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47자)

협정 초안

피켓팅 상대가 마왕? · 소하린

6월 9일 오후 두 시⁠, 서울시청 별관 7층 회의실⁠. 탁자 위에 생수병 여섯 개와 회의 자료 여섯 부가 놓여 있었다⁠. 자료 표지에 「⁠안건 — 잠실 공연장 지하 3층 비상구 너머 특수 공간 관련 공연 안전 대책(⁠가칭⁠)⁠」이라고 적혀 있었다⁠. 특수 공간이라는 말 옆에 누군가 볼펜으로 물음표를 그렸다가 지운 자국이 있었다⁠.

공연안전과 주무관은 서른 중반으로 보였다⁠. 넥타이가 왼쪽으로 비뚤어져 있었다⁠. 회의 내내 고쳐 매다가 회의가 끝날 때까지 비뚤어진 채였다⁠. 주무관 옆에 잠실 공연장 관리팀장이 앉았다⁠. 관리팀장은 지하 3층 하역장 열쇠 꾸러미를 탁자에 올려놓고 계속 만지작거렸다⁠.

맞은편에 구문팔이 앉았다⁠. 구문팔 옆에 바르덴이 앉았다⁠. 바르덴은 비니를 쓰지 않고 왔다⁠. 회의실 문을 들어오면서 뿔이 문틀에 살짝 긁혔다⁠. 도르마는 바르덴 옆에서 지팡이를 탁자에 기대 두고 떡볶이 포장 용기를 열었다⁠. 회의실에 고추장 냄새가 퍼졌다⁠. 주무관이 도르마를 보고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나는 탁자 끝 「⁠팬 대표⁠」 명패 앞에 앉았다⁠. 명패는 코팅된 종이를 반으로 접은 것이었다⁠. 내 이름 석 자가 굵게 박혀 있었다⁠. 이름 앞에 직함이 없어서 나는 조금 우스운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오픈채팅방에는 회의 들어가기 전에 공지를 하나 올려 두었다⁠. 「⁠방장 시청 다녀옵니다⁠. 마왕님이랑 한 회의실에 있음⁠. 무사히 돌아오면 광주 응원법 최종본 올림⁠」 답글이 삼백 개 달렸다⁠. 대부분 「⁠무사히 돌아오세요⁠」였고⁠, 몇은 「⁠마왕님 사인 받아 와 주세요⁠」였다⁠.

“⁠시작하겠습니다⁠.⁠” 주무관이 넥타이를 고쳤다⁠. “⁠일단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저 비상구 너머에⁠, 그러니까⁠, 다른 나라가 있다는 거죠⁠?⁠”

“⁠나라가 아니라 세계요⁠.⁠” 바르덴이 말했다⁠. “⁠짐은 그 세계의 왕이오⁠.⁠”

주무관이 볼펜으로 자료에 무언가를 적었다⁠. 「⁠왕 — 본인 진술⁠」

“⁠관리팀장님⁠, 비상구는 용접해서 막을 수 있습니까⁠?⁠”

“⁠해 봤어요⁠.⁠” 관리팀장이 열쇠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지난주 수요일에 용접했어요⁠. 금요일 밤 공연 앙코르 때 용접 자리가 녹아서 떨어졌어요⁠. 바닥에 쇳물 자국 아직 있어요⁠.⁠”

“⁠문은 노래가 여오⁠.⁠” 바르덴이 말했다⁠. “⁠인간계에서 노래가 울리는 동안 문은 막을 수 없소⁠. 짐도 막지 못하오⁠.⁠”

“⁠그럼 공연을 안 하면⁠…⁠”

구문팔이 의자에서 반쯤 일어났다⁠.

“⁠주무관님⁠, 우리 애들 투어 중이에요⁠. 광주 남았어요⁠. 다섯 해 만에 처음 하는 투어예요⁠. 공연을 안 하다니요⁠.⁠”

“⁠대표님⁠, 부산에서 붉은 후드 단체가 이백 명 들어왔습니다⁠. 그분들 다 저쪽 세계분들이라면서요⁠. 대구에서도 백오십 명⁠. 무기를 공연장 물품 보관소에 맡긴 분들이 있다고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삼지창이요⁠. 사고 나면 누가 책임집니까⁠?⁠”

“⁠보관소에 맡겼으니 사고는 안 났잖아요⁠.⁠”

“⁠다음엔 안 맡기면요⁠?⁠”

주무관과 구문팔이 동시에 바르덴을 보았다⁠. 바르덴이 자료를 덮었다⁠.

