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02자)

확성기

광장 비둘기들의 복수 · 문들레

광장 돌바닥은 해가 뜨고 한 시간쯤 지나야 발바닥에 미지근해진다⁠. 구슬은 미지근해지기 전에 내려앉는 새였다⁠. 차가운 돌 위에서 발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분수 옆 벤치 밑을 보면⁠, 뒤축이 꺾인 회색 운동화 한 켤레가 먼저 나와 있었다⁠. 운동화는 날마다 같은 자리에서 멈추고⁠, 멈춘 다음에는 반드시 무언가를 흘렸다⁠.

“⁠얘들아⁠, 밥 먹자⁠. 구구구구⁠.⁠”

노숙인 할아버지가 쌀 자루 주둥이를 풀었다⁠. 할아버지는 비둘기 소리를 흉내 낼 줄 알았는데⁠, 흉내가 엉망이었다⁠. 짧은 구구 셋은 여기 먹을 것이 있다는 소리다⁠. 할아버지는 늘 넷을 했다⁠. 무리는 하나가 더 붙어도 너그럽게 알아들었다⁠. 쌀이 돌바닥에 흩어지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번졌고⁠, 느티나무 가지에서 잿빛 몸들이 한꺼번에 떨어져 내렸다⁠.

구슬은 쌀알 하나를 부리로 집어 고개를 젖혀 삼켰다⁠. 묵은 쌀이었다⁠. 겉이 누렇고 씹으면 먼지 맛이 났지만⁠, 광장에서는 아침에 떨어지는 것이 가장 맛있다⁠. 점심에는 김밥 꽁다리가 떨어지고 저녁에는 과자 봉지가 굴러다니지만⁠, 아침 쌀은 다툴 일이 적었다⁠. 운동화가 넉넉하게 뿌렸다⁠.

목이 마르면 분수 물받이로 간다⁠. 구슬은 고인 물에 부리를 박고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물을 빨아들였다⁠. 물 위에 제 몸이 비쳤다⁠. 잿빛 몸⁠, 날개를 접으면 등 위에 나란히 눕는 검은 띠 두 줄⁠. 목을 돌릴 때마다 목털이 초록에서 자줏빛으로 번쩍 바뀌었고⁠, 주황 눈이 물속에서 저를 마주 보았다⁠. 물받이 바닥을 짚은 두 발은 잘 익은 대추처럼 붉었다⁠.

물을 다 마시고 벤치 밑으로 가니 과자 봉지가 하나 굴러 와 있었다⁠. 봉지 주둥이를 묶은 하얀 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구슬이 실 끝을 부리로 건드리는 순간⁠, 분수 가장자리 가장 높은 돌에서 외발 수비둘기가 뛰어내렸다⁠. 외발은 오른발이 없다⁠. 발목 아래가 둥글게 아물어 돌에 닿지 않는다⁠. 젊을 때 실에 감긴 발이 하루하루 가늘어지다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무리의 늙은 새들은 다 안다⁠. 외발이 구슬의 붉은 발을 세게 쪼았다⁠. 구슬이 날개를 펴고 물러서자 외발은 실을 발로 밀어 벤치 뒤로 차 넣고⁠, 낮게 끄르륵 울며 높은 돌로 돌아갔다⁠. 아침마다 되풀이되는 일이었다⁠. 외발에게 실은 발을 먹는 벌레였다⁠.

쌀을 반쯤 먹었을 때 짝이 다가왔다⁠. 목털이 푸르게 번들거리는 수비둘기였다⁠. 짝은 목을 공처럼 부풀리고 꼬리를 돌바닥에 끌며 구슬 둘레를 빙빙 돌았다⁠. 구우우⁠, 길게⁠. 밥 먹는 중에 하는 짓이었다⁠. 구슬은 쌀알을 두 개 더 삼키고 나서 날개로 짝의 가슴을 밀쳤다⁠. 짝은 밀려난 자리에서 한 바퀴를 더 돌았다⁠.

