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437자)

다시

시어머니로 빙의한 악녀 며느리 · 진새온

찻잔이 입술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다시⁠.⁠”

말해 놓고 내가 놀랐다⁠. 침대 곁에 무릎을 꿇은 앳된 하녀가 은쟁반을 받쳐 든 채 굳었고⁠, 쟁반 위 찻주전자 뚜껑이 달그락 떨었다⁠. 하녀는 찻잔을 받아 들고 문밖으로 거의 뛰어나갔다⁠. 나는 이불을 덮은 채 혀끝을 입천장에 대 보았다⁠. 떫었다⁠. 오래 우린 떫은맛이 아니었다⁠. 묵은 찻잎에 마른 꽃잎을 섞어 향으로 덮은 맛이었다⁠. 나는 평생 티백 녹차와 회사 일 층 카페 아메리카노로 산 사람이었다⁠. 혀는 아니었다⁠.

천장이 높았다⁠. 침대 기둥 넷에 자주색 휘장이 드리워 있었고⁠, 높은 창으로 들어온 아침 햇빛이 휘장의 금실을 한 올씩 짚어 나갔다⁠. 우리 집 안방 천장에는 남편이 십 년 전에 붙인 야광 별 스티커가 아직 세 개 남아 있다⁠. 여기에는 별 대신 날개 달린 아기 천사들이 그려져 있었고⁠, 천사들이 일제히 나를 내려다봤다⁠.

일어나려는데 허리에서 뚝 소리가 났다⁠. “⁠아이고⁠.⁠” 마흔넷의 허리가 아니었다⁠. 예닐곱 해는 더 쓴 허리였다⁠.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았다⁠. 아침마다 화장실 거울에서 보던 얼굴⁠, 콧등에 안경 자국이 남은 마흔네 살 위혜수의 얼굴은 없었다⁠. 거울 속 여자는 쉰 살 무렵이었다⁠. 은빛이 섞인 금발을 밤새 땋아 어깨에 늘어뜨렸고⁠, 눈은 날카로운 회청색이었다⁠.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를 나무라는 얼굴이었다⁠. 화장대 위에는 진주 목걸이가 둥글게 놓여 있었고 상아 손잡이 부채가 접혀 있었다⁠. 부채를 집자 손이 쥐는 법을 알았다⁠. 손목을 한 번 털면 부채가 촤르륵 펴졌고⁠, 다시 털면 탁 접혔다⁠.

문이 열리고 쉰 줄의 여자가 들어왔다⁠. 허리에 바느질 주머니를 차고 입에는 과자 부스러기를 묻힌 채였다⁠. 여자는 내 머리를 풀어 빗기 시작하면서 숨도 안 쉬고 말을 쏟았다⁠.

“⁠마님⁠, 차를 또 물리셨다고요⁠. 아래층이 벌써 난리예요⁠. 그래도 오늘은 참으셔야 해요⁠. 오늘 아침에 젊은 마님이 곳간 열쇠를 받으러 오시잖아요⁠. 수도 귀부인들이 다 지켜보고 있어요⁠. 로슈몽 공작부인이 며느리를 어떻게 다루나 하고요⁠.⁠”

로슈몽⁠. 젊은 마님⁠. 곳간 열쇠⁠. 빗이 머리를 한 번 내려갈 때마다 어젯밤이 한 장씩 넘어갔다⁠.

어젯밤 열한 시⁠, 나는 거실 소파에 누워 『⁠공작가의 꽃⁠』 2권 마지막 장을 읽고 있었다⁠. 우리 출판사가 종이책 판권을 산 웹소설이었고⁠, 다음 주 회의 전까지 띠지 문구를 내야 했다⁠. 열한 시 사십 분에 학원에서 돌아온 고1 아들에게 「⁠밥은⁠?⁠」 하고 보냈더니 「⁠ㅇㅇ⁠」이 왔다⁠. 두 글자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다시 소설로 돌아갔고⁠, 그다음은 기억이 없다⁠. 휴대전화가 얼굴에 떨어지는 감촉이 마지막이었다⁠.