“⁠짐의 백성은 맡기오⁠. 붉은발톱은 짐의 말을 듣지 않소⁠.⁠”

*

회의는 한 시간 동안 같은 자리를 돌았다⁠. 주무관은 문을 막고 싶어 했고⁠, 관리팀장은 이미 막아 봤고⁠, 구문팔은 공연을 해야 했고⁠, 바르덴은 축제를 열어야 했다⁠. 도르마는 떡볶이를 다 먹고 용기 바닥의 국물을 젓가락으로 찍어 먹었다⁠. 오후 세 시⁠, 주무관이 자료 마지막 장을 넘겼다⁠.

「⁠인간계·마계 공연 협정(⁠안⁠)⁠」

“⁠법적 효력이 있는 문서는 아닙니다⁠. 아직은요⁠. 저쪽 세계와 무슨 협정을 맺는 법이 우리나라에 없습니다⁠. 그래도 일단 서로 지킬 것을 적어 두자는 겁니다⁠.⁠”

초안은 한 장이었다⁠. 마족 관객은 공연장 입장 전에 무기를 맡긴다⁠. 비상구 앞에 공연장 직원을 둔다⁠. 인간 출연자가 마계 무대에 서는 경우 마왕이 안전을 책임진다⁠. 마지막 줄을 읽고 나는 손을 들었다⁠. 명패 앞에서 손을 드니 내 손이 학교 교실에서처럼 높이 올라갔다⁠.

“⁠표 얘기가 없어요⁠.⁠”

다섯이 나를 보았다⁠. 도르마는 젓가락을 입에 문 채였다⁠.

“⁠부산이랑 대구에서 붉은 후드 단체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아세요⁠? 매크로로 표를 쓸어 가서요⁠. 표마켓에 열 배 값으로 올려 놓고⁠, 안 팔린 자리는 전사를 앉혔어요⁠. 무기 맡기는 것도 중요한데⁠, 표가 먼저예요⁠. 표를 쥐면 자리를 쥐고⁠, 자리를 쥐면 소리를 쥐어요⁠.⁠”

주무관이 볼펜을 고쳐 쥐었다⁠.

“⁠구체적으로요⁠?⁠”

“⁠한 사람 한 장⁠. 정가⁠. 매크로 금지⁠, 리셀 금지⁠. 마족한테도 똑같이요⁠. 표마켓 같은 데 올라온 마족 표는 무효로 하고요⁠.⁠”

“⁠한 장은 너무하지⁠.⁠” 구문팔이 말했다⁠. “⁠보통 두 장은 사게 해 줘⁠. 친구랑 같이 오게⁠. 그리고 리셀 막으면 1차 판매가 안 빠져요⁠, 학생⁠. 사람들이 되팔 수 있으니까 일단 사 두는 거야⁠. 업계가 다 그렇게 돌아가⁠.⁠”

“⁠그렇게 돌아가서 3층 사람들이 백삼십만 원짜리 표를 봐야 했어요⁠.⁠”

“⁠그건 붉은발톱인가 그 사람이 나쁜 거고⁠…⁠”

“⁠대표님이 두 장 하자고 해서 매크로가 두 배로 쓸어 갔잖아요⁠.⁠”

구문팔이 입을 다물었다⁠. 주무관이 볼펜 끝으로 자료를 톡톡 쳤다⁠. 공연 암표 처벌법 개정안이 지난달 통과됐다고⁠, 시행은 내년이지만 협정에 먼저 넣으면 근거가 된다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바르덴이 탁자에 두 손을 얹었다⁠.

“⁠한 사람 한 장⁠. 짐은 받겠소⁠.⁠”

“⁠투자자님⁠!⁠”

“⁠대표⁠, 짐이 1열 7번을 잡은 것은 한 장이었소⁠. 한 장으로 충분했소⁠.⁠”

바르덴이 나를 보았다⁠. 회의실 형광등이 붉은 눈에 비쳤다⁠.

