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13자)

내려놓으면 눕습니다

S급 헌터들의 짐꾼입니다만 · 백해원

44층 계단을 다 올라서자 송진 냄새가 코 안쪽에 들러붙었다. 송판을 막 켠 목공소 냄새를 백 배로 졸여 놓은 것 같은 그 냄새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에 얇은 막을 하나씩 바르고 지나갔고, 노아 렌은 혀끝으로 입천장을 한 번 쓸고 나서야 침을 삼킬 수 있었다.

등에 진 배낭이 삐걱였다. 소가죽 어깨끈 두 줄이 쇠고리에 물려 우는 소리였다. 물 네 통, 붕대 한 상자, 기름 먹인 밧줄 두 타래, 헌터 넷의 여분 칼날과 화살촉, 사흘 치 마른 빵. 다 합쳐 열두 관이었다. 짐꾼들이 무게를 세는 단위인 관으로 치면 물 한 통이 두 관쯤 되니, 노아는 지금 물 여섯 통을 업고 있는 셈이었다.

“여기서 왼쪽.”

앞에서 셀린 바크가 말하고,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S급 헌터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은빛 머리를 뒤로 묶은 셀린은 검집에 손을 얹은 채 송진이 흘러내린 벽 쪽으로 곧장 나아갔다. 노아가 반 걸음 늦게 입을 열었다.

“리더님, 그쪽은 벽입니다.”

“알아. 벽을 확인하는 거야.”

셀린은 벽을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리고, 몸을 돌려 왼쪽으로 갔다. 뒤에서 방패를 멘 하름이 콧소리로 웃다가 셀린과 눈이 마주치고는 기침으로 바꿨다. 마법사 루카는 지팡이를 가슴에 안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기도문 같았는데, 잘 들어 보니 어머니에게 보내는 유언이었다.

“루카 씨, 아직 아무 일도 없습니다.”

“노아 씨는 짐꾼이라 몰라요. 44층은 원래 사람 마음을 이상하게 만들어요.”

“송진 때문입니다. 코로 숨 쉬지 마세요.”

“입으로 쉬면 송진 맛이 나요.”

“그럼 조금만 쉬세요.”

맨 뒤에서 창을 어깨에 걸친 칼렌 하웰이 혀를 찼다. 백야의 부리더이자 A급 창잡이인 칼렌은 이번 시즌이 끝나기 전에 S급 승급 심사를 받는다는 말을 아르센의 술집마다 흘리고 다녔다. 금실로 수놓은 망토 끝에 송진이 묻을까 봐 그는 아까부터 망토 자락을 한 손에 걷어쥐고 걸었다.

“짐꾼이 말이 많네요. 짐은 입으로 지는 겁니까?”

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깨끈을 엄지로 한 칸 조였다.

바닥이 떨렸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다. 발바닥 아래에서 모래가 굴러가는 것 같은 떨림이 이어지다가, 송진이 흘러내린 벽의 틈마다 검은 털이 삐져나왔다. 손바닥만 한 거미들이 송진 방울을 등에 이고 쏟아져 나왔고, 그 수가 벽 하나를 다 덮을 만큼 불어났다.

“송진 거미다!”

하름이 방패를 땅에 박았다. 칼렌이 창을 내리며 외쳤다.

“짐 내려! 손 비워!”

헌터들이 등에 멘 작은 배낭을 한꺼번에 벗어 던졌다. 셀린의 배낭이 돌바닥에 떨어져 굴렀고, 루카는 지팡이를 들려고 허리에 찬 약통까지 끌러 냈다. 싸우려면 손이 비어야 했다. 헌터들은 언제나 그렇게 싸웠다.

노아는 배낭을 벗지 않았다. 대신 무릎을 굽히고 배낭 밑동을 엉덩이에 붙였다. 6년 동안 몸에 붙은 자세였다.

셀린의 검이 거미 떼 한가운데를 갈랐다. 칼집에서 검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한 번 들렸고,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거미 열댓 마리가 반으로 갈라져 송진 덩어리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칼렌의 창이 그 뒤를 쓸었고, 하름의 방패가 덮쳐 오는 무리를 밀어냈다. 루카의 불꽃이 벽을 핥자 송진에 불이 붙어 매캐한 연기가 퍼졌다.

그리고 바람이 왔다.

*

누름바람은 소리가 없었다. 노아는 귀보다 먼저 정수리로 그것을 알았다. 누가 머리 위에 두꺼운 솜이불을 한 장 내려놓은 것 같더니, 이불이 두 장이 되고 네 장이 되었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무거운 공기가 위에서부터 사람을 눌렀다.

