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753자)
단추
마지막 동원훈련날 포탄이 떨어졌다 · 마효곤
인준묵은 둑 비탈의 마른 풀 위에 앉아 있었다. 풀이 엉덩이 밑에서 바스락거렸다. 군화 속의 양말이 젖어 발가락이 시렸다. 해가 서쪽 능선에 반쯤 걸쳐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강 한가운데 끊어진 다리의 교각 두 개가 물 위로 머리만 내밀고 있었다. 교각 꼭대기에 휘어진 쇠 난간 한 토막이 매달려 바람에 끼익거렸다.
둑 위에서 기계화 대대의 장갑차들이 엔진을 켠 채 강 건너를 겨누고 있었다. 엔진 소리가 낮게 깔렸다. 강 건너 북단은 조용했다. 둑길 위에 누운 북쪽 차량에서 아직 연기가 가늘게 올라갔다.
치영이 둑을 내려왔다. 손에 종이컵 두 개를 들고 있었다. 하나를 준묵에게 내밀었다.
“커피입니다. 물이 생겼습니다. 대대에서 끓였습니다.”
“함 대위님 커피믹스는 하사가 다 털어 먹었는데요.”
“압니다. 이건 대대 겁니다. 맛없습니다.”
준묵은 컵을 받았다. 뜨거웠다. 한 모금 마셨다. 맛이 없었다. 준묵은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치영이 준묵 옆 풀 위에 앉았다. 둘 사이에 한 사람이 앉을 만큼의 자리가 있었다.
“보고를 올렸습니다.”
치영이 말했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
“가래여울교 폭파, 여섯 시 십사 분 사십 초. 계획보다 이 분 사십 초 늦음. 지연 결정, 작전참모 구치영.”
준묵은 컵을 내렸다.
“십이 분은요?”
“십이 분은 계산입니다. 저쪽 선두가 둑길에서 막힌 만큼 시각을 미뤘습니다. 계획서에 쓴 원칙대로입니다. 그건 아무 문제 없습니다.”
“이 분 사십 초는요?”
치영은 대답하기 전에 커피를 마셨다.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이 분 사십 초는 계산이 아니었습니다.”
강물이 교각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졌다. 치영이 말을 이었다.
“여섯 시 십이 분에 반 소위가 둘, 칠십 미터라고 했습니다. 저는 손잡이를 쥐고 있었습니다. 북쪽 보병이 북단에 올라섰다는 건 쌍안경 없이도 보였습니다. 원칙대로라면 그때 돌려야 했습니다. 확인 불요라고 제가 썼으니까요.”
“안 돌리셨잖아요.”
“반 소위가 십 초마다 숫자를 불렀습니다. 육십, 오십, 사십. 숫자가 줄어드는데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숫자를 세는 사람이 숫자가 영이 되기 전에 손을 떼는 법을, 저는 몰랐습니다.”
준묵은 치영을 보았다. 치영의 옆얼굴에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아침에 턱에 바짝 매었던 철모 끈이 풀려 늘어져 있었다.
“그 이 분 사십 초 동안, 북쪽 보병이 다리 위로 백 미터를 걸어 들어왔습니다. 일 분만 더 늦었으면 다리 위에서 그 사람들과 당신들이 섞였을 겁니다. 그러면 저는 돌렸을 겁니다. 당신들이 다리 위에 있어도. 그건 거짓말 안 하겠습니다.”
“압니다.”
“그래서 이 분 사십 초는 제 이름으로 올렸습니다. 계산이 아니었으니까.”
준묵은 강 건너를 보았다. 북단 삼거리에 비어 있는 구덩이들이 저녁 그늘 속에 검게 패어 있었다. 정오에 마흔한 명이 철모로 판 구덩이들이었다.
“작전참모님, 그거 올리시면 어떻게 됩니까?”
“조사를 받습니다. 작전참모 자리는 내일이면 다른 사람이 앉을 겁니다.”
치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커피를 마저 마시고 빈 컵을 손안에서 구겼다.
“반 소위 다섯 시 반 철수 거부는 제가 승인한 것으로 올렸습니다. 남단 예비군들이 다리로 뛰어 들어간 것도 제 지시로 올렸습니다. 정오에 일흔여섯이 다리를 건너간 것도 제가 보낸 것으로 이미 올렸고요. 거짓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부터 맞추면 됩니다.”
준묵은 웃었다. 이 사람은 엄포를 놓을 때도 숫자를 붙였고, 잘못을 털어놓을 때도 숫자를 붙였다. 숫자 사이에 제 이름을 끼워 넣는 일만 오늘 처음 하고 있었다.
*
“인준묵 씨.”
치영이 둑 아래를 가리켰다. 도로 위에 군용 트럭 한 대가 시동을 걸고 있었다. 짐칸에 들것 둘이 실려 있었다. 하나는 시훈이었다. 허벅지에 붕대를 감은 시훈이 들것에 누워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른 들것은 시트로 덮여 있었다.
