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422자)

침묵 관객

피켓팅 상대가 마왕? · 소하린

5월 22일 아침 일곱 시 서울역⁠, 부산행 열차 5호차⁠.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았고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연두가 예매해 둔 자리였다⁠. 연두는 3층 모래알 부산 조 스무 명과 함께 7호차에 탔다⁠. 출발 전에 메시지 하나가 왔다⁠. 「⁠조원들이 슬로건 접는 법 알려 달래서⁠. 부산역에서 봐⁠.⁠」 나는 비어 있는 옆자리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대전을 지날 무렵 통로가 소란해졌다⁠. 승무원 하나가 특실 칸에서 걸어 나오며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4호차 손님 한 분이 창문을 여시려고 해서요⁠. 네⁠, 창문이 안 열린다고 말씀드렸는데 손으로 여시려고⁠…⁠” 나는 4호차 문 유리 너머를 보았다⁠. 검은 후드를 쓴 마족들이 창문에 손바닥을 붙이고 바깥 논밭을 구경하고 있었다⁠. 맨 앞에 바르덴이 앉아 있었다⁠. 바르덴 옆에 처음 보는 마족 넷이 은빛 비늘이 돋은 목덜미를 후드로 가리고 앉아 있었다⁠.

바르덴이 유리 너머의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못 본 척 5호차로 돌아왔다⁠. 휴대전화가 떨렸다⁠. 「⁠은비늘 가문 넷이 새로 왔소⁠. 불탄 마을 아이들의 형들이오⁠. 열차가 빨라서 놀라고 있소⁠.⁠」 나는 답장 대신 「⁠창문 열지 마세요⁠」라고 보냈다⁠. 「⁠이미 늦었소⁠. 하나가 손톱 자국을 냈소⁠.⁠」

*

부산 공연장 1층 앞 구역은 E와 F였다⁠. 공연 시작 삼십 분 전⁠, 3층 끝자리에서 내려다본 E와 F 구역이 붉었다⁠. 붉은 후드를 쓴 사람들이 이백 자리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다들 몸집이 컸고⁠, 다들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응원봉을 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주변 관객들이 슬금슬금 E와 F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1층 E구역 단체 뭐임⁠?⁠? 다 빨간 후드에 팔짱 끼고 있음⁠」

「⁠무섭다 진짜 무서워 아무도 말을 안 함⁠」

「⁠혹시 안티 단체 아님⁠?⁠」

오픈채팅방에 사진이 연달아 올라왔다⁠. 나는 방에 공지를 올렸다⁠. 「⁠1층 E·F는 보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해요⁠.⁠」 연두는 3층 반대편 L구역에 있었다⁠. 하늘색 슬로건 사이로 연두의 노란 머리끈이 보였다⁠.

공연이 시작됐다⁠. 첫 곡 전주에 공연장 전체가 일어났다⁠. E와 F 구역만 앉아 있었다⁠. 이백 명이 앉아 있는 자리는 무대 정면이었다⁠. 우담이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가 정면의 붉은 덩어리를 보았다⁠. 첫 소절이 반 박자 늦게 나왔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다섯 해 동안 들어 온 우담의 목소리였다⁠. 반 박자 늦은 것은 처음 들었다⁠.

“⁠우담⁠!⁠”

내가 소리쳤다⁠. 3층 모래알이 따라 외쳤다⁠. 이천 명이 넘는 목소리였다⁠. 2층이 따라 했다⁠. 함성이 무대까지 내려가 우담의 등을 밀었다⁠. 우담의 다음 소절은 박자에 맞았다⁠. 그래도 정면은 붉고 조용했다⁠. 노래와 노래 사이 짧은 정적마다 E와 F 구역의 침묵이 공연장 바닥에 깔렸다⁠. 박수 소리가 침묵 위에서 미끄러졌다⁠. 이백 명이 소리를 안 내는 것이 이천 명이 소리를 내는 것보다 크게 들렸다⁠.

1층 맨 앞 줄 가장자리에 바르덴이 있었다⁠. 바르덴과 검은깃·은비늘 마족 열넷이 붉은 덩어리를 바로 옆에 두고 모래봉을 흔들고 있었다⁠. 바르덴의 모래봉 흔드는 팔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었다⁠.

*

중간 영상이 나오는 동안 1층 통로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3층 난간 너머로 내려다보았다⁠. 바르덴이 E구역 통로에 서서 붉은 후드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후드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르덴보다 컸다⁠. 둘 사이의 공기가 일렁였다⁠. 경호원 셋이 통로로 뛰어갔다⁠.

나는 3층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1층 로비로 나오자 매점 앞 원탁에 가르쉬가 앉아 있었다⁠. 붉은 정장에 중절모⁠, 종이컵 커피⁠. 종이컵에 빨대를 꽂아 마시고 있었다⁠. 뿔이 중절모 안에 잘 들어가 있었다⁠. 가르쉬가 나를 보고 일어나 모자를 벗었다⁠.