셀린이 검을 든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름의 방패가 바닥에 엎어지면서 하름이 그 위에 엎어졌다. 루카는 지팡이를 놓치고 옆으로 쓰러졌고, 칼렌은 창대를 짚고 버티다가 창대째 미끄러져 얼굴을 돌바닥에 박았다. 거미들도 납작해졌다. 몸이 가벼운 것부터 바닥에 들러붙었다.

노아는 서 있었다.

무릎이 접혔다가 펴졌다. 열두 관이 등을 누르는데, 그 무게가 이상하게 발바닥을 바닥에 박아 주었다. 머리 위의 솜이불은 노아를 눕히려 했지만 등의 짐이 노아를 아래에서 붙잡았다. 40층을 넘으면 탑이 빈 몸을 민다는 말을 짐꾼 숙소에서 수없이 들었다. 짐꾼들끼리 술 마시고 하는 허풍인 줄 알았다.

“노, 노아 씨…….”

루카가 바닥에 뺨을 붙인 채 손가락만 까딱였다.

“움직이지 마세요. 숨만 쉬세요.”

노아는 한 발씩 내디뎠다. 발을 들 때마다 바람이 그 발을 다시 바닥에 붙이려 했다. 그래서 발을 높이 들지 않고 바닥을 쓸듯이 밀었다. 짐꾼이 젖은 계단을 오를 때 쓰는 걸음이었다.

층 끝 계단까지는 백 걸음쯤이었다. 계단 앞 돌기둥에 박힌 표석이 송진 연기 너머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층이 열리면 바람이 멎는다. 처음 손을 얹는 사람이 층을 연다.

노아는 기름 먹인 밧줄 한 타래를 허리에서 풀었다. 밧줄 끝을 셀린의 칼띠에 매고, 거기서 두 걸음 떨어진 하름의 방패끈에 매고, 루카의 허리띠에 맸다. 손가락이 송진에 들러붙어 매듭이 두 번 미끄러졌다. 세 번째에 묶였다.

칼렌의 차례였다. 칼렌이 고개를 겨우 돌려 노아를 올려다보았다. 뺨에 돌가루와 송진이 엉겨 있었다.

“짐 내려놔.”

“예?”

“그 짐 내려놓고 나부터 업어. 내가 부리더다.”

“내려놓으면 저도 눕습니다.”

“짐꾼이 눕든 말든 그건 짐꾼 사정이고.”

칼렌의 목소리는 바닥에 눌려서도 부드러웠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람을 깎는 데 익숙한 사람의 말투였다. 노아는 칼렌의 망토 끝을 보았다. 금실 자수가 송진에 절어 검게 굳어 있었다.

“부리더님, 제가 짐을 내리면 여기 서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도 표석까지 못 갑니다.”

“명령이야.”

“짐꾼 계약서에는 짐을 지라고 적혀 있습니다. 내리라는 말은 없습니다.”

노아는 칼렌의 창대에 밧줄을 감고 매듭을 지었다. 칼렌이 무어라 욕을 했는데, 바람이 그 욕을 바닥으로 눌러 버려서 끝까지 들리지 않았다.

*

헌터 넷을 끄는 일은 짐을 지는 일과 달랐다. 등의 짐은 몸에 붙어 같이 움직였지만, 뒤에 매달린 사람 넷은 바닥에 붙어 노아를 뒤로 잡아당겼다. 밧줄이 어깨에 걸렸고, 걸린 자리를 배낭 어깨끈이 다시 눌렀다. 열 걸음을 가자 어깨에서 뜨거운 것이 흘렀다. 서른 걸음을 가자 그것이 팔꿈치까지 내려왔다.

뒤에서 하름이 끌려오며 웅얼거렸다.

“노아, 내가 미안하다. 지난번에 네 빵 먹은 거 나다.”

“압니다.”

“루카 빵도 내가 먹었다.”

“그것도 압니다.”

“그럼 왜 말 안 했냐?”

“지금 말씀하셨잖습니까.”

루카가 바닥에 끌려가며 웃다가 송진 연기를 들이켜 기침을 했다. 셀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밧줄 맨 앞에 매인 셀린은 처음 바람이 왔을 때 머리를 바닥에 부딪치고 정신을 잃은 채였다.

일흔 걸음째에 노아의 오른 무릎이 꺾였다. 무릎이 돌바닥에 닿기 직전에 노아는 배낭 밑동으로 엉덩이를 받쳐 주저앉는 것을 막았다. 짐이 노아를 다시 일으켰다. 숨을 고르는 동안 노아는 짐꾼 숙소의 늙은 조합장 가렛을 떠올렸다. 가렛은 술에 취하면 의족을 두드리며 말했다. 짐꾼이 앉으면 짐도 앉는다, 짐이 앉으면 다시 못 일으킨다.

아흔 걸음째에 표석이 손 닿는 데 있었다.

