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08자)
영 원
무지출 챌린지 단톡방 · 도결애
“회계상 숫자야, 태언아.”
채묘정이 말했다. 카메라 두 대가 돌고 있었고, 채묘정은 카메라를 보지 않았다. 태언만 보았다.
“너는 내 첫 졸업생이야. 네 확인서는 내가 직접 뽑아 줬어. 그 종이가 진짜야.”
“네. 종이는 진짜예요.” 태언이 졸업함 철문에 대고 편 종이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남은 빚 0원 · 졸업」 “삼 년 동안 반 공기만 먹었어요. 빚 있는 사람이 다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졸업하고 나서도 버릇이 안 고쳐졌어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빚이 없는데 왜 배가 아직 이걸 아는지.”
태언이 종이를 네 번 접어 지갑에 다시 넣었다.
“제 배가 맞았어요. 빚이 그대로 있었어요. 천팔백.”
태언이 열쇠를 졸업함 첫 번째 문에 꽂았다. 맨 위 왼쪽이었다. 열쇠가 돌아갔다. 철문이 열렸다. 안에 휴대전화 하나가 누워 있었다. 화면이 꺼진 지 열다섯 달 된 전화기였다. 태언이 전화기를 꺼내 들고 식당을 돌아보았다.
“곰국 님.”
곰국이 움직이지 않았다. 태언이 곰국에게 걸어가 전화기를 넥타이 짧은 셔츠 가슴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확인서가 든 주머니였다. 곰국이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종이와 전화기가 한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꺼내도 퇴소 아니에요.” 태언이 식당 전체에 들리게 말했다. “오늘부터요.”
“그 규칙 내가 만든 거야.” 채묘정이 말했다.
“제가 지켰어요. 삼 년 동안요.” 태언이 두 번째 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가 그만 지킬게요.”
태언은 문을 하나씩 열었다. 서두르지 않았다. 열 때마다 닉네임을 불렀고, 부른 사람에게 걸어가 전화기를 손에 쥐여 주었다. 짠물은 전화기를 받자마자 가슴에 끌어안았다. 이백원은 받은 전화기를 한참 뒤집어 보다가 앞치마에 넣었다. 반지하왕은 받지 않겠다고 손을 저었고, 태언은 반지하왕의 전화기를 식탁 위에 엎어 놓았다. 아홉 번째 문에서 태언이 예림 언니를 불렀다. 예림 언니가 라희의 전화기를 받았다. 금 간 액정 위로 부재중 전화 알림이 수십 개 겹쳐 있었다. 전부 예림 언니가 건 전화였다.
스물네 번째 문은 비어 있었다. 내가 목요일 새벽에 열고 간 문이었다. 태언은 빈 문을 닫지 않고 열어 두었다.
*
태언이 관리인 휴대전화를 꺼냈다. 엄지로 화면을 한참 눌렀다. 사진을 고르는 손이었다. 다 고르고 나서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식당의 휴대전화들이 한꺼번에 울렸다. 방금 켠 전화기들이 열다섯 달 치, 한 달 치, 열흘 치 알림을 토해 내는 사이로 방장 글 알림이 끼어들었다.
「절약왕: 방장입니다. 저는 삼 년 동안 공짜로 살았다고 믿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제 빚은 그대로입니다.」
사진이 붙었다. 이사장실 화면이었다. 「육태언 · 채권액 18,000,000 · 잔액 18,000,000」 그다음 사진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지하 부엌 화이트보드였다. 매주 일요일 밤 지우기 전에 찍어 둔 근무표였다. 「05:00 쌀 — 곰국 · 라희 · 이백원」 사진 속 날짜가 삼 년 전 겨울부터 지난주까지 이어졌다. 태언의 손글씨였다. 같은 손글씨가 백오십 장 넘게 올라갔다.
「절약왕: 식구들이 일한 시간입니다. 제가 직접 적었습니다. 봉사라고 적지 않았습니다. 그냥 시간을 적었습니다.」
단톡방이 멈췄다가 터졌다. 참여자는 육천이백이었다.
「거지왕자: 방장님」
「통장잔고요정: 이거 다 일한 거잖아」
「반값인생: 참을인 님이 말한다던 게 이거였음?」
「딱그때: 지금이 그때다」
창길이 식당 구석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글을 자기가 읽으며.
태언이 관리인 휴대전화를 나에게 내밀었다.
“삼 년 치 다 들어 있어요. 하린 님이 갖고 있어요.”
