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79자)

전야 시장

피켓팅 상대가 마왕? · 소하린

6월 25일 오전 열 시⁠, 잠실 하역장⁠. 천장 너머에서 저녁 공연의 낮 리허설이 돌고 있었다⁠. 드럼이 같은 여덟 마디를 계속 되풀이했다⁠. 녹색 철문 앞에 상자가 쌓여 있었다⁠. 「⁠소리 표 · 이천⁠」 마흔한 명 가운데 열 명이 상자를 하나씩 안고 줄을 서 있었다⁠. 학원옥상⁠, 삼각김밥폐기담당⁠, 그리고 오픈채팅방에서 닉네임으로만 알던 얼굴들⁠. 다들 목에 하늘색 수건을 둘렀다⁠. 내가 둘러 오라고 한 적은 없었다⁠.

철문 옆에 주무관이 있었다⁠. 넥타이는 오늘도 왼쪽으로 비뚤어져 있었다⁠. 손에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저는 못 들어갑니다⁠. 공무원이 허가 없이 출국하면 안 돼서요⁠. 출국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요⁠.⁠” 주무관이 서류철을 들어 보였다⁠. “⁠협정 서명은 내일 축제 밤이라고 들었습니다⁠. 잘되면 연락 주세요⁠. 이쪽 서명은 제가 받아 오겠습니다⁠.⁠”

“⁠누구한테 받아요⁠?⁠”

“⁠아직 모릅니다⁠. 시장님한테 마왕 얘기를 어떻게 보고할지도 모릅니다⁠.⁠”

드럼이 여덟 마디를 끝내고 기타가 들어왔다⁠. 철문이 열렸다⁠. 학원옥상이 뜨거운 바람에 뒷걸음질 쳤다가 상자를 고쳐 안고 계단을 내려갔다⁠.

*

흑요성 아래 마을은 성벽 바깥 붉은 흙 언덕에 있었다⁠. 언덕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천막이 빼곡했다⁠. 시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소리가 먼저 왔다⁠. 쇠 망치 소리⁠, 짐승 우는 소리⁠, 마계 말로 흥정하는 소리⁠, 아이들이 뛰는 소리⁠. 소리마다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마족의 목소리에는 원래 쇠가 들어 있었다⁠.

시장 어귀에 칼과 창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일 년에 하루⁠, 칼을 성문 밖에 두고 들어오는 날이라고 도르마가 말했었다⁠. 칼 산 옆에서 붉은발톱 가문 전사들이 창을 팔고 있었다⁠. 팔면서도 창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언덕 한가운데 가장 큰 천막이 검었다⁠. 「⁠흑요성 공식⁠」 깃발이 천막 꼭대기에서 펄럭였다⁠. 천막 앞 줄이 언덕을 세 바퀴 돌았다⁠. 줄 선 마족들의 허리띠와 뿔에서 키링이 짤랑거렸다⁠. 회색은 쇠뿔⁠, 은색은 은비늘⁠, 검은색은 검은깃⁠, 연보라는 밤나비⁠. 볼 빨간 마왕 얼굴이 일곱 가지 색으로 언덕을 덮었다⁠. 천막 안에서 연두가 아르바이트생 셋과 마족 짐꾼 열과 함께 키링을 나눠 주고 있었다⁠. 도르마가 정한 규칙대로 값은 받지 않았다⁠. 손에 쥐여 주기만 했다⁠.

내 자리는 언덕 맨 아래 가장자리였다⁠. 돌이빨 가문의 소금 장수와 안개꼬리 가문의 향 장수 사이⁠, 돌 판대 하나⁠. 우리는 판대 위에 소리 표를 늘어놓았다⁠. 학원옥상이 판대 앞에 직접 그린 종이 간판을 세웠다⁠. 「⁠3층 · 누르면 소리 남⁠」 한글이었다⁠. 마족들은 한글을 읽지 못했다⁠.

마족들이 지나갔다⁠. 판대 위의 종이를 흘끗 보고 지나갔다⁠. 하나가 종이 표를 집어 냄새를 맡더니 도로 내려놓았다⁠. 하나는 종이 표를 손가락으로 튕겨 보고 웃었다⁠. 키링에 비해 종이는 초라했다⁠. 검은 천막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언덕 아래까지 내려왔다⁠.

