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97자)

계약서

은퇴한 프로게이머 드론 조종사 · 여오령

2035년 12월 첫 화요일 저녁 일곱 시⁠, 나는 오른손목에 찬 검은 보호대의 찍찍이를 한 칸 더 당겨 붙였다⁠. 찍찍이 뜯어지는 소리가 마이크에 들어가자 채팅창에 「⁠찍⁠」이 줄줄이 올라왔다⁠. 열 해 동안 방송을 하면서 생긴 인사였다⁠. 시청자들은 내 얼굴보다 내 손목 소리를 먼저 알아봤다⁠.

「⁠찍⁠」 「⁠찍찍⁠」 「⁠형님 손목 오늘도 살아 계심⁠?⁠」 「⁠철벽 출근 ㅋㅋ⁠」

방송 화면 귀퉁이의 작은 창에 내가 떠 있었다⁠. 마흔 살⁠, 의자에 앉으면 후드티 밑으로 배가 살짝 나왔다⁠. 뒷머리는 낮잠에 눌린 대로 뻗쳤고⁠, 무테 안경알에는 모니터 불빛이 두 장 겹쳐 비쳤다⁠. 목에는 큰 검은 헤드셋을 걸었고⁠, 회색 게임단 후드티는 소매가 늘어나 손등을 반쯤 덮었다⁠. 은퇴하던 해 팀에서 마지막으로 받은 옷이었다⁠. 가슴팍의 팀 로고는 빨래를 오래 해서 거의 지워졌다⁠.

“⁠오늘은 다시 보기입니다⁠. 열 해 전 아홉 성채 결승⁠, 마지막 판⁠.⁠”

아홉 성채에서 나는 열한 해를 먹고살았다⁠. 성채 아홉 개를 지키면서 상대 본진을 무너뜨리는 전략 게임이다⁠. 별명은 철벽이었다⁠. 먼저 때리지 않았다⁠. 상대가 지칠 때까지 막다가⁠, 상대 손이 한 번 비는 순간 한 번에 끝냈다⁠. 해설자들은 지루하다고 했고⁠, 이긴 판이 쌓이자 지루하다는 말을 그만했다⁠.

화면 속 스물아홉 살의 내가 마우스를 쥐고 있었다⁠. 상대 기병이 세 번 밀려왔다가 세 번 성벽 앞에서 녹았다⁠. 지금의 나는 화면 속 손가락을 보면서 손목을 주물렀다⁠. 스물아홉 살의 손은 하루 열네 시간을 버텼고⁠, 마흔 살의 손은 두 시간이면 보호대 안쪽이 저렸다⁠.

후원 알림이 울렸다⁠. 기계 목소리가 후원 문구를 읽었다⁠.

「⁠천 원 후원 — 형 이 판 볼 때마다 내가 다 숨 막힘⁠. 제발 한 번만 먼저 때려 봐⁠」

“⁠안 때립니다⁠. 열 해 전에도 안 때렸어요⁠. 다시 보기에서 때리면 조작이죠⁠.⁠”

「⁠ㅋㅋㅋㅋ⁠」 「⁠철벽 근본⁠」 「⁠탁진엄마⁠: 귤까놨다⁠」

채팅창 맨 아래로 어머니의 아이디가 올라왔다⁠. 어머니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일산 상가 이층에서 PC방을 하는 어머니는 손님이 뜸한 저녁이면 집에 와서 거실 텔레비전으로 내 방송을 틀었다⁠. 내 방은 거실에서 문 하나 너머였다⁠. 어머니는 문 하나 너머에서 채팅을 쳤다⁠.

“⁠어머니⁠, 방송 중에는 귤 얘기 하지 마시라니까요⁠.⁠”

「⁠탁진엄마⁠: 식는다⁠」 「⁠귤이 식음⁠?⁠」 「⁠어머님 귤 데워 드시는 분⁠」 「⁠천 원 후원 — 어머님 귤 대신 받으세요⁠」

결승 마지막 판은 사십 분짜리였다⁠. 삼십 분째에 상대가 본진을 비우고 전부 밀고 들어오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틀면 채팅창은 늘 같은 말로 찼다⁠. 「⁠여기서 때려⁠」 열 해 전 관객석도 같은 말을 외쳤고⁠, 나는 열 해 전에도 막았다⁠.

초인종이 울린 것은 삼십 분째 장면 바로 앞이었다⁠.

