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86자)

고백

피켓팅 상대가 마왕? · 소하린

6월 21일 오후 네 시⁠, 기말고사가 끝났다⁠. 행정법 답안지 마지막 줄에 나는 「⁠이상입니다⁠」라고 썼다가 지웠다⁠. 지운 자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냈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라볶이를 시켰다⁠. 사장님이 라면 사리를 하나 더 넣어 주었다⁠. 시험 끝난 날마다 넣어 주는 사리였다⁠.

국물을 한 숟가락 떴을 때 맞은편 의자가 뒤로 밀렸다⁠. 가르쉬가 앉았다⁠. 붉은 정장에 중절모⁠. 분식집 플라스틱 의자가 가르쉬의 몸에 눌려 끼익 소리를 냈다⁠. 가르쉬는 중절모를 벗어 옆 의자에 올려놓고 사장님을 향해 손을 들었다⁠.

“⁠순대 한 접시 부탁드립니다⁠. 간도 같이 주시겠습니까⁠?⁠”

“⁠예⁠, 예⁠.⁠” 사장님이 가르쉬의 짧은 뿔을 보고 나를 보았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대를 썰었다⁠.

“⁠시험은 잘 보셨습니까⁠?⁠”

“⁠볼일만 말해요⁠.⁠”

“⁠성격이 급하십니다⁠. 그래서 0⁠.1초에 지셨나 봅니다⁠.⁠”

가르쉬가 휴대전화를 탁자에 올려놓고 화면을 내 앞으로 밀었다⁠. 표마켓 거래 내역 캡처였다⁠. 2025년 12월 14일⁠. 「⁠모래시계 팬미팅 · 2층 B구역 · 판매가 450⁠,000원 · 판매자 표나는팬⁠」 아래에 구매자 아이디 끝 세 글자가 가려져 있었다⁠. 화면 귀퉁이에 내 옛 프로필 사진이 작게 박혀 있었다⁠. 하늘색 수건을 두른 내 뒷모습이었다⁠.

라볶이 국물에서 김이 올라왔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가씨와 저는 같은 것을 원한다고 부산에서 말씀드렸지요⁠.⁠” 가르쉬가 말했다⁠. “⁠저 가수가 마계에 오지 않는 것⁠. 그러려면 아가씨가 마지막 판을 이기셔야 합니다⁠.⁠”

“⁠그래서요⁠?⁠”

“⁠이기게 해 드리겠습니다⁠. 붉은발톱에는 대장장이가 백 명 있습니다⁠. 쇠를 다루는 손이니 아크릴쯤은 금방 배웁니다⁠. 아가씨가 무엇을 만들든 하룻밤에 만 개를 만들어 드리지요⁠. 그리고 마왕 쪽 공장의 재료가 마계로 넘어가는 길도 조금 늦어질 겁니다⁠. 철문 앞 하역장은 복잡하니까요⁠.⁠”

“⁠연두 공장이요⁠?⁠”

“⁠곽연두라는 분이지요⁠. 손이 빠르다고 들었습니다⁠.⁠”

사장님이 순대 접시를 내려놓았다⁠. 가르쉬가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쑤시개로 간 한 점을 집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거절하시면 오늘 밤 아홉 시에 이 화면이 모래알 광장에 올라갑니다⁠. 오픈채팅방에도요⁠. 아가씨를 따르는 팬이 삼천이백이지요⁠. 리셀 금지를 외친 방장이 리셀러였다는 것을 알면 몇이 남을까요⁠?⁠”

“⁠그쪽 손 잡으면 우담은 안 가고 전쟁은 계속되고 붉은발톱 전사들은 밥 먹는 거죠⁠.⁠”

“⁠정확하십니다⁠.⁠”

“⁠은비늘 아이들은요⁠?⁠”

가르쉬가 간을 씹다가 멈췄다⁠. 아주 짧게 멈췄다가 다시 씹었다⁠.

