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51자)

계약금

피켓팅 상대가 마왕? · 소하린

“⁠다치면요⁠?⁠”

내 목소리가 성벽 위에서 갈라졌다⁠. 우담은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평원의 불빛이 우담의 얼굴 한쪽을 붉게 칠했다가 사라졌다⁠.

“⁠다섯 해 동안 여기 오면서 한 번도 안 다쳤어요⁠.⁠”

“⁠여기 성 안이잖아요⁠. 축제 무대는 평원에 세운다면서요⁠. 저 불빛 있는 데요⁠. 일곱 가문이 다 온대요⁠. 붉은발톱 이천 명도요⁠.⁠”

“⁠알아요⁠.⁠”

“⁠알면서 왜요⁠?⁠”

“⁠무서워서요⁠.⁠”

우담이 웃었다⁠. 웃는데 입꼬리만 올라갔다⁠.

“⁠다섯 해 전에 저 계단 내려올 때⁠, 무서워서 노래했다고 했잖아요⁠. 지금도 똑같아요⁠. 무서우니까 노래하고 싶어요⁠. 은비늘 아이들 마을 불탔다는 얘기 듣고 이틀 동안 연습실에서 노래만 불렀어요⁠. 매니저 형이 목 상한다고 마이크를 뺏어 갔어요⁠.⁠”

“⁠그럼 연습실에서 부르세요⁠. 잠실에서 부르세요⁠. 여기 말고요⁠.⁠”

나는 성벽 돌을 손바닥으로 쳤다⁠. 손바닥이 얼얼했다⁠. 우담이 성벽 돌에 손바닥을 얹은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색 수건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팬이 제 무대를 정해요⁠?⁠”

나는 숨이 막혔다⁠. 다섯 해 동안 들어 본 우담의 목소리 가운데 가장 조용했다⁠. 화를 내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아팠다⁠.

“⁠팬이 다섯 해 동안 표 사서 무대를 만들었어요⁠. 3층 끝자리 사서⁠, 앨범 열 장씩 사서⁠, 생일마다 떡 맞춰서요⁠. 우담 씨가 서는 무대는 다 그렇게 생긴 거예요⁠.⁠”

“⁠알아요⁠. 그래서 더 서고 싶어요⁠. 받은 거 어디라도 돌려주고 싶어서요⁠.⁠”

“⁠돌려주는 데가 왜 전쟁터예요⁠.⁠”

우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모자를 벗어 손에 쥐었다⁠. 땀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붙어 있었다⁠. 바르덴은 성벽 끝에서 우리를 등지고 평원만 보고 있었다⁠. 마왕이 일부러 귀를 막고 있는 뒷모습이었다⁠. 뿔은 조용했다⁠.

“⁠기획사는 몰라요⁠. 대표님은 투자자님이 해외 축제 연결해 주는 분인 줄 알아요⁠. 멤버 형들은 반쯤 알아요⁠. 제가 가끔 이상한 데 다녀온다는 정도만요⁠.⁠” 우담이 모자를 다시 썼다⁠. “⁠겨루기 하시는 거 알아요⁠. 투자자님이 말해 줬어요⁠.⁠”

“⁠안 멈춰요⁠. 겨루기는⁠.⁠”

“⁠네⁠. 안 멈추셔도 돼요⁠.⁠” 우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응원할게요⁠. 두 분 다요⁠.⁠”

나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우담도 웃었다⁠. 이번에는 눈까지 웃었다⁠. 평원에서 쇳소리가 또 왔다⁠. 셋을 세기 전이었다⁠.

*

5월 30일 새벽 다섯 시⁠, 성내동 반지하⁠. 철문을 넘어 돌아온 내 운동화 밑창에 붉은 흙이 묻어 있었다⁠. 작업실 문을 열자 연두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밤을 새운 얼굴이었다⁠. 책상 위에 서류 봉투가 있었다⁠. 검은 밀랍 도장이 깨져 있었다⁠.

연두가 휴대전화를 내 앞으로 밀었다⁠. 은행 앱이었다⁠.

