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39자)

서른 자

소문 순위로 줄 세우는 강호 · 한빛결

한가위 한낮의 햇빛은 쨍했다⁠. 객잔 앞마당의 흙이 사람들 발에 밟혀 먼지로 일어났고⁠, 먼지가 햇빛 속에서 금가루처럼 떠다녔다⁠. 마당 한쪽에 큰 나무 방이 서 있었다⁠. 맨 위에 「⁠일 위 은선문 백리현⁠」⁠, 한참 아래에 「⁠열한 위 청송문 단목령⁠」 객잔 지붕 위에는 이야기꾼들이 줄지어 앉아 붓을 들고 있었다⁠. 일곱 고을 추천 탁자에서 같은 시각에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쪽지 매단 비둘기들이 삼 층 창턱에서 기다렸다⁠.

비무대 아래 맨 앞에 무림맹 사자가 삿갓을 쓰고 서 있었다⁠. 방주는 사자 옆에서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은선문 아이들이 「⁠공자님 이겨라 누나도⁠」 깃발을 들고 원주 곁에 모여 있었다⁠. 아이들 뒤에 지팡이를 짚은 사부가 있었다⁠. 사부는 새벽에 솔숲 길을 내려왔다⁠. 세 해 만이었다⁠. 참새가 사부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사부의 무릎은 내려오는 동안 열두 번 쉬었다고⁠, 참새가 목령에게 일렀다⁠.

사다리 앞에서 방주가 목령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마지막이라는 듯 김이 오르는 잔이었다⁠. 목령은 이번에는 잔을 받았다⁠. 한 모금에 다 마셨다⁠. 혀 위에 아무 맛도 남지 않았다⁠.

“⁠맛이 없소⁠.⁠” 목령이 빈 잔을 방주의 손에 돌려주었다⁠.

“⁠그래서 아무 이야기나 담기지⁠.⁠” 방주가 빈 잔을 들여다보았다⁠. “⁠올라가라⁠. 해가 머리 위에 있을 때 끝나야 그림이 좋다⁠.⁠”

목령은 서쪽 사다리를 올랐다⁠. 긴 검은 머리를 높이 묶은 푸른 끈을 한 번 더 조였고⁠, 해진 남색 도복 소매를 팔꿈치 위로 걷었다⁠. 팔뚝의 표국 매듭은 새 무명천으로 다시 감았다⁠. 손에는 이 빠진 철검을 들었다⁠. 디딤목 마흔 개를 오르는 동안 마당의 소리가 발밑으로 가라앉았다⁠.

동쪽 사다리로 백리현이 올라왔다⁠. 흰 비단옷의 금실 무늬가 햇빛에 번쩍였다⁠. 허리까지 오는 은백색 머리를 위에서 조금 묶었고⁠, 먹 그림 접부채를 펴 든 채 웃고 있었다⁠. 리현이 마당에 부채를 한 번 흔들자 아래가 터졌다⁠. 먹 부채 패도⁠, 소매 패도⁠, 엮어라 패도 함께 외쳤다⁠.

리현이 목령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꽃잎은 오늘 소매에 넣어 왔네⁠. 쓸지 안 쓸지는 나도 모르겠군⁠.⁠”

“⁠쓰시오⁠. 공자 무공이오⁠.⁠”

*

리현은 받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목령의 칼이 가슴으로 오면 리현은 칼이 닿을 자리에 없었다⁠. 반 보 비켜서고⁠, 한 걸음 흘러가고⁠, 칼이 지나간 자리로 돌아왔다⁠. 사부가 지붕 아래에서 말해 준 걸음이었다⁠. 손목을 쓰지 않으니 손목이 아끼는 대로 남았다⁠. 열 합⁠, 스무 합이 지나도 부채와 칼은 한 번도 부딪치지 않았다⁠. 마당이 술렁였다⁠. 쇳소리가 안 나는 비무는 처음이었다⁠.

