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436자)

흰 탁자

영끌 전날로 회귀했다 · 문채겸

2023년 8월 21일 월요일 오후 한 시 사십 분⁠, 휘담 리버파크 1차 상담실의 유리문에는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영업 종료 — 시설물 반환 중⁠」 단비하우징의 간판은 떼어졌고⁠, 간판 자리에 나사 구멍 네 개와 햇볕에 덜 바랜 네모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시행사가 상담실을 돌려받아 다음 주에 철거한다고 했다⁠. 서흔이 협의회 소송 설명회를 핑계로 오후 한나절만 빌려 두었다⁠.

안은 비어 있었다⁠. 사탕 그릇이 사라진 흰 탁자들이 줄지어 있었고⁠, 입구의 단지 모형 유리 상자는 천으로 덮여 있었다⁠. 큰 유리창으로 한낮의 볕이 쏟아졌다⁠. 형우는 창가 맨 앞 탁자 앞에서 멈췄다⁠. 두 해 전 해린이 형우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낸 탁자였다⁠. 탁자 모서리에 두 해 전 인주가 묻었던 자리가 희미하게 분홍색으로 남아 있었다⁠. 아무도 닦지 않은 것이었다⁠.

창밖에 크레인이 없었다⁠. 강 건너 1차 단지 열여섯 동이 다 올라가 있었고⁠, 베란다마다 빨래가 널려 있었다⁠. 102동 15층 베란다에는 아기 내복 몇 벌이 집게에 물려 있었다⁠.

“⁠형부⁠, 에어컨 안 나와요⁠. 철거 들어간다고 전기 반만 살려 놨대요⁠.⁠” 서흔이 손부채를 부치며 들어왔다⁠. 서흔의 목에 이름표가 매달려 있었다⁠. 「⁠휘담 리버파크 입주민 소송 모임 대표 맹서흔⁠」 협의회장 이름표 위에 새 이름표를 덧붙인 것이었다⁠. 테이프 자국이 가장자리에 보였다⁠.

“⁠이름이 바뀌었네요⁠.⁠”

“⁠단톡방 이름도 바꿨어요⁠. 어젯밤에 투표했어요⁠. 천이백 명 찬성⁠.⁠” 서흔이 휴대전화를 보여 주었다⁠. 「⁠휘담 리버파크 입주민 소송 모임(⁠1⁠,342⁠)⁠」 고정 공지는 하나뿐이었다⁠. 「⁠1⁠. 실거래 가격은 실제대로 신고합니다⁠」 서흔이 화면을 내리자 총무의 글이 보였다⁠. 「⁠부린이 형부님 에코백 백 개 청구서 첨부합니다 — 농담입니다⁠. 근데 반은 진담⁠」 엄지 이모티콘이 열몇 개 달려 있었다⁠.

“⁠소송은 몇 년 걸린대요⁠. 변호사가 그러는데 이기면 웃돈 일부라도 돌려받고⁠, 지면 변호사비만 나간대요⁠.⁠” 서흔이 휴대전화를 내렸다⁠. “⁠뉴스 봤어요⁠? 미국 금리가 22년 만에 제일 높대요⁠. 우리 잔금 대출 이자 또 오른대⁠. 형부 말대로 계산해 봤어요⁠. 두 배로⁠. 안 맞아요⁠. 그래도 해 보는 거예요⁠.⁠”

형우의 휴대전화가 떨었다⁠. 상칠이었다⁠. 「⁠형 오늘 그날이지⁠」「⁠나 벼리셀 판 돈으로 은행 안 그만둠⁠」「⁠형 보고 배움⁠」「⁠대신 차 바꿈 ㅋㅋ 중고 경차에서 중고 준중형⁠」「⁠그리고 형 오산 지점 통폐합되면 동탄으로 다시 오래⁠. 본부에서⁠. 새 지점장이 형 이름 물어봤어⁠」 형우는 답장으로 차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상칠이 바로 우산 이모티콘을 보냈다⁠. 「⁠이제 비 안 와⁠」

*

두 시 정각⁠, 치윤과 하솜이 들어왔다⁠. 하솜은 아기띠를 메고 있었다⁠. 여섯 달 된 아기가 아기띠 안에서 상담실 천장 조명을 올려다보며 손을 빨았다⁠. 치윤은 택배 조끼 대신 흰 반팔 셔츠를 입었다⁠. 처음 보는 차림이었다⁠.