*

아홉 시가 가까워지면 광장에 신발이 늘어난다⁠. 신발마다 흘리는 것이 다르다⁠. 굽 높은 구두는 서둘러 지나가며 아무것도 안 흘린다⁠. 흰 운동화를 신은 청년은 토스트를 입에 문 채 뛰어서 부스러기를 길게 뿌려 주고⁠, 구슬의 무리는 청년이 지나간 줄을 따라 한 줄로 걸었다⁠. 검은 구두는 조심해야 했다⁠. 검은 구두가 여럿 모이면 발을 구르고 “⁠훠이⁠” 소리를 냈다⁠.

오늘은 검은 구두들이 다른 짓을 했다⁠. 분수 앞에 긴 천을 펼치더니 두 끝을 가로등 기둥에 묶었다⁠. 끈을 묶던 여자가 재채기를 연달아 세 번 했다⁠. 보좌관이라고 불리는 여자였다⁠.

“⁠의원님⁠, 글자 안 비뚤어요⁠?⁠”

“⁠비둘기 먹이 금지와 포획 특별법⁠. 잘 보이면 됐어⁠.⁠”

구슬은 글자를 모른다⁠. 천에 검고 굵은 무늬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천 앞에 갈색 구두 한 켤레가 와서 멈췄다⁠. 광을 낸 구두라 돌바닥의 하늘이 코끝에 비쳤다⁠. 왼쪽 끈이 풀려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구슬의 눈에 끈 두 가닥은 아침 햇볕에 꿈틀거리는 지렁이였다⁠.

갈색 구두 위로 큰 동물이 하나 서 있었다⁠. 사람들은 이 동물을 의원님⁠, 피정학 의원님이라고 불렀다⁠. 정학은 손에 쥔 것이 없었다⁠. 김밥도 토스트도 없이⁠, 입 앞에 하얀 깔때기 하나를 들고 있었다⁠.

검은 눈 하나 달린 상자를 어깨에 멘 사람들이 줄지어 정학을 겨눴다⁠. 큰 동물들이 한 줄로 서서 같은 곳을 보는 일은 매가 뜰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구슬은 목을 늘이고 하늘을 보았다⁠. 매는 없었다⁠.

“⁠여러분⁠!⁠”

깔때기에서 끽 하는 쇳소리가 터졌다⁠. 느티나무에 있던 무리 절반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다시 앉았다⁠. 정학이 깔때기를 입에서 조금 뗐다⁠.

“⁠광장은 시민의 것입니다⁠. 비둘기 밥상이 아닙니다⁠!⁠”

구슬은 밥이라는 소리를 알았다⁠. 할아버지가 “⁠밥 먹자⁠” 할 때의 소리와 비슷했다⁠. 큰 동물이 밥⁠, 밥 하고 외치는데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구슬은 고개를 갸웃하며 갈색 구두 쪽으로 두 걸음 걸었다⁠.

*

정학 옆으로 고무 장화가 와서 멈췄다⁠. 장화 코에 하얗게 마른 얼룩이 겹겹이 앉아 있었다⁠. 구슬은 얼룩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날아오를 때 몸을 가볍게 하려고 떨어뜨리는 것⁠, 무리가 앉았다 간 자리마다 남는 것이었다⁠. 장화의 주인은 정학의 지역구 시장에서 왔다는 상인회장이었다⁠. 상인회장이 누런 천 조각을 머리 위로 들었다⁠. 천은 군데군데 구멍이 나서 바람에 너덜거렸다⁠.

“⁠이게 우리 시장 차양이에요⁠. 새로 단 지 석 달 만에 이래요⁠. 생선 위로 떨어지고⁠, 손님 국수 그릇에 떨어지고⁠, 위생 점검 나오면 벌점이에요⁠. 옆집 생선 가게 양반은 차양 닦다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지금 다리에 깁스했어요⁠. 손님들이 우리 시장 들어오면 하늘부터 봐요⁠. 하늘부터⁠!⁠”

상인회장의 목소리는 확성기 없이도 깔때기만큼 컸다⁠. 카메라를 든 사람 하나가 손을 들었다⁠.

“⁠외국 몇몇 도시는 번식을 줄이는 모이를 쓴다던데⁠, 그런 방법은 검토 안 하셨습니까⁠?⁠”

“⁠그건 몇 년 걸립니다⁠. 우리 시장은 올여름에 문을 닫습니다⁠.⁠”

정학이 깔때기를 다시 입에 댔다⁠. 구두 앞코가 한 번 들렸다 내려갔다⁠. 정학은 말을 세게 할 때마다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구슬은 짝이 아침마다 하는 짓을 떠올렸다⁠. 목털이 있었으면 부풀렸을 것이다⁠.

