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514자)

취켓팅

피켓팅 상대가 마왕? · 소하린

잠실새내역에서 성내동까지 연두와 나는 말없이 걸었다⁠. 연두는 신문지가 든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버릴 데가 많았는데도 버리지 않았다⁠. 바르덴은 역 앞에서 헤어졌다⁠. 헤어질 때 바르덴은 가르쉬가 한 말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비니 구멍으로 나온 뿔을 손으로 덮고 “⁠내일 밤 두 시에 가겠소⁠” 한마디만 했다⁠.

작업실 계단 앞에서 연두가 멈췄다⁠.

“⁠그 얘기 아는 사람 나밖에 없었잖아⁠.⁠”

“⁠응⁠.⁠”

“⁠그때 너 등록금 이십삼만 원 모자랐지⁠. 나한테 빌려 달라고 하려다 말았던 거 알아⁠. 나도 그때 돈이 없었으니까⁠.⁠”

연두가 반지하 계단을 한 칸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쇼핑백 손잡이가 연두 손가락에 감겨 있었다⁠.

“⁠나 너 욕 안 해⁠. 근데 저 붉은 양복이 그걸 알고 있다는 게 무서워⁠.⁠”

“⁠나도⁠.⁠”

연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작업실 불을 켜자 열압착기의 빨간 대기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

매크로에는 약점이 있었다⁠. 바로티켓은 무통장 입금으로 예매하면 다음 날 밤 열한 시 오십구 분까지 돈을 넣어야 했다⁠. 돈을 넣지 않은 표는 자동으로 취소되고⁠, 취소된 표는 새벽 두 시 무렵 한꺼번에 다시 풀렸다⁠. 붉은발톱 계정이 쓸어 간 표 가운데 가르쉬가 돈을 낸 것은 1층 앞 구역뿐일 것이었다⁠. 전사를 앉힐 자리였다⁠. 나머지 2층과 3층은 리셀로 팔리지 않으면 입금 기한을 넘길 것이었다⁠.

“⁠그러니까 새벽 두 시에 풀리는 표를 우리가 잡는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다섯 해 동안 새벽 두 시에 깨어 있었으니까⁠.⁠”

5월 4일 새벽 한 시 오십 분⁠, 작업실에 노트북 세 대가 켜졌다⁠. 연두가 하나⁠, 내가 하나⁠, 나머지 하나는 바르덴 앞에 놓였다⁠. 바르덴은 비니를 벗어 무릎에 올려놓고 화면을 노려보았다⁠. 나는 바르덴 손 위에 내 손을 겹쳐 키보드 맨 위 줄을 가리켰다⁠.

“⁠여기 F5요⁠. 새로 고침⁠. 누르고⁠, 배치도에 파란 점 뜨면 바로 누르고⁠, 결제까지 가요⁠. 생각하지 말고요⁠.⁠”

“⁠생각하지 않는 것은 짐의 특기가 아니오⁠.⁠”

“⁠오늘 특기로 만드세요⁠.⁠”

두 시 삼 분⁠, 광주 2층 C구역에 파란 점 하나가 떴다⁠. 바르덴의 검지가 F5를 내리찍었다⁠. 퍽 소리와 함께 F5 키가 튀어 올라 천장에 맞고 떨어졌다⁠. 키보드 맨 위 줄에 구멍이 뚫렸다⁠. 파란 점은 회색이 되었다⁠.

연두가 천장에서 떨어진 키를 주워 바르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이거 제 노트북이에요⁠. 할부 남았어요⁠.⁠”

“⁠새로 사 주겠소⁠. 금화로⁠.⁠”

“⁠금화 받는 전자 상가가 어디 있어요⁠.⁠”

바르덴은 첫날 밤 나머지 시간을 키가 빠진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눌렀다⁠. 네 시가 되도록 한 장도 못 잡았다⁠. 나는 세 장⁠, 연두는 두 장이었다⁠. 바르덴은 동이 틀 무렵 손가락 끝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1열 7번 때보다 어렵소⁠.⁠”

*

닷새째 밤에 바르덴이 첫 표를 잡았다⁠. 「⁠예매가 완료되었습니다⁠」 알림음이 울리는 순간 바르덴의 뿔이 웅 하고 울었다⁠. 바르덴은 화면을 보고⁠, 나를 보고⁠, 연두를 보고⁠, 다시 화면을 보았다⁠. 붉은 눈가가 촉촉했다⁠.