해린이 뒤따라 들어왔다⁠. 해린은 지난주에 새결과 함께 오산에서 학교 뒤 빌라로 돌아왔다⁠. 해린의 손에 도장이 있었다⁠. 4월의 밤 식탁 위에 놓고 갔던 도장이었다⁠.

공인중개사는 서흔이 소송 모임 사람들에게 물어 찾은 동네 사람이었다⁠. 단비부동산과 아무 상관 없는⁠, 학교 앞 상가 2층에서 이십 년 장사했다는 예순 넘은 여자였다⁠. 중개사가 돋보기를 쓰고 계약서를 탁자 위에 펼쳤다⁠.

“⁠분양권 매매⁠. 102동 1503호⁠. 매도인 봉치윤⁠, 매수인 맹해린⁠.⁠” 중개사가 돋보기 너머로 해린을 보았다⁠. “⁠어머⁠, 매수인이 원래 매도인이었네⁠. 이 년 만에 되사요⁠?⁠”

“⁠네⁠.⁠” 해린이 말했다⁠. “⁠되사요⁠.⁠”

“⁠요즘 별일 다 있네⁠.⁠” 중개사가 계약서를 넘겼다⁠. “⁠매매 대금은 분양가에 웃돈 일억 이천⁠. 중도금 대출은 매수인이 승계⁠. 신고 가격은⁠…⁠…⁠”

“⁠일억 이천이요⁠.⁠” 해린이 말했다⁠. “⁠실제 가격 그대로요⁠.⁠”

중개사가 해린을 잠깐 보더니 웃었다⁠. “⁠당연하지⁠, 그럼⁠. 나는 그 외에는 안 써요⁠.⁠”

치윤이 계약서의 금액 칸을 오래 보았다⁠. 웃돈 일억 이천⁠. 두 해 전 3월에 자기 손으로 보낸 금액이었다⁠. 치윤은 볼펜을 쥐고 형우를 보았다⁠.

“⁠과장님⁠. 저희 이거 팔기로 한 거⁠, 과장님 때문 아니에요⁠.⁠” 치윤이 말했다⁠. “⁠하솜이랑 지난주 내내 계산했어요⁠. 과장님이 말해 준 숫자로요⁠. 2027년에 저희가 사억 칠천 빚이라는 거⁠. 지금 웃돈 빠진 가격으로 계속 살면 이억 넘게 빚이라는 거⁠.⁠” 치윤이 하솜의 아기띠를 보았다⁠. “⁠이 집 좋아요⁠. 15층에서 강 보여요⁠. 근데 이 집 이자가 저희 애보다 커요⁠. 애가 크는 것보다 이자가 더 빨리 커요⁠.⁠”

하솜이 아기의 등을 토닥였다⁠. “⁠장인어른 퇴직금 돌려드리고⁠, 병원 근처에 전세 구했어요⁠. 작아요⁠. 걸어서 출근해요⁠.⁠” 하솜이 해린을 보았다⁠. “⁠사모님⁠, 저 집 예쁘게 쓰셔야 돼요⁠. 제가 벽지 골랐어요⁠. 아기 방은 하늘색이에요⁠.⁠”

“⁠하늘색 그대로 둘게요⁠.⁠” 해린이 말했다⁠. “⁠우리 애는 2학년이라 아기 방은 아니지만⁠.⁠”

“⁠2학년이면 하늘색 좋아해요⁠.⁠” 하솜이 웃었다⁠.

치윤이 매도인 칸에 도장을 찍었다⁠. 인주가 종이에 스미는 소리가 났다⁠. 중개사가 계약서를 해린 앞으로 돌려놓았다⁠.

해린이 도장 뚜껑을 열었다⁠. 형우는 해린 옆에 앉아 있었다⁠. 형우의 왼손이 탁자 위에 있었다⁠. 계약서 매수인 칸에서 손바닥 하나만큼 떨어진 자리였다⁠. 두 해 전 같은 탁자에서 형우의 손은 점선 위를 덮고 있었다⁠. 오늘은 점선 옆에 놓여 있었다⁠. 해린이 형우의 손을 한 번 보고⁠, 점선 위에 도장을 눌렀다⁠.