목령은 리현을 따라갔다⁠. 따라가는 동안 리현이 목령을 끌었다⁠. 리현이 흘러가는 길은 늘 동쪽이었다⁠. 서른 합 무렵 목령의 발이 동쪽 끝에서 다섯 번째 널에 닿았다⁠. 마흔 합에 네 번째⁠. 목령은 알면서 따라갔다⁠. 따라가지 않으면 리현의 부채 끝이 목령의 목을 찾아왔다⁠.

쉰 합에서 리현이 처음으로 부채를 썼다⁠. 목령의 칼을 받지 않고⁠, 칼이 오기 전에 목령의 손등을 짧게 쳤다⁠. 따끔했다⁠. 예순 합에 다시 쳤다⁠. 손등이 부어올랐다⁠. 리현의 손목이 그만큼 닳고 있었다⁠. 칠십 합⁠, 리현이 부채를 펴는 소리가 반 박자 늦어졌다⁠.

동쪽 끝에서 세 번째 널⁠. 먹 점⁠.

리현이 목령의 왼 어깨를 겨누고 들어왔다⁠. 목령이 물러날 자리는 먹 점 하나뿐이었다⁠. 목령은 물러나며 발끝으로 먼저 짚었고⁠, 널이 반 뼘 꺼졌다⁠. 목령은 체중을 싣지 않았다⁠. 꺼지는 널을 따라 무릎을 굽혔고⁠, 무릎이 굽는 만큼 몸이 낮아졌다⁠. 리현의 부채가 목령의 정수리 위로 지나갔다⁠. 사부가 장대로 들었다 놓은 기와를 밟던 걸음이었다⁠. 다른 발은 이미 옆 널 위에 있었다⁠.

마당에서 비명이 났다⁠. 비무대 위의 널 하나가 꺼지는 것을 아래에서 다 보았다⁠. 방주의 찻잔이 입술 앞에서 멈췄다⁠.

목령은 낮아진 몸으로 리현의 품에 들어갔다⁠. 리현은 비킬 자리가 없었다⁠. 처음으로 리현이 칼을 받았다⁠. 쇠살과 철검이 맞부딪쳤다⁠. 쨍 소리가 서른 자 아래 마당까지 내려가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다음부터는 받는 싸움이었다⁠. 목령은 봐주지 않았다⁠. 어젯밤에 말한 대로였다⁠. 칼이 손목으로 가지 않고 부채로 갔고⁠, 부채를 거쳐 손목으로 갔다⁠. 여든 합⁠. 리현의 어깨가 손목을 따라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흔 합⁠. 리현이 웃었다⁠. 웃는 입술 사이로 숨이 끊어져 나왔다⁠.

아흔여섯 번째 합에서 리현이 소매를 털었다⁠.

복사꽃 잎이 한 줄로 날았다⁠. 명주실이 당겨지는 소리가 아주 가늘게 났다⁠. 꽃잎이 목령의 눈앞을 가렸다⁠. 꽃잎 뒤에서 부채 끝이 목령의 목으로 왔다⁠. 다섯 해 동안 리현이 꽃잎 뒤에 숨겨 둔 단 하나의 진짜 수였다⁠. 꽃잎은 장식이 아니었다⁠. 눈을 가리는 무공이었다⁠.

목령은 눈을 감았다⁠. 대청에서 처음 찔렀던 자리⁠, 쇠살 열여섯 개가 모이는 손잡이 바로 위를 소리로 찾았다⁠. 부채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 꽃잎이 흩어지는 소리⁠, 리현의 숨소리⁠. 목령은 꾸밈없는 청송문 찌르기를 내질렀다⁠.

철검이 살이 모이는 자리를 쳤다⁠. 딱⁠. 손에 감촉이 왔다⁠. 쇠살 하나가 부러지고⁠, 부러진 쇠살이 철검의 날을 물고 비틀었다⁠. 철검의 날에서 이가 하나 더 떨어져 나갔다⁠. 리현의 손에서 부채가 빠졌다⁠.

먹 그림 접부채가 서른 자 아래로 천천히 돌며 떨어졌다⁠. 꽃잎이 뒤를 따랐다⁠. 부채는 비무대 아래 맨 앞⁠, 무림맹 사자의 발치에 떨어졌다⁠.

