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243자) · 단하 · 섣달 초아흐레
스물셋
초식을 쓸 때마다 내 몸에서 빠져나간다 · 한도윤
객잔 이 층 구석 자리는 벽이 두 면이라 등이 편했다. 단하는 그 자리에 앉으면 문과 계단 입구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을 들어서자마자 셌고, 검은 상에 올리지 않고 무릎 옆 널바닥에 세워 두었다. 상 위에는 식은 국 한 그릇과, 유리 등피를 씌운 등잔 하나가 있었다.
등피는 이 고개 아래에서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남쪽 항구로 들어온 지 몇 해 안 됐다는 얇은 유리가 불꽃을 감싸고 있어서,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도 불이 눕지 않았다. 그 대신 유리 한쪽에 그을음이 손톱만 하게 앉아 방 안의 빛이 조금 누렜다. 기름은 들기름이었고 타는 냄새가 국 냄새보다 셌다.
주인 봉삼이 계단을 올라와 문설주에 기댔다.
“손님, 방값은 아까 받았고요. 등잔 기름은 따로입니다.”
“안 켜 달라고 했소.”
“켜 드린 건 기름이고, 등피는 또 따로지요. 남쪽에서 온 물건이라 닦는 값이 붙습니다.”
단하는 품에서 동전 셋을 꺼내 상 모서리에 놓았다. 봉삼은 그것을 세어 보지도 않고 쓸어 담더니, 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국그릇을 들여다봤다.
“국은 식어도 값은 안 식습니다.”
문이 닫혔다. 단하는 국을 한 술 떴다. 짰다.
그는 소매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등잔 곁에 펼쳤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세로로 짧은 줄 스물넷이 그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 스물둘에는 가로줄이 하나씩 더 그어져 있었다. 글자는 없었다. 줄의 순서가 스승이 가르친 순서였다.
스승은 스물넷을 다 주고 열한 해 전에 죽었다. 죽고 나서 처음 쓴 것 하나가 이튿날 몸에서 비어 있었다. 두 번째 것도 비었을 때는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잊은 것은 더듬으면 가장자리가 잡히는데, 빈 것은 더듬을 자리 자체가 없었다. 세 번째를 쓰고 나서야 단하는 그것을 알았다.
그 뒤로는 세면서 살았다.
지워지지 않은 줄은 둘이었다. 하나는 스승이 두 번째로 가르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맨 끝의 스물넷째였다. 두 번째 것은 스승 밑에 든 아홉 살에 배워서 스무 해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았다.
해 질 녘에 아래층에서 본 부녀가 떠올랐다. 아비는 손바닥이 새까매서 숟가락을 쥘 때마다 자루에 검은 자국이 묻었고, 딸은 열 살쯤 돼 보였는데 국을 반쯤 먹고 나머지를 아비 쪽으로 밀었다. 아비는 그 그릇을 도로 밀지 않고 딸의 머리를 쓸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쓸었다. 숯 묻은 손바닥이 머리에 닿으면 안 지워진다는 것을 오래 알아 온 손이었다.
봉삼이 그 둘에게 방값 얘기를 하러 갔다가 그냥 돌아온 것도 단하는 봤다. 부녀는 방을 잡지 않고 부엌 곁 아궁이 앞에 짚을 깔았다. 고개를 넘어 어디로 가는 길인지는 묻지 않았다. 셀 일이 아니었다.
아래층에서 상이 넘어갔다.
*
먼저 들린 것은 사내 목소리였다.
“여팔 어른 셈이오. 쌀 스물여섯 섬. 오늘이 기한이라고 가을에 말했잖소.”
단하는 종이를 접어 소매에 넣었다. 난간 쪽 창호 틈으로 아래가 보였다. 사내 셋이 부엌문 앞에 서 있었다. 앞의 둘은 젊었고 하나는 늙었다. 젊은 하나는 허리에 도를 찼고 다른 하나는 창을 짚고 있었다.
부엌문을 등으로 막고 선 남자는 손바닥이 새까맸다. 숯쟁이였다. 서른 후반쯤 됐고, 등 뒤 부엌 안에서 아이가 우는 소리가 났다.
“딸을 도가 부엌에 들이면 반을 까 준다고 하셨소.” 늙은 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반이오, 장순이. 열세 섬이면 봄에 숯 두 가마로 갚을 수 있지 않소.”
“부엌일이 아닌 걸 아는데 내가 어떻게 보내오.”
“부엌일이오.”
“옥분이도 부엌일이었지.”