“후송 트럭입니다. 오늘 밤 의정부 병원까지 갑니다. 부상자와 전사자를 싣고 갑니다. 함 대위도, 탁홍구 예비군도. 호송 인원이 하나 필요합니다.”
준묵은 치영을 보았다.
“의정부요.”
“의정부를 지나갑니다. 당신 집 앞을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치영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준묵은 가슴 주머니를 눌렀다. 도화지가 젖어 손바닥에 들러붙었다. 아빠 여섯 시에 와. 여섯 시는 이미 한참 지났다. 트럭을 타면 아홉 시 전에 집 앞을 지날 수 있었다. 솔빈이 아직 안 자고 있을 시각이었다.
준묵은 둑 위를 올려다보았다. 둑 위에 예비군들이 앉아 있었다. 원배가 출석부를 펴 놓고 이름을 맞추고 있었다. 하사가 귀에 붕대를 감고 장갑차 바퀴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체육대회 모자를 쓴 예비군이 컵라면을 씹고 있었다. 동원령은 아직 그대로였다. 둑 위의 사람들은 오늘 밤 집에 가지 못했다. 내일도 모레도 이 둑에 있을 것이었다.
“저 말고 다른 사람 태워 주세요.”
“누구를요?”
“홍구 씨 어머님이요. 아들하고 같이 가셔야죠. 노인분들은 원장님이 학교 강당으로 모시고 간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님은 아들 옆에 계셔야 합니다.”
치영은 오래 준묵을 보았다.
“당신은요?”
“고르라고 한 사람이 먼저 가면 안 되니까요.”
“아침에도 그 말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는 정오였고, 지금은 저녁입니다. 같은 말이 아직 맞습니다.”
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서 둑 아래 트럭으로 걸어갔다. 운전병에게 무언가를 일렀다. 운전병이 버스로 뛰어가 버스 문을 두드렸다.
준묵은 둑을 내려가 트럭 짐칸 옆으로 갔다. 시훈이 들것에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하얬는데 눈은 멀쩡했다.
“형님, 저 의정부 간대요.”
“들었어.”
“형님 집 의정부라면서요. 형수님한테 들를까요? 단추 아직 안 고쳤다고 일러 드리게.”
“벌써 아셔.”
“그럼 드라마 얘기라도 해 드릴게요. 일 회부터요. 제가 주인공 친구로 나온 거.”
“우리 집 사람 그 드라마 안 봤어.”
“그러니까 할 얘기가 더 많죠.”
시훈이 웃다가 허벅지를 움켜쥐고 얼굴을 찡그렸다. 들것 옆에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가 끈으로 묶여 있었다. 바구니 안에 컵 열아홉 개가 포개져 있었다. 노인들이 밤마다 틀니를 담그던 컵이었다. 노인들은 원장과 함께 먼저 떠났고, 바구니는 시훈이 놓지 않았다.
“그거 할머니들 거잖아.”
“알아요. 운전병 아저씨가 가는 길에 강당 들러 준대요. 형님, 이거 가지러 갔다가 다리에 총 맞았어요. 이건 제가 끝까지 들고 가야 말이 돼요.”
준묵은 바구니 끈을 한 번 더 조여 주었다. 시훈이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아침에 찍은 사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영포티 형님 마지막 출근」 사진 속 준묵의 단추가 한 칸 어긋나 있었다.
“형님, 이거 올려도 돼요?”
“올리지 마.”
“벌써 올렸어요. 좋아요 삼천 개 넘었어요.”
*
해가 지고 나서 치영이 둑 끝으로 걸어갔다. 원배가 무전기를 무릎에 얹고 앉아 있었다. 치영이 손바닥만 한 것을 원배에게 내밀었다. 유리가 깨진 손목시계였다. 원배는 시계를 받아 오래 들여다보았다. 치영이 무어라 짧게 말했고, 원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배는 시계를 왼쪽 손목에 찼다. 치영은 둑을 따라 지휘소 쪽으로 돌아갔다. 준묵은 멀리서 두 사람을 보기만 했다.
*
밤 일곱 시 반, 준묵은 둑 위에서 새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 번 가자마자 새란이 받았다.
“살아 있지?”
“응.”
“뉴스에 다리 나와. 외신까지 나와. 끊어지는 거 누가 찍어 올렸어. 당신 그 위에 있었어?”
“밑에 있었어.”
“…거짓말.”
“다 건너고 나서 끊겼어. 진짜야.”
새란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수화기 너머로 차 소리가 났다. 아직 길 위였다.
“오늘 못 와?”
“응. 동원령이라.”
“알아. 뉴스에서 봤어. 당신 회사 팀장님한테서도 전화 왔어. 내일 견적서 못 하냐고.”