*

어머니가 현관문 여는 소리가 났고⁠, 낮은 남자 목소리가 이어졌다⁠. 슬리퍼 소리가 내 방문 앞에 와서 멎었다⁠.

“⁠탁진아⁠. 군인 아저씨들이 니 찾는다⁠.⁠”

마이크가 켜져 있었다⁠. 채팅창이 나보다 먼저 반응했다⁠.

「⁠군인⁠?⁠」 「⁠형 재입대각⁠」 「⁠영장 나왔다 ㅋㅋㅋㅋ⁠」 「⁠마흔에 영장이 나옴⁠?⁠」

방문이 열렸다⁠. 군복 입은 사람 둘이 문턱에 있었다⁠. 앞의 남자는 쉰 줄이었고 어깨에 별 하나를 달았다⁠. 머리를 짧게 쳤는데 귀 위가 하얗게 셌다⁠. 뒤의 여자는 커다란 검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남자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모니터 셋⁠, 마이크 팔⁠, 조명⁠, 벽에 기대 둔 접이식 의자 둘⁠. 눈길이 벽에 붙은 결승 사진에서 멈췄다⁠.

“⁠드론사령부 사령관 천명곤입니다⁠. 이쪽은 모혜운 소령⁠.⁠”

“⁠방송 중인데요⁠.⁠”

“⁠압니다⁠. 보고 왔습니다⁠.⁠”

명곤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접이식 의자를 폈다⁠. 혜운도 하나를 폈다⁠. 두 사람이 방송 장비 바로 앞⁠, 카메라가 담는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화면 귀퉁이의 작은 창에서 군복 둘이 내 어깨 너머로 들어왔다⁠.

「⁠ㄹㅇ 군인임⁠」 「⁠별 하나 = 준장⁠」 「⁠장군님 방송 출연 ㄷㄷ⁠」 「⁠형 뭐 했어 솔직히 말해⁠」

“⁠방송 끄시겠습니까⁠?⁠” 혜운이 물었다⁠.

“⁠끄면 더 이상해 보여요⁠. 지금 장군님 얼굴을 몇만 명이 봤어요⁠.⁠”

명곤이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보고 고개를 숙였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지⁠.⁠”

채팅창이 잠깐 멈췄다가 터졌다⁠.

「⁠지지는 끝날 때 하는 거예요 장군님⁠」 「⁠시작하자마자 항복하심⁠」 「⁠ㅋㅋㅋㅋㅋㅋ⁠」

명곤은 채팅창을 읽더니 혜운을 돌아보았다⁠. 혜운이 낮게 말했다⁠. “⁠인사는 ‘⁠ㅎㅇ⁠’입니다⁠, 사령관님⁠.⁠” 명곤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렌즈를 향했다⁠.

“⁠정정합니다⁠. 하이⁠.⁠”

*

혜운이 가방에서 서류철과 옷 한 벌을 꺼냈다⁠. 옷은 카키색 군 조끼였다⁠. 주머니가 여럿 달렸고⁠, 가슴에 「⁠봉탁진⁠」 명찰이 벌써 박혀 있었다⁠. 혜운이 조끼를 펼쳐 내 후드티 앞에 대 보았다⁠.

“⁠사이즈는 엑스라지로 준비했습니다⁠.⁠”

「⁠배 때문에 ㅋㅋㅋㅋ⁠」 「⁠소령님 정확하심⁠」 「⁠탁진엄마⁠: 엑스라지맞다⁠」

명곤이 서류철을 열어 내 앞으로 돌렸다⁠. 첫 장 맨 위에 「⁠원격전투 계약 조종사 계약서⁠」라고 찍혀 있었다⁠.

“⁠원격 전투 드론 조종사를 뽑습니다⁠. 군인으로 부르는 게 아닙니다⁠. 계약 요원입니다⁠. 기간은 일 년⁠, 월급은 지금 방송 수입보다 많을 겁니다⁠.⁠”

“⁠제 방송 수입 아세요⁠?⁠”

“⁠모 소령이 계산했습니다⁠.⁠”

혜운이 숫자 하나를 말했다⁠. 정확했다⁠. 채팅창에 「⁠형 저거 맞아⁠?⁠」가 올라왔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마흔이에요⁠. 손목이 이래요⁠.⁠” 나는 검은 보호대를 찬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반응 속도는 스무 살 애들 반도 안 나와요⁠.⁠”