“⁠짐이 잡았소⁠. 광주 3층 F구역 22번⁠.⁠”

“⁠축하해요⁠. 이제 그거 3층 모래알한테 정가로 넘기는 거예요⁠.⁠”

“⁠알고 있소⁠. 이 표에는 이름을 붙여 주고 싶은데⁠.⁠”

“⁠표에 이름을 왜 붙여요⁠.⁠”

“⁠1열 7번도 짐에게는 이름이 있소⁠. 처음이라는 이름⁠.⁠”

연두가 키보드에 이마를 박고 웃었다⁠. 나도 웃었다⁠. 웃다가 3층 F구역 22번을 기다리던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잡았어요⁠. 정가 그대로 양도 절차 보내 드릴게요⁠.⁠」 답이 바로 왔다⁠. 「⁠방장님 저 그 자리 마왕님이 잡았다는 거 자랑해도 돼요⁠?⁠」 나는 안 된다고 썼다⁠. 다음 날 F구역 22번의 새 주인은 모래알 광장에 「⁠1열 마왕님이 내 표 잡아 줌 (⁠진짜임⁠)⁠」이라는 글을 올렸다⁠. 조회수가 내 마왕 글보다 높았다⁠.

밤마다 사람이 늘었다⁠. 오픈채팅방에 「⁠취켓팅 조⁠」가 생겼다⁠. 조마다 새벽 두 시에 깨어 있을 사람 다섯을 정했다⁠. 대학생⁠, 편의점 야간 알바⁠, 갓 입사한 신입 사원⁠, 재수 학원 다니는 스무 살⁠. 잡은 표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정가로 넘겼다⁠. 수수료 한 푼 붙이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다⁠. 방 인원은 이천사백 명이 되었다⁠. 열여드레 동안 되찾은 표가 천백 장이었다⁠. 바르덴은 천백 장 가운데 열한 장을 잡았다⁠. 열한 장 모두 3층이었다⁠. 바르덴은 3층 자리만 노렸다⁠.

“⁠1층 앞자리가 더 빨리 풀리는데 왜 3층만 잡아요⁠?⁠”

“⁠3층에서 소리가 시작되는 것을 보았으니까⁠.⁠”

뉴스도 조금씩 시끄러워졌다⁠. 「⁠모래시계 투어 0초 매진 의혹⁠… 기획사 ‘⁠매크로 수사 의뢰⁠’⁠」 기사 사진 속 구문팔은 기자들 앞에서 이마의 땀을 닦고 있었다⁠. 댓글이 수천 개 달렸고⁠, 그중 하나가 붉은발톱을 언급했다⁠. 「⁠표마켓 붉은발톱 이거 동일인임 신고 바람⁠」 표마켓은 붉은발톱 계정을 막았다⁠. 다음 날 같은 사진의 계정이 이름만 바꿔 다시 생겼다⁠. 「⁠붉은발톱2⁠」였다⁠.

*

열흘째 밤에는 도르마가 작업실에 왔다⁠. 잠실에 공연이 있는 밤이라 철문이 열렸고⁠, 도르마는 지팡이를 짚고 성내동 골목까지 걸어왔다⁠. 반지하 계단을 내려오며 계단 하나마다 「⁠쯧⁠」을 붙였다⁠. 계단이 열두 개였다⁠.

“⁠인간들은 왜 땅 밑에 사냐⁠? 마계에서도 땅 밑에는 벌레나 산다⁠.⁠”

“⁠월세가 싸서요⁠.⁠”

연두가 대답했다⁠. 도르마는 연두를 한 번 보고 더 묻지 않았다⁠. 작업실 한가운데 의자에 앉아 연두가 시켜 둔 떡볶이를 먹었다⁠. 매운맛 3단계였다⁠. 두 번째 떡을 씹다가 도르마의 부러진 뿔에서 김이 올라왔다⁠. 도르마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젓가락을 놓지 않았다⁠.

