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51자)

초록 불

주말마다 빌리는 몸 · 여오령

일요일 새벽 다섯 시⁠, 양양 바다는 아직 회색이었다⁠. 검은 웻슈트 차림의 길병곤은 보드에 엎드려 팔을 저었고⁠, 등 뒤에서 물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어깨로 느꼈다⁠. 두 손으로 보드를 짚고 발을 끌어당기자 몸이 생각보다 먼저 일어났다⁠. 무릎이 알아서 굽었고 허리가 알아서 버텼다⁠. 스물다섯 살 허리였다⁠. 파도가 보드 꼬리를 밀었고⁠, 병곤은 일 년 만에 처음으로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모래밭 가까이까지 미끄러져 갔다⁠.

“⁠병곤아⁠! 탔다⁠! 우리 병곤이가 탔어⁠!⁠”

모래밭에서 서핑 숍 사장이 장발을 휘날리며 뛰어왔다⁠. 아침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돌아봤다⁠. 어깨가 넓고 근육이 단단한 스물다섯 살 청년이 물에서 걸어 나오는데 이름이 병곤이었다⁠. 처음 온 주말에 이름을 말했더니 사장은 한참 웃고 나서 물었다⁠. “⁠할아버지가 지어 주셨냐⁠?⁠” 병곤은 그렇다고 했다⁠. 일 년 동안 양양 바닷가에서 병곤은 할아버지가 이름을 지어 준 스물다섯 살이었다⁠.

서핑 숍 화장실에서 소금물을 씻어 내고 거울을 봤다⁠. 짙은 눈썹에 각진 턱⁠, 햇볕에 그을린 목⁠. 웻슈트 지퍼를 내리자 탄탄한 가슴과 어깨가 드러났다⁠. 거울 속 얼굴은 웃을 때 왼쪽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다⁠. 병곤의 버릇이 아니었다⁠. 몸 주인의 이름은 옥찬율이고 대학원생이라는 것까지만 알았다⁠. 계약서에 적힌 것이 전부였다⁠. 손목의 흰 접속 밴드 끝에서 작은 불이 초록으로 깜박였다⁠. 주인 아닌 사람이 들어 있는 몸이라는 표시였다⁠. 병곤은 거울 속 초록 불에 대고 속으로 인사했다⁠. 이번 주도 잘 썼습니다⁠.

*

일요일 밤 아홉 시 사십 분⁠, 성수동 「⁠여벌⁠」 센터 1층 접속실은 치과처럼 하얗고 조용했다⁠. 침대 두 개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병곤은 찬율의 몸으로 이쪽 침대에 누웠고⁠, 유리벽 너머 침대에는 직원이 지하 보관실에서 밀고 올라온 마흔여섯 살 남자가 누워 있었다⁠. 둥근 얼굴에 넓은 이마⁠, 옆을 짧게 친 반백 머리⁠. 금테 안경은 벗겨서 가슴 위에 얹어 두었다⁠. 주말마다 보는데도 병곤은 제 몸을 바깥에서 볼 때마다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배가 나와 있었다⁠.

“⁠열 시 정각에 닫겠습니다⁠. 몸 주인분 깨시기 전에 먼저 나가 주시고요⁠.⁠”

주말 보관실 직원이 두 사람의 밴드를 침대 머리맡 단자에 꽂았다⁠. 유리벽 너머 제 손목의 밴드에서는 파란 불이 느리게 숨을 쉬었다⁠. 비어 있는 몸의 색이었다⁠. 손님과 몸 주인은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이 회사 약관이었고⁠, 그래서 병곤은 일 년 동안 찬율이 눈 뜬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병곤에게 찬율은 거울 속 얼굴이었고⁠, 잠든 찬율에게 병곤은 월요일마다 늘어나는 근육통이었다⁠.

열 시가 되자 천장의 불이 한 번 깜박였다⁠. 눈을 뜨자 몸이 무거웠다⁠. 이불을 덮은 것이 아니라 이불이 된 것 같은 무게였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고⁠, 입안이 텁텁했다⁠. 혀끝에 소주 맛이 남아 있었고⁠, 혀뿌리에는 담배 맛이 깔려 있었다⁠. 병곤은 담배를 끊은 지 열두 해가 지났다⁠. 왼쪽 무릎에는 손바닥만 한 멍이 들었고⁠, 오른손 주먹 마디가 벗겨져 있었다⁠.