*

마당이 한참 조용했다⁠. 지붕 위의 붓들도 멈췄다⁠. 그러다 앞니 빠진 아이가 깃발을 높이 들었다⁠. 「⁠누나도⁠」 글씨가 위로 올라가 있었다⁠. 아이가 외쳤다⁠. 배고프다⁠! 마당이 따라 외쳤다⁠. 엽전이 비무대 아래로 쏟아졌다⁠. 아무도 먼저 던지지 않았고⁠, 다들 한꺼번에 던졌다⁠. 「⁠청송문⁠」 바구니에도 「⁠은선문⁠」 바구니에도 떨어졌다⁠.

리현은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오른 손목을 왼손으로 감쌌다⁠. 그러고 나서 일어났다⁠. 동쪽 끝에서 세 번째 널 앞으로 걸어가 쪼그려 앉았다⁠. 꺼진 널 귀퉁이에 손가락을 넣어 잡아당겼다⁠. 못이 없는 널은 힘을 주지 않아도 들렸다⁠.

리현은 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쐐기 자국과 먹 점이 햇빛에 다 보였다⁠. 리현의 목소리가 서른 자 아래로 또렷이 내려갔다⁠. 다섯 해 동안 꽃잎 이야기를 하던 목소리였다⁠.

“⁠이 널은 방주가 못을 빼게 한 널입니다⁠. 저는 알고서 막내를 이 널로 몰았습니다⁠. 막내도 알고서 밟았습니다⁠.⁠” 리현이 널을 비무대 아래로 던졌다⁠. 널이 먼지를 일으키며 방주의 발 앞에 떨어졌다⁠. “⁠그래도 졌습니다⁠. 구경 잘하셨으면 엽전은 막내한테 던지십시오⁠.⁠”

엽전이 다시 쏟아지는 소리 속에서 리현이 목령을 돌아보았다⁠. 땀에 젖은 은백색 머리가 이마에 붙어 있었다⁠.

“⁠아흔여섯 합이었네⁠.⁠” 리현이 손목을 쥔 채 웃었다⁠. “⁠네 번 남았는데⁠.⁠”

“⁠네 번이면 내가 졌소⁠?⁠”

“⁠아니⁠. 네 번이면 내 손목이 먼저 떨어졌겠지⁠.⁠” 리현이 부러진 쇠살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다음엔 백 번 다 쓰게 해 주게⁠.⁠”

*

목령은 서쪽 사다리를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지막 디딤목에서 발을 헛디뎠고⁠, 참새가 받았다⁠.

방주는 비무대 아래에서 찻잔을 든 채 서 있었다⁠. 발 앞에 널과 부채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무림맹 사자가 허리를 굽혀 널을 집었다⁠. 못 구멍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사자는 방주를 보지 않고 말했다⁠.

“⁠내년 강남 호위 일감은 비무로 정하겠소⁠. 방의 차례가 아니라⁠.⁠”

방주는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오래 굴렸다⁠. 삼키지 못했다⁠. 방주는 마당의 엽전 바구니들을 보았다⁠. 오늘 아침 판돈은 열에 일곱이 막내에게 몰려 있었다⁠. 방주가 일곱 고을 손님들에게 내줄 돈이었다⁠. 방주는 차를 땅에 뱉었다⁠. 처음 보는 일이었다⁠.

“⁠막내야⁠.⁠” 방주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내일이면 사람들은 이것도 이야기로 듣는다⁠. 널 이야기⁠, 꽃잎 이야기⁠, 엽전 이야기⁠. 이야기는 내가 판다⁠.⁠”

“⁠이야기는 우리가 하겠소⁠.⁠”

목령이 비켜서자 뒤에 참새가 있었다⁠. 참새는 나무 방 받침대 위로 올라갔다⁠. 손에 이 나간 흰 찻잔을 들고 있었다⁠. 마당의 사람들이 영문을 모른 채 저마다 찻잔이나 술잔이나 빈손을 들었다⁠. 참새의 목소리가 반 음 낮아졌다⁠.