“⁠빠른 손은 많습니다⁠. 우리가 찾는 건 기다리는 손입니다⁠.⁠” 명곤이 턱으로 벽의 결승 사진을 가리켰다⁠. “⁠열 해 전 결승 마지막 판⁠, 봉탁진 씨는 사십 분 동안 한 번도 먼저 때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판을 마흔 번 봤습니다⁠.⁠”

“⁠마흔 번이요⁠?⁠”

“⁠중령 때 당직 서면서 봤습니다⁠.⁠”

「⁠장군님 찐팬⁠」 「⁠덕질이 국가 단위⁠」

명곤은 웃지 않았다⁠. 목소리 높이를 바꾸지 않고 숫자를 말했다⁠.

“⁠올해 입대한 스무 살이 삼 년 전의 절반입니다⁠. 내년에는 더 줍니다⁠. 강화 북쪽 해안 초소에는 열여섯 명이 있어야 하는데 열네 명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열네 명 가운데 둘이 다쳤습니다⁠. 북쪽 드론이었습니다⁠.⁠”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넘어왔다⁠. 어머니가 내 방송을 끄고 뉴스를 틀었다⁠. 앵커가 강화⁠, 초소⁠, 부상이라는 낱말을 차례로 말했고⁠, 외신이 이번 국지전을 사람이 안 죽는 전쟁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덧붙였다⁠. 드론끼리 싸우고 드론끼리 떨어지는 전쟁이라고 했다⁠.

“⁠사람이 못 서는 자리는 화면이 지켜야 합니다⁠. 화면은 게이머가 제일 잘 다룹니다⁠.⁠”

“⁠화면 너머에도 사람이 있잖아요⁠.⁠”

말이 먼저 나왔다⁠. 채팅창이 한 박자 늦게 조용해졌다⁠.

명곤이 나를 보았다⁠. “⁠압니다⁠. 그래서 봉탁진 씨입니다⁠. 화면 너머가 사람이라는 걸 아는 손이 필요합니다⁠.⁠”

나는 서류철을 덮어 명곤 앞으로 밀었다⁠. 손바닥 밑에서 종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마이크에 들어갔다⁠.

“⁠저는 막는 사람이에요⁠. 쏘는 사람은 안 해요⁠. 철벽은 먼저 안 때립니다⁠. 게임에서도 안 때렸어요⁠.⁠”

“⁠요격만 하셔도 됩니다⁠.⁠”

“⁠요격도 쏘는 거죠⁠.⁠”

“⁠기체를 쏘는 겁니다⁠. 사람 없는 기체⁠.⁠”

“⁠그 기체 띄운 사람은요⁠?⁠”

명곤은 대답 대신 서류철을 다시 내 앞으로 밀었다⁠. 이번에는 나도 밀지 않았다⁠. 손을 서류철 위에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종이 한 묶음이 멈췄다⁠. 손바닥 밑에서 종이가 미지근해졌다⁠.

「⁠형 거절해⁠」 「⁠아니 근데 월급 ㄷㄷ⁠」 「⁠나라가 부르는데⁠」 「⁠탁진엄마⁠: 가지마라⁠」

어머니의 채팅이 올라오자 명곤의 눈이 화면으로 갔다⁠. 띄어쓰기 없는 네 글자를 한참 보았다⁠.

“⁠어머님이십니까⁠?⁠”

“⁠네⁠. 귤 까 놓으셨대요⁠.⁠”

명곤의 입꼬리가 잠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

명곤이 일어나 의자를 접어 벽에 기대 놓았다⁠. 혜운이 서류철을 가방에 넣으려 하자 명곤이 손을 들어 막았다⁠. 서류철과 조끼가 책상 위에 남았다⁠.

“⁠가져가세요⁠.⁠”

“⁠두고 가겠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안 바뀌어요⁠.⁠”

명곤은 문 앞에서 돌아서서 카메라를 한 번 보고⁠, 나를 보았다⁠.

“⁠나샛별 씨는 오늘 낮에 서명했습니다⁠.⁠”

보호대 안에서 맥이 뛰었다⁠. 손목이 먼저 알아들었다⁠.

