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136자) · 단하 · 섣달 열이틀

스물여섯 섬

초식을 쓸 때마다 내 몸에서 빠져나간다 · 한도윤

고개를 넘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봉삼이 빌려준 손수레는 바퀴 하나가 헐거워서 오르막마다 왼쪽으로 기울었고, 단하는 그때마다 수레 채를 어깨로 받쳐 거적 덮인 장순이 미끄러지지 않게 했다. 눈은 그쳤지만 고갯길 응달에는 밤새 언 눈이 그대로 있어서, 밟으면 발밑에서 사기그릇 깨지는 소리가 났다. 숨을 쉴 때마다 콧속이 달라붙었다.

봉삼은 수레 뒤를 따라왔다. 수레 삯을 받으러 오는 길이라고 했다.

“수레는 하루 삯이 동전 여섯이고, 고개를 넘으면 곱입니다. 돌아오는 길은 빈 수레니까 반만 받지요.”

“셈이 후하구려.”

“사람 실은 수레라서 그렇습니다.” 봉삼이 코를 훌쩍였다. “그 대신 마당 눈 치운 값은 안 받겠습니다.”

소여는 수레 옆에서 걸었다. 봉삼의 아내가 준 짚신이 커서 발등에 짚을 한 줌씩 쑤셔 넣었는데, 걸을 때마다 그 짚이 삐져나와 뒤에 한 올씩 떨어졌다. 아이는 한 번도 수레에 기대지 않았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거적 끝에 삐져나온 아비의 검은 손을 이따금 봤을 뿐이다.

단하는 걸으면서 셌다. 쌀 스물여섯 섬. 흉년 세 해째 고개 너머 쌀값이 한 섬에 은자 두 냥이라고 봉삼이 말했으니 모두 쉰두 냥이다. 단하의 전대에는 넉 냥과 동전 한 줌이 있었다.

*

청계진 북쪽 비탈에 숯가마가 셋 있었고, 그중 끝의 것 곁에 귀덕의 집이 붙어 있었다. 흙벽에 널지붕을 얹은 두 칸 집이었다. 가마에서 새어 나온 연기가 처마 밑에 고여 있어서 집 전체가 숯 냄새에 절어 있었다.

귀덕은 문을 열자마자 수레를 봤고, 거적을 봤고, 소여를 봤다. 그러고 나서 단하를 봤다.

그녀는 울지 않고 먼저 단하에게 달려들었다. 주먹으로 가슴을 쳤는데, 숯가마 일을 스무 해 한 여자의 주먹이라 한 번 맞을 때마다 명치 안의 엄지가 도로 파고들었다. 단하는 피하지 않았다.

“당신은 뭐 했소. 칼 찬 사람이 그 자리에서 뭐 했소.”

“늦었소. 내려가서 셋 가운데 둘을 넘기는 사이에 늦었소.”

“늦어?” 귀덕의 주먹이 멈췄다. “늦은 게 무슨 대답이오.”

그러고 나서야 귀덕은 수레 곁에 주저앉아 울었는데, 숯가마 연기 너머 이웃집 개가 따라 짖을 만큼 소리가 컸다. 소여는 그 곁에 서서 고모의 등에 손을 얹었다. 운 것은 고모였고, 달랜 것은 열한 살 아이였다.

상은 초라했다. 병풍 대신 가마니를 세웠고 제상에는 조밥 한 그릇과 말린 무 세 쪽이 올랐다. 흉년이라 문상 온 이웃이 여섯이었고, 그중 넷은 상가 밥을 먹으러 온 사람이라는 것을 귀덕도 알았다. 귀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밥을 더 퍼 주었다.

*

사흘째 되는 아침에 여팔이 왔다.

키가 크지 않았고 얼굴이 희었다. 털 깃을 댄 겉옷 소매 밖으로 나온 손도 희어서, 숯가마 동네에서 그 손만 따로 떠 보였다. 뒤에 청지기 오목과 곰배와 장대가 섰다. 곰배는 오른팔을 헝겊으로 목에 매달고 있었고, 장대는 걸을 때마다 배를 감쌌다. 그 뒤로 향회장 서봉구가 지팡이를 짚고 따라왔는데, 문턱을 넘자마자 하품을 했다.

여팔은 관 앞에 절을 두 번 했다. 절하는 모양이 반듯했다. 그러고 나서 품에서 종이를 꺼내 관 뚜껑 위에 폈다.

“장순이 가을에 쓴 문서요. 쌀 스물여섯 섬, 기한은 섣달 초아흐레.”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아래 작은 글씨는 담보요. 딸 하나.”

