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296자)

열압착기

피켓팅 상대가 마왕? · 소하린

6월 23일 밤⁠, 잠실 하역장⁠. 천장 너머에서는 발레 공연의 마지막 막이 오르고 있었다⁠. 현악기 소리가 가늘게 내려왔다⁠. 도르마는 녹색 철문 앞에 지팡이를 세우고 서 있었다⁠. 오늘은 바르덴이 없었다⁠. 마왕은 축제 준비로 흑요성을 비울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 판⁠.⁠” 도르마가 말했다⁠. “⁠붉은 달이 뜨기 전날⁠, 흑요성 아래 마을에 전야 시장이 선다⁠. 일곱 가문이 다 모인다⁠. 칼을 성문 밖에 두고 들어오는 날은 일 년에 그날 하루다⁠.⁠”

“⁠붉은발톱도요⁠?⁠”

“⁠가르쉬도 온다⁠. 시장에서 창을 판다⁠. 쯧⁠.⁠” 도르마가 방울을 한 번 흔들었다⁠. “⁠각자 굿즈를 하나씩 내놓는다⁠. 해가 질 때까지 시장에 온 마족들이 굿즈를 손에 쥔다⁠. 나는 시장을 걸으며 듣는다⁠. 마족들이 쥔 굿즈에서 무엇이 나는지⁠. 해가 지면 판정한다⁠.⁠”

“⁠사람들이 많이 사 간 쪽이 이기는 거예요⁠?⁠”

“⁠많이 팔린 것은 시장 상인이 셀 일이다⁠. 나는 뿔로 듣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막막해졌다⁠. 마족이 쥔 굿즈에서 무엇이 나는지를 듣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반쯤만 알아들었다⁠.

“⁠아가씨⁠.⁠”

도르마가 철문 손잡이를 잡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모래알 광장 글⁠, 나도 읽었다⁠. 그 인간 녀석이 읽어 줬다⁠.⁠”

“⁠우담이요⁠?⁠”

“⁠이름은 내 입으로 말 안 한다⁠.⁠” 도르마가 손잡이를 돌렸다⁠. 현악기가 높이 올라가는 순간 문이 열렸다⁠. “⁠백 년 전 붉은발톱 가객은 목이 갈라진 걸 숨기려다 무대에서 쫓겨났다⁠. 숨기지 않았으면 어땠을지⁠, 늙은이는 백 년 동안 궁금했다⁠. 쯧⁠.⁠”

*

6월 23일 자정⁠, 성내동 반지하⁠. 연두가 두고 간 열압착기와 내 노트북과 마흔한 명 가운데 열네 명이 있었다⁠. 반지하에 열네 명이 들어오자 공기가 탁해졌다⁠. 누가 선풍기를 틀었다⁠. 선풍기 바람에 아크릴 판 보호 필름이 날아다녔다⁠. 나머지 스물일곱 명은 오픈채팅방 영상 통화로 들어와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 얼굴 스물일곱 개가 바둑판처럼 떴다⁠.

“⁠포토카드 어때요⁠?⁠” 편의점 야간 알바가 말했다⁠. 이름은 몰랐다⁠. 오픈채팅 닉네임이 「⁠삼각김밥폐기담당⁠」이었다⁠.

“⁠마족은 사진 안 찍는대요⁠. 거울도 안 좋아한대요⁠.⁠” 내가 말했다⁠.

“⁠응원봉 커버⁠?⁠”

“⁠마족한테 응원봉이 없어요⁠.⁠”

“⁠그럼 뿔 커버⁠.⁠”

다들 웃었다⁠. 영상 통화 속 얼굴 스물일곱 개가 동시에 웃어서 노트북 스피커가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재수생 하나가 손을 들었다⁠. 닉네임 「⁠학원옥상⁠」이었다⁠. 「⁠한 번 더⁠」 챌린지 영상을 학원 옥상에서 찍은 스무 살이었다⁠.