“⁠오늘 서른 자 위에서 두 사람이 싸웠습니다⁠. 둘 다 널을 알았습니다⁠.⁠”

참새는 찻잔을 입에 댔다⁠. 마당이 한 모금을 마셨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방주의 추천 탁자 아닌 데서 나온 첫 한 모금이었다⁠. 지붕 위 이야기꾼들이 붓을 들어 받아 적기 시작했다⁠.

*

해 질 녘⁠, 목령은 은선문 대문 앞에 왔다⁠. 진 문파의 빗장은 이긴 사람이 제 손으로 지른다⁠. 마당 사람들이 둑길을 따라 줄지어 따라왔다⁠.

대문 안은 비어 있었다⁠. 원주가 아이들과 함께 보따리를 이고 대문 밖에 나와 있었다⁠. 큰솥은 수레에 실려 있었다⁠. 리현이 수레 앞에서 손목에 천을 감고 있었다⁠. 리현의 품에서 붉은 도장이 찍힌 종이가 삐져나와 있었다⁠. 리현은 종이를 꺼내 대문 앞 화톳불에 던졌다⁠. 이기면 태워 주겠다던 종이였다⁠. 진 사람이 제 손으로 태웠다⁠. 종이가 오그라들며 타올랐다⁠.

“⁠빚은 빚이네⁠. 갚을 거고⁠.⁠” 리현이 말했다⁠. “⁠다만 방주 손에서 갚지 않고 내 손으로 갚겠네⁠.⁠”

원주가 이고 있던 보따리를 고쳐 이었다⁠. 원주는 닫힐 대문을 오래 보지 않았다⁠.

“⁠공자가 졌으니 문은 닫는 게 맞다⁠. 규칙은 규칙이야⁠.⁠” 원주가 목령에게 턱짓을 했다⁠. “⁠빨리 질러⁠. 애들 저녁 늦는다⁠.⁠”

목령은 대문을 닫았다⁠. 빗장을 질렀다⁠. 나무 빗장이 고리에 들어가는 소리가 짧고 무거웠다⁠. 앞니 빠진 아이가 원주의 치마를 잡고 대문을 보다가 목령을 올려다보았다⁠.

“⁠누나⁠, 이제 우리 어디서 자요⁠?⁠”

목령은 솔숲을 가리켰다⁠.

*

청송문 산문 앞에서 사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부는 품에서 방주와 도장을 찍은 종이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반으로 찢었다⁠. 다시 반으로 찢었다⁠.

“⁠문파는 사람 살리려고 있는 거다⁠.⁠” 사부가 종이 조각을 바람에 날렸다⁠. “⁠사람이 백 명 오면 문을 연다⁠. 그것도 내 것이니 내가 연다⁠.⁠”

사부는 문을 열지 않고 목령을 보았다⁠. 목령이 산문 빗장을 뽑았다⁠. 기울어진 기둥이 삐걱거렸다⁠.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아이들이 초롱을 들고 줄지어 들어갔다⁠. 백 개의 초롱이 솔숲 길을 따라 사당까지 이어졌다⁠. 보름달이 솔숲 위에 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나무 방 기둥에 붙은 쪽지는 이랬다⁠. 「⁠청송문 막내⁠, 은선공자를 업고 산을 오름 · 제자 하룻밤 새 백 명 · 사당 지붕은 일 위가 갈았음⁠」 셋 가운데 맞는 것은 둘이었다⁠.

사당 부엌에서는 아궁이 두 개에 불이 들어갔다⁠. 원주가 큰솥에 쌀을 안치며 사부의 솥을 흘겨보았고⁠, 사부는 물을 너무 많이 붓는다고 원주에게 핀잔을 들었다⁠. 참새는 산문 앞 바위에 앉아 고갯길을 올라온 장꾼들에게 한 모금 이야기를 했다⁠. 백리현은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쇠살 하나가 부러진 먹 그림 접부채로 불을 부쳤다⁠. 꽃잎 대신 불티가 한 줄로 날아올랐다⁠. 목령은 이가 둘 빠진 철검을 부뚜막에 기대 놓고⁠, 아이들 그릇을 하나씩 손에 쥐여 주며 끝까지 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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