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67자)

판정

피켓팅 상대가 마왕? · 소하린

6월 25일 밤⁠, 성 동쪽 탑 아래 넓은 방⁠. 은비늘 아이들 열넷이 짚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마흔한 명 가운데 시장에 따라온 열 명도 아이들 사이에 끼어 잠들었다⁠. 학원옥상의 팔을 가장 작은 아이가 베고 있었다⁠. 삼각김밥폐기담당은 코를 골았다⁠. 마족 시종 하나가 코 고는 소리에 놀라 창을 찾았다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도로 내려놓았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탑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꼭대기 창턱에 연두가 앉아 있었다⁠. 그을린 앞치마를 무릎에 덮고 있었다⁠. 창밖 하늘에 붉은 달이 거의 다 차올라 있었다⁠. 내일 밤이면 다 찬다고 했다⁠.

“⁠자리 있어⁠?⁠”

“⁠마계 창턱 넓어⁠. 마왕 성이라⁠.⁠”

나는 연두 옆에 앉았다⁠. 돌이 따뜻했다⁠. 시장의 불은 꺼졌지만 언덕에서 아직 연기가 가늘게 올라왔다⁠.

“⁠이만 개 다 탔어⁠.⁠” 연두가 말했다⁠. “⁠상자 두 개⁠, 삼백 개 남았어⁠. 쇠뿔 회색이 제일 많이 남았어⁠. 회색 만드는 게 제일 어려웠는데⁠.⁠”

“⁠바르덴이 손을 샀다고 했잖아⁠. 겨루기랑 상관없이⁠.⁠”

“⁠알아⁠. 마왕님 그런 말은 지키는 분이야⁠.⁠” 연두가 앞치마 끝을 손가락으로 말았다⁠. “⁠그래도 상관있어⁠. 내일 판정에서 내가 지면⁠, 내 키링 단 마족들이 축제에서 노래할 일이 없잖아⁠.⁠”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연기 냄새가 창턱까지 올라왔다⁠. 연두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소리 표였다⁠. 반지하에서 견본으로 만든 첫 번째 표였다⁠. 연두가 새벽 네 시에 눌러 보고 작업대에 내려놓았던 표였다⁠. 연두가 챙겨 갔던 모양이었다⁠.

“⁠이거 들었을 때⁠.⁠” 연두가 표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내 키링 졌다고 생각했어⁠.⁠”

“⁠아직 안 졌어⁠.⁠”

“⁠알아⁠. 그래서 내일 제대로 질 거야⁠. 대충 지면 너도 기분 나쁘잖아⁠.⁠”

나는 웃었다⁠. 웃다가 목이 메었다⁠. 탑 아래 방에서 삼각김밥폐기담당의 코 고는 소리가 올라왔다⁠. 한 번 크게 골고 한참 쉬었다가 다시 골았다⁠. 연두가 코 고는 박자에 맞춰 손가락으로 창턱을 두드렸다⁠. 숨 참는 자리 같다고 연두가 말했다⁠. 우리는 둘 다 소리 죽여 웃었다⁠. 연두가 내 하늘색 수건 매듭을 고쳐 매 주었다⁠. 부산 주차장에서 고쳐 매 준 것과 같은 매듭이었다⁠.

“⁠나 리셀한 거⁠, 너 왜 끝까지 안 미워했어⁠?⁠”

“⁠미워했어⁠. 사흘쯤⁠.⁠” 연두가 창밖을 보았다⁠. “⁠그다음엔 등록금 고지서 생각났어⁠. 나도 그 겨울에 돈 없었으니까⁠. 우리 둘 다 돈 없는 덕후였잖아⁠.⁠”

“⁠지금은 너 돈 있잖아⁠.⁠”

“⁠사천만 원⁠. 세금 떼고 삼천육백⁠.⁠” 연두가 소리 표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그래서 내일 안 봐줄 수 있어⁠.⁠”

*

6월 26일 새벽⁠, 불탄 시장 언덕 아래 공터⁠. 땅이 아직 따뜻했다⁠. 재가 발목까지 쌓인 자리도 있었다⁠. 붉은 하늘이 동쪽부터 옅어지고 있었다⁠. 공터 둘레에 마족들이 모여 있었다⁠. 어제 시장에 왔던 일곱 가문이었다⁠. 검은깃⁠, 은비늘⁠, 쇠뿔⁠, 밤나비⁠. 그리고 어제 키링 줄에 서지 않았던 안개꼬리와 돌이빨⁠. 소금 장수가 맨 앞에 있었다⁠. 소금 자루 옆에 소리 표 한 장을 세워 들고 있었다⁠.