“⁠맵다⁠. 좋다⁠. 쯧⁠.⁠”

도르마는 떡볶이를 다 먹고 열압착기 앞으로 갔다⁠. 손잡이를 내려 보고⁠, 빨간 대기등을 들여다보고⁠, 다시 손잡이를 올렸다⁠. 연두가 아크릴 판 하나를 넣고 시범을 보여 주었다⁠. 압착기가 쉭 하고 김을 뿜자 도르마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게 뭐 하는 기계냐⁠?⁠”

“⁠그림을 판에 눌러 붙이는 기계예요⁠. 키링 만들 때 써요⁠.⁠”

“⁠누르면 남는구나⁠.⁠” 도르마가 압착기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쇠뿔 가문에도 옛날에 이런 게 있었다⁠. 노래를 새긴 돌판을 눌러 찍어 집집마다 나눠 줬지⁠. 전쟁 나고 녹여서 창날로 만들었다⁠.⁠”

도르마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노트북 앞의 바르덴을 내려다보았다⁠. 바르덴은 키가 빠진 구멍에 손가락을 넣은 채 굳어 있었다⁠.

“⁠폐하가 인간 기계 앞에서 밤을 새우는 걸 쇠뿔 가문 아이들이 보면 웃겠다⁠.⁠”

“⁠웃으면 좋은 일이오⁠.⁠”

“⁠좋은 일이지⁠. 쯧⁠.⁠”

도르마는 불에 그을린 종이 한 장을 바르덴의 무릎에 떨어뜨리고 계단을 올라갔다⁠. 올라갈 때도 계단마다 「⁠쯧⁠」을 붙였다⁠.

*

열여드레째 새벽 네 시⁠, 연두는 소파에 쓰러져 자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만 작업실을 비췄다⁠. 바르덴은 키가 빠진 구멍에 손가락을 넣은 채 창밖을 보았다⁠. 반지하 창으로 골목 바닥이 보였다⁠. 신문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왜 하필 우담이에요⁠?⁠”

내가 물었다⁠. 열여드레 동안 묻지 못한 말이었다⁠. 바르덴은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노트북 구멍의 테두리를 한 바퀴 더듬었다⁠.

“⁠다섯 해 전⁠, 짐은 흑요성 복도에서 소리를 들었소⁠. 철문 너머에서 누가 노래를 하고 있었지⁠. 반주도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짐의 뿔이 그날 처음 울었소⁠. 태어나 삼백 해 동안 한 번도 울지 않던 뿔이었소⁠.⁠”

“⁠그게 우담이었어요⁠?⁠”

“⁠짐은 그날 약속을 하나 했소⁠. 약속의 나머지는 짐이 말할 것이 아니오⁠.⁠”

“⁠약속이 뭔데요⁠?⁠”

바르덴은 말하지 않았다⁠.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화면 빛이 꺼지자 바르덴의 붉은 눈만 어둠 속에 남았다⁠.

“⁠결국 그쪽 전쟁에 우리 애들을 앞에 세우는 거잖아요⁠. 노래하는 사람을 칼 든 사람들 사이에⁠.⁠”

“⁠앞에는 짐이 서오⁠.⁠”

“⁠그쪽은 마왕이잖아요⁠. 칼 맞아도 안 죽잖아요⁠.⁠”

“⁠죽소⁠. 마왕도⁠.⁠”

바르덴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바르덴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도르마가 놓고 간 종이였다⁠. 마계 글씨였다⁠. 종이 가장자리가 불에 그을려 있었다⁠.

“⁠도르마가 가져온 소식이오⁠. 은비늘 가문의 마을 하나가 불탔다고⁠. 마을의 아이 열넷이 성으로 피했소⁠. 뿔이 아직 말랑한 아이들이오⁠.⁠”

“⁠그건 그쪽 사정이에요⁠.⁠”

나는 말해 놓고 입술을 깨물었다⁠. 바르덴은 종이를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나를 오래 보았다⁠.