“⁠방장님⁠. 마족은 뿔이 소리 들으면 운다면서요⁠.⁠”

“⁠응⁠.⁠”

“⁠그럼 소리를 파는 건 어때요⁠? 생일 카드 펼치면 노래 나오는 거 있잖아요⁠. 녹음 칩이요⁠. 방산시장 가면 개당 육백 원에 팔아요⁠. 저 수능 끝나고 엄마 생신 카드 만들 때 사 봤어요⁠.⁠”

반지하가 조용해졌다⁠. 선풍기만 돌았다⁠. 나는 학원옥상을 보았다⁠. 학원옥상은 손을 든 채 얼굴이 빨개졌다⁠.

“⁠종이로 표를 만들자⁠.⁠” 내가 말했다⁠. “⁠콘서트 표처럼⁠. 표 가운데 단추를 붙이고⁠, 누르면 소리가 나는 거야⁠.⁠”

“⁠무슨 소리요⁠?⁠”

“⁠그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족이 쥐었을 때 뿔이 울 소리⁠. 우담의 노래는 안 됐다⁠. 노래 녹음은 기획사 것이었고⁠, 겨루기에 우담을 끌어들이면 반칙이었다⁠. 3층 「⁠한 번 더⁠」는 마족이 들어 본 적 없는 인간들의 소리였다⁠. 들어 본 적 없는 소리로 뿔이 울까⁠. 나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모르겠다고 말하는 방장을 마흔한 명이 기다려 주었다⁠.

돈은 모았다⁠. 규칙은 하나였다⁠. 웃돈 금지⁠. 각자 낼 수 있는 만큼만⁠. 내 통장의 칠만 원을 먼저 넣었다⁠. 삼각김밥폐기담당이 십만 원을 넣었다⁠. 학원옥상이 이만 원을 넣고 「⁠다음 달 용돈 받으면 더 넣을게요⁠」라고 썼다⁠. 새벽 두 시에 모인 돈은 백이십만 원이었다⁠. 녹음 칩 이천 개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연두의 키링 이만 개의 십분의 일이었다⁠.

*

6월 24일 아침⁠, 방산시장⁠. 포장 재료 가게들이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비닐 냄새와 종이 먼지 냄새가 골목을 채웠다⁠. 학원옥상이 앞에서 걸었다⁠. 생일 카드 녹음 칩을 파는 가게는 골목 맨 끝이었다⁠. 사장님이 칩 이천 개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학생들 무슨 행사 해⁠?⁠”

“⁠축제요⁠.⁠”

“⁠무슨 축제를 칩 이천 개로 해⁠?⁠”

“⁠마계요⁠.⁠”

사장님이 웃었다⁠. 농담인 줄 알았다⁠. 칩 상자를 수레에 싣고 골목을 나오다가 나는 걸음을 멈췄다⁠. 골목 입구에 일 톤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트럭 짐칸에 아크릴 원판 상자가 산처럼 실려 있었다⁠. 트럭 옆에서 연두가 아르바이트생 셋에게 상자 개수를 세게 하고 있었다⁠. 검은 앞치마 차림이었다⁠.

연두가 나를 보았다⁠. 내 수레의 칩 상자를 보았다⁠. 상자 겉에 「⁠녹음 모듈 · 생일 카드용⁠」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연두의 눈이 상자 글씨에 오래 머물렀다⁠.

“⁠칩이네⁠.⁠”

“⁠응⁠.⁠”

“⁠소리 굿즈 하려고⁠?⁠”

“⁠말 안 해⁠.⁠”

“⁠말 안 해도 보이는데⁠.⁠”

아르바이트생 셋이 우리를 번갈아 보다가 슬금슬금 트럭 뒤로 사라졌다⁠. 학원옥상도 수레를 끌고 골목 안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연두가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나 이만 개 더 주문받았어⁠. 일곱 가문 색 다 넣어서⁠. 아르바이트생 셋 월급 줘야 돼⁠. 작업실 월세도 내야 돼⁠. 네가 이기면 계약 끝나⁠.⁠”

“⁠바르덴이 겨루기랑 상관없이 계약 지킨다고 했잖아⁠.⁠”