「⁠입금 40⁠,000⁠,000원 · 시계탑엔터테인먼트(⁠흑요성⁠)⁠」

“⁠금화를 대표님이 바꿔서 보냈대⁠. 세금도 떼고⁠.⁠” 연두가 말했다⁠. “⁠이름 썼어⁠. 어젯밤에⁠.⁠”

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방 안에서 모래봉이 굴렀다⁠. 연두는 내 얼굴을 보지 않고 열압착기의 빨간 대기등을 보았다⁠.

“⁠월세 석 달 냈어⁠. 넉 달 치 미리 냈어⁠. 집주인이 처음으로 웃는 이모티콘 보냈어⁠.⁠”

“⁠연두야⁠.⁠”

“⁠엄마 병원비도 냈어⁠. 엄마가 뭐 하는 회사냐고 물어서 굿즈 회사라고 했어⁠. 틀린 말 아니잖아⁠.⁠”

“⁠그 키링 달고 마족들이 축제에 와⁠. 우리 애들 서는 축제에⁠.⁠”

“⁠우담이 가고 싶대며⁠. 네가 메시지로 보냈잖아⁠. 새벽 세 시에⁠. 제가 먼저 부탁했어요⁠, 라고⁠.⁠”

연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갰다⁠.

“⁠우담이 가고 싶은 무대를 왜 네가 막아⁠?⁠”

“⁠위험하니까⁠.⁠”

“⁠위험한 거 우담도 알잖아⁠. 다 알고 가겠다는 거잖아⁠. 그럼 그건 우담 일이지 네 일이 아니야⁠.⁠”

“⁠우담 일이면 나는 가만있어야 돼⁠?⁠”

“⁠가만있으라는 게 아니라⁠.⁠” 연두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너 지금 우담 지키는 거야⁠, 네 다섯 해 지키는 거야⁠?⁠”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열압착기 대기등이 지지직 소리를 냈다⁠. 냉장고 모터가 웅 돌았다가 멎었다⁠. 나는 연두를 보았다⁠. 연두도 나를 보았다⁠. 다섯 해 동안 옆자리에서 손가락을 꺾던 연두였다⁠.

“⁠너는 사천만 원 받고 마왕 편 된 거고⁠.⁠”

말이 먼저 나갔다⁠. 연두의 얼굴이 하얘졌다가 빨개졌다⁠.

“⁠너는 리셀도 했잖아⁠.⁠”

연두가 말했다⁠. 크게 말하지 않았다⁠. 작게 말해서 더 크게 들렸다⁠.

“⁠그때 등록금 모자랐지⁠. 돈이 필요했지⁠. 나 그때 너 욕 안 했어⁠. 지금도 안 해⁠. 근데 나도 지금 필요해⁠. 나는 남의 표 판 것도 아니고 내 손으로 만든 거 파는 거야⁠. 처음으로⁠, 내 손으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연두는 바닥의 아크릴 판 더미를 하나씩 상자에 넣기 시작했다⁠. 손이 빨랐다⁠. 레이저 커팅기 전원을 뽑았다⁠. 상자 두 개가 금방 찼다⁠.

“⁠마왕님이 성수동에 작업실 잡아 줬어⁠. 기계도 새로 넣어 줬어⁠. 나 거기로 가⁠.⁠”

“⁠여기 네 작업실이잖아⁠.⁠”

“⁠여기는 계약 끝났어⁠. 집주인한테 6월 말에 비운다고 했어⁠. 어차피 비워야 했어⁠.⁠”

연두는 상자 테이프를 길게 뜯었다⁠. 찌익⁠, 찌익⁠. 테이프 소리가 반지하 벽에 부딪혔다⁠. 나는 문간에 서서 연두의 등을 보았다⁠. 연두가 상자를 다 붙이고 나서 열압착기 앞에서 손을 멈췄다⁠.

“⁠이건 두고 갈게⁠. 새 거 받았어⁠. 너 써⁠.⁠”

“⁠나 열압착기 쓸 줄 몰라⁠.⁠”

“⁠배워⁠. 손잡이 누르면 돼⁠. 십 초 세고 올리면 돼⁠.⁠”

*

6월 2일⁠, 나는 수원 엄마 세탁소에 갔다⁠. 콘서트 다녀오면 일을 돕기로 한 약속이 있었다⁠. 세탁소 안은 스팀 냄새와 비닐 냄새로 꽉 차 있었다⁠. 엄마는 다리미를 밀면서 내 얼굴을 한 번 보았다⁠.