늙은 자의 얼굴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도 든 자에게 턱을 한 번 들었다.
도 든 자와 창 든 자가 장순의 양팔을 잡아 마당으로 끌어냈다. 장순은 끌려 나가면서도 부엌문 문고리를 놓지 않아서 문짝이 반쯤 딸려 나오다가 경첩에서 비명을 질렀다. 아이가 부엌에서 뛰어나와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아이는 울었는데, 마당에 아비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는 소리가 뚝 끊겼다.
마당에는 눈이 얇게 깔려 있었다.
*
이 층 난간에서 마당까지는 한 길 반이었다. 단하는 그 높이를 재는 동시에 내려선 뒤의 발 자리를 골랐다. 마당 가운데는 눈이 얇게 깔려 미끄럽고, 처마 아래 한 뼘은 눈이 들이치지 않아 흙이 말라 있었다. 그는 마른 데를 골랐다.
난간을 넘었다. 발이 흙에 닿는 소리가 났고, 셋이 한꺼번에 돌아봤다.
도 든 자가 먼저 왔다. 도를 세로로 들고 왔으니 위에서 아래로 내릴 참이었다. 단하는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반 보 안으로 들어갔다. 도가 내려올 자리를 먼저 차지하면 도는 내려오지 못하고, 팔꿈치만 어깨에 와서 걸린다. 그는 어깨를 틀어 그 팔꿈치를 바깥으로 밀었다. 도가 손에서 빠져 눈에 박혔다.
“아, 내 팔꿈치!”
창 든 자는 거리를 먹고 사는 병기를 들고 있었다. 단하는 창끝이 오는 선을 따라 옆으로 두 걸음 비켜 섰다. 창은 곧게 오는 것만 빠르고, 옆으로 도는 것은 느리다. 그는 창대 가운데를 왼손으로 눌러 땅에 붙이고 오른 무릎으로 사내의 명치를 올려 찼다. 사내가 접히면서 창을 놓쳤다.
“곰배야, 너는 팔꿈치고 나는 명치다. 누가 더 아프냐.”
“지금 그걸 세냐!”
세 번째가 문제였다.
늙은 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무릎 꿇린 장순의 목 뒤에 짧은 칼을 대고 서 있었다. 단하가 한 걸음 오면 칼끝을 반 치 눌렀다. 계산을 아는 자였다.
“검객 양반, 댁은 이 일에 셈이 없소.” 늙은 자가 말했다. “우리는 쌀 받으러 왔고, 이 사람은 쌀을 안 냈소. 댁이 한 걸음 오면 내가 반 치 누르고, 두 걸음 오면 한 치 누르오. 셈은 댁도 할 줄 알 거요.”
장순이 무릎 꿇은 채 고개를 들었다. 목에 칼이 닿아 있는데도 그는 단하를 보지 않고 마루 밑을 봤다. 입 모양이 「들어가 있어라」였다.
마당은 열 걸음이었다. 늙은 자와 단하 사이가 여섯 걸음이었고, 늙은 자와 장순 사이에는 거리가 없었다. 눈은 발목까지 안 왔으니 발은 미끄러지지 않을 것이다. 단하는 그런 것을 늘 먼저 셌다. 걸음 수, 바닥, 병기의 길이, 상대의 어깨 높이. 세고 나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갈렸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남은 것 가운데 하나는 짧은 거리에서 손목 관절을 꺾는 초식이다. 닿아야 쓴다. 저 늙은이에게 닿으려면 세 걸음이 필요하고, 세 걸음이면 저 손이 칼을 눌러 버린다.
다른 하나는 거리를 없앤다. 몸이 어떻게 가는지 단하도 설명하지 못한다. 눈을 감았다 뜨면 상대 앞에 서 있다. 스승은 그것을 두 번째로 가르쳤다. 아홉 살 단하를 마당 끝에 세워 놓고 눈을 감았다 뜨게 하기를 하루에 삼백 번씩, 석 달을 시켰다. 석 달째 어느 저녁에 눈을 떴더니 스승의 턱밑이었고, 스승은 웃지도 않고 「이건 아껴라」 했다. 단하는 스무 해 동안 그 말대로 했다.
남은 것 둘. 쓰면 하나.
마루 밑에서 아이의 눈이 보였다. 아이는 울고 있었는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단하는 썼다.
*
거리가 없어졌다.
늙은 자의 눈이 커지는 것을 코앞에서 봤다. 누런 흰자위에 핏줄이 섰고 속눈썹에 눈 한 송이가 붙어 있었다. 단하는 그자의 오른 팔목을 잡아 바깥으로 틀었다. 칼이 눈 위에 떨어졌다.