귀덕이 부엌에서 나오다가 그 자리에 섰다. 소여는 관 곁에 앉아 있었는데,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단하가 일어섰다.

“채노에게 딸을 데려오라 했소?”

“도가 부엌에 일손이 모자라서 그랬소. 부엌일이오.”

“옥분이도 부엌일이었지요.” 귀덕이 말했다.

여팔은 귀덕을 보지 않았다. 그는 관 뚜껑에 편 문서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 주름을 폈다.

“나는 칼 든 적 없소, 검객 양반. 쌀을 놓았지. 흉년에 쌀 놓는 사람이 없으면 이 고개에서 봄까지 사는 집이 절반이오. 채노가 칼을 뽑은 건 채노 일이고, 채노는 이제 내 사람이 아니오. 달아난 늙은이를 내가 어찌 아오?”

“그럼 향회가 그 일을 따지겠소?”

서봉구가 눈을 떴다. 조는 척을 하고 있었던 눈이었다.

“향회는 빚 다툼 끝에 사람이 넘어져 죽은 일을 이미 들었소.” 서봉구가 말했다. “실족이오. 눈길이 미끄러웠다지.”

단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셌다. 여기서 검을 뽑으면 곰배와 장대는 이틀 전처럼 넘어진다. 오목은 도망가고, 여팔은 서 있을 것이다. 서 있는 여팔을 벨 수는 있다. 그러면 여팔의 궤에 든 빚 문서 절반이 여팔의 처남인 향회장에게 가고, 봄에 쌀을 놓을 사람이 없어지고, 소여는 여기 못 산다. 남은 초식은 하나였고, 그것은 막는 초식이었다. 벨 것이 없었다.

“내가 지겠소.”

여팔이 처음으로 단하를 제대로 봤다.

“무엇을?”

“그 문서요. 스물여섯 섬. 내 이름으로 지겠소. 아이는 여기 두시오.”

“검객 양반한테 쉰두 냥이 있소?”

“없소.”

오목이 웃었다. 곰배도 따라 웃다가 팔이 울려서 얼굴을 찡그렸다.

여팔은 웃지 않았다. 그는 한참 단하의 손을 봤다. 왼손 엄지 안쪽의 굳은살을 보고, 장삼 소매 끝이 해진 것을 보고, 발에 감은 행전이 젖어 있는 것을 봤다.

“삼월 삼짇날.” 여팔이 말했다. “봄 쌀 놓기 전날까지 가져오시오. 하루라도 넘으면 아이는 도가 부엌으로 오고, 문서는 그대로 남소. 댁이 진 빚은 댁 빚이고, 담보는 담보요.”

“그리 하시오.”

오목이 문서 끝에 단하의 이름을 적고 손도장을 받았다. 붓이 얼어 있어서 오목이 입김을 두 번 불었다. 여팔은 문서를 접어 품에 넣고 돌아서다가 한마디를 더 했다.

“채노를 보거든 나한테 알려 주시오. 그 늙은이가 무엇을 보았는지, 내가 궁금해서 그러오.”

그들이 나간 뒤 귀덕이 부엌 문턱에 앉아 한참 단하를 노려봤다.

“당신 바보요?”

“셈은 할 줄 아오.”

“셈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쉰두 냥 빚을 지오?”

“셈을 해서 지었소.”

귀덕은 대답하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가 조밥을 한 그릇 퍼 왔다. 상가 밥이었다. 단하 앞에 쿵 내려놓았다. 조밥 위에 말린 무 한 쪽이 얹혀 있었는데, 제상에 올랐던 세 쪽 가운데 하나였다.

*

땅이 얼어 있어서 무덤을 팔 수가 없었다. 귀덕이 가마에서 숯을 한 가마니 퍼 와 뒷산 비탈에 펴 놓고 불을 붙였다. 숯이 하룻밤 타는 동안 언 흙이 한 자쯤 녹았고, 녹은 데를 파고 다시 숯을 폈다. 사흘째 저녁에야 장순이 누울 만한 깊이가 됐다. 숯쟁이를 숯불로 녹인 땅에 묻는다고 귀덕이 말했고, 말하고 나서 제 입을 손등으로 막았다.

장례가 끝난 밤, 소여는 무덤 앞에 서 있었다. 단하가 올라가 보니 아이는 숯을 태운 자리에 남은 재를 맨손으로 무덤 위에 덮고 있었다. 손바닥이 새까매져 있었다.

단하는 아이 곁에 조금 떨어져 섰다. 여섯 걸음쯤이었다. 그는 그 거리를 세고 있는 저를 알아챘다. 비탈 아래 숯가마에서 불씨가 튀는 소리가 났고, 식어 가는 재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무릎께까지만 와서 흩어졌다.