“⁠마왕님은 그렇게 말해⁠. 근데 축제가 안 열리면 축제 굿즈를 누가 사⁠.⁠” 연두가 트럭 짐칸을 손바닥으로 쳤다⁠. “⁠내 키링 달고 웃는 마족들 사진 봤어⁠? 쇠뿔 할머니들이 회색 키링 받고 울었대⁠. 그거 내가 만든 거야⁠. 처음으로 내 손으로 만든 걸로 누가 울었어⁠.⁠”

“⁠내가 지면 우담이 붉은발톱 이천 명 앞에 서⁠.⁠”

“⁠알아⁠. 그것도 알아⁠.⁠”

연두가 고개를 돌렸다⁠. 트럭 사이드미러에 연두의 얼굴이 비쳤다⁠.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나는 수레 손잡이를 꽉 쥐었다⁠. 손바닥에 남은 열압착기 손잡이 자국이 아직 빨갰다⁠.

“⁠우리 둘 다 맞으면 어떡해⁠?⁠” 연두가 물었다⁠.

“⁠그럼 둘 다 열심히 하는 거지⁠.⁠”

“⁠너 그런 말 할 줄도 아네⁠.⁠”

연두가 트럭 조수석 문을 열었다⁠. 올라타다가 멈추고 한마디를 보탰다⁠.

“⁠칩은 단추 위에 바로 붙이지 마⁠. 열압착기 열에 칩 녹아⁠. 종이를 먼저 찍고 칩은 나중에 붙여⁠.⁠”

트럭이 떠났다⁠. 골목 안에서 학원옥상이 수레를 끌고 나왔다⁠.

“⁠방장님⁠, 저분이 연두상회 사장님이에요⁠? 적인데 왜 알려 줘요⁠?⁠”

“⁠적이라서⁠.⁠”

학원옥상은 이해 못 한 얼굴이었다⁠. 나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

밤 열 시부터 표를 찍었다⁠. 표 모양은 내가 그렸다⁠. 3층 R구역 끝자리 표를 본떴다⁠. 종이에 「⁠붉은 달 전야 · 3층 · 한 번 더⁠」라고 넣었다⁠. 좌석 번호 칸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으려다가⁠, 「⁠아무 데나⁠」라고 넣었다⁠. 마족 누구라도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종이를 열압착기로 코팅해 빳빳하게 하고⁠, 칩을 붙이고⁠, 단추를 붙였다⁠. 학원옥상이 칩 붙이는 손이 제일 빨랐다⁠. 삼각김밥폐기담당은 편의점 야간을 마치고 새벽 한 시에 왔다⁠.

새벽 세 시⁠, 마지막으로 소리를 정해야 했다⁠. 칩은 녹음된 소리를 하나만 담을 수 있었다⁠. 이천 개 모두 같은 소리였다⁠. 열네 명이 작업대 둘레에 모여 나를 보았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녹음 앱을 열었다⁠. 맨 위에 파일이 하나 있었다⁠. 「⁠새 녹음 47⁠」 31분 47초⁠. 광주 막공이었다⁠. 진 판이었다⁠. 지고 나서 한 번도 열어 보지 않은 파일이었다⁠.

재생을 눌렀다⁠.

비명⁠. 의자 넘어지는 소리⁠. 「⁠움직이지 마세요⁠」 그리고 딸깍⁠. 딸깍⁠, 딸깍⁠, 딸깍⁠. 모래봉 단추가 3층 끝에서부터 번져 나가는 소리였다⁠. 내 목소리가 첫 소절을 불렀다⁠. 작고 떨렸다⁠. 삼천이 따라 불렀다⁠. 그리고 낮은 화음이 들어왔다⁠. 쇠뿔 가문 스무 명이었다⁠. 화음 위에 인간의 목소리가 얹혔다⁠. 숨 참는 자리⁠. 반지하의 열네 명이 휴대전화 앞에서 다 같이 숨을 참았다⁠. 웅⁠. 웅⁠. 웅⁠. 붉은 후드 셋의 뿔⁠. 「⁠한 번 더⁠!⁠」 그리고 크고 둥근 웅⁠. 도르마였다⁠.