“⁠은비늘 아이들은 은비늘 가주가 먹입니다⁠. 각자 자기 가문을 먹이는 것이 마계의 법입니다⁠.⁠” 가르쉬가 이쑤시개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아홉 시까지 생각해 보십시오⁠. 순대는 제가 사겠습니다⁠.⁠”

가르쉬가 일어나 계산대에 금화를 한 닢 내려놓았다⁠. 사장님이 금화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가르쉬는 「⁠거스름돈은 됐습니다⁠」 하고 중절모를 쓰고 나갔다⁠. 사장님이 금화를 이빨로 깨물어 보았다⁠. 구문팔과 똑같은 동작이었다⁠.

나는 식은 라볶이 앞에 앉아 있었다⁠. 손이 떨려서 숟가락을 쥘 수가 없었다⁠.

“⁠제가 이기는 건 제 손으로 해요⁠.⁠”

가르쉬는 이미 없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맞은편 의자에 대고 말했다⁠. 분식집 사장님이 금화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

밤 여덟 시 사십 분⁠, 나는 원룸 책상 앞에 앉았다⁠. 휴대전화 사진첩을 거꾸로 넘겼다⁠. 2025년 12월까지 한참을 넘겨야 했다⁠. 다섯 해 동안 찍은 모래시계 사진이 만 장이 넘었다⁠. 2025년 12월 14일에 캡처 한 장이 있었다⁠. 가르쉬가 보여 준 것과 같은 화면이었다⁠. 나는 이 캡처를 지운 적이 없었다⁠. 지우면 없던 일이 되리라 믿어서가 아니었다⁠. 지우는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등록금 고지서도 같은 날짜에 찍혀 있었다⁠. 「⁠미납액 230⁠,000원⁠」 엄마 세탁소 보일러가 2025년 겨울에만 두 번 고장 났다⁠. 엄마는 보일러를 고치고 나서 이번 학기는 반만 대 줄 수 있다고 미안해했다⁠. 팬미팅 표는 이미 사 두었다⁠. 표마켓에 올리자 십 분 만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사십오만 원이었다⁠. 등록금을 내고 남은 돈으로 엄마 세탁소에 핫팩 한 상자를 사 갔다⁠. 팬미팅 날 나는 집에서 인터넷 생중계 댓글만 보았다⁠.

여덟 시 오십 분⁠. 모래알 광장 글쓰기 창을 열었다⁠. 제목 칸에 손가락이 오래 멈춰 있었다⁠.

「⁠3층 모래알 방장입니다⁠. 저 리셀한 적 있어요⁠.⁠」

본문에 캡처 두 장을 붙였다⁠. 표마켓 거래 화면과 등록금 고지서⁠. 고지서를 붙일까 말까 한참 망설였다⁠. 사정을 붙이면 변명이 될 것이었다⁠. 붙이지 않으면 사정을 숨기는 것이 될 것이었다⁠. 나는 붙였다⁠. 그리고 썼다⁠.

「⁠2025년 12월⁠, 팬미팅 표를 십일만 원에 사서 사십오만 원에 팔았습니다⁠. 등록금이 모자랐습니다⁠. 사정이 있었다고 해서 한 일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리셀 금지를 외치면서 이 얘기를 안 했습니다⁠. 오늘 이 화면을 들고 협박하러 온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보다 먼저 올립니다⁠. 제 표를 사신 분께 웃돈 삼십사만 원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쪽지 주세요⁠. 방장은 내려놓겠습니다⁠. 마지막 판은 혼자서라도 하겠습니다⁠.⁠」

여덟 시 오십육 분⁠. 등록 단추를 눌렀다⁠. 딸깍⁠. 같은 글을 「⁠3층 모래알⁠」 공지에 올렸다⁠. 아홉 시 정각⁠, 휴대전화를 엎어 두었다⁠.

*

엎어 둔 휴대전화가 쉬지 않고 떨렸다⁠. 책상 위에서 조금씩 움직이다가 모서리에서 떨어졌다⁠. 나는 줍지 않았다⁠. 열 시에 주웠다⁠. 댓글이 천 개였다⁠.