형우의 왼손목이 뜨거워졌다⁠. 형우는 손을 탁자 위에 둔 채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42⁠,000⁠,000⁠」

빨간 숫자였다⁠. 플러스 일억 육천사백만 원이 마이너스 사천이백만 원이 되어 있었다⁠. 벼리셀로 번 돈이 1503호의 웃돈과 떨어진 가격 사이로 거의 다 빠져나갔다⁠. 2027년 10월 16일의 반형우네 집은 다시 빚을 지고 있었다⁠. 2021년 8월 소파에서 본 마이너스 이억 천만 원의 오분의 일이었다⁠. 사천이백만 원⁠. 해린의 돌봄교실 월급과 형우의 오산 지점 월급으로 네 해 동안 갚을 수 있는 빚이었다⁠.

치윤이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이었다⁠. 형우는 왼손을 내밀었다⁠. 치윤이 웃으며 왼손으로 바꿔 잡았다⁠. “⁠과장님은 왜 맨날 왼손이에요⁠?⁠”

“⁠시계 때문에요⁠.⁠”

“⁠시계가 왜요⁠?⁠”

“⁠고장 났어요⁠.⁠”

치윤의 손바닥이 단단했다⁠. 숫자가 바뀌었다⁠.

「⁠+31⁠,000⁠,000⁠」

검은색이었다⁠. 2027년 10월 16일⁠, 봉치윤의 집은 빚을 다 갚고 삼천백만 원이 남았다⁠. 2차 상담실에 갈 일도⁠, 상담실에서 누가 계약서를 덮어 줄 일도 없었다⁠. 형우는 손을 조금 오래 잡고 있었다⁠. 치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과장님⁠, 손 이제 안 차시네요⁠.⁠”

*

두 시 반⁠, 상담실 뒷문이 열렸다⁠. 수사관 두 사람이 먼저 들어오고⁠, 수사관들 뒤로 경렬이 상자 하나를 안고 나왔다⁠. 뒷방의 짐을 챙겨 가도록 수사관들이 한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고 서흔이 낮게 말했다⁠. 지난주 법원이 구속 영장을 발부했고⁠, 오늘은 짐만 챙기고 다시 들어간다고 했다⁠. 경렬은 회색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상자 맨 위에 둘둘 만 달력 하나가 꽂혀 있었다⁠. 2008년 12월⁠.

경렬이 흰 탁자 앞에서 멈췄다⁠. 수사관이 경렬의 팔꿈치를 가볍게 잡았다가⁠, 경렬이 움직이지 않자 손을 놓고 기다렸다⁠.

경렬은 탁자 위의 계약서를 보았다⁠. 매수인 맹해린⁠. 신고 가격 웃돈 일억 이천⁠. 경렬의 눈이 금액 칸에서 오래 머물렀다⁠.

“⁠반 과장님⁠.⁠” 경렬이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또 꼭대기에서 사시네요⁠. 웃돈 다 빠진 집을⁠, 웃돈 붙여서⁠.⁠”

“⁠이번엔 알고 삽니다⁠.⁠” 형우가 말했다⁠. “⁠다음 사람 없이⁠.⁠”

경렬이 웃었다⁠. 상자를 고쳐 안았다⁠. “⁠지금 안 사면 영영 못 산다⁠. 그 말이 제가 한 말 중에 제일 맞는 말이었어요⁠. 과장님이 오늘 증명하셨네⁠.⁠” 경렬이 해린을 보았다⁠. “⁠사모님⁠, 축하드립니다⁠. 두 번째네요⁠.⁠”

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장 뚜껑을 닫았다⁠.

형우가 일어났다⁠. 경렬 앞으로 가서 왼손을 내밀었다⁠. 두 해 동안 경렬이 내밀 때마다 받지 않던 손이었다⁠. 경렬이 형우의 손을 보았다⁠. 상자를 한 팔로 옮겨 안고⁠, 비어 있는 왼손으로 맞잡았다⁠. 말랑하고 마른 손이었다⁠. 두 해 전과 같았다⁠.

숫자가 바뀌었다⁠.