짝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짝이 느티나무에서 내려와 갈색 구두 앞에 앉더니 목을 부풀리고 빙빙 돌기 시작했다⁠. 반들반들한 구두 코에 푸른 목털이 비쳤다⁠. 짝은 구두 속의 수비둘기에게 구우우 하고 길게 울었다⁠. 정학은 말을 이으면서 오른발을 슬그머니 들어 뒤로 뺐다⁠. 구두 속의 수비둘기가 물러나자 짝은 이긴 줄 알고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카메라 하나가 정학의 얼굴 대신 발밑을 찍었다⁠.

“⁠법이 통과되면 광장과 시장에서 먹이를 주는 행위에 과태료를 물리고⁠, 전문 업체가 포획을 맡습니다⁠. 다음 달 본회의에서 표결합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벤치에서 쌀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가 쌀 자루를 거꾸로 들고 흔들고 있었다⁠. 한 번 뿌린 아침밥 위에 또 뿌리는 일은 처음이었다⁠. 무리가 느티나무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 현수막 밑까지 쌀을 쫓아 걸었다⁠. 정학의 갈색 구두 둘레가 순식간에 잿빛으로 덮였다⁠. 정학이 현수막 뒤로 몸을 숨겼다⁠. 보좌관은 재채기를 했다⁠.

“⁠어르신⁠! 지금 기자회견 중입니다⁠!⁠”

정학이 현수막 끝을 붙잡은 채 벤치로 걸어갔다⁠. 무리를 피해 까치발로 걸었다⁠. 할아버지는 쌀 자루를 무릎에 얹고 고개도 안 들었다⁠.

“⁠나도 아침 먹이는 중이여⁠.⁠”

“⁠이 법 통과되면 여기서 이러시는 거 과태료예요⁠.⁠”

“⁠얼마⁠?⁠”

“⁠…그건 시행령에서 정하는데요⁠.⁠”

“⁠모르는구먼⁠. 의원 양반이 낸 법을⁠.⁠”

카메라 줄에서 웃음이 터졌다⁠. 정학의 귀가 붉어졌다⁠. 정학은 벤치 앞에 쪼그려 앉아 할아버지와 눈높이를 맞췄다⁠. 구슬이 보기에 큰 동물이 몸을 낮추는 것은 먹이를 줄 때거나 잡으려 할 때였다⁠.

“⁠어르신 쌀 때문에 비둘기가 늘어요⁠. 늘어나면 시장으로 가고요⁠. 시장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장사를 접습니다⁠.⁠”

“⁠이 쌀이 어디서 온 쌀인 줄이나 알고 하는 소리여⁠?⁠”

할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고무 장화를 보았다⁠. 장화가 한 걸음 다가왔다가 멈췄다⁠. 상인회장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작아졌다⁠.

“⁠형님⁠, 여기서 이러지 마요⁠.⁠”

“⁠아시는 분이세요⁠?⁠”

“⁠…시장에 오래 계셨던 분이에요⁠.⁠”

“⁠오래 있다 쫓겨났지⁠.⁠”

할아버지가 쌀을 한 줌 더 뿌렸다⁠. 쌀알 몇 개가 갈색 구두 코에 튀었다⁠.

*

구슬은 쌀을 쫓다가 갈색 구두 앞에 닿았다⁠. 쌀보다 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끈 끝이 바람에 들썩였다⁠. 지렁이였다⁠. 구슬은 부리로 끈 끝을 물고 힘껏 잡아당겼다⁠. 끈이 쭉 늘어나다 툭 걸리고⁠, 다시 당기자 위에서 큰 동물의 얼굴이 내려왔다⁠.

얼굴이 그렇게 가까이 온 것은 처음이었다⁠. 정학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입이 벌어졌다⁠.