『⁠공작가의 꽃⁠』은 몰락한 백작가의 딸 셀레스타가 로슈몽 공작에게 시집와 시어머니에게 시달리는 이야기다⁠. 시어머니 마르셀린은 1권 첫 장에서 2권 마지막 장까지 며느리를 들볶는다⁠. 곳간 열쇠를 달라는 며느리에게 찻잔을 던지고⁠, 며느리를 볕 안 드는 북쪽 방에 넣고⁠, 해가 가장 짧은 날 왕대비의 겨울 연회에서 며느리 찻잔에 독을 탔다가 들킨다⁠. 아들이 제 손으로 어머니를 북쪽 수녀원에 보내는 장면에서 댓글창이 뒤집혔다⁠. 「⁠시엄마 퇴장할 때 박수침⁠」 「⁠셀레스타는 이제 행복만 해⁠」 나는 회의 자료에 「⁠시어머니 캐릭터 굿즈는 안 팔림⁠」이라고 적어 두었다⁠.

거울 속 회청색 눈이 나를 봤다⁠. 내가 바로 안 팔리는 굿즈였다⁠.

*

찻상은 창 아래에 있었다⁠. 둥근 탁자에 의자가 여섯⁠, 의자마다 자주색 방석이 놓여 있었는데 방석 다섯 장이 새것처럼 빳빳했다⁠. 이 방의 주인은 오랫동안 혼자 앉아 차를 마셨다⁠. 나는 볕이 드는 의자에 앉아 오늘 아침의 순서를 머릿속으로 짰다⁠. 열쇠를 달라고 하면 준다⁠. 웃으면서 준다⁠. 찻잔은 던지지 않는다⁠. 열여섯 해 며느리 노릇을 한 사람으로서 시어머니가 어떻게 해야 며느리가 덜 미워하는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우리 시어머니는 일요일 아침 아홉 시마다 전화해 「⁠아범 밥은 챙기냐⁠」를 물었고⁠, 나는 일요일 아침 여덟 시 오십구 분마다 심호흡을 했다⁠.

노크 소리가 났다⁠. 시녀장 오딜이 문을 열자 연분홍이 들어왔다⁠.

셀레스타는 스물넷이었다⁠. 허리까지 오는 붉은 곱슬머리를 반만 묶어 등에 흘렸고⁠, 연분홍 드레스 자락이 걸을 때마다 발목에서 물결쳤다⁠. 원작 표지 그대로였다⁠. 아니⁠, 표지보다 눈이 더 맑았다⁠. 뒤에는 마른 사내가 따라 들어왔다⁠. 공작가의 집사였다⁠. 집사는 문 옆에 서서 손을 모았는데⁠, 눈은 내 허리에 찬 열쇠꾸러미에 가 있었다⁠.

셀레스타가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어머님⁠, 좋은 아침이에요⁠. 시집온 지 석 달이 됐으니 이제 살림을 배우고 싶어요⁠. 곳간 열쇠부터 맡겨 주시면 어머님 일을 덜어 드릴게요⁠.⁠”

토씨 하나 안 틀린 원작 대사였다⁠. 다음 줄은 이랬다⁠. 「⁠마르셀린은 대답 대신 찻잔을 들었다⁠.⁠」

내 손이 찻잔을 들었다⁠.

나는 들지 않았다⁠. 손이 들었다⁠. 팔꿈치가 뒤로 젖혀지면서 찻물이 잔 테두리에서 출렁였고⁠, 나는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콱 붙잡았다⁠. 오딜이 숨을 들이켰다⁠. 집사가 반 발 물러났다⁠. 셀레스타만 움직이지 않았다⁠. 셀레스타는 찻물이 날아올 자리를 정확히 아는 사람처럼⁠,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오른손을 천천히 내려 찻잔을 받침에 놓았다⁠. 달각⁠. 그리고 웃었다⁠. 회사에서 신입 사원 첫 출근 날 짓는 웃음이었다⁠.

“⁠셀레스타 씨⁠.⁠”

방 안이 조용해졌다⁠. 오딜의 입이 벌어졌다⁠. 셀레스타의 눈썹이 한 번 떨렸다⁠.