「⁠−1⁠,380⁠,000⁠,000⁠」

마이너스 십삼억 팔천만 원⁠. 2021년 8월 이 탁자에서 본 플러스 사십일억 이천만 원이 있던 자리였다⁠. 형우는 손을 놓지 않았다⁠.

“⁠대표님⁠, 버티실 겁니까⁠?⁠”

“⁠버텨야죠⁠.⁠” 경렬이 말했다⁠. “⁠2008년에도 버텼어요⁠. 버티는 사람이 이겨요⁠. 그건 지금도 맞는 말이에요⁠.⁠” 경렬이 손을 뺐다⁠. “⁠과장님도 버티세요⁠. 웃돈 일억 이천에 지금 시세면⁠, 사천만 원쯤 물리셨겠네⁠. 그쯤이면 버틸 만하잖아요⁠.⁠”

형우는 숨을 멈췄다⁠. 경렬은 형우의 시계를 보지 않았다⁠. 탁자 위 계약서의 금액 칸을 한 번 더 보았을 뿐이었다⁠. 이십 년 동안 남의 계약서를 읽어 온 눈이었다⁠. 수사관이 경렬의 팔꿈치를 다시 잡았다⁠. 경렬은 상자를 안고 유리문 쪽으로 걸어갔다⁠. 「⁠영업 종료⁠」 종이 앞에서 경렬이 잠깐 멈추고⁠, 문 옆 빈 사탕 그릇 자리를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그리고 나갔다⁠. 유리문이 닫히고 볕 속으로 회색 티셔츠가 멀어졌다⁠.

*

치윤과 하솜이 아기를 데리고 먼저 나갔다⁠. 서흔은 중개사를 배웅하러 나가며 해린의 어깨를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상담실에 형우와 해린만 남았다⁠. 전기가 반만 살아 있어서 천장 조명의 절반이 꺼져 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볕이 흰 탁자 위를 하얗게 덮었다⁠.

해린이 계약서를 서류 봉투에 넣으며 말했다⁠. “⁠정문에서 칠 분이야⁠.⁠”

“⁠이 분 더 멀지⁠.⁠”

“⁠새결이 걸음으로는 구 분이야⁠.⁠” 해린이 봉투를 닫았다⁠. “⁠구 분이면 받아쓰기 하나 더 외울 수 있어⁠.⁠”

형우가 웃었다⁠. 해린도 웃었다⁠. 해린이 봉투를 탁자 위에 놓고⁠, 도장을 형우의 와이셔츠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하늘색 주머니가 도장 모양으로 불룩해졌다⁠.

“⁠이건 당신이 갖고 있어⁠. 다음엔 당신이 찍어⁠.⁠”

“⁠다음은 없을 거야⁠.⁠”

“⁠있어⁠. 새결이 중학교 갈 때⁠.⁠” 해린이 형우의 넥타이를 반쯤 풀린 그대로 두고 매듭만 바로 세웠다⁠. “⁠그때는 둘이 같이 정해⁠. 혼자 정하고 나중에 말하지 말고⁠. 당신도⁠, 나도⁠.⁠”

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왼손목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형우는 시계를 보았다⁠.

초침이 움직이고 있었다⁠. 2027년 10월 16일 오후 세 시 십일 분에서 멈춰 있던 초침이⁠, 두 해 만에 한 칸을 넘어갔다⁠. 그리고 한 칸 더⁠. 빨간 숫자는 아직 유리 위에 떠 있었다⁠. 마이너스 사천이백만 원⁠. 초침이 숫자 위를 지나갈 때마다 숫자의 빨간색이 조금씩 흐려졌다⁠. 날짜 창에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작은 숫자가 돌아와 있었다⁠. 21⁠.

해린이 형우의 손목을 끌어다 자기 귀에 댔다⁠. “⁠고쳤네⁠. 소리 나⁠.⁠”

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흰 탁자 위에 해린의 손과 형우의 손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두 손 사이에 인주 자국이 하나⁠, 두 해 전 것과 오늘 것이 겹쳐 조금 진하게 남아 있었다⁠. 창밖에는 크레인이 없었고⁠, 102동 15층 베란다의 아기 내복이 바람에 한 번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시계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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