표석은 어른 머리만 한 회색 돌이었다. 수백 년 동안 헌터들의 손바닥이 닿은 자리가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었고, 그 닳은 자리에 손을 얹는 순간 노아는 돌이 생각보다 따뜻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 체온만큼 따뜻했다.

표석에서 흰 빛이 퍼졌다. 빛이 층 전체로 번지자 머리 위의 솜이불이 한 장씩 걷혔다. 하름이 먼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뒤집었고, 루카가 천장을 보고 누운 채 울기 시작했다. 칼렌은 창대에 감긴 밧줄을 손톱으로 뜯었다.

셀린이 눈을 떴다. 노아의 얼굴과 표석과 자기 칼띠에 묶인 밧줄을 차례로 보더니, 처음 한 말은 이것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44층 끝입니다, 리더님. 45층 계단 앞입니다.”

“내가 왔어?”

“끌려오셨습니다.”

셀린은 대답 대신 눈을 다시 감았다.

거미들이 납작하게 붙어 있던 자리에는 헌터들이 벗어 던진 배낭 넷이 흩어져 있었다. 송진에 반쯤 잠긴 셀린의 배낭, 뚜껑이 열려 약병이 굴러 나온 루카의 약통, 하름의 배낭에서 쏟아진 육포 한 꾸러미. 칼렌이 그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것도 짐이죠?”

노아는 아무 말 없이 백 걸음을 되돌아갔다. 바람이 걷힌 층은 그냥 송진 냄새 나는 넓은 방이었다. 배낭 넷을 주워 끈을 서로 엮어 가슴 앞에 걸고 돌아오는 동안, 하름이 바닥에 누운 채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거 보면 헌터 하기 싫어진다.”

“하름 씨는 원래 하기 싫어하셨잖아요.”

루카가 울다 말고 대꾸했다. 하름은 반박하지 못하고 육포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노아의 등에는 열두 관이, 가슴에는 배낭 넷이 매달려 있었고, 그는 그 차림으로 아까보다 빠르게 걸었다.

*

물과 붕대가 모자라 그날 백야는 45층에 오르지 않고 내려왔다. 30층 증기 엘리베이터 하역장에 닿았을 때는 해가 진 뒤였다. 엘리베이터 쇠문 사이로 석탄 연기가 흘러나왔고, 하역장 바닥에는 다른 파티의 짐꾼들이 부려 놓은 상자가 줄지어 있었다. 짐꾼 후배 피나가 상자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노아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선배! 어깨 그거 뭐야? 아니, 뭐예요? 피가 왜 등까지 와 있어요?”

“끈이 좀 먹었다.”

“끈이 사람을 먹어요?”

“열두 관에 넷을 달면 먹는다.”

피나가 입을 벌린 채 노아 뒤의 헌터들을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그러고는 다시 노아를 보았다.

칼렌이 피나 앞을 지나 노아 옆에 섰다. 망토는 벗어 팔에 걸었고, 얼굴의 송진은 물로 다 씻어 낸 뒤였다. 하역장 등불 아래서 칼렌은 다시 백야의 부리더처럼 보였다.

“수고했어요, 짐꾼.”

칼렌이 가죽 주머니에서 은화 세 닢을 꺼냈다. 노아가 손을 내밀지 않자, 칼렌은 노아의 배낭 옆주머니를 열고 은화를 하나씩 떨어뜨려 넣었다.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44층은 내가 열었어요. 표석에 처음 손을 얹은 건 나고요. 바람이 오기 전에 내가 계단까지 뛰었고, 짐꾼은 뒤에서 짐을 지켰죠. 길드 보고서에는 그렇게 올라갈 겁니다.”

“표석에 손 얹은 건 저입니다.”

“짐꾼 손은 표석에 안 닿아요. 닿아도 안 센다는 말입니다.”

칼렌이 노아의 배낭 옆주머니를 툭 쳤다. 은화가 안에서 서로 부딪쳤다.

“짐꾼이 받은 건 다 짐이죠. 그건 무겁지도 않을 텐데요.”

엘리베이터 쇠문이 열렸다. 칼렌이 먼저 탔고, 하름과 루카가 노아의 눈을 피하며 뒤따랐다. 셀린은 들것에 실려 들어가면서 노아 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렸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술을 달싹이고는 그대로 쇠문 너머로 사라졌다.

노아는 배낭을 멘 채 하역장에 서 있었다. 열두 관 중에 물 네 통은 비었고 붕대도 다 썼으니 짐은 가벼워져 있어야 했다. 그런데 옆주머니 쪽 어깨가 처졌다. 은화 세 닢 무게만큼이었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내려놓으면 눕습니다 · S급 헌터들의 짐꾼입니다만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