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551자)

붉은 달

피켓팅 상대가 마왕? · 소하린

나는 소리 표를 주머니에 넣었다⁠. 엄지가 단추에서 떨어지자 손이 조금 덜 차가워졌다⁠. 공터의 모두가 기다렸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마족들은 원래 기다리는 데 익숙하다고 바르덴이 말한 적이 있었다⁠. 백 년을 기다린 사람들이었다⁠.

“⁠가요⁠.⁠”

우담이 나를 보았다⁠. 바르덴이 나를 보았다⁠. 가르쉬의 눈이 가늘어졌다⁠.

“⁠모래시계⁠, 오늘 밤 무대에 서요⁠. 대신 제가 정한 대로요⁠.⁠”

나는 후드티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시청 회의실에서 주무관이 나눠 준 「⁠인간계·마계 공연 협정(⁠안⁠)⁠」이었다⁠. 철문을 넘을 때부터 접어서 넣고 다녔다⁠. 종이 귀퉁이가 땀에 젖어 물러 있었다⁠. 판대 위에 종이를 펴고⁠, 학원옥상에게 볼펜을 빌렸다⁠. 학원옥상의 볼펜은 끝이 씹혀 있었다⁠.

“⁠하나⁠. 표는 한 사람 한 장이에요⁠. 오늘 밤 객석은 일곱 가문이 똑같은 수로 나눠요⁠. 붉은발톱도요⁠.⁠”

공터가 술렁였다⁠. 은비늘 마족 하나가 붉은발톱을 가리키며 무어라 외쳤다⁠. 도르마가 지팡이로 땅을 짚자 조용해졌다⁠.

“⁠둘⁠. 표 가진 사람은 칼을 성문 밖에 두고 와요⁠. 시장 날이랑 똑같이요⁠. 셋⁠. 무대 앞은 마왕님이 지켜요⁠. 1열 자리에 앉지 말고⁠, 무대를 등지고 서서요⁠.⁠”

바르덴이 눈을 깜빡였다⁠. 1열 7번을 마흔 번 연습해서 잡은 마왕이었다⁠. 바르덴은 한참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넷⁠. 노래가 끝나면 모래시계는 바로 돌아와요⁠. 다음 무대를 마계에 세울지 말지는 우담 씨가 정해요⁠. 마왕님도 저도 말고요⁠.⁠”

우담이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모자를 손에 꽉 쥐었다⁠.

“⁠다섯⁠.⁠”

나는 볼펜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씹힌 볼펜 끝이 종이에 작은 구멍을 냈다⁠.

“⁠응원단장은 제가 해요⁠. 지면 하기로 했던 거⁠, 이겼으니까 제가 골라서 할게요⁠.⁠”

연두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작게⁠. 나는 연두를 보지 않았다⁠. 보면 마음이 바뀔 수 있었다⁠.

*

공터 끝에서 가르쉬가 걸어 나왔다⁠. 붉은 갑옷이 새벽빛을 받아 검붉었다⁠. 가르쉬는 판대 위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인간 글씨를 읽지 못하는 눈이었다⁠. 그래도 종이를 오래 보았다⁠.

“⁠아가씨는 이기셨습니다⁠.⁠” 가르쉬가 말했다⁠. 정중하지 않았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두 판을 이기고 정할 권리를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내주십니까⁠? 가수를 지키겠다고 석 달을 싸우신 분이⁠.⁠”

“⁠이겨서 정하는 거예요⁠. 지면 남이 정하잖아요⁠.⁠”

“⁠정한 것이 마왕의 축제입니다⁠.⁠”

“⁠마왕님 축제 아니에요⁠. 표 가진 사람 축제예요⁠.⁠” 나는 종이를 가르쉬 앞으로 밀었다⁠. “⁠그쪽 전사들한테도 표 줄게요⁠. 한 사람 한 장⁠, 정가로⁠. 앞 구역도 줄게요⁠. 다른 가문이랑 똑같이요⁠. 팔짱 끼고 앉아 있어도 돼요⁠. 대신 칼은 밖에 두고 와요⁠.⁠”

가르쉬가 웃었다⁠. 짧고 마른 웃음이었다⁠.