「⁠실망입니다 진짜로⁠」

「⁠리셀 막자고 협정까지 들어갔다면서요 리셀러가⁠?⁠」

「⁠등록금 사진은 왜 붙임⁠? 불쌍한 척하는 거임⁠?⁠」

「⁠협박한 사람 누구예요 그게 더 무서운데⁠」

「⁠저도 예전에 판 적 있어서 할 말 없음⁠… 근데 방장은 하지 마세요⁠」

「⁠취켓팅 조에서 표 받은 사람인데 정가로 줬던 거 다 기억함⁠. 그래도 좀 충격⁠」

오픈채팅방 인원이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삼천이백에서 이천오백⁠. 자정에 천⁠. 새벽 두 시⁠, 다섯 해 동안 새벽 두 시면 깨어 있던 시각에 삼백⁠. 「⁠○○님이 나갔습니다⁠」 알림이 화면을 끝없이 내려갔다⁠. 나가는 사람들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한 사람이 나가면서 짧게 남겼다⁠. 「⁠광주 떼창 좋았어요⁠. 그래도 나갈게요⁠.⁠」

새벽 세 시⁠, 모래알 광장 운영진에게서 쪽지가 왔다⁠. 「⁠3층 응원 리더 공지 권한과 슬로건 공식 배포 권한을 회수합니다⁠. 운영 원칙에 따른 조치이니 양해 바랍니다⁠.⁠」 나는 「⁠네⁠」라고 답했다⁠. 마침표를 찍었다⁠.

아침 일곱 시⁠. 방 인원은 마흔한 명이었다⁠. 남은 사람들 가운데 몇이 말을 남겼다⁠.

「⁠방장님 그만두시면 이 방 누가 해요⁠」

「⁠저 재수생인데 한 번 더 챌린지 학원 옥상에서 찍은 사람이에요⁠. 남을게요⁠」

「⁠마지막 판 혼자 하지 마세요⁠. 저 손 빨라요⁠. 편의점 야간이라 낮에 비어요⁠」

「⁠저도 표 팔아 본 적 있어요⁠. 그래서 남아요⁠」

마흔한 명이었다⁠. 열여드레 동안 새벽 두 시에 함께 깨어 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였고⁠, 처음 보는 이름도 있었다⁠. 나는 마흔한 개의 이름을 하나씩 눌러 보았다⁠. 프로필 사진 대부분이 3층 끝자리에서 찍은 무대였다⁠. 다들 무대가 손톱만 했다⁠.

*

6월 22일 정오⁠, 쪽지 하나가 왔다⁠. 아이디 끝 세 글자가 가려져 있던 사람이었다⁠.

「⁠2025년 팬미팅 표 산 사람입니다⁠. 계좌 보내 드립니다⁠. 34만 원 받겠습니다⁠.⁠」

인사도 없었다⁠. 원망도 없었다⁠. 계좌 번호만 있었다⁠. 나는 은행 앱을 열었다⁠. 통장에 사십일만 원이 있었다⁠. 6월 편의점 알바비였다⁠. 삼십사만 원을 보냈다⁠. 「⁠이체가 완료되었습니다⁠」 잔액이 칠만 원이 되었다⁠. 오 분 뒤 답이 왔다⁠.

「⁠받았습니다⁠. 광주 정전 때 3층에서 처음 불 켠 분이 방장님이라는 글 봤어요⁠. 그건 잘하셨어요⁠.⁠」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고맙다고 쓰기도 이상했고⁠, 죄송하다고 한 번 더 쓰기도 이상했다⁠. 대신 쪽지 창을 닫지 않고 오래 두었다⁠.

오후 세 시⁠, 메일이 왔다⁠. 바로티켓이었다⁠.

「⁠회원님의 계정은 다수의 부정 거래 이력 신고에 따라 이용이 제한되었습니다⁠. 제한 기간 동안 예매·취소표 예매·양도 기능을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제한 기간⁠: 2027년 6월 22일 ~ 2028년 6월 21일⁠.⁠」

한 해였다⁠. 나는 노트북을 켜고 바로티켓에 로그인했다⁠. 아이디를 넣고 비밀번호를 넣고 로그인 단추를 눌렀다⁠. 「⁠이용이 제한된 계정입니다⁠」 다시 눌렀다⁠. 같은 글자가 떴다⁠. 다섯 해 동안 단련한 검지가 F5 위에 있었다⁠. 누를 곳이 없었다⁠.