“방장님은요?”
“저는 밥 일이에요.” 태언이 웃었다. 웃음이 오래가지 않았지만 걷히지도 않았다. “밥 일 말고 다른 일을 찾아봐야죠.”
*
식구들이 저마다 골랐다.
짠물은 식당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동안 앞치마 끈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엄마가 받았다. 짠물이 아주 공손하게 말했다. “엄마, 나 취직한 거 아니야. 미안해. 근데 월급은 받을 거야.” 전화 너머에서 엄마가 무어라 크게 말했고, 짠물은 전화기를 귀에서 조금 뗀 채 울면서 웃었다.
이백원은 2층에 올라가 가방을 들고 내려왔다. 현관 앞에서 나를 보고 안경을 고쳐 썼다.
“계산해 봤어. 받을 돈. 이백 원짜리로 바꾸니까 내 화폐 단위가 너무 작더라.” 이백원이 말했다. “이제 단위 바꿔야겠다. 천 원으로.”
곰국은 남았다. 전화기와 열여섯 번째 확인서를 한 주머니에 넣은 채 식탁에 앉아 있었다.
“나는 진정서는 쓸게. 근데 여기서 쓸래.” 곰국이 느리게 말했다. “밖에 나가면 저녁부터 굶어. 월급 나올 때까지는 여기서 밥 먹을 거야. 이사장님이 쫓아내기 전까지.”
곰국 옆에 졸업생 둘과 반지하왕이 남았다. 2호점 식구들 가운데 반쯤이 남고 반쯤이 승합차에 다시 오르지 않았다. 남는 사람도 나가는 사람도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 모두 배를 따랐다.
채묘정이 이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닫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 서랍에서 귤을 꺼냈다. 껍질을 깠다. 카메라 하나가 열린 문 앞까지 따라갔다. 채묘정이 카메라를 보지 않고 말했다.
“내일 아침 이천 명 밥은 누가 해?”
나는 이사장실 문간으로 갔다. 처음 귤 조각을 받지 않던 자리였다.
“일한 사람들한테 월급 주고 하세요. 그럼 다들 할 거예요.”
채묘정이 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오래 씹었다. 씹으면서 오른쪽 모니터를 보았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 꺼진 화면에 채묘정의 얼굴이 검게 비쳤다. 채묘정은 귤 반쪽을 남긴 채 책상에 내려놓았다. 처음 보는 일이었다. 무엇이든 끝까지 까먹던 손이 귤을 남겼다.
*
오후 네 시, 서른한 명이 진정서에 서명했다. 내가 초안을 썼고, 창길이 영수증을 붙였고, 태언의 근무표 사진이 붙었다. 예림 언니가 맨 위에 서명했다. 라희의 이름은 병실에서 라희가 직접 쓰겠다고 했다. 진정서는 목요일 저녁 노동청에 들어갔다. 구청 사람들이 감사패를 도로 상자에 넣어 가져갔다. 금요일 아침, 신림 고시촌 마흔 곳 가운데 서른 곳이 반찬 계약을 끊었다는 소식이 단톡방에 올라왔다.
저녁 일곱 시, 병실에서 라희가 진정서에 이름을 썼다. 침대 등받이를 세우고, 배를 한 손으로 받치고, 다른 손으로 볼펜을 쥐었다. 설라희. 마지막 획이 조금 떨렸다. 라희는 저녁으로 나온 미음을 한 숟가락 떠서 오래 입에 물고 있다가 삼켰다.
“언니, 내 방 벽에 붙은 확인서 있잖아.” 라희가 나를 보았다. “떼 줘. 아니다, 두라고 해. 곰국 오빠한테. 증거잖아.”
“네가 붙인 거잖아.”
“언니가 눌러 줬잖아. 귀퉁이.” 라희가 웃었다. 웃다가 배를 받쳤다. “그러니까 언니 지문도 있어. 증거야.”
예림 언니가 라희의 미음 그릇을 들어 한 숟가락 더 떠 주었다. 라희는 받아먹고 다시 오래 물고 있었다. 천천히.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같은 시각, 태언은 영원하우스 1층 관리인 방을 비웠다고 했다. 창길이 지나가다 봤다며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빈 방 벽에 테이프 자국 네 개가 남아 있었다. 「남은 빚 0원 · 졸업」이 붙어 있던 자리였다. 종이는 태언의 지갑으로 돌아갔고, 벽에는 네모난 자국만 하얗게 남았다.