“⁠전사 삼천의 밥은요⁠? 아가씨가 주십니까⁠?⁠”

“⁠그건 제가 못 해요⁠.⁠”

나는 바르덴을 보았다⁠. 가르쉬의 질문은 처음부터 나한테 한 것이 아니었다⁠. 바르덴이 판대 앞으로 나왔다⁠.

“⁠인간계에는 무대가 많소⁠. 짐이 투어를 보태며 보았소⁠. 무대를 세울 쇠가 모자라고⁠, 쇠를 다룰 손이 모자라오⁠. 협정이 서면 인간계 공연 무대의 철골을 붉은발톱 대장장이들에게 맡기겠소⁠. 창 대신 무대를 짓는 일이오⁠.⁠” 바르덴이 잠깐 말을 골랐다⁠. “⁠밥이 창만큼 나올지는 짐도 모르오⁠. 모른다고 말하겠소⁠.⁠”

가르쉬는 바르덴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뒤에서 젊은 전사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가 도로 물러났다⁠.

“⁠밤에 보겠습니다⁠.⁠”

가르쉬가 몸을 돌렸다⁠. 대답이 아니었다⁠. 거절도 아니었다⁠.

정오에 구문팔이 철문을 넘어왔다⁠. 우담이 데리러 갔다⁠. 구문팔은 흑요성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돌바닥에 주저앉았다⁠. 붉은 하늘을 보고 “⁠우리 애들 해외 축제가 여기야⁠?⁠” 하고 세 번 물었다⁠. 네 번째로 묻고 나서 바르덴이 내민 출연 계약서에 이름을 썼다⁠. 계약서 맨 위에 내가 고친 협정 초안이 붙어 있었다⁠. 구문팔은 읽지도 않고 「⁠한 사람 한 장⁠」 줄 옆에 도장을 꾹 눌렀다⁠. 그러고는 쇠뿔 가문 할머니가 내민 끓는 돌국수를 한 입 먹고 울었다⁠. 매워서 우는지 감격해서 우는지 구문팔 본인도 몰랐다⁠.

*

오후 내내 나는 일곱 가문의 마족들에게 응원법을 가르쳤다⁠. 평원 무대 앞 붉은 흙바닥에서였다⁠. 통역은 우담이 했다⁠. 우담은 리허설을 마치고 내려와 내 옆에 쪼그려 앉아 마계 말로 바꿔 주었다⁠. 「⁠우담⁠」은 바꿀 수 없어서 그대로 두었다⁠. 마족 천 명이 「⁠우다⁠!⁠」를 외쳤다⁠. 받침 없는 우다였다⁠. 우담이 웃다가 사레가 들렸다⁠.

“⁠숨 참는 자리는 여기요⁠. 하나⁠, 둘⁠.⁠”

천 명이 숨을 참았다⁠. 안개꼬리 마족들의 꼬리에서 안개가 멈췄다⁠. 돌이빨 소금 장수가 볼을 부풀렸다⁠. 밤나비 마족들의 등 날개 무늬가 접혔다⁠. 붉은발톱은 오지 않았다⁠.

쉬는 동안 우담이 물병을 건네며 물었다⁠.

“⁠응원단장은 무대 등지고 서잖아요⁠. 저 안 보이는데⁠, 괜찮아요⁠?⁠”

“⁠3층 끝자리보다 가까워요⁠.⁠”

“⁠그건 그런데⁠.⁠”

“⁠우담 씨 목소리는 등으로도 들려요⁠. 다섯 해 동안 들었어요⁠.⁠”

우담이 물병을 쥔 채 한참 나를 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바르덴이 무대를 등지고 서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자꾸 고개가 무대 쪽으로 돌아가서 도르마가 지팡이로 정강이를 쳤다⁠. “⁠쯧⁠. 폐하⁠, 목에 힘 줘라⁠.⁠”

해가 질 무렵 표를 나눴다⁠. 표는 흑요성 시종들이 오후 내내 검은 돌 조각에 뿔 무늬를 새겨 만들었다⁠. 만 장이었다⁠. 일곱 가문에 똑같은 수로 나눴다⁠. 연두가 남은 회색 키링 삼백 개를 돌 표 삼백 장에 하나씩 꿰었다⁠. 소리 표 여든아홉 장도 돌 표 사이에 섞었다⁠. 마흔한 명 가운데 열 명이 성문 앞에 판대를 세우고 줄을 세웠다⁠. 학원옥상이 마계 말 「⁠한 사람 한 장⁠」을 외워서 외쳤다⁠. 발음이 틀려서 마족들이 웃었다⁠. 웃으면서도 한 사람에 한 장씩만 받아 갔다⁠.