“⁠이거 왜 이래요⁠? 입에서 담배 맛이 나는데⁠.⁠”

“⁠보관 중에 영양액이 식도로 조금 올라오면 그런 맛이 나요⁠. 다들 그러세요⁠.⁠” 직원은 태블릿을 넘기며 덧붙였다⁠. “⁠허리 아프시면 보관 침대에 허리 받침 매트 넣어 드릴 수 있어요⁠. 주 삼만 원이요⁠.⁠”

병곤은 웃으며 신청 단추를 눌렀다⁠. 마흔여섯 허리에 삼만 원이면 싸다고 생각했다⁠.

지하 3층 주차장에서 회색 세단에 타자 무릎이 운전대에 닿지 않았다⁠. 의자가 두 칸 뒤로 밀려 있었다⁠. 룸미러는 천장을 보고 있었고⁠, 기름 바늘은 금요일보다 한 칸 내려와 있었다⁠. 발레 직원이 차를 옮겼으려니 했다⁠. 의자를 당기고 거울을 맞추는 동안 허리가 한 번 더 비명을 질렀다⁠.

*

월요일 아침 일곱 시 십 분⁠, 목동 아파트 식탁⁠. 염서휴가 남편 허리에 두 엄지를 대고 꾹 눌렀다⁠.

“⁠골반 또 틀어져 왔네⁠. 오른쪽이 이만큼 올라갔어⁠. 산악회에서 뭘 메고 다녀⁠?⁠”

“⁠배낭⁠. 물 많이 넣었어⁠.⁠”

“⁠가방에서 모래가 한 줌 나오던데⁠. 북한산에 모래사장 생겼어⁠?⁠”

“⁠계곡⁠. 계곡에 모래 있어⁠.⁠”

서휴는 필라테스 강사였다⁠. 사람 몸을 열다섯 해 만졌고⁠, 골반 높이만 보고 손님이 지난주에 이사를 했는지 맞혔다⁠. 병곤은 서휴의 엄지가 허리에서 떨어지기 전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딸 이솜이 토스트를 입에 문 채 휴대전화 너머로 아빠를 봤다⁠. 열일곱이었고⁠, 아빠가 무슨 말을 하든 반 박자 먼저 한숨을 쉬었다⁠.

“⁠아빠⁠, 산악회 단톡방 한 번만 보여 줘 봐⁠. 산악회 아저씨들 프사 궁금해⁠.⁠”

“⁠단톡방은 개인 정보야⁠.⁠”

“⁠등산화는 왜 맨날 새 거야⁠?⁠”

병곤은 대답 대신 커피를 마셨다⁠. 아직 몸에 주말이 덜 빠져 있었다⁠. 컵을 내려놓으며 입에서 말이 저절로 나왔다⁠. “⁠와⁠, 오늘 컨디션 미쳤다⁠.⁠”

이솜이 토스트를 내려놓았다⁠. “⁠영포티 왔다⁠. 엄마⁠, 아빠 또 젊은 척해⁠.⁠”

“⁠허리 붙잡고 미쳤대⁠.⁠” 서휴가 말했다⁠.

식탁 옆 텔레비전에서 아침 뉴스가 흘러나왔다⁠. 국회 신체대여법 소위원회가 다음 달 공청회를 연다는 소식이 지나가고⁠, 화면이 편의점 방범 카메라 영상으로 바뀌었다⁠. 「⁠성동경찰서⁠, 성수동 뺑소니 용의자 공개수배⁠」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어제 새벽 네 시 사십 분⁠, 성동구 성수동 뚝섬로 횡단보도에서 첫차를 타러 가던 예순세 살 여성이 승용차에 치였습니다⁠. 운전자는 차를 세우지 않고 달아났으며⁠, 피해자는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경찰은 운전자가 사고 십이 분 뒤 인근 편의점에 들른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화면 속 남자는 계산대 앞에서 담배 한 갑과 숙취 음료를 내려놓고 있었다⁠. 둥근 얼굴에 넓은 이마⁠, 옆을 짧게 친 반백 머리⁠, 금테 안경⁠. 남색 정장 바지에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남자가 지갑을 꺼내느라 팔을 들자 손목에서 흰 밴드가 보였다⁠.