공터 맨 끝에 붉은발톱이 있었다⁠. 가르쉬가 붉은 갑옷 차림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목에 가는 붉은 줄이 남아 있었다⁠. 뒤에 전사 수십이 있었다⁠. 젊은 전사도 있었다⁠.

공터 한가운데 돌 판대 둘이 놓였다⁠. 왼쪽에 연두의 키링 삼백 개⁠, 오른쪽에 내 소리 표 여든아홉 장⁠. 이천 장 가운데 불에서 건진 것이었다⁠. 몇 장은 가장자리가 그을려 있었다⁠. 바르덴이 판대 왼쪽에⁠, 내가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연두는 바르덴 뒤에⁠, 학원옥상과 열 명은 내 뒤에 있었다⁠. 아이들이 열 명 다리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공터 가장자리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회색 연습복에 검은 모자⁠. 우담이었다⁠. 축제 무대 리허설을 하러 새벽에 넘어왔다고 했다⁠. 우담은 판대 가까이 오지 않았다⁠. 마족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쇠뿔 가문 할머니 하나가 우담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도르마가 지팡이를 짚고 공터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방울이 짤랑 울렸다⁠. 공터가 조용해졌다⁠.

“⁠마지막 판⁠. 굿즈⁠. 해가 진 뒤라 시장에서 다 듣지 못했다⁠. 남은 것으로 듣는다⁠.⁠”

*

도르마가 먼저 왼쪽 판대로 갔다⁠. 키링 하나를 집었다⁠. 회색이었다⁠. 굵은 쇠뿔을 단 볼 빨간 마왕 얼굴이 도르마의 쭈글쭈글한 손바닥 위에서 웃고 있었다⁠. 도르마는 키링을 오래 쥐고 있었다⁠. 엄지로 마왕의 볼 빨간 동그라미를 쓸었다⁠. 도르마의 입가가 움직였다⁠. 웃음이었다⁠. 육백 살 재상이 키링을 보고 웃었다⁠. 공터 둘레의 쇠뿔 가문 할머니들이 따라 웃었다⁠. 어제 회색 키링을 받고 울었다던 할머니들이었다⁠.

뿔은 울지 않았다⁠.

“⁠곱다⁠.⁠” 도르마가 말했다⁠. “⁠예쁘다⁠. 쇠뿔 할머니들이 이걸 받고 울었다는 것도 안다⁠. 손녀가 칼 대신 이걸 허리에 달고 다닌다는 것도⁠.⁠” 도르마가 키링을 가슴에 대었다가 판대에 내려놓았다⁠. 조심스럽게⁠. “⁠그래도 뿔은 손에 쥔 것에는 울지 않는다⁠. 귀에 들어오는 것에 운다⁠. 쯧⁠.⁠”

연두가 고개를 숙였다⁠. 바르덴이 연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도르마가 오른쪽 판대로 왔다⁠. 소리 표 하나를 집었다⁠. 가장자리가 그을린 것이었다⁠. 글씨를 읽지 못하는 눈으로 「⁠좌석 아무 데나⁠」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단추를 눌렀다⁠.

딸깍⁠.

모래봉 단추가 번지는 소리⁠. 딸깍⁠, 딸깍⁠, 딸깍⁠. 숨 참는 소리⁠. 공터의 마족들이 녹음 속 숨소리를 따라 숨을 참았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쇠뿔 가문의 낮은 화음이 흘러나왔다⁠. 인간의 높은 목소리가 화음 위에 얹혔다⁠. 쇠뿔 가문 젊은 마족 몇이 자기 목소리를 알아듣고 서로를 보았다⁠. 웅⁠, 웅⁠, 웅⁠. 붉은발톱 셋의 뿔⁠. 공터 끝의 붉은 전사들 사이에서 누가 숨을 들이켰다⁠.