붉은 달이 떠오를 때 성문 앞에 붉은 덩어리가 나타났다⁠. 붉은발톱이었다⁠. 다른 가문과 같은 수였다⁠. 다들 빈손이었다⁠. 성문 밖 붉은 흙 위에 창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맨 앞에 가르쉬가 있었다⁠. 갑옷도 벗고 왔다⁠. 붉은 가죽 옷 한 벌이었다⁠. 가르쉬가 학원옥상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학원옥상이 덜덜 떨며 표 한 장을 가르쉬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돌 표가 아니었다⁠. 판대에 남은 마지막 소리 표였다⁠. 가르쉬가 표를 내려다보았다⁠. 「⁠좌석 아무 데나⁠」

*

붉은 달이 하늘 한가운데 떠올랐을 때 무대에 불이 들어왔다⁠. 평원 끝에서 끝까지 객석이 마족으로 찼다⁠. 일곱 가문이 일곱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구역 사이에 칼 대신 모래봉을 든 검은깃 마족들이 띠를 이루고 있었다⁠. 무대 맨 앞에 바르덴이 있었다⁠. 1열 자리가 아니었다⁠. 무대 바로 아래 붉은 흙 위에 객석을 향해 서 있었다⁠. 무대를 등지고⁠. 검은 코트 자락이 뜨거운 바람에 펄럭였다⁠.

나는 바르덴 옆에 놓인 작은 단상에 올라갔다⁠. 나무 상자 두 개를 쌓은 단상이었다⁠. 학원옥상과 삼각김밥폐기담당이 양옆에서 붙잡고 있었다⁠. 내 목에 하늘색 수건⁠, 손에 노란 모래봉⁠. 단상에 올라서자 객석 전체가 보였다⁠. 만 개의 뿔이 붉은 달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무대는 보이지 않았다⁠. 무대는 내 등 뒤에 있었다⁠. 응원단장은 객석을 본다⁠. 박자를 주려면 객석의 얼굴을 봐야 한다⁠.

등 뒤에서 피아노 전주가 울렸다⁠. 「⁠모래가 다 떨어지기 전에⁠」였다⁠. 무대 옆에서 구문팔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전주 여덟 마디⁠. 나는 모래봉을 들었다⁠.

“⁠우⁠! 다⁠!⁠”

만 명이 외쳤다⁠. 받침 없는 우다였다⁠. 등 뒤에서 우담이 웃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평원에 퍼졌다⁠. 웃음 끝에서 첫 소절이 시작됐다⁠.

후렴 앞 두 박⁠. 숨 참는 자리⁠. 나는 모래봉을 높이 들고 멈췄다⁠. 만 명이 숨을 참았다⁠. 안개가 멈추고 날개가 접혔다⁠. 평원에 바람 소리만 남았다⁠. 등 뒤에서 우담의 고음이 붉은 하늘로 올라갔다⁠.

“⁠한 번 더⁠!⁠”

웅⁠.

쇠뿔 구역이었다⁠. 회색 뿔 수백이 한꺼번에 울었다⁠. 객석 한가운데 관계자석에서 도르마가 떡볶이 용기를 떨어뜨렸다⁠. 웅⁠. 은비늘⁠. 은빛 비늘 아이들이 형들의 어깨 위에서 소리 표를 눌러 댔다⁠. 웅⁠. 검은깃⁠. 띠를 이룬 마족들의 모래봉이 일제히 흔들렸다⁠. 웅⁠. 밤나비⁠. 접혔던 날개 무늬가 펴졌다⁠. 웅⁠. 돌이빨⁠. 돌을 치는 둔한 소리가 평원 바닥을 울렸다⁠. 소금 장수가 두 손을 들고 있었다⁠.

다섯이었다⁠.

두 번째 「⁠한 번 더⁠」에서 안개꼬리 구역의 안개가 하늘로 솟았다⁠. 안개 속에서 웅 소리가 났다⁠. 여섯이었다⁠.

붉은발톱 구역은 조용했다⁠. 붉은 덩어리가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맨 앞에 가르쉬가 있었다⁠. 가르쉬는 무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단상 위의 나를 보고 있었다⁠. 노란 눈 가운데 세로 동공이 붉은 달빛에 가늘게 빛났다⁠.