식탁이 조용해졌다⁠. 냉장고 모터 소리가 들렸다⁠.

“⁠아빠잖아⁠.⁠” 이솜이 말했다⁠.

“⁠당신 일요일 새벽에 산에 있었다며⁠.⁠” 서휴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병곤은 리모컨을 집어 화면을 멈췄다⁠. 스무 해 동안 남의 사고 영상을 멈춰 온 손이었다⁠. 보험금을 타려고 일부러 차에 뛰어든 사람의 발목⁠, 블랙박스를 끈 운전자의 깜박이⁠. 병곤은 화면을 한 칸씩 뒤로 넘겨 남자의 손목에서 멈추고⁠, 확대했다⁠. 흰 밴드 끝의 작은 불이 초록색이었다⁠.

병곤은 제 손목을 내려다봤다⁠. 같은 밴드⁠, 꺼진 불⁠. 제 몸에 제가 들어 있으면 불은 켜지지 않는다⁠. 일 년 동안 초록 불은 주말마다 거울 속 찬율의 손목에서만 봤다⁠.

“⁠당신 어디 가⁠?⁠” 서휴가 물었다⁠.

병곤은 이미 현관에서 구두를 꿰고 있었다⁠. 왼발과 오른발이 바뀌어 있었다⁠.

*

성수로 가는 강변북로에서 병곤은 신호에 걸릴 때마다 차 안을 뒤졌다⁠. 사고 차량을 처음 보는 날처럼 순서대로였다⁠. 운전석 아래⁠, 컵 받침⁠, 문 주머니⁠, 햇빛 가리개⁠. 컵 받침 바닥에서 담배꽁초 하나가 나왔다⁠. 필터에 금색 줄이 둘 그어진 가는 담배였다⁠. 병곤이 피우던 시절에도 그런 담배는 비싸서 못 피웠다⁠. 앞 유리 위쪽 블랙박스의 메모리 카드 칸은 비어 있었다⁠. 칸 뚜껑이 반쯤 열린 채였다⁠.

“⁠카드를 빼 갔네⁠.⁠”

혼잣말이 나오자 몸이 익숙하게 반응했다⁠. 스무 해 동안 보험금 청구서를 들고 찾아간 사고 현장에서 블랙박스 카드가 없으면⁠, 병곤은 늘 같은 말을 했다⁠. 카드가 없다는 것도 기록입니다⁠. 누군가 빼 갔다는 기록이요⁠. 다만 이번에는 청구서에 적힌 이름이 길병곤이었다⁠.

옆 차선에 배달 오토바이가 멈췄다⁠. 헬멧을 쓴 라이더가 병곤의 차 안을 들여다보다가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과 병곤을 번갈아 봤다⁠. 병곤은 안경을 벗었다⁠. 라이더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안경을 쓰라는 시늉을 했다⁠. 병곤이 안경을 쓰자 라이더가 엄지를 들었다⁠. 맞다는 뜻인지 잘 찍혔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신호가 바뀌었고 병곤은 액셀을 밟았다⁠. 백미러 속에서 라이더가 휴대전화를 들어 번호판을 찍고 있었다⁠.

단톡방에 서휴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산악회 회장 전화번호 보내⁠. 지금⁠.⁠」 이어서 이솜⁠. 「⁠아빠 숏폼 벌써 돎⁠. 제목이 편의점 아재임⁠」 병곤은 휴대전화를 조수석에 엎어 놓았다⁠. 화면이 엎어져도 진동은 계속 올라왔다⁠.

*

여덟 시 삼십 분⁠, 「⁠여벌⁠」 센터 로비에서는 투자 설명회 시연 연습이 한창이었다⁠. 벽 한 면을 채운 화면에 「⁠주말을 빌려 드립니다⁠」라는 글자가 떠 있었고⁠, 화면 아래에서 싱가포르 투자사 사람들에게 보낼 영상을 찍는 직원들이 조명을 옮기고 있었다⁠. 한가운데 회색 리넨 셔츠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여벌⁠」 대표 금세창이었다⁠. 병곤은 회원 가입 날 벽에 붙은 사진에서 금세창의 얼굴을 봤다⁠. 사진보다 웃는 입이 컸다⁠.