“⁠한 번 더⁠!⁠”

삼천의 인간과 백의 마족이 외쳤다⁠. 그리고 녹음 속의 도르마가 울었다⁠. 웅⁠.

녹음이 끝나기 전에 공터의 도르마가 울었다⁠.

웅⁠.

부러진 뿔 밑동이 떨렸다⁠. 광주의 웅 소리와 지금의 웅 소리가 겹쳤다⁠. 도르마는 소리 표를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사십 초가 끝나고 칩이 멎었는데도 도르마의 뿔은 그치지 않았다⁠.

공터 맨 앞에서 소금 장수가 자기 소리 표의 단추를 눌렀다⁠. 어제 오후 내내 누르던 표였다⁠. 「⁠한 번 더⁠!⁠」 소금 장수 옆의 마족이⁠, 마족 옆의 아이가 저마다 쥔 소리 표를 눌렀다⁠. 어제 시장에서 손에 쥐여 준 서른일곱 장과 아이들이 연기 속에서 들고 나온 표였다⁠. 공터 둘레에서 「⁠한 번 더⁠」가 여기저기 따로 울렸다⁠. 박자가 맞지 않았다⁠. 맞지 않는 박자가 겹치고 겹쳐서 공터가 함성으로 찼다⁠.

웅⁠.

낮고 둔한 소리였다⁠. 돌을 쳐서 나는 소리였다⁠. 소금 장수의 네모난 뿔이 울고 있었다⁠. 소금 장수가 자기 뿔을 만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돌이빨 가문 마족들이 소금 장수를 둘러쌌다⁠. 마계 말이 쏟아졌다⁠. 놀란 소리였다⁠. 백 년 동안 아무것에도 울지 않았다던 돌이빨 가문의 뿔이었다⁠.

도르마가 소리 표를 판대에 내려놓았다⁠.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목소리는 말라 있었다⁠.

“⁠그 소리에 마왕 아이들 목소리가 들어 있다⁠.⁠”

바르덴이 말했다⁠. 하오체였다⁠. 화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확인하는 목소리였다⁠.

“⁠네⁠.⁠” 내가 대답했다⁠. “⁠광주에서 같이 불렀으니까요⁠. 진 판의 소리예요⁠.⁠”

“⁠광주에서 내 뿔은 마족 아이들 노래에 울었다⁠.⁠” 도르마가 말했다⁠. “⁠마족끼리 부른 소리였다⁠. 오늘은 인간이 마족 소리를 들고 왔다⁠. 자기가 진 판에서 상대 아이들이 부른 소리를⁠. 그래서 운다⁠.⁠”

도르마가 지팡이로 오른쪽 판대를 가리켰다⁠.

“⁠마지막 판⁠. 인간 편이다⁠.⁠”

*

공터가 웅성거렸다⁠. 학원옥상이 내 등을 끌어안았다⁠. 삼각김밥폐기담당이 소리를 질렀다⁠. 은비늘 아이들이 소리 표를 눌러 댔다⁠. 「⁠한 번 더⁠! 한 번 더⁠!⁠」 나는 판대 앞에 서 있었다⁠. 이겼는데 손이 차가웠다⁠.

“⁠방장님⁠, 우리 이긴 거예요⁠? 진짜로요⁠?⁠” 학원옥상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오픈채팅방에 올려야 되는데⁠, 아 여기 안 터지지⁠. 서른한 명이 지금 서울에서 손톱 물어뜯고 있을 텐데⁠.⁠”

“⁠돌아가서 올려⁠.⁠”

“⁠돌아가면 축제 끝나 있잖아요⁠. 생중계를 못 해요⁠, 마계는⁠.⁠” 삼각김밥폐기담당이 휴대전화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 「⁠서비스 지역이 아닙니다⁠」 붉은 하늘에 대고 휴대전화를 흔드는 인간 열 명을 마족들이 신기한 듯 구경했다⁠. 은비늘 아이 하나가 따라서 소리 표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

바르덴이 판대를 돌아 내 앞으로 왔다⁠. 붉은 눈이 판대 위의 소리 표를 내려다보았다⁠. 바르덴은 소리 표 하나를 집어 단추를 눌렀다⁠. 숨 참는 자리에서 바르덴도 숨을 참았다⁠. 「⁠한 번 더⁠」가 끝나고 바르덴이 표를 내려놓았다⁠.