“⁠방장님⁠.⁠” 삼각김밥폐기담당이 말했다⁠. “⁠눌러 보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 마계 말 못 하잖아⁠.⁠”

“⁠몸으로요⁠.⁠”

삼각김밥폐기담당이 소리 표 하나를 들고 판대 앞으로 나갔다⁠. 지나가는 안개꼬리 마족 앞에서 단추를 눌렀다⁠. 딸깍 소리⁠, 숨 참는 소리⁠, 「⁠한 번 더⁠!⁠」 안개꼬리 마족이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꼬리에 감겨 있던 안개가 흩어졌다⁠. 마족은 우리를 노려보고 빠른 걸음으로 가 버렸다⁠. 향 장수가 웃었다⁠. 마계 말로 무어라 했는데 비웃는 소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반대편의 돌이빨 소금 장수는 웃지 않았다⁠. 돌처럼 네모난 이빨을 가진 늙은 마족이었다⁠. 소금 장수가 판대 너머로 손을 뻗어 소리 표 하나를 집었다⁠. 단추를 눌렀다⁠. 「⁠한 번 더⁠!⁠」 소금 장수가 귀를 기울였다⁠. 다시 눌렀다⁠. 「⁠한 번 더⁠!⁠」 소금 장수는 표를 내려놓지 않고 소금 자루 옆에 세워 두었다⁠. 손님이 없을 때마다 눌렀다⁠. 오후 내내 언덕 아래 가장자리에서 「⁠한 번 더⁠」가 띄엄띄엄 울렸다⁠. 소금 장수의 네모난 이빨 사이로 휘파람 같은 소리가 따라 나왔다⁠. 뿔은 울지 않았다⁠. 돌이빨 가문의 뿔은 돌처럼 단단해서 백 년 동안 아무것에도 울지 않았다고 했다⁠.

정오까지 우리가 손에 쥐여 준 소리 표는 서른일곱 장이었다⁠. 대부분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단추를 누르고 「⁠한 번 더⁠」가 나오면 깔깔 웃고⁠, 다시 누르고 또 웃었다⁠. 뿔은 울지 않았다⁠. 아이들 뿔은 아직 말랑했다⁠.

*

오후 두 시⁠, 판대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붉은 정장이 아니었다⁠. 가르쉬는 마계에서는 붉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중절모 대신 짧게 잘린 뿔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뒤에 붉은발톱 전사 넷이 서 있었다⁠. 하나는 부산 비상계단에서 내 모래봉을 받아 간 젊은 전사였다⁠. 젊은 전사는 나를 보고 눈을 피했다⁠.

가르쉬가 판대 위의 소리 표 하나를 집었다⁠. 「⁠붉은 달 전야 · 3층 · 한 번 더 · 좌석 아무 데나⁠」 글씨를 읽지 못하는 얼굴로 표를 뒤집어 보았다⁠. 단추를 눌렀다⁠.

딸깍⁠. 딸깍⁠, 딸깍⁠, 딸깍⁠. 숨 참는 소리⁠. 쇠뿔 가문의 낮은 화음⁠. 인간의 높은 목소리⁠. 그리고 웅⁠, 웅⁠, 웅⁠. 붉은 후드 셋의 뿔⁠.

가르쉬의 손이 멈췄다⁠. 노란 눈의 세로 동공이 가늘어졌다⁠. 뒤에 선 젊은 전사가 숨을 들이켰다⁠. 사십 초가 끝나기 전에 가르쉬가 주먹을 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칩이 찌직 하고 소리를 내다 멎었다⁠.