“⁠다만 그대도 알아 두시오⁠. 이 조항은 겨루기 결과와 상관없이 짐이 지키겠다는 것이오⁠. 그대가 이기든 짐이 이기든⁠.⁠”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 조항은 제가 졌을 때 쓰는 거예요⁠.⁠” 나는 숨을 한 번 쉬었다⁠. “⁠저는 안 질 거고요⁠.⁠”

도르마가 「⁠쯧⁠」 하고 웃었다⁠. 주무관이 초안 맨 아래에 볼펜으로 한 줄을 적었다⁠. 「⁠표 — 1인 1매⁠, 정가⁠, 매크로·되팔기 금지(⁠인간·마족 동일⁠)⁠」 회의실 창밖으로 시청 앞 잔디 광장이 보였다⁠. 잔디 위에서 어린이집 아이들이 줄을 맞춰 걸어가고 있었다⁠. 선생님이 맨 앞에서 노란 깃발을 들었다⁠.

“⁠서명은 언제 해요⁠?⁠” 내가 물었다⁠.

“⁠저쪽 세계 쪽 서명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주무관이 바르덴을 보았다⁠.

“⁠일곱 가문 가주가 다 해야 하오⁠. 붉은발톱은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럼 협정이 안 되는 거잖아요⁠.⁠”

“⁠붉은 달 축제 밤에 옛 법이 서면 하게 되오⁠. 일곱 가문의 뿔이 한 노래에 울면⁠, 그해에는 칼보다 법이 무겁소⁠.⁠”

*

떼창 판까지 열흘이 남아 있었다⁠. 나는 오픈채팅방에 영상 하나를 올렸다⁠. 지하철 2호선 잠실역 승강장에서 찍은 영상이었다⁠.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 사이로 3층 모래알 다섯 명이 작게 「⁠한 번 더⁠」를 외쳤다⁠. 외치고 나서 서로 놀라 웃었다⁠. 열다섯 초짜리였다⁠.

「⁠한 번 더 챌린지⁠. 어디서든 「⁠한 번 더⁠」 한 번⁠. 광주에서 같이 외쳐요⁠.⁠」

이틀 만에 영상이 오백 개 올라왔다⁠. 편의점 계산대 뒤에서 알바생이 외쳤다⁠. 대학 도서관 열람실 앞에서 학생 셋이 숨을 참았다가 속삭였다⁠. 재수 학원 옥상에서 스무 살들이 외쳤다⁠. 세탁소 다리미 김 사이로 엄마가 외쳤다⁠. 엄마의 「⁠한 번 더⁠」는 박자가 하나 늦었다⁠. 숏폼 플랫폼의 챌린지 순위에서 「⁠한 번 더⁠」가 사흘째에 열두 번째⁠, 닷새째에 세 번째로 올라갔다⁠. 조회수 합이 백만을 넘었다⁠.

엿새째 되던 날 다른 영상 하나가 순위 첫 줄로 올라왔다⁠. 어두운 하역장에서 검은 후드를 쓴 스무 명이 한 줄로 서 있었다⁠. 굵은 쇠뿔⁠, 은빛 비늘⁠, 검은 깃털⁠, 날개 무늬가 그려진 후드⁠. 스무 명이 숨을 참았다⁠. 하역장 형광등이 지지직 떨었다⁠. 그리고 「⁠한 번 더⁠」가 터졌다⁠. 사람 목소리보다 한 옥타브 낮은⁠, 쇳소리 섞인 화음이었다⁠. 영상 끝에 비니를 쓴 바르덴이 카메라를 향해 모래봉을 흔들었다⁠.

「⁠마족 코스프레 단체 떼창 퀄 미쳤다⁠」

「⁠저음 무엇 이거 진짜 사람 목소리임⁠?⁠?⁠」

「⁠광주 막공에 이 단체 온대요 3층 모래알이랑 붙는대요⁠」

「⁠붙는다는 게 뭔데 무서움⁠」

「⁠1열 마왕님 계정 맞나요⁠?⁠? 우리 3층 방장님이랑 라이벌이라던데⁠」

댓글 수는 내 영상보다 많았다⁠.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작업실 열압착기 앞에 앉았다⁠. 연두가 두고 간 기계였다⁠. 광주용 슬로건을 내 손으로 찍어 보는 중이었다⁠. 아크릴 판 위에 「⁠한 번 더⁠」 글자를 올리고 손잡이를 눌렀다⁠. 쉭⁠. 열까지 세고 손잡이를 올렸다⁠. 글자가 왼쪽 위로 비뚤게 기울어 붙어 있었다⁠. 「⁠한 번 더⁠」를 외치다 넘어지는 사람의 글씨였다⁠. 다시 찍었다⁠. 이번엔 기포가 생겼다⁠. 열두 장째에 겨우 반듯한 것이 나왔다⁠. 손바닥에 열압착기 손잡이 자국이 빨갛게 남았다⁠.