“⁠왜 그래⁠. 표 못 잡았어⁠?⁠”

“⁠잡았어⁠. 친구랑 싸웠어⁠.⁠”

“⁠연두⁠?⁠”

나는 대답 대신 비닐 씌운 셔츠를 옷걸이에 걸었다⁠. 엄마가 다리미를 세워 두고 스팀 단추를 눌렀다⁠. 칙⁠. 하얀 김이 천장으로 올라갔다⁠.

“⁠엄마가 공장 그만두고 이거 차린다고 했을 때 할머니가 사흘을 안 주무셨어⁠. 다리미 열에 손 데면 어떡하냐고⁠. 세탁소 망하면 어떡하냐고⁠.⁠”

“⁠그래서⁠?⁠”

“⁠그래서 손 데었지⁠. 여기⁠, 여기⁠.⁠” 엄마가 손등의 하얀 자국 두 개를 보여 주었다⁠. “⁠망하지는 않았고⁠.⁠”

“⁠할머니가 말린 게 틀렸다는 거야⁠?⁠”

“⁠할머니가 말린 것도 맞고⁠, 엄마가 한 것도 맞아⁠. 그래서 할머니는 나중에 다리미 손잡이에 씌울 털실 덮개를 떠다 주셨어⁠.⁠” 엄마가 다리미 손잡이를 툭툭 쳤다⁠. 손잡이에 낡은 털실이 감겨 있었다⁠. “⁠말리는 사람은 끝까지 말려도 돼⁠. 그 대신 덮개는 떠다 줘야지⁠.⁠”

“⁠나 뜨개질 못 해⁠.⁠”

“⁠그러니까 배워⁠. 너 손가락 빠르잖아⁠. 표는 잘 잡으면서⁠.⁠”

나는 털실을 오래 보았다⁠. 연두가 떠오르고⁠, 우담이 떠올랐다⁠. 엄마는 다시 다리미를 밀기 시작했다⁠. 셔츠 등판의 주름이 한 줄씩 펴졌다⁠.

*

6월 3일⁠, 성수동⁠. 연두의 새 작업실은 구문팔의 기획사 건물 3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아직도 「⁠점검 중⁠」이었다⁠. 나는 연두의 상자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왜 들고 있는지 나도 몰랐다⁠. 아침에 연두가 「⁠짐이 많아⁠」라고 메시지를 보냈고⁠, 나는 답장 대신 성수동으로 왔다⁠. 연두는 내가 계단 아래에 나타났을 때 아무 말도 안 하고 상자 하나를 내 품에 안겼다⁠.

“⁠이거 무거워⁠.⁠”

“⁠덕질은 하체로 하는 거라며⁠.⁠”

“⁠그건 덕질 얘기고⁠.⁠”

“⁠이것도 덕질이야⁠. 마왕 덕질⁠.⁠”

3층 작업실은 넓었다⁠. 창이 컸고 볕이 들었다⁠. 반지하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볕이었다⁠. 새 레이저 커팅기 두 대와 열압착기 세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벽에는 「⁠1열 마왕⁠」 키링 도안이 크게 붙어 있었다⁠. 도안 옆에 마계 글씨로 무언가 적힌 종이가 있었다⁠. 바르덴이 붙인 것이라고 했다⁠. 일곱 가문의 깃발 무늬였다⁠. 가문마다 키링 색을 다르게 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구문팔이 작업실 문간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손에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

“⁠우리 굿즈 사장님⁠! 아⁠, 떡 학생도 왔네⁠. 커피 하나 더 사 올까⁠?⁠”

“⁠괜찮아요⁠.⁠”

“⁠투자자님이 키링 이만 개 주문했다며⁠? 우리 회사 창립 이래 최대 주문이야⁠. 우리 애들 앨범보다 많이 팔리게 생겼어⁠.⁠”

구문팔은 신이 나서 떠들다가 내 얼굴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커피 한 잔을 연두에게⁠, 한 잔을 내 손에 쥐여 주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통화를 했다⁠. 「⁠아니⁠, 김 실장님⁠, 이번 달은 진짜 드려요⁠. 굿즈가 대박이 났어요⁠…⁠」

연두가 상자를 다 풀었다⁠. 나는 할 일이 없었다⁠. 창가에 서서 커피를 마셨다⁠. 쓴맛이 혀에 오래 남았다⁠.