“⁠제 전사 셋의 뿔 소리를 팔고 계시는군요⁠.⁠”

“⁠안 팔아요⁠. 나눠요⁠. 값 안 받는 거 아시잖아요⁠.⁠”

“⁠값을 안 받으면 더 비쌉니다⁠.⁠” 가르쉬가 구겨진 표를 판대 위에 내려놓았다⁠. 정중하게⁠, 펴서 내려놓았다⁠. “⁠분식집에서 거절하셨지요⁠. 아가씨가 이기도록 도와드리겠다고 했는데⁠. 아가씨는 혼자 하겠다고 했고⁠, 오늘 보니 혼자서는 서른일곱 장이군요⁠. 마왕 쪽은 만 장이 넘었습니다⁠.⁠”

“⁠해 질 때까지 아직 많이 남았어요⁠.⁠”

“⁠그렇지요⁠. 그러니 제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가르쉬가 몸을 돌렸다⁠. 붉은발톱 전사 넷이 뒤따랐다⁠. 젊은 전사만 한 발 늦었다⁠. 젊은 전사는 판대 위의 구겨진 표를 보고⁠, 나를 보고⁠, 아무것도 집지 않고 가르쉬를 따라갔다⁠. 허리띠 안쪽에서 노란빛이 아주 잠깐 새어 나왔다⁠.

*

불은 오후 네 시에 났다⁠. 언덕 위 검은 천막 지붕에서 연기가 먼저 올랐다⁠. 불붙은 창이 천막 지붕에 꽂혀 있었다⁠. 둘⁠, 셋⁠, 넷⁠. 천막 천이 바싹 말라 있었다⁠. 불길이 지붕을 타고 옆 천막으로 번졌다⁠. 옆 천막에서 다시 옆 천막으로⁠. 붉은 흙 언덕에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아래로 불었다⁠. 불이 언덕을 타고 내려왔다⁠.

시장이 비명으로 찼다⁠. 마족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키링이 짤랑거리는 소리와 비명이 뒤섞였다⁠. 나는 판대 앞에서 언덕 위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천막이 무너지고 있었다⁠. 천막 안에 연두가 있었다⁠.

“⁠상자 들고 아래로⁠! 성문까지 가⁠!⁠”

열 명에게 소리를 지르고 나는 언덕을 거슬러 올라갔다⁠. 마족들의 어깨에 부딪쳤다⁠. 하늘색 수건이 누군가의 뿔에 감겨 목이 졸렸다가 풀렸다⁠. 연기가 눈을 찔렀다⁠. 검은 천막 앞에서 연두가 키링 상자를 끌어내고 있었다⁠. 머리카락 끝이 그을려 있었다⁠. 아르바이트생 셋은 이미 짐꾼들과 함께 빠져나간 뒤였다⁠. 연두 혼자였다⁠.

“⁠두고 와⁠!⁠”

“⁠이거 이만 개야⁠!⁠”

“⁠두고 오라고⁠!⁠”

연두가 상자를 놓지 않았다⁠. 나는 연두가 끌던 상자의 반대편 손잡이를 잡았다⁠. 둘이 상자 하나를 들고 연기 속을 걸었다⁠. 다시 들어가 하나를 더 끌어냈다⁠. 세 번째에 천막 기둥이 무너졌다⁠. 불똥이 쏟아졌다⁠. 나는 연두의 팔을 잡아 뒤로 당겼다⁠. 연두가 기침을 했다⁠. 연기를 너무 마셔서 속이 불편해 보였다⁠. 연두는 무너진 천막을 보고 주저앉았다⁠. 상자 둘이 우리 옆에 있었다⁠. 삼백 개쯤 남은 상자였다⁠.

“⁠이만 개였는데⁠.⁠”

연두가 말했다⁠. 그을린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언덕 옆 골목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났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럿이었다⁠. 연기가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마계 말로 서로를 부르는 가는 목소리⁠. 은비늘 아이들이었다⁠. 성 동쪽 탑에서 내려와 시장 구경을 왔던 열넷이었다⁠. 연기 때문에 길을 잃은 것이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판대에서 챙겨 온 소리 표 한 장이 있었다⁠. 골목 입구로 달려가 표를 머리 위로 들고 단추를 눌렀다⁠.

딸깍⁠. 딸깍⁠, 딸깍⁠, 딸깍⁠.

“⁠한 번 더⁠!⁠”

녹음 속의 삼천이 외쳤다⁠. 연기 속에서 울음소리가 멎었다⁠. 나는 한 번 더 눌렀다⁠. 「⁠한 번 더⁠!⁠」 연기 너머에서 가는 목소리가 따라 했다⁠.