나는 반듯한 한 장과 비뚤어진 열한 장을 바닥에 늘어놓고 사진을 찍었다⁠. 누구에게 보낼지 한참 고민하다가 연두에게 보냈다⁠. 말은 붙이지 않았다⁠. 사진만 보냈다⁠. 답은 십 분 뒤에 왔다⁠.

「⁠십 초 아니고 팔 초⁠. 판을 먼저 데워⁠. 그래야 기포 안 생겨⁠」

이어서 사진 한 장이 왔다⁠. 성수동 작업실 창가에 회색 키링이 줄지어 말라 가고 있었다⁠. 「⁠1열 마왕⁠」이 굵은 회색 뿔을 달고 있었다⁠.

「⁠쇠뿔 가문 색은 회색이래⁠. 회색 키링 처음 만들어 봄⁠. 회색이 제일 어려워⁠. 조금만 잘못 섞어도 쥐색 돼⁠」

「⁠쥐색 마왕 귀엽겠다⁠」

「⁠귀여우면 안 돼⁠. 쇠뿔 가문 할머니들 자존심 세대⁠」

나는 웃었다⁠. 웃고 나서 화면을 오래 보았다⁠. 연두는 다음 메시지를 쓰다 지웠다⁠. 「⁠입력 중⁠」 표시가 세 번 떴다가 사라졌다⁠. 마지막에 온 것은 짧았다⁠.

「⁠광주 가⁠?⁠」

「⁠응⁠. 너는⁠?⁠」

「⁠나는 일⁠. 굿즈 부스⁠.⁠」

같은 공연장에 둘 다 가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같이 가지 않았다⁠.

*

광주 공연 사흘 전 밤⁠, 나는 잠실 하역장에서 바르덴과 도르마를 만났다⁠. 천장 너머에서는 어느 밴드의 공연이 한창이었다⁠. 기타 소리가 쇳물처럼 내려왔다⁠.

“⁠광주에는 네 가문이 가오⁠.⁠” 바르덴이 말했다⁠. “⁠검은깃⁠, 은비늘⁠, 쇠뿔⁠, 밤나비⁠. 백 명이오⁠.⁠”

“⁠일곱 중에 넷이요⁠?⁠”

“⁠안개꼬리와 돌이빨은 아직 망설이오⁠. 붉은발톱은 사백 자리를 쥐었소⁠.⁠”

도르마가 지팡이로 바닥을 짚었다⁠. 방울이 짤랑 울렸다⁠. 도르마는 평소보다 오래 말이 없었다⁠.

“⁠쇠뿔 가문 아이들이 온다⁠. 스무 명⁠. 내 손녀의 손녀들이다⁠. 칼 대신 모래봉을 들고 온다⁠.⁠” 도르마가 부러진 뿔 밑동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판정할 때 내 가문 편을 들지 않을 자신이 없다⁠. 쯧⁠.⁠”

나는 도르마를 보았다⁠. 육백 년 산 재상이 처음으로 자기 뿔을 믿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천장 너머에서 기타가 길게 울렸다⁠. 녹색 철문 틈으로 붉은빛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그래도 판정해 주세요⁠. 뿔은 거짓말 못 한다면서요⁠.⁠”

“⁠뿔은 못 한다⁠. 늙은이 마음이 문제지⁠.⁠”

“⁠마음은 뿔이 우는 다음에 오잖아요⁠.⁠”

도르마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쭈글쭈글한 눈가가 가늘어졌다⁠.

“⁠인간 계집애가 마계 속담을 어디서 배웠냐⁠?⁠”

“⁠방금 지어냈어요⁠.⁠”

“⁠쯧⁠.⁠” 도르마가 지팡이를 짚고 철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광주에서 보자⁠. 공정하게 듣겠다⁠. 늙은이 뿔이 울면 원망하지 마라⁠.⁠”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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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채온2026.11.01· 9화

    시청 회의 자료에 「특수 공간」 옆 물음표를 그렸다 지운 자국, 이런 장면 너무 좋아요.

    • 소하린작가2026.11.01

      공무원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던 거죠. 그 회의실에 마왕도 앉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