“⁠너 나 미워⁠?⁠” 연두가 등을 돌린 채 물었다⁠.

“⁠아니⁠.⁠”

“⁠나도 너 안 미워⁠.⁠” 연두가 새 열압착기 손잡이를 내렸다⁠. 쉭⁠. “⁠그래도 겨루기 굿즈 판 나오면 안 봐줄 거야⁠. 나 이제 돈 받고 하는 사람이야⁠.⁠”

“⁠나도 안 봐줘⁠.⁠”

“⁠너 손 엄청 느리잖아⁠.⁠”

“⁠알아⁠.⁠”

*

6월 5일 정오⁠, 흑요성 공식 굿즈가 열렸다⁠. 인간계에서는 연두상회 온라인 가게에 「⁠흑요성 공식 · 1열 마왕 키링⁠」이 올라왔다⁠. 삼 분 만에 품절이었다⁠. 모래알 광장 게시판이 키링 이야기로 덮였다⁠.

「⁠1열 마왕 키링 실화냐 볼 빨간 거 미쳤다⁠」

「⁠연두상회 사장님 원래 우담 키링 만드시던 분 아니에요⁠? 1열 마왕 공식 굿즈를 왜 연두상회가 함⁠」

「⁠연두상회 배신⁠?⁠」

「⁠아니 근데 너무 귀여움 배신이어도 삼⁠」

「⁠방장님 연두상회 사장님이랑 친구 아니세요⁠?⁠?⁠」

마지막 댓글은 내 오픈채팅방에도 올라왔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3층 모래알⁠」 방 인원은 이천팔백이었다⁠. 이천팔백 명이 연두를 알았다⁠. 연두가 3층 슬로건 삼백 장을 밤새 잘라 준 것을 알았다⁠.

같은 날 저녁 대구 공연에 나는 혼자 갔다⁠. 3층 끝자리였다⁠. 1층 맨 앞에 바르덴과 마족 응원단 스물이 있었다⁠. 검은깃과 은비늘에 쇠뿔 가문이 더해져 있었다⁠. 쇠뿔 마족들은 굵은 회색 뿔에 「⁠1열 마왕⁠」 키링을 매달고 있었다⁠. 뿔이 흔들릴 때마다 키링이 짤랑거렸다⁠. 1층 E구역에는 이번에도 붉은 후드들이 앉아 있었다⁠. 이백 자리가 아니라 백오십 자리였다⁠. 팔짱을 낀 채 앞만 보는 붉은 후드들 가운데⁠, 몇몇의 허리띠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쌍안경으로 당겨 보았다⁠. 볼 빨간 마왕 얼굴이었다⁠. 붉은 후드 하나가 옆 사람 눈치를 보며 키링을 허리띠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공연이 끝나고 오픈채팅방을 열었다⁠. 연두의 메시지가 개인 창에 와 있었다⁠.

「⁠이만 개 다 나갔대⁠. 마계에서⁠. 이만 개 더 해 달래⁠.⁠」

나는 답장 칸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내렸다⁠. 공연장 앞 광장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가방마다 「⁠1열 마왕⁠」이 매달려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서울시 공연안전과 주무관입니다⁠. 표나린 씨 맞으시죠⁠?⁠”

“⁠네⁠.⁠”

“⁠모래시계 팬 오픈채팅방 방장님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부산 공연 붉은 후드 단체 건하고⁠, 잠실 공연장 지하 비상구 건 때문에요⁠. 팬 대표로 회의에 좀 와 주실 수 있을까요⁠? 기획사 대표님하고⁠…⁠” 주무관이 잠깐 숨을 골랐다⁠. 목소리가 작아졌다⁠. “⁠뿔 달린 분도 오십니다⁠.⁠”

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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