“⁠한 번 더⁠!⁠”

받침 없는 「⁠한 버 더⁠」였다⁠. 동쪽 탑에서 내가 가르친 응원법이었다⁠. 연기 속에서 은빛 비늘이 하나 반짝였다⁠. 둘⁠, 다섯⁠, 열⁠. 아이들이 소리를 따라 골목을 빠져나왔다⁠. 맨 앞의 가장 작은 아이가 내 다리에 매달렸다⁠. 내 무릎에 올라와 모래봉 단추를 누르던 아이였다⁠. 아이가 내 손에서 소리 표를 받아 들고 단추를 눌렀다⁠. 딸깍⁠. 「⁠한 번 더⁠!⁠」 아이가 울면서 웃었다⁠.

열넷을 다 셌다⁠. 연두가 뒤에서 아이 둘을 안고 있었다⁠.

*

언덕 아래 성문 앞에서 쇳소리가 났다⁠. 사람이 쇠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나는 아이들을 연두에게 맡기고 달려갔다⁠. 성문 옆 무너진 천막 사이에서 바르덴이 가르쉬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가르쉬의 등이 성벽에 붙어 있었다⁠. 바르덴의 뿔에서 불꽃이 튀었다⁠. 붉은 눈이 아니라 하얗게 타는 눈이었다⁠. 바르덴의 다른 손에 검은 칼이 들려 있었다⁠. 칼날이 가르쉬의 목에 닿아 있었다⁠.

“⁠시장에 칼을 들이지 않는 날이다⁠.⁠” 바르덴의 목소리는 하오체가 아니었다⁠. “⁠네가 법을 깼다⁠.⁠”

“⁠폐하도 지금 칼을 드셨습니다⁠.⁠” 가르쉬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했다⁠. 목에 칼이 닿아 있어서 조금 떨렸다⁠.

“⁠안 돼요⁠!⁠”

내가 소리쳤다⁠. 바르덴이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바르덴의 칼 든 팔을 붙잡았다⁠. 팔이 뜨거웠다⁠. 손바닥이 데었다⁠. 놓지 않았다⁠.

“⁠죽이면 내일 전쟁이에요⁠! 축제 전날 마왕이 가주를 죽였다고⁠! 붉은발톱 이천 명이 축제 무대로 와요⁠! 우담이 서 있을 무대로요⁠!⁠”

바르덴의 팔이 떨렸다⁠. 칼날이 가르쉬의 목에서 한 치 떨어졌다⁠. 다시 붙었다⁠. 다시 떨어졌다⁠. 시장에 불타는 소리만 들렸다⁠. 천막 기둥이 무너지는 소리⁠. 멀리서 아이 하나가 소리 표를 누르는 소리⁠. 「⁠한 번 더⁠!⁠」

바르덴이 칼을 내렸다⁠. 멱살을 놓았다⁠. 가르쉬가 성벽을 짚고 숨을 골랐다⁠. 목에 가는 붉은 줄이 나 있었다⁠. 가르쉬는 나를 보았다⁠. 처음으로 정중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아가씨가 왜 저를 살립니까⁠?⁠”

“⁠그쪽 살린 거 아니에요⁠. 내일 살린 거예요⁠.⁠”

가르쉬는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돌려 불타는 언덕을 올라갔다⁠. 붉은발톱 전사들이 뒤따랐다⁠. 젊은 전사가 맨 뒤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

지팡이 방울 소리가 났다⁠. 도르마가 성문 그늘에서 걸어 나왔다⁠. 하얀 머리에 재가 앉아 있었다⁠. 도르마는 무너진 시장을 오래 보았다⁠. 연두가 끌어낸 키링 상자 둘⁠, 우리 열 명이 성문까지 들고 온 소리 표 상자 하나⁠. 상자 하나는 반쯤 타 있었다⁠.

“⁠해가 졌다⁠.⁠” 도르마가 말했다⁠. “⁠판정은 내일 새벽에 한다⁠. 둘 다 남은 걸 들고 와라⁠.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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