“⁠그대에게도 사정이 있었겠지⁠. 표를 판 겨울에⁠.⁠”

나는 몸이 굳었다⁠. 바르덴은 말을 꺼내 놓고 바로 고개를 저었다⁠.

“⁠묻는 것이 아니오⁠. 그대가 말하고 싶을 때 듣겠소⁠. 가르쉬의 입으로 들은 것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소⁠.⁠”

소파에서 연두가 몸을 뒤척였다⁠. 담요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나는 담요를 주워 연두에게 덮어 주었다⁠. 덮어 주면서 바르덴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

바르덴이 연두의 키링을 본 것은 열여드레째 아침이었다⁠. 연두가 잠에서 깨어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작은 키링 하나를 떨어뜨렸다⁠. 바르덴의 발 앞으로 굴러간 키링을 바르덴이 주웠다⁠.

아크릴 키링이었다⁠. 검은 머리에 작은 뿔 두 개⁠, 붉은 눈⁠, 검은 후드 코트를 입은 둥근 얼굴의 캐릭터가 모래봉을 끌어안고 있었다⁠. 눈은 점 두 개였고 볼에 분홍 동그라미가 있었다⁠. 연두가 3층 모래알 방 단체 사진에 넣으려고 장난으로 그린 것이었다⁠. 이름까지 달려 있었다⁠. 「⁠1열 마왕⁠」

웅⁠.

바르덴의 뿔이 울었다⁠. 아침 햇빛이 반지하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키링에 닿았다⁠. 바르덴은 손바닥 위의 키링을 내려다보며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웅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이게⁠… 짐이오⁠?⁠”

“⁠네⁠. 죄송해요⁠. 장난으로⁠…⁠”

“⁠이 손⁠, 짐이 사겠소⁠.⁠”

바르덴이 연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연두가 뒷걸음질 쳤다가 책상에 엉덩이를 부딪쳤다⁠.

“⁠흑요성의 공식 굿즈를 만들어 주시오⁠. 축제에 일곱 가문의 마족이 모이오⁠. 마족들은 서로 원수지만⁠, 이 얼굴을 보면 칼보다 먼저 웃을 것이오⁠. 만 개를 주문하겠소⁠. 선금도 주겠소⁠.⁠”

“⁠만 개요⁠?⁠”

“⁠모자라면 이만 개⁠.⁠”

연두가 키링을 보고⁠, 바르덴을 보고⁠, 나를 보았다⁠. 연두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지난달 주문이 일곱 개였던 가게였다⁠. 나는 연두의 손목을 잡았다⁠.

“⁠연두야⁠. 이거 마계 축제 굿즈야⁠. 우리 애들 데려가는 축제⁠.⁠”

“⁠알아⁠.⁠”

“⁠생각해 보시오⁠. 짐은 기다리겠소⁠.⁠”

바르덴은 키링을 연두에게 돌려주지 않고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연두가 “⁠그거 견본인데⁠” 하고 손을 뻗었다가 내렸다⁠.

*

5월 21일 밤⁠, 부산 공연 전날이었다⁠. 나는 작업실에서 3층 모래알 부산 조 응원 순서표를 출력하고 있었다⁠. 연두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내 앞에 놓았다⁠. 봉투 겉에 검은 밀랍 도장이 찍혀 있었다⁠. 도장 무늬는 뿔 두 개였다⁠.

「⁠흑요성 공식 굿즈 제작 계약서 · 키링 이만 개 · 선금 사천만 원⁠」

계약서 밑에 연두의 이름을 쓰는 칸이 있었다⁠. 비어 있었다⁠. 연두는 계약서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나 이거 해도 돼⁠?⁠”

출력기에서 응원 순서표가 한 장씩 밀려 나왔다⁠. 지잉⁠, 지잉⁠. 연두는 대답을 기다렸다⁠. 연두 휴대전화가 책상 위에서 떨렸다⁠. 집주인이었다⁠. 연두는 휴대전화를 엎어 놓았다⁠.

“⁠하지 마⁠.⁠”

연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약서를 봉투에 도로 넣고 가방 지퍼를 올렸다⁠. 지퍼 올라가는 소리가 출력기 소리보다 길었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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