내 빚은 그대로였다. 이천백사십만 원. 빚 주인도 그대로 채묘정이었다. 내가 영원하우스에서 일한 열이레 치 월급은 진정서의 서른한 번째 줄에 들어갔다. 언제 나올지는 몰랐다.
*
금요일 새벽 다섯 시 오십구 분, 골목 입구 쌀가게 앞에 도착했다. 쌀가게 셔터는 여섯 시에 올라갔다. 창길이 내 옆에서 휴대전화 시계를 보고 있었다. 반값 스티커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오, 사, 삼.” 창길이 초를 셌다. “이, 일.”
셔터가 올라갔다. 쌀가게 주인이 하품을 하며 형광등을 켰다. 나는 십 킬로그램짜리 쌀 포대를 가리켰다. 「32,900원」 휴대전화 결제를 열었다. 엄지가 화면 위에서 잠깐 멈췄다. 백이십오 일이었다. 1월 2일부터 어제까지, 나는 한 번도 이 화면에 엄지를 올리지 않았다.
엄지를 눌렀다. 단말기가 삑 하고 울었다.
“딱 그때네.” 창길이 말했다.
나는 쌀 포대를 어깨에 메었다. 무거웠다. 무거운 걸 메고 가는 게 버릇이라 어깨가 금방 자리를 찾았다. 걸으면서 단톡방을 열었다. 넉 달 만에 올리는 인증이었다.
「참을인: 오늘 지출 32,900원. 쌀 10kg. 참은 것: 없음.」
답이 금방 달렸다.
「거지왕자: 참을인 님이 돈을 썼다」
「통장잔고요정: 연속 기록 깨짐 축하드려요. 진심」
「컵밥언니: 죽 끓일 거 조금 남겨」
「딱그때: 내 옆에서 씀. 증인 있음」
*
일곱 시, 은행나무고시원 공용 부엌의 작은 함지에 쌀을 쏟았다. 수돗물이 찼다. 영원하우스 지하의 찬물만큼 찼다. 손을 넣자 손목까지 아렸다. 쌀을 움켜쥐었다 놓을 때마다 찬물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손을 빼지 않았다. 참는 손이 아니었다. 씻는 손이었다.
밥솥에 쌀을 안치고 남은 쌀 한 줌은 따로 불렸다. 예림 언니가 병원에 가져갈 죽거리였다. 밥솥 표시등이 「취사」로 바뀌었다. 김이 오르기 시작했다.
208호 재수생이 밥그릇을 들고 내려왔다. 밥솥을 보고, 나를 보았다. 아무 말 없이 식탁에 앉았다. 210호 경찰 시험 준비생도 내려왔다. 나를 보고 잠깐 멈췄다가 밥그릇을 들고 줄 끝으로 갔다. 창길이 김치 통 바닥을 긁어 한 사람 앞에 한 조각씩 놓았다. 「한솥살림」 상표가 붙은 마지막 통이었다.
예림 언니가 보온 도시락을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병원에서 밤을 새우고 온 얼굴이었다.
“죽은?”
“불리고 있어요.”
“천천히 끓여. 걔 천천히 먹는 거 배웠어.” 예림 언니가 식탁에 도시락 통을 놓았다.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나도 한 그릇.”
부엌 문간에 태언이 서 있었다. 텀블러가 없었다. 빈손을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고, 들어올지 말지 문턱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밥솥이 칙칙 울다가 조용해졌다. 표시등이 「보온」으로 바뀌었다. 뚜껑을 열자 김이 부엌 천장까지 올라가 형광등을 흐렸다. 나는 주걱으로 밥을 저어 그릇마다 퍼 담았다. 재수생의 그릇, 경찰 시험 준비생의 그릇, 예림 언니의 그릇. 마지막 그릇에는 주걱을 두 번 눌러 고봉으로 담았다. 회색 후드티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은 손으로 그릇을 들고 문간으로 갔다.
“공짜예요?” 태언이 물었다.
“아니요. 제가 샀어요.”
태언이 그릇을 받았다. 두 손으로. 문턱을 넘어 들어와 식탁 끝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고 밥을 떴다. 반 공기가 지나도 숟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저마다 숟가락 소리를 냈다. 빠른 숟가락도 있었고 느린 숟가락도 있었다. 김이 걷힌 형광등 아래, 태언의 그릇 바닥이 하얗게 드러났다. 밥솥의 보온 표시등이 빨갛게 켜져 있었고, 솥 안에는 아직 밥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