“⁠길병곤 고객님⁠.⁠” 세창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뉴스 보셨군요⁠. 저도 봤습니다⁠.⁠”

“⁠제 몸이 일요일 새벽에 차를 몰았습니다⁠. 저는 양양에 있었고요⁠.⁠”

“⁠기록부터 보시죠⁠.⁠” 세창은 태블릿을 돌려 보였다⁠. 「⁠B1-14 · 길병곤 · 보관 중 · 7월 8일 22시 04분 ~ 7월 10일 21시 58분⁠」 “⁠고객님 몸은 주말 내내 지하 1층 14번 침대에 계셨습니다⁠. 문 열린 기록도⁠, 침대에서 내려온 기록도 없습니다⁠.⁠”

“⁠그럼 편의점에 간 건 누굽니까⁠?⁠”

“⁠고객님이 모르시는 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세창은 웃었다⁠. “⁠하나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빈 몸에는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그런 기술은 세상에 없어요⁠.⁠”

“⁠화면 속 제 밴드가 초록이었습니다⁠.⁠”

세창의 웃음이 반 박자 멈췄다⁠. 세창은 왼손 검지로 제 손목 밴드를 톡톡⁠, 두 번 두드렸다⁠. 그러고는 다시 웃었다⁠.

“⁠방송국 화면은 색이 다 다릅니다⁠, 고객님⁠. 파랑이 초록으로 나오기도 하고요⁠. 그리고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혹시 일요일 새벽에 잠깐 깨셨던 거 아닙니까⁠? 꿈인 줄 아셨을 수도 있고요⁠.⁠”

“⁠빈 몸은 안 깹니다⁠. 대표님 회사 약관에 그렇게 적혀 있어요⁠.⁠”

“⁠그러니까요⁠.⁠” 세창은 태블릿을 거두었다⁠.

“⁠보관실 영상 보여 주십시오⁠. 14번 침대 위 카메라요⁠. 주말 마흔여덟 시간 전부⁠.⁠”

“⁠영장 가져오시는 분께 보여 드리겠습니다⁠. 경찰이든 검찰이든요⁠.⁠” 세창은 고개를 기울였다⁠. “⁠고객님은 보험사에서 사고 조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아시잖아요⁠. 청구인이 직접 증거를 고르게 두는 보험사는 없습니다⁠.⁠”

병곤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스무 해 동안 병곤이 하던 말이었다⁠.

세창이 말을 이었다⁠. “⁠저희 회사가 고객님께 해 드릴 수 있는 건 다 해 드리겠습니다⁠. 허리 받침 매트는 평생 무료로 넣어 드릴게요⁠.⁠”

병곤의 휴대전화가 주머니에서 연달아 떨었다⁠. 회사 단톡방이었다⁠. 「⁠사고조사부(⁠7⁠)⁠」 「⁠부장님 이거 부장님 아니죠⁠?⁠」 「⁠아니 너무 부장님인데⁠」 「⁠ㅠㅠ 부장님 출근하세요⁠?⁠」 단톡방 알림 위로 모르는 번호가 떴다⁠. 병곤이 받자 느린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성동경찰서 교통범죄수사팀입니다⁠. 길병곤 씨 맞으시죠⁠? 오늘 오전 중에 좀 나와 주셔야겠는데요⁠.⁠”

전화를 끊자 세창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병곤은 이번에는 잡지 않았다⁠.

“⁠경찰서 가시는 길이면 마음 편히 가세요⁠.⁠” 세창이 말했다⁠. “⁠저희 변호사가 먼저 가 있을 겁니다⁠. 고객님 편은 아니고요⁠.⁠”

로비 화면에서 「⁠주말을 빌려 드립니다⁠」가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검은 화면이 된 짧은 사이⁠, 유리 같은 화면에 반백 머리의 마흔여섯 살 남자가 비쳤다⁠. 허리를 짚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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