“⁠표 아가씨⁠. 공연은 즐거우십니까⁠?⁠”

“⁠저 사람들 빼요⁠.⁠”

“⁠표를 산 손님들입니다⁠.⁠”

“⁠표 사서 소리를 막는 손님이요⁠?⁠”

“⁠소리를 내지 않는 것도 관람입니다⁠. 인간계 공연장 규칙을 다 읽어 보았습니다⁠. 팔짱을 끼지 말라는 조항은 없더군요⁠.⁠”

가르쉬가 의자를 빼 주었다⁠. 나는 앉지 않았다⁠. 로비 천장 스피커에서 중간 영상의 소리가 웅얼웅얼 새어 나왔다⁠. 멤버들이 바닷가에서 웃는 영상이었다⁠.

“⁠우담 첫 소절이 늦었어요⁠. 다섯 해 동안 한 번도 안 늦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앉혀 둔 겁니다⁠.⁠” 가르쉬가 빨대를 빼 종이컵 뚜껑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아가씨⁠, 우리는 같은 것을 원합니다⁠. 저 가수가 마계에 오지 않는 것⁠. 아가씨는 가수가 다칠까 봐⁠, 저는 가문이 굶을까 봐⁠. 이유가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 저를 미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같은 거 아니에요⁠.⁠”

“⁠어디가 다릅니까⁠?⁠”

나는 대답하려다 말이 막혔다⁠. 우담이 마계에 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나도 가르쉬도 같았다⁠. 가르쉬가 웃었다⁠. 정중하게⁠.

“⁠광주 떼창 판에서는 제 손님이 사백 자리입니다⁠. 아가씨 비밀은 그 전에 꺼낼까요⁠, 그 뒤에 꺼낼까요⁠?⁠”

“⁠마음대로 해요⁠.⁠”

“⁠그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가르쉬가 중절모를 썼다⁠. 로비 문이 열리고 경호원들이 바르덴을 데리고 나왔다⁠. 바르덴은 경호원들에게 정중하게 팔을 잡혀 있었다⁠. 경호원 하나가 무전기에 대고 “⁠아니요⁠, 싸움은 없었고요⁠, 서로 노려보기만⁠…⁠” 하고 보고했다⁠. 바르덴이 가르쉬를 보았다⁠. 가르쉬가 모자 챙에 손을 댔다⁠.

“⁠폐하⁠, 노려보는 것도 인간계에서는 퇴장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경호원들은 바르덴을 퇴장시키지 않았다⁠. 바르덴이 1열 표를 꺼내 보여 주자 경호원 하나가 「⁠아⁠, 1열 마왕님⁠」 하고 알아보았다⁠. 경호원은 모래알 광장 회원이었다⁠.

*

후반부 첫 곡은 「⁠마지막 모래⁠」였다⁠. 조명이 꺼지고 우담 혼자 무대 끝에 앉았다⁠. 피아노 전주가 흘렀다⁠. 3층 모래알은 이 노래에서는 응원법을 하지 않았다⁠. 숨소리도 줄였다⁠. 우담이 혼자 부르는 노래였다⁠.

우담은 정면의 붉은 덩어리를 보지 않았다⁠. 눈을 감고 불렀다⁠. 첫 소절이 공연장 천장까지 닿았다⁠. 박자는 정확했다⁠. 우담의 목소리가 2절로 넘어갈 때 1층 E구역에서 소리가 났다⁠.

웅⁠.

작은 소리였다⁠. 3층 끝에서도 들릴 만큼 공연장이 조용했다⁠. 붉은 후드들 사이에서 누군가 고개를 숙였다⁠. 주변의 붉은 후드들이 일제히 고개 숙인 전사를 돌아보았다⁠. 웅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고개 숙인 사람의 어깨가 떨렸다⁠. 후드가 뒤로 벗겨졌다⁠. 어린 얼굴이었다⁠. 짧게 자른 붉은 뿔 두 개가 웅웅 울고 있었다⁠. 젊은 전사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입술이 움직였다⁠. 우담의 후렴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우담이 눈을 떴다⁠. 정면을 보았다⁠. 붉은 덩어리 한가운데에 후드 벗은 얼굴 하나가 있었다⁠. 우담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후렴을 후드 벗은 얼굴을 보며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조명이 들어왔다⁠. 박수가 터지는 사이 E구역 통로에서 가르쉬가 걸어 들어왔다⁠. 가르쉬는 울고 있는 젊은 전사의 어깨를 잡았다⁠. 세게 잡지 않았다⁠. 일으켜 세워 통로로 데리고 나갔다⁠. 나머지 붉은 후드들은 팔짱을 낀 채 앞만 보았다⁠. 몇몇의 팔짱이 아까보다 느슨했다⁠.

오픈채팅방이 들썩거렸다⁠.

「⁠E구역 빨간 후드 한 명 울었음 ㅠㅠㅠㅠ⁠」

「⁠우담이 그 사람 보면서 끝까지 불렀어⁠」

「⁠안티 아니었나 봐 그냥 낯가리는 단체였나 봐⁠」

나는 3층 난간에 이마를 대고 숨을 골랐다⁠. 붉은발톱 가문의 뿔이 처음 울었다⁠. 일곱 가문 가운데 하나였다⁠.