“⁠아니⁠, 셀레스타⁠. 곳간부터 하는 거 좋아요⁠. 온보딩⁠, 아니⁠, 처음 배울 때는 원래 곳간부터 해요⁠.⁠” 나는 열쇠꾸러미에서 놋쇠 열쇠 하나를 뺐다⁠. 어느 열쇠가 곳간 것인지는 손가락이 알았다⁠.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고요⁠. 혼자 끙끙대지 말고⁠.⁠”

셀레스타가 열쇠를 두 손으로 받았다⁠. 받는 손끝이 차가웠다⁠. 셀레스타는 열쇠를 쥔 채 한 박자 늦게 웃었다⁠.

“⁠감사해요⁠, 어머님⁠. 그럼 금고 열쇠는 언제쯤 배울 수 있을까요⁠?⁠”

“⁠금고는 다음 달에⁠. 수습 기간이 있잖아요⁠.⁠”

“⁠수습이요⁠?⁠”

“⁠그런 게 있어요⁠.⁠”

셀레스타가 다시 인사하고 나갔다⁠. 집사가 따라 나가다 문간에서 나를 한 번 돌아보았다⁠. 문이 닫히자 오딜이 바느질 주머니에서 과자를 하나 꺼내 입에 넣고⁠, 씹으면서 말했다⁠.

“⁠마님⁠, 어디 편찮으세요⁠? 젊은 마님한테 웃으셨어요⁠. 제가 이 댁에서 서른 해를 일했는데⁠, 마님 웃는 얼굴은 돌아가신 공작님 장례 날 말고는 처음 봬요⁠.⁠”

장례 날에 웃었다고⁠? 원작에 그런 줄은 없었다⁠. 원작은 셀레스타의 눈으로만 쓰여 있었다⁠.

*

점심은 아래층 식당에서 먹었다⁠. 긴 식탁 끝에 앉아 있으니 장화에 진흙을 묻힌 사내가 들어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했다⁠. 입술이 손등에 닿기 한 뼘 전에 멈추는⁠, 하기 싫은 숙제 같은 인사였다⁠. 아들 오렐리앙이었다⁠. 스물일곱⁠, 로슈몽 공작⁠. 키가 문틀에 닿을 만큼 컸고⁠, 마르셀린의 회청색 눈을 그대로 물려받았는데 눈빛만은 순해서 덩치 큰 사냥개 같았다⁠.

“⁠어머니⁠, 셀레스타한테 웃으셨다면서요⁠.⁠” 오렐리앙이 빵을 뜯으며 나를 곁눈질했다⁠. “⁠무슨 꿍꿍이세요⁠?⁠”

“⁠꿍꿍이는⁠. 밥은 먹었니⁠?⁠”

“⁠지금 먹잖아요⁠.⁠”

“⁠아침 말이야⁠.⁠”

“⁠응⁠.⁠”

응⁠. 한 글자였다⁠. 나는 빵을 든 채 잠깐 숨을 골랐다⁠. 서울에서는 두 글자였는데 여기서는 한 글자였다⁠. 오렐리앙은 수프를 세 숟가락 만에 비우고 말 이야기를 했다⁠. 새로 들인 암말이 어제 마구간 문을 걷어찼다고⁠, 셀레스타가 암말에게 각설탕을 주었더니 순해졌다고⁠. 아내 이야기를 할 때 오렐리앙의 귀가 빨개졌다⁠. 나는 원작 댓글 하나를 떠올렸다⁠. 「⁠남주 마마보이였다가 아내 바보 되는 거 개좋음⁠」

점심이 끝나 갈 무렵 왕궁에서 사람이 왔다⁠. 은쟁반 위에 두툼한 초대장 한 장이 놓여 있었고⁠, 백합을 찍은 흰 봉랍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봉랍을 뜯기 전에 이미 내용을 알았다⁠. 「⁠해가 가장 짧은 날⁠, 왕대비 아델하이드가 겨울 연회를 엽니다⁠.⁠」 원작에서 마르셀린이 끌려 나가는 날이었다⁠. 오딜이 손가락을 꼽았다⁠. 사십 일 남았다고 했다⁠.