반지하가 조용했다⁠. 학원옥상이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이거요⁠.⁠”

“⁠이건 진 판이야⁠.⁠”

“⁠진 판인데 이거예요⁠. 인간이랑 마족이 같이 부른 거잖아요⁠.⁠”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진 판의 소리를 이긴 판에 쓴다⁠. 바르덴의 아이들이 낸 화음까지 담아서⁠. 이런 일이 반칙인지 아닌지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도르마가 정할 일이었다⁠. 나는 녹음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숨 참는 자리부터 「⁠한 번 더⁠」가 끝나고 도르마의 뿔이 우는 자리까지⁠. 사십 초였다⁠. 칩에 들어가는 길이가 사십 초였다⁠.

*

자정을 한참 넘겨 새벽 세 시 반⁠, 열압착기가 멈췄다⁠. 손잡이를 내렸는데 쉭 소리가 나지 않았다⁠. 빨간 대기등이 꺼지고 작은 화면에 「⁠E3⁠」이 떴다⁠. 다시 켜도 「⁠E3⁠」 전원을 뽑았다 꽂아도 「⁠E3⁠」 남은 표는 천이백 장이었다⁠. 아침 아홉 시까지 철문을 넘어야 했다⁠.

열네 명이 열압착기를 둘러쌌다⁠. 삼각김밥폐기담당이 휴대전화로 「⁠열압착기 E3⁠」을 검색했다⁠. 「⁠히터 과열 차단 — 서비스 센터 문의⁠」 서비스 센터는 아침 아홉 시에 문을 열었다⁠.

나는 연두에게 메시지를 쓰다가 지웠다⁠. 적에게 기계를 고쳐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지운 메시지 칸 위에 「⁠입력 중⁠」 표시가 떴다⁠. 연두가 무언가 쓰고 있었다⁠. 연두의 「⁠입력 중⁠」이 떴다가 사라지고⁠, 다시 떴다가 사라졌다⁠.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새벽 네 시⁠, 반지하 문이 열렸다⁠. 연두가 공구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머리에 아크릴 가루가 하얗게 붙어 있었다⁠. 연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열네 명 사이를 지나 열압착기 앞에 쪼그려 앉았다⁠. 뒤판 나사 넷을 풀었다⁠. 안을 들여다보고 「⁠역시⁠」라고 중얼거렸다⁠. 공구 가방에서 작은 퓨즈를 꺼내 갈아 끼웠다⁠. 뒤판을 닫았다⁠. 전원을 꽂았다⁠. 빨간 대기등이 켜졌다⁠.

“⁠판을 먼저 데우라니까⁠. 차가운 판을 계속 밀어 넣으니까 히터가 혼자 버티다 끊긴 거야⁠.⁠”

“⁠어떻게 알았어⁠?⁠”

“⁠오픈채팅방⁠. 나 아직 안 나갔어⁠.⁠” 연두가 공구 가방을 닫았다⁠. “⁠마흔두 번째야⁠.⁠”

연두가 일어나다가 작업대 위의 소리 표 하나를 보았다⁠. 견본으로 하나 먼저 완성해 둔 것이었다⁠. 연두가 표를 집어 들었다⁠. 「⁠붉은 달 전야 · 3층 · 한 번 더 · 좌석 아무 데나⁠」 연두가 단추를 눌렀다⁠.

모래봉 단추들이 딸깍거리는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숨 참는 소리⁠. 낮은 화음⁠. 「⁠한 번 더⁠!⁠」 웅⁠.

연두가 표를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사십 초가 다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녹음이 끝나고 칩이 찍 소리를 내며 멈췄다⁠. 연두가 표를 작업대에 내려놓았다⁠.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내일은 안 봐줘⁠.⁠”

연두가 문을 나갔다⁠. 계단 열두 개를 올라가는 발소리가 났다⁠. 열압착기 손잡이를 내렸다⁠. 쉭⁠. 하얀 김이 반지하 천장으로 올라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나는 여덟에서 손잡이를 올렸다⁠.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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