“⁠샛별이가요⁠?⁠”

“⁠내일 아침 아홉 시⁠, 파주 원격전투단 조종동에서 국군 초청전이 열립니다⁠. 와글TV로 생중계합니다⁠. 상금은 오천만 원이고⁠, 나샛별 씨가 우승 후보입니다⁠.⁠”

“⁠걔 스물일곱이에요⁠.⁠”

“⁠우리 초소 병사들은 스물하나입니다⁠.⁠”

두 사람이 현관으로 나갔다⁠. 어머니가 귤 접시를 든 채 거실에 서 있었다⁠. 명곤이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이자⁠, 어머니는 귤 하나를 집어 명곤의 손에 쥐여 주었다⁠. 명곤은 귤을 받아 들고 나갔다⁠. 어머니는 현관문이 닫히고 나서야 내 방을 보았다⁠.

“⁠니 안 가제⁠?⁠”

“⁠안 가요⁠.⁠”

어머니가 귤 접시를 내 책상에 놓고 나갔다⁠. 귤은 정말로 식어 있었다⁠. 베란다에 내놓았던 귤이었다⁠.

조금 뒤 어머니가 다시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귤 대신 파스 한 봉지를 들고 왔다⁠. 어머니는 내 침대 끝에 앉아 파스 비닐을 뜯었다⁠.

“⁠손 내봐라⁠.⁠”

보호대를 풀고 손목을 내밀었다⁠. 어머니가 파스를 손목 안쪽에 붙이고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찬 기운이 뼈까지 내려갔다⁠.

“⁠장군이 니 손 얘기만 하더라⁠.⁠”

“⁠기다리는 손이래요⁠.⁠”

“⁠니 손은 옛날에 한 번 팔았으면 됐다⁠.⁠” 어머니는 파스 비닐을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 돈으로 내 가게 보증금 냈다⁠. 두 번은 안 판다⁠.⁠”

어머니가 나간 뒤에도 파스 냄새가 방에 남았다⁠. 은퇴한 이듬해 봄⁠, 수술비와 가게 보증금이 한꺼번에 필요했을 때 나는 센서 달린 장갑을 끼고 하루 여덟 시간씩 게임을 했다⁠. 손가락이 언제 움직이고 언제 멈추는지를 기록한다고 했다⁠. 계약서는 첫 장만 읽었다⁠. 이천만 원이었다⁠.

*

방송을 끄지 않았다⁠. 다시 보기의 삼십 분째 장면을 틀었다⁠. 상대가 본진을 비우고 전부 밀고 들어왔고⁠, 채팅창은 「⁠여기서 때려⁠」로 찼다⁠. 화면 속 스물아홉 살의 나는 막았다⁠. 장면이 도는 동안 나는 책상 위 서류철에 눈을 주지 않으려고 모니터만 보았다⁠. 엑스라지 조끼의 명찰이 눈꼬리에 자꾸 들어왔다⁠.

일곱 해 전 겨울⁠, 스무 살 나샛별은 내 방송의 시청자 대전에 들어와 열두 판을 내리 졌다⁠. 열세 번째 판에서 처음으로 내 성채 하나를 무너뜨렸고⁠, 방송이 끝난 뒤 쪽지를 보냈다⁠. 「⁠먼저 때리는 법 말고 막는 법 가르쳐 주세요⁠.⁠」 나는 막는 법을 가르쳤다⁠. 샛별은 때리는 법을 더 잘 배웠다⁠. 일곱 해 동안 한 번도 내 말을 끝까지 들은 적이 없었다⁠.

밤 열한 시⁠, 방송을 끄자마자 휴대전화가 떨렸다⁠. 와글TV 알림이었다⁠.

「⁠샛별 님이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 내일 국군 초청전 나가요⁠!⁠!⁠」

썸네일 속 샛별은 분홍 후드티 위에 카키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조끼는 엠사이즈였고⁠, 가슴에 「⁠나샛별⁠」 명찰이 박혀 있었다⁠.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카메라에 대고 브이를 그렸다⁠.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언니 군인 됨⁠?⁠」 「⁠상금 오천 실화⁠?⁠」 「⁠동생 강화 있지 않아⁠?⁠」

샛별은 마지막 줄을 보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웃으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내일 아침 아홉 시⁠, 일 등 하러 갑니다⁠. 그리고 스승님⁠.⁠” 샛별이 렌즈를 똑바로 보았다⁠. “⁠보고 있는 거 알아요⁠. 시청자 목록에 철벽 떠 있어요⁠.⁠”

나는 시청자 목록에서 내 아이디를 지우지 못했다⁠. 손목 보호대의 찍찍이를 뜯었다가⁠, 한 칸 더 당겨 다시 붙였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