*

공연이 끝나고 나는 퇴근길로 가는 길에 공연장 뒤편 비상계단을 지났다⁠. 계단 맨 아래 칸에 붉은 후드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마지막 모래⁠」에서 울었던 젊은 전사였다⁠. 가르쉬는 보이지 않았다⁠. 전사는 짧은 뿔을 두 손으로 감싸고 계단 콘크리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뿔 끝이 아직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가방에서 여분 모래봉을 꺼냈다⁠. 늘 하나를 더 챙겼다⁠. 배터리가 나갈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전사 앞에 쪼그려 앉아 모래봉을 내밀었다⁠. 전사가 모래봉을 보고 나를 보았다⁠. 노란 눈 가운데가 세로로 갈라져 있었다⁠. 가르쉬와 같은 눈이었다⁠.

“⁠옆구리 단추 누르면 켜져요⁠.⁠”

전사가 단추를 눌렀다⁠. 딸깍⁠. 모래봉이 노랗게 켜졌다⁠. 전사의 얼굴이 노래졌다⁠.

“⁠가주님한테 혼났어요⁠?⁠”

“⁠혼나지 않았다⁠. 가주님은 아무 말도 안 하셨다⁠. 그게 더 무섭다⁠.⁠” 전사의 한국말은 또박또박했다⁠. 외워서 하는 말투였다⁠. “⁠가주님은 나쁜 분이 아니다⁠. 우리 형 셋이 은비늘 창에 죽었다⁠. 가주님이 형들 아이를 다 거두셨다⁠.⁠”

“⁠근데 왜 울었어요⁠?⁠”

전사는 대답 대신 모래봉을 껐다 켰다⁠. 딸깍⁠, 딸깍⁠. 계단 위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내려왔다⁠. 전사가 벌떡 일어나 모래봉을 후드 속에 숨겼다⁠. 숨긴 자리에서 노란빛이 새어 나왔다⁠. 전사는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

퇴근길은 공연장 뒤 주차장 출구였다⁠. 바리케이드 앞에 팬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나는 맨 끝에 있었다⁠. 연두는 L구역 조원들과 바리케이드 맨 앞을 잡고 있었다⁠. 승합차 세 대가 차례로 빠져나갔다⁠. 세 번째 차가 바리케이드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뒷좌석 창문이 내려갔다⁠.

우담이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턱까지 내리고 있었다⁠. 우담은 손을 흔들다가 팬들 맨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목에 하늘색 수건이 있었다⁠. 승합차가 아예 멈췄다⁠. 매니저가 앞좌석에서 뭐라고 말했고 우담이 고개를 저었다⁠.

“⁠3층 하늘색 수건님⁠, 맞죠⁠? 잠실에서 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데⁠.⁠”

팬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대답을 못 했다⁠. 다섯 해 동안 상상해 본 장면이었는데 상상 속의 나는 무슨 말이든 하고 있었다⁠. 실제의 나는 수건 끝만 쥐었다⁠.

“⁠오늘 3층 아니었으면 저 첫 곡에서 무너졌어요⁠. 고마워요⁠.⁠”

우담이 창밖으로 몸을 조금 내밀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1열 그분⁠, 아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한테도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오늘 그분이 E구역 앞에서 계속 모래봉 흔들어 주셨거든요⁠.⁠”

창문이 올라갔다⁠. 승합차가 출구를 빠져나갔다⁠. 팬들이 꺅 소리를 지르며 나를 둘러쌌다⁠. 「⁠하늘색 수건님⁠」 「⁠방장님이 하늘색 수건님이었어요⁠?⁠」 연두가 사람들을 헤치고 와서 내 팔을 잡아 끌어냈다⁠. 주차장 구석 가로등 밑까지 와서야 연두가 손을 놓았다⁠.

“⁠얼굴 빨개⁠.⁠”

“⁠알아⁠.⁠”

연두는 웃지 않았다⁠. 대신 내 수건을 고쳐 매 주었다⁠. 연두가 고쳐 맨 매듭은 내가 매는 것보다 단단했다⁠.

가로등 너머 어둠 속에 바르덴이 있었다⁠. 검은 코트 자락이 주차장 바닥에 끌렸다⁠. 바르덴은 우리 둘에게 다가오지 않고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말했다⁠.

“⁠우담이 그대에게 무어라 하던가⁠?⁠”

“⁠고맙대요⁠. 그쪽한테도⁠.⁠”

바르덴의 뿔이 아주 작게 웅 울었다가 그쳤다⁠. 바르덴은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3층⁠. 마계에 와 보시오⁠. 붉은 평원을 보고⁠, 성으로 피한 아이들을 보시오⁠. 보고 나서도 막겠다면 그때 막으시오⁠. 짐은 말리지 않겠소⁠.⁠”

연두가 내 소매를 잡았다⁠. 나는 연두의 손을 내려다보았다가 바르덴을 보았다⁠. 주차장 출구로 마지막 승합차의 불빛이 멀어지고 있었다⁠.

“⁠갈게요⁠. 대신 보고 와서도 막을 거예요⁠.⁠”

“⁠그러시오⁠.⁠”

6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