나는 초대장을 접어 부채 사이에 끼웠다⁠. 사십 일⁠. 신간 하나 띄우는 데 드는 시간이었다⁠. 목표는 단순했다⁠. 며느리에게 찻잔을 던지지 않는다⁠. 북쪽 방에 넣지 않는다⁠. 연회 날 남의 찻잔 근처에는 가지도 않는다⁠. 회사였으면 화이트보드에 세 줄로 적고 옆에 동그라미를 쳤을 것이다⁠. 오렐리앙이 부채에 끼운 초대장을 보더니 어머니가 연회를 반기는 얼굴은 처음 본다고 했다⁠. 반기는 게 아니라 날짜를 세는 거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오딜은 초대장을 받쳐 든 김에 수도 소식도 한 바구니 쏟았다⁠. 북쪽 제국에 흉년이 들어 제국 상선들이 남쪽 항구 밀을 웃돈 주고 실어 간다는 것⁠, 그래서 수도 빵값이 지난주에만 두 번 올랐다는 것⁠, 빵집 앞에서 누가 로슈몽 욕을 하더라는 것⁠. 왜 로슈몽 욕을 하느냐고 묻자 오딜이 과자를 씹다 말고 내 얼굴을 봤다⁠.

“⁠마님이 모르시면 누가 알아요⁠.⁠”

오딜은 대답 대신 과자를 하나 더 입에 넣었다⁠.

밤이 깊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가 너무 넓었고 베개가 너무 높았고 허리가 너무 아팠다⁠. 서울에 있는 내 몸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생각하다가⁠, 아들이 내일 아침 밥은 먹고 학교에 가는지 생각하다가⁠, 아들이 「⁠ㅇㅇ⁠」 말고 다른 글자를 보낸 게 언제였는지 따져 보다가 그만두었다⁠. 나는 촛대를 들고 일어났다⁠. 퇴근 전에 사무실을 한 바퀴 도는 버릇이 이십 년이었다⁠. 프린터에 남은 종이⁠, 꺼지지 않은 모니터⁠, 잠기지 않은 서랍⁠.

공작저는 사무실보다 훨씬 넓었다⁠. 이 층 복도를 지나 중앙 계단을 내려가고⁠, 일 층 응접실과 식당을 지나고⁠, 주방 옆 좁은 돌계단으로 지하에 내려갔다⁠. 돌벽에서 찬 습기가 올라와 슬리퍼 속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계단 끝에 쇠를 덧댄 참나무 문이 있었다⁠. 금고였다⁠. 내 허리의 열쇠꾸러미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열쇠가 이 문의 것이었다⁠.

문이 한 뼘 열려 있었다⁠. 틈으로 촛불이 새어 나왔다⁠.

나는 촛대를 낮추고 문을 밀었다⁠. 금고 안에는 철제 상자들이 선반에 줄지어 있었고⁠, 가운데 작은 책상 위에 양피지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집사가 촛대를 들고 책상 곁에 서 있었다⁠. 책상 앞 의자에는 셀레스타가 앉아 있었다⁠. 붉은 곱슬머리를 다 풀어 내린 채였고⁠,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금빛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 윗면에 밀 이삭이 새겨져 있었다⁠. 로슈몽 공작가의 인장 반지였다⁠. 반지 옆에 빨간 봉랍 막대가 녹아 있었다⁠.

집사의 촛대가 흔들렸다⁠. 셀레스타는 흔들리지 않았다⁠. 반지 낀 손을 양피지 위에 얹어 글씨를 덮고⁠, 나를 올려다보며 아침과 똑같이 웃었다⁠.

“⁠어머님⁠, 주무셔야죠⁠.⁠”

“⁠그 반지⁠, 빼요⁠.⁠”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셀레스타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이건 어머님이 오늘 아침 저한테 맡기신 거예요⁠. 곳간 열쇠랑 같이요⁠. 어머님이 처음으로 웃어 주셨다고⁠, 저 오늘 저녁에 공작님 앞에서 울었어요⁠. 공작님도 우셨고요⁠.⁠” 셀레스타가 목소리를 한층 낮췄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내일 아침이면 이 댁 사람들 모두 그렇게 알게 될 거예요⁠.⁠”

나는 양피지를 덮은 하얀 손등을 보았다⁠. 원작 어디에도 없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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