아이가 먼저 말했다. 이틀 전 밤 이후로 처음 내는 목소리였고, 오래 안 쓴 목이라 쉬어 있었다.

“어른은 왜 늦었습니까?”

단하는 거짓말을 고르려다 그만두었다.

“셌다.”

“무엇을 셌습니까?”

“걸음을. 네 아버지와 그 늙은이 사이, 나와 그 늙은이 사이. 바닥이 미끄러운지, 칼이 얼마나 긴지. 남은 것이 몇 개인지. 다 세고 나서 갔다.”

소여는 재 묻은 손을 무릎에 문질렀다. 문지를수록 무명 치마가 검어졌다.

“아버지는 안 셌습니다.”

“…….”

“그 사람들이 왔을 때 아버지가 저를 부엌 안으로 밀었습니다. 그리고 문을 등으로 막았습니다.” 아이가 말했다. “몇 사람인지도 안 봤습니다. 그냥 막았습니다.”

단하의 왼손이 검집을 쥐었다가 놓았다. 쥔 자리의 굳은살이 얼어 있었다.

“고모가 그러는데 저는 이제 여팔 어른 것이랍니다. 어른이 빚을 대신 지셨다고.”

“삼짇날까지는 아무 데도 안 간다.”

“삼짇날에는 갑니까?”

단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쉰두 냥과 넉 냥 사이를 셀 수는 있었지만, 그 사이를 메울 길은 아직 셀 수 없었다.

아이가 무덤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고는 아비가 하던 것처럼 손등으로 봉분의 재를 한 번 쓸었다.

*

이튿날 아침 단하는 여팔의 도가에 갔다. 장터 위쪽 돌담 안에 광이 여섯 칸 나란히 서 있었고, 광마다 문에 쇠 빗장이 걸려 있었다. 문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스무 명 남짓이었는데 저마다 빈 자루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고, 맨 앞의 노인은 자루 대신 제 두루마기를 벗어 들고 있었다. 섣달인데 봄 쌀을 미리 꾸러 온 사람들이었다. 광 틈으로 묵은 쌀 냄새와 쥐 오줌 냄새가 함께 새어 나왔다.

오목이 광 앞에 상을 펴 놓고 한 사람씩 불렀다. 이름을 묻고, 식구 수를 묻고, 딸이 몇인지를 물었다. 딸을 묻는 대목에서 줄 선 사람들이 아무도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 단하는 그것이 더 추웠다.

“채노를 찾소.”

“그런 사람 여기 없소.” 오목이 붓을 든 채 말했다. “줄 서실 거 아니면 비켜 주시오. 뒤에 사람 있소.”

줄에 선 사내 하나가 단하를 흘끔 봤다. 곰배와 장대가 팔꿈치와 명치를 문질렀다는 그 검객이라는 것을 알아본 얼굴이었다. 사내는 눈을 내리깔고 자루를 고쳐 쥐었다. 이 줄에서 검객 편을 들면 봄에 쌀이 안 나온다.

단하는 돌아서다가 맨 끝 광의 빗장이 다른 광과 달리 안쪽에서도 걸려 있다는 것을 봤다. 빗장 아래 문틈에 눈이 쓸려 있었다. 누가 드나든 자리였다.

*

단하는 청계진 장터 아래 주막 홍매집에 방을 잡았다. 주모 홍매는 쉰 줄의 여자로, 단하가 쉰두 냥 빚을 졌다는 소문을 벌써 들었는지 방값을 선불로 받았다.

그날 밤 아래 술청에서 곰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팔을 매단 채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눈 감았다 떴는데 코앞이더라니까. 여섯 걸음을 한 번에. 그 늙은이 눈이 튀어나오는 걸 내가 봤다고.”

“너는 그때 팔꿈치 부여잡고 누워 있었잖아.”

“누워서도 봤다!”

단하는 방에 누워 명치를 눌렀다. 이레가 다 차려면 아직 사흘이 남았고, 누르는 대로 엄지가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소문이 고개를 넘어 어디까지 갈지 셌다. 셀 수 없었다.

채노는 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도가 뒷문으로 들어가는 늙은이를 봤다는 사람이 있고, 나루로 갔다는 사람도 있었다.

닷새 뒤 저녁에 주막 문이 열리면서 찬바람과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들어왔다.

“홍매집이 여기요? 술은 외상 되오?”

단하는 몸을 일으켰다. 사형 무진이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늘 알고 왔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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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책상2026.06.10· 2화

    여기서 끊는 건 반칙 아닌가요… 잘 읽었습니다.

    • 한도윤작가2026.06.11

      죄송합니다, 다음 화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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