“⁠으아악⁠!⁠”

정학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얀 깔때기가 손에서 빠져 돌바닥에 떨어졌고⁠, 떨어지면서 켜진 채로 끼이이익 울었다⁠. 외발이 분수 꼭대기에서 날개를 세게 맞부딪쳤다⁠. 딱⁠. 위험하니 모두 뜨라는 소리였다⁠. 광장의 무리가 한 몸처럼 떠올랐다⁠. 수백 개의 날개가 동시에 공기를 쳤고⁠, 떠오르는 몸들은 가벼워지려고 저마다 떨어뜨릴 것을 떨어뜨렸다⁠.

현수막에 하얀 점이 수십 개 찍혔다⁠. 보좌관의 머리에 하나⁠, 상인회장의 장화에 또 하나⁠. 정학의 오른쪽 어깨에 큰 것이 하나 떨어졌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상자를 들어 올려 위를 찍고⁠, 다시 정학의 어깨를 찍었다⁠.

구슬은 가로등 꼭대기에 올라앉아 숨을 골랐다⁠. 끈은 놓쳤다⁠. 아래에서 정학이 천천히 일어났다⁠. 바지 엉덩이를 털고⁠, 어깨를 내려다보고⁠, 떨어진 깔때기를 주웠다⁠. 보좌관이 휴지를 내밀었지만 정학은 받지 않았다⁠. 정학은 어깨에 하얀 것을 단 채 카메라 앞으로 다시 걸어가 깔때기를 입에 댔다⁠.

“⁠보셨습니까⁠. 이게 시장 상인들이 날마다 당하는 일입니다⁠!⁠”

이번에는 웃음이 아니라 박수가 나왔다⁠. 상인회장이 장화를 탁탁 구르며 제일 크게 쳤다⁠. 구슬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리를 놀라게 한 동물이 박수를 받았다⁠.

*

회견이 끝나자 검은 구두들이 천을 걷었다⁠. 정학은 길가에 선 검은 차 앞에서 보좌관과 말했다⁠. 구슬은 가로등에서 차 지붕 위의 가로등으로 옮겨 앉았다⁠. 정학의 어깨에서 하얀 것이 반쯤 말라 있었다⁠.

“⁠업체 사장님한테 전화해⁠. 이 광장에서부터 그물 칠 자리 재 보시라고⁠.⁠”

“⁠표결도 안 했는데요⁠, 의원님⁠.⁠”

“⁠표결 전에 그림이 있어야 표결이 돼⁠. 오늘 그림 봤잖아⁠.⁠”

보좌관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재채기를 참았다⁠.

“⁠벌써 퍼지고 있어요⁠. 의원님 엉덩방아요⁠. 조회수가 계속 올라가요⁠.⁠”

“⁠엉덩방아 말고 어깨를 퍼뜨려⁠.⁠”

정학이 차 문을 열다 말고 광장을 돌아보았다⁠. 분수 옆 벤치에서 할아버지가 빈 쌀 자루를 접고 있었다⁠. 할아버지 발밑에서 무리가 마지막 쌀알을 줍고 있었다⁠. 정학은 한참 벤치를 보다가 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혔다⁠.

구슬은 무리의 적을 안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매⁠, 벤치 밑에서 엉덩이를 흔드는 고양이⁠, 발을 먹는 실⁠. 오늘 하나가 늘었다⁠. 모이를 안 흘리면서 밥⁠, 밥 하고 외치는 큰 동물⁠. 그물이라는 소리를 할 때 갈색 구두 앞코가 광장 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구슬은 두드린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아침 쌀이 떨어지던 자리였다⁠.

검은 차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외발이 분수 꼭대기에서 끄르륵⁠, 돌아오라고 울었다⁠. 짝이 느티나무 가지에서 목을 길게 뺐다⁠. 구슬은 붉은 발로 가로등 머리를 한 번 박차고 몸을 던졌다⁠. 날개 끝으로 공기를 걸어 잡고⁠, 차 지붕 위 한 뼘 높이로⁠, 길을 건너 의원회관 쪽으로 날았다⁠. 모이를 안 흘리는 신발을 따라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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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면은세개2026.10.31· 1화

    할아버지 구구 소리가 늘 넷이라 엉망이라는 데서 빵 터졌어요. 비둘기 말이 있는 거예요?

    • 문들레작가2026.10.31

      짧은 구구 셋이 밥 있다는 소리라고 정해 두었어요. 할아버지는 끝까지 넷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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