자리에는 다음 계절이 이미 들어 있대. 봄이 시작하는 자리에 여름 불씨가 있고. 근데 그게 떠나라는 뜻은 아니래. 떠나는 거랑 도망치는 거는 다르대.”

“뭐가 다른데?”

미연은 대답하려다 막혔다. 승수가 그 차이를 말해 준 적은 없었다. 미연이 지금 막 지어낸 말이었다.

“떠나는 건 어디로 가는지 알고 가는 거고, 도망치는 건 어디서 나오는지만 아는 거?”

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 물 내리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너 그거 진짜 거기서 배운 거야?”

“아니. 방금 내가 만들었어.”

“근거는?”

“없어.”

수아가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웃음이었다.

“그럼 나도 근거 없이 하나 정할게. 연수는 끝까지 받을게. 끝나고 생각할래.”

전화를 끊고 돌아보니 승수가 논둑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주무르고 있었다. 다 들은 얼굴이었다.

“떠나는 거랑 도망치는 거, 그거 누구 말이에요?”

“제 말이요. 근거 안 보임.”

“그거 좋은 말이에요. 근거가 없어도 좋은 말은 있어요. 다만 그 말을 명식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않으면 돼요.”

*

할머니 집 대문 앞에 정우가 서 있었다. 배낭은 메지 않은 채였다. 손에는 다 먹은 장조림 반찬통이 들려 있었다. 미연이 다가가자 정우가 반찬통을 내밀었다.

“할머니가 밥 두 공기 드셨어요. 이거 덕분에.”

“다 드셨어요? 사흘 치인데.”

“제가 반 먹었어요.”

정우는 반찬통을 미연 손에 쥐여 주고 대문 기둥에 등을 기댔다.

“두 시 차 놓쳤어요. 일부러.”

“왜요?”

“할머니가 밥 먹는 거 보다가요. 저 가면 저렇게 두 공기 안 드실 것 같아서.”

정우는 하늘을 보았다. 해가 산등성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도망치는 거랑 떠나는 거 다르다면서요. 아까 논둑에서 하는 소리 다 들렸어요. 우리 집 담이 낮아서요.”

미연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거 근거 없는 말이에요.”

“그래도 맞는 말 같던데요. 저 지금 가면 도망이에요.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까.”

할머니가 대문 안에서 미연을 불렀다. 툇마루에 앉아 미연에게 손짓했다.

“아가씨, 그 찜질방 집에서 나와. 우리 집 건넌방 비었어. 방값 대신 밭일 좀 거들고.”

“네?”

“네 엄마가 보일러 제대로 되는 데로 옮기라며. 우리 집 보일러는 영감이 놓은 거라 아직 쌩쌩해.”

미연은 엄마가 그 말을 한 걸 할머니가 어떻게 아는지 묻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무슨 말이든 하루면 돌았다. 피 볼 살이라는 말도, 엄마의 보일러 잔소리도.

그날 저녁 미연은 숙소에서 짐을 옮겼다. 숙소 아주머니는 섭섭하다면서 장판 온도를 이제야 낮췄다. 할머니 집 건넌방은 작고 서늘했다. 벽에 오래된 달력이 걸려 있었는데 2014년 12월에서 멈춰 있었다. 영감이 마지막으로 넘긴 장이라고 할머니가 말했다.

*

새벽 두 시쯤 미연은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다.

치이익. 짧게 끊겼다가 다시 치이익. 바람 소리는 아니었다. 쇠구슬이 깡통 안에서 굴러가는 소리가 그 사이에 섞였다. 미연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방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확 밀려들었다. 마당이 어두웠다. 대문 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누구세요?”

움직임이 멎었다. 그리고 발소리가 골목으로 빠르게 멀어졌다. 미연은 맨발로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었다. 골목 끝 가로등 아래로 검은 점퍼 하나가 꺾여 사라지는 게 보였다. 그게 다였다.

미연은 대문 바깥쪽을 돌아보았다. 파란 페인트가 벗겨진 철문 위에 붉은 글씨가 아직 흘러내리고 있었다. 글자 끝에서 페인트 방울이 하나씩 땅으로 떨어졌다.

살인자.

뒤에서 건넌방 옆 방문이 열렸다. 정우가 맨발로 마당에 서 있었다. 정우는 대문까지 걸어와 그 두 글자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직 마르지 않은 첫 글자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손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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