등 뒤에서 노래가 바뀌었다⁠. 피아노 하나만 남았다⁠. 「⁠마지막 모래⁠」였다⁠. 우담 혼자 부르는 노래였다⁠. 나는 모래봉을 내렸다⁠. 이 노래에서는 응원법을 하지 않는다⁠. 다섯 해 동안 지켜 온 약속이었다⁠. 만 명의 마족이 내가 모래봉을 내리는 것을 보고 따라 내렸다⁠. 평원이 조용해졌다⁠.

우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왔다⁠. 마이크를 거치지 않은 것처럼 가깝게 들렸다⁠. 첫 소절⁠, 두 번째 소절⁠. 2절로 넘어갈 때 붉은발톱 구역에서 무언가가 켜졌다⁠. 노란빛이었다⁠. 딸깍⁠. 부산 비상계단에서 내가 건넨 모래봉이었다⁠. 젊은 전사가 팔짱을 풀고 모래봉을 머리 위로 들고 있었다⁠. 딸깍⁠. 옆의 전사가 허리띠 안쪽에서 볼 빨간 마왕 키링을 꺼냈다⁠. 딸깍⁠, 짤랑⁠. 붉은 덩어리 여기저기서 노란빛과 키링이 나왔다⁠.

웅⁠.

붉은발톱 구역이 울었다⁠. 젊은 전사의 짧은 뿔⁠, 옆 전사의 뿔⁠, 뒷줄 전사들의 뿔⁠. 부산에서 하나⁠, 광주에서 셋이었던 소리가 붉은 구역 전체로 번졌다⁠. 일곱이었다⁠. 백 년 만이었다⁠.

가르쉬만 울지 않았다⁠. 잘린 뿔은 끝까지 조용했다⁠. 가르쉬는 울지 않는 뿔을 한 손으로 만지고⁠, 객석 붉은 흙 위에 무릎을 꿇었다⁠. 손에 끼고 있던 붉은 가죽 장갑을 벗어 흙 위에 내려놓았다⁠. 칼을 내려놓는 대신 하는 일이라고 도르마가 나중에 말해 주었다⁠. 가르쉬는 장갑 위에 손바닥을 얹은 채 고개를 숙였다⁠. 붉은 달빛에 짧은 뿔이 검게 보였다⁠. 정중한 자세였다⁠. 가르쉬는 끝까지 정중했다⁠.

옆에서 바르덴의 뿔이 울었다⁠. 무대를 등지고 선 마왕이 객석의 일곱 구역을 차례로 보며 울었다⁠. 소리 없이⁠. 뿔만 소리를 냈다⁠.

*

마지막 후렴이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섯 해 동안 3층 끝자리에서 손톱만 한 우담을 보았다⁠. 오늘 밤 우담은 내 등 뒤 열 걸음 거리에 있었다⁠. 돌아보면 얼굴이 보일 것이었다⁠. 땀 젖은 앞머리⁠, 하얀 셔츠 깃⁠, 노래 앞에서 먼저 들이마시는 숨까지⁠. 응원단장은 객석을 본다⁠. 나는 객석을 보았다⁠.

만 개의 뿔이 울고 있었다⁠. 은비늘 아이 하나가 형의 어깨 위에서 소리 표를 귀에 대고 있었다⁠. 쇠뿔 할머니들이 회색 키링을 쥔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었다⁠. 객석 뒤편 판대 옆에서 연두가 검은 앞치마 차림으로 울면서 키링을 하나씩 마족 아이들 손에 쥐여 주고 있었다⁠. 학원옥상과 삼각김밥폐기담당이 단상 다리를 붙든 채 고개만 돌려 무대를 보고 있었다⁠. 둘은 보아도 됐다⁠. 둘은 응원단장이 아니었다⁠.

등 뒤에서 우담의 마지막 음이 길게 이어졌다⁠. 평원의 바람이 마지막 음을 실어 내 앞의 만 명에게 날랐다⁠. 나는 노란 모래봉을 머리 위로 든 채 서 있었다⁠. 목에 두른 하늘색 수건이 뜨거운 바람에 등 뒤로 날렸다⁠. 수건 끝이 무대를 향해 펄럭였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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