“⁠짐이 졌소⁠.⁠” 바르덴이 고개를 숙였다⁠. 마왕이 인간에게 허리를 숙였다⁠. 공터의 마족들이 조용해졌다⁠. “⁠두 판을 이긴 사람이 정하기로 했소⁠. 그대가 정하시오⁠.⁠”

연두가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울었다⁠. 바르덴이 연두를 돌아보았다⁠.

“⁠곽연두⁠. 짐은 그대의 손을 샀소⁠. 계약은 겨루기와 상관없소⁠. 탄 이만 개는 짐이 다시 주문하겠소⁠. 오늘 밤 축제가 열리든 열리지 않든⁠.⁠”

“⁠열리지 않으면 누가 사요⁠.⁠”

“⁠짐이 사오⁠. 짐의 성에 걸겠소⁠. 일곱 가문 색 다⁠.⁠”

연두가 울다가 웃었다⁠. 콧물이 나왔다⁠. 아르바이트생이 휴지를 건넸다⁠. 도르마가 지팡이로 연두의 신발 끝을 톡 쳤다⁠.

“⁠울지 마라⁠. 인간이 울면 매운 냄새가 난다⁠. 떡볶이 생각난다⁠. 쯧⁠.⁠”

“⁠재상님⁠, 그건 제 콧물 냄새예요⁠.⁠”

“⁠그러니까 더 생각난다⁠.⁠”

공터 둘레에서 쇠뿔 가문 할머니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연두도 웃었다⁠. 콧물이 한 번 더 나왔다⁠.

공터 끝에서 박수 소리가 났다⁠. 하나였다⁠. 가르쉬였다⁠. 가르쉬가 팔짱을 풀고 천천히 손뼉을 치며 걸어 나왔다⁠. 붉은 갑옷이 새벽빛에 검게 보였다⁠.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분식집에서 드린 제안은 거절하셨지만 결국 같은 곳에 오셨군요⁠.⁠” 가르쉬가 내 앞에서 멈췄다⁠. “⁠가수는 오지 않습니다⁠. 오늘 밤 붉은 달이 떠도 노래는 없습니다⁠. 내일 아침 달이 지면 옛 법도 집니다⁠. 붉은발톱은 은비늘 우물로 갑니다⁠.⁠”

가르쉬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이긴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긴 것은 나였는데⁠.

“⁠아가씨 덕분입니다⁠. 진심으로⁠.⁠”

가르쉬가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 붉은발톱 전사들이 창을 고쳐 쥐었다⁠. 젊은 전사 하나가 창을 고쳐 쥐지 않았다⁠. 허리띠 안쪽에서 노란빛이 아주 잠깐 새어 나왔다⁠.

나는 가르쉬를 보지 않았다⁠. 공터 가장자리를 보았다⁠. 우담이 마족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우담은 판대 앞까지 와서 모자를 벗었다⁠. 새벽빛에 땀 젖은 앞머리가 보였다⁠.

“⁠하늘색 수건님⁠.⁠”

우담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평소와 같았다⁠.

“⁠정해 주세요⁠. 정하신 대로 할게요⁠. 진짜로요⁠.⁠”

공터의 모두가 나를 보았다⁠. 일곱 가문의 마족과 마왕과 재상과 가수와 친구와 마흔한 명 가운데 열 명과 열네 아이들⁠. 붉은 달은 아직 동쪽 하늘에 희미하게 걸쳐 있었다⁠. 오늘 밤 다 차오를 달이었다⁠. 축제까지 반나절이 남아 있었다⁠. 나는 손에 쥔 소리 표를 내려다보았다⁠. 「⁠좌석 아무 데나⁠」 단추 위에 내 엄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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