준묵은 웃었다. 웃음이 터져서 한참 멎지 않았다. 새란도 웃었다. 웃다가 울었다. 우는 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솔빈이 바꿔 줄게.”
“아빠!”
“응.”
“아빠, 여섯 시 지났어.”
“알아. 아빠가 늦었어. 미안해.”
“아빠 이제 몇 시에 와?”
준묵은 대답하지 못했다. 솔빈이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빠, 다리 그려 줄까? 엄마가 아빠 다리에 있었대.”
“다리 없어졌어.”
“그럼 새로 그려 줄게. 엄청 긴 거. 버스도 그려 줄게. 아저씨들도.”
“아저씨 많은데.”
“다 그릴 수 있어. 서른 명.”
전화가 다시 새란에게 넘어갔다. 새란은 한참 말이 없다가 물었다.
“단추는?”
“…아직.”
“내일 아침엔 고쳐.”
“응.”
“꼭.”
밤이 깊자 둑 위가 조용해졌다. 예비군들은 대대가 내준 모포를 뒤집어쓰고 둑 비탈에 줄줄이 누웠다. 준묵의 휴대전화가 떨렸다. 단톡방 「다리 지킴이 41」의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다리 지킴이 50」 십 분 뒤에 또 바뀌었다. 「다리 없음」 바꾼 사람은 체육대회 모자였다. 아래에 한 줄이 올라왔다.
「퇴소 시각 몇 시냐고 아까부터 물어보는데 아무도 대답을 안 함」
하사가 답을 달았다. 「동원령 해제 시각입니다」
「그게 몇 신데」
「저도 모릅니다」
둑 여기저기서 킥킥대는 소리가 모포 밑으로 새어 나왔다. 원배가 둑 끝에서 휴대전화 불빛을 끄고 말했다.
“다들 주무십시오. 내일 여섯 시 기상입니다.”
누군가 모포 밑에서 대답했다.
“여섯 시 소리 좀 그만하세요, 소위님.”
이번에는 원배도 웃었다.
*
이튿날 아침 일곱 시, 하늘이 맑았다. 3월 아침의 빛이 둑의 마른 풀 위로 하얗게 쏟아졌다. 강 위에는 물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끊긴 다리의 교각 두 개가 안개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밤사이 후송 트럭은 떠나지 못했다. 국도가 막혀 아침으로 미뤄졌다. 둑 아래 도로에서 트럭이 다시 시동을 걸었다. 짐칸에 홍구의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시트로 덮인 들것 옆이었다. 무릎 위에 빈 들통을 안고 있었다. 준묵이 둑을 내려가 트럭 꽁무니로 다가갔다.
어머니가 준묵을 내려다보았다. 밤새 한숨도 안 잔 얼굴이었다. 눈이 부어 있었다. 목소리는 아침처럼 또렷했다.
“군인 양반. 우리 홍구가 순댓국 산다고 했다며.”
“네.”
“가게 다시 열면 와. 전곡 시장 입구, 간판에 돼지 그려진 데. 내가 끓여 줄게. 홍구 거니까 돈은 안 받아.”
“꼭 가겠습니다.”
“꼭.”
어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준묵은 손을 잡았다. 거칠고 따뜻했다. 어머니는 준묵의 손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트럭이 움직였다. 들통이 짐칸 바닥에서 달그락거렸다. 시훈이 들것에 누운 채 고개를 들어 준묵에게 손을 흔들었다. 트럭이 둑 모퉁이를 돌아 남쪽으로 사라졌다.
준묵은 둑 위로 올라갔다. 원배가 무전기를 메고 둑 끝에 앉아 있었다. 원배의 손목에 유리가 깨진 시계가 감겨 있었다. 바늘이 열두 시 오십 분에 멈춘 시계였다. 준묵은 시계에 대해 묻지 않았다. 원배도 말하지 않았다.
준묵은 둑 꼭대기에서 강을 마주했다. 소총 멜빵을 쥐었다. 칠이 벗겨진 「94」가 아침 해를 받았다. 강 건너, 둑길 위의 누운 차량에서 마지막 연기가 하얀 기둥이 되어 곧게 올라가고 있었다. 바람이 없어서 기둥은 흩어지지 않았다. 어제 아침 열 시 사십 분, 훈련장 둔덕에서 처음 본 연기와 같은 모양이었다.
준묵은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단추 하나가 어제 새벽부터 한 칸씩 밀려 있었다. 준묵은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풀었다. 접힌 도화지가 주머니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맨 아래 단추를 맞는 구멍에 끼우고, 하나씩 올라가며 다시 채웠다. 마지막 단추가 제자리에 들어갔다. 전투복 앞섶이 반듯하게 내려왔다. 주머니 덮개가 처음으로 납작하게 닫혔다.
강 건너의 하얀 연기 기둥이 아침 빛 속에서 천천히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