해가 질 무렵 원룸 창밖 골목에서 웅 소리가 났다⁠. 창을 열자 가로등 아래에 바르덴이 있었다⁠. 비니를 쓰지 않았다⁠. 뿔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골목을 지나던 배달 오토바이가 바르덴을 보고 속도를 줄였다가 다시 냈다⁠.

“⁠그대가 말하고 싶을 때 듣겠다고 했소⁠.⁠” 바르덴이 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들었소⁠. 모래알 광장에서⁠.⁠”

“⁠그래서요⁠? 위로하러 오셨어요⁠?⁠”

“⁠아니오⁠. 짐은 위로를 잘 못하오⁠.⁠” 바르덴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가르쉬가 연두의 재료를 늦추겠다고 했다지⁠. 하역장 길은 짐이 지키겠소⁠. 마지막 판은 공정해야 하오⁠.⁠”

“⁠제 쪽도 막지 마세요⁠. 마왕님이 제 편 들어 주면 그것도 반칙이에요⁠.⁠”

“⁠알고 있소⁠. 그래서 그대 편은 들지 않겠소⁠.⁠” 바르덴이 잠깐 말을 골랐다⁠. “⁠다만 하나만 말하겠소⁠. 그대가 아홉 시 전에 올린 것은 가르쉬가 처음 겪는 일이오⁠. 붉은발톱은 남의 비밀로 백 년을 싸웠소⁠. 비밀을 먼저 내놓는 자는 처음 보았을 것이오⁠.⁠”

바르덴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골목 끝으로 걸어갔다⁠. 가로등 불빛이 끝나는 자리에서 뿔이 한 번 더 작게 울었다⁠. 나는 창을 닫았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연두였다⁠. 문자가 아니라 전화였다⁠. 연두가 전화를 건 것은 성수동으로 이사 간 뒤 처음이었다⁠.

“⁠왜 혼자 했어⁠.⁠”

연두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밤을 새운 목소리였다⁠. 뒤에서 열압착기 김 빠지는 소리가 났다⁠. 쉭⁠, 쉭⁠.

“⁠네가 같이 하면 너도 욕먹잖아⁠. 너 이제 흑요성 공식이잖아⁠.⁠”

“⁠그래도 말은 해 주지⁠. 나 새벽에 글 보고 알았어⁠. 사람들이 나한테도 물어⁠. 연두상회 사장님도 알고 있었냐고⁠.⁠”

“⁠뭐라고 했어⁠?⁠”

“⁠알았다고 했어⁠.⁠” 연두가 잠깐 말을 멈췄다⁠. “⁠알고도 친구 했다고⁠.⁠”

나는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이용이 제한된 계정입니다⁠」 연두의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열압착기가 한 번 더 쉭 소리를 냈다⁠.

“⁠굿즈 판은 안 봐준다⁠.⁠” 연두가 말했다⁠.

“⁠알아⁠.⁠”

“⁠마흔한 명이랑 해⁠?⁠”

“⁠응⁠.⁠”

“⁠마흔한 명이면 하루에 키링 몇 개 만드는지 알아⁠?⁠”

“⁠몰라⁠.⁠”

“⁠나도 몰라⁠. 그래서 무서워⁠.⁠”

전화가 끊겼다⁠. 나는 노트북을 덮지 않았다⁠. 화면 속 회색 글자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F5를 눌렀다⁠. 「⁠이용이 제한된 계정입니다⁠」 오픈채팅방 알림이 한 번 울렸다⁠. 마흔한 명 가운데 하나가 사진을 올렸다⁠. 편의점 계산대 위에 아크릴 판 열두 장과 커터 칼이 놓여 있었다⁠. 「⁠방장님⁠, 뭐 만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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