그런데 장순이 앞으로 쓰러졌다.
단하는 팔목을 쥔 채 그 등을 내려다봤다. 무명 겹옷 등판 한가운데가 검게 젖어 있었고, 젖은 자리가 눈 위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늙은 자의 칼은 목 뒤에 대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이미 들어가 있었다. 단하가 난간을 넘기 전에, 부엌문 앞에서 끌려 나올 때 이미.
늙은 자가 단하를 봤다. 그 얼굴에 처음으로 무언가가 지나갔는데, 이긴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그자가 말했다. “막기에 겁이 났소.”
단하는 팔목을 놓았다.
놓고 무릎을 꿇어 장순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눈이 아직 열려 있었고, 입술이 한 번 움직였다. 단하는 귀를 댔다.
“소여…….”
그것이 끝이었다.
늙은 자는 도망갔다. 곰배와 장대가 팔꿈치와 명치를 끌어안고 그 뒤를 따라 울타리 문을 빠져나갔다. 늙은 자는 뛰면서 한 손으로 제 명치를 누르고 있었다. 단하는 쫓지 않았다.
마루 밑에서 아이가 기어 나왔다. 맨발이었다. 눈 위를 걸어 아비 곁까지 와서 앉았는데, 발등이 금세 빨개졌다. 아이는 소리를 내지 않고 울었다. 어깨가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되풀이했고, 입술을 이로 문 채 숨만 쉬었다. 소리 없는 울음을 단하는 처음 봤다.
단하는 아이를 말리지 않았다. 제 장삼을 벗어 그 어깨에 덮어 주려다가, 손이 멈췄다. 이 손으로 덮어 줄 자격이 없었다.
봉삼이 부엌에서 나와 입을 막았다. 한참 있다가 그가 말한 것은 값이 아니었다.
“고모가 고개 너머 청계진에 삽니다. 숯가마 옆에.”
“여팔이 누구요?”
봉삼이 울타리 문 쪽을 한 번 봤다. 거기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나서야 목소리를 낮췄다.
“청계진 곡물 도가 주인입니다. 흉년 세 해에 고개 너머 빚 문서 절반이 그 집 궤에 들어갔지요. 저 늙은이는 그 집 수금꾼 채노고요. 삼십 년을 받으러 다녔는데 칼 뽑는 건 저도 처음 봤습니다.”
*
곰배가 두고 간 도가 눈에 꽂힌 채 서 있었다. 단하는 그것을 뽑아 울타리 밖으로 던지려다 말고 장독 곁에 눕혀 두었다. 날이 밝으면 누군가 그것을 증거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관가가 닿지 않는 고개에서 증거가 무슨 소용인지 단하는 몰랐지만, 버리는 쪽보다 두는 쪽이 나았다.
그 밤 단하는 마당에 오래 앉아 있었다. 눈이 계속 내려서 장순의 등을 덮고, 아이의 머리를 덮고, 단하의 무릎을 덮었다. 누가 거적을 가져와 장순을 덮었고, 봉삼의 아내가 아이를 안아 들여갔다. 아이는 들려 가면서도 아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단하는 이 층으로 올라가 등잔 곁에 종이를 폈다. 두 번째 줄 위에 가로줄을 그었다. 손이 떨려서 줄이 한 번 꺾였다.
명치가 아팠다. 속에서 누가 엄지로 한 곳만 꾹 누르고 있는 것 같은 통증이었고, 숨을 깊이 들이쉬면 그 엄지가 한 번 더 파고들었다. 창호 밖으로 처마의 눈덩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쿵, 하고 한 번 울린 뒤에는 다시 눈 내리는 소리만 남았다.
맞은 데가 아니었다. 쓴 것이 나간 자리였다. 나갈 때마다 그랬다. 이레쯤 아프고, 아픈 것이 가시면 빈 것도 잊힌다. 스물두 번을 그렇게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것이 하나 걸렸다. 달아나던 늙은이가 누르던 자리가 명치였다. 단하는 그자를 명치에 맞히지 않았다.
그는 등잔 불을 오래 봤다. 유리 속에서 불이 눕지 않고 서 있었다.
이십 년 아끼던 것을 썼고, 쓰고도 못 지켰다. 남은 것은 하나였다. 여팔이라는 이름과 쌀 스물여섯 섬이 남았고, 청계진이라는 고을이 남았다.
사라진 스물셋이 어디로 갔는지, 그는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