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6,059자)
짐은 한 상자
방출 통보 받은 날, 스무 살 신인으로 돌아갔다 · 정이한
창고 방에서는 오래된 공 냄새가 났다. 가죽이 습기를 먹었다가 마르기를 몇 해 되풀이하면 나는 시큼한 냄새였고, 벽 쪽에 쌓인 공 상자 위에는 누가 먹다 둔 컵라면 용기가 뚜껑을 반쯤 연 채 식어 있었다. 2026년 10월 셋째 주, 인천 해무 2군 구장이 있는 강화의 오후였다. 창밖에서는 마지막 훈련을 끝낸 어린 투수들이 외야 펜스를 따라 러닝을 돌고 있었다.
“윤석아, 거기 앉아.”
운영팀장 구봉수가 접이식 의자를 펴 주었다. 다리 하나가 짧은 의자라 엉덩이를 대자마자 몸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채윤석은 기운 채로 앉아 있기로 했다. 똑바로 앉으려고 버둥거리는 모습을 이 방에서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구봉수는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열다섯 해 전 이 사람은 스물일곱 살 막내 트레이너였고, 윤석의 오른 팔꿈치에 얼음주머니를 처음 대 준 사람이었다. 지금은 배가 나왔고, 목에 건 명찰 끈이 셔츠 단추 사이에 끼어 있었다.
“구단은 채윤석 선수의 그간의 헌신에 깊이 감사드리며…….”
“형, 그냥 말로 해요.”
“이거 읽어야 돼. 인사팀이 꼭 읽으래.”
“녹음해요?”
“아니. 근데 읽으래.”
구봉수가 문장을 끝까지 읽는 동안 문 옆 벽에 기대 선 남자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2군 감독 강현태였다. 마흔여섯, 현역 때 인천 해무의 주전 마무리였고, 9회에 올라와 한 번 노려보면 타자가 먼저 눈을 피한다는 말이 돌던 사람이었다. 그 눈은 지금도 그대로였는데, 지금은 휴대전화 화면에 박혀 있었다.
“재계약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상입니다.” 구봉수가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미안하다, 윤석아.”
“형이 왜 미안해요.”
“요즘은 미안하다고 하는 게 내 일이야.”
강현태가 그제야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서른다섯이면 오래 했다. 1군 한 번 못 올라온 놈이 이만큼 버틴 것도 기록이다.”
윤석은 대답 대신 오른팔을 탁자 위에 올렸다. 팔꿈치 안쪽에 지렁이처럼 굵은 흉터가 있었다. 스물한 살에 끊어진 팔꿈치 인대를 손목 쪽 힘줄로 갈아 끼우는 수술, 야구판에서 토미존이라고 부르는 수술의 자국이었다. 그 뒤로 그는 시속 140킬로미터를 한 번도 넘기지 못했다. 독립구단을 돌다 스물아홉에 육성선수로 다시 들어와 2군에서만 여섯 해를 던졌다.
“감독님. 2011년 오키나와 기억나세요? 불펜에서 신인한테 그러셨잖아요. 마흔 개 던지고 들어갈 거면 짐 싸라고.”
“기억 안 난다. 그런 말은 하루에 백 번 했다.”
“저는 그날 백사십 개 던졌어요.”
강현태가 잠깐 윤석을 보았다. 그 눈에 무언가가 지나갔지만, 미안함은 아니었다. 귀찮음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 때문에 팔 나갔다는 거냐? 던진 건 너다.”
맞는 말이라서 윤석은 더 할 말이 없었다.
*
짐은 상자 하나로 끝났다. 글러브 둘, 스파이크 한 켤레, 팔꿈치 보호대, 다 쓴 파스 상자, 그리고 맨 위에 공 하나. 실밥이 누렇게 바랜 공에는 매직으로 쓴 글씨가 번져 있었다. 「2011. 2. 10 오키나와 첫 불펜. 예솔이가 받음」. 스무 살의 예솔이 불펜에서 공을 건네주며 써 준 것이었다. 기념이라고, 나중에 1군 올라가면 이거 들고 인터뷰하라고.
주차장 가로등 아래에 회색 세단이 서 있었다. 차에 기대 선 남자가 캔커피 두 개를 들고 손을 흔들었다. 하얀 운동화에 등산 조끼, 귀밑까지 하얗게 센 머리. 윤석은 그 얼굴을 열두 해 만에 다시 보았는데도 단번에 알아보았다.
오상필이었다. 2014년 리그를 흔든 승부조작 사건의 브로커였고, 징역을 살고 나와 지금은 김포에서 「상필 야구교실」을 한다는 소문이 돌던 사람이었다.
“윤석이 맞지? 소식 들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
“어떻게 알고 왔어요?”
“이 바닥에서 방출 소식은 하루면 돈다.” 오상필이 캔커피 하나를 내밀었다. “우리 교실에 코치 자리 하나 있다. 애들 투구 폼 봐 주는 거야. 너만 한 사람 없지. 2군 십 년 넘게 굴렀으면 안 되는 폼은 다 알잖아.”
윤석은 캔을 받지 않았다. “예솔이 지금 뭐 하는지 알아요?”
오상필의 웃음이 반 박자 늦게 멈추었다.
“대리운전해요. 밤새 남의 차 몰고 새벽엔 손님 차 뒷좌석에서 쪽잠 자요. 영구제명 먹은 포수는 동네 야구교실에서도 안 써 줘서.”
“그건 걔가 고른 거다.”
윤석의 손이 먼저 나갔다. 등산 조끼의 깃이 손아귀에 구겨졌고, 오상필의 손에서 떨어진 캔이 바닥을 굴러 하얀 운동화 앞코에 갈색 물을 튀겼다. 오상필은 버둥거리지 않았다. 멱살을 잡힌 채 고개를 조금 기울이고 윤석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때 걔한테 기회를 줬다. 아버지 가게 넘어가게 생겼다고 울던 놈한테.” 오상필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그런데 윤석아, 너는 그때 걔 옆방에 있었잖아. 너 뭐 했냐?”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윤석은 그 질문에 열두 해 동안 답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해 겨울 예솔이 새 차를 몰고 왔을 때, 그 차가 어디서 났는지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 짐작하고 묻지 않았다. 물으면 알아야 하니까.
오상필이 조끼 깃을 손바닥으로 펴고 운동화 앞코를 내려다보았다. “신발값은 됐다. 코치 자리는 생각해 봐.”
*
편의점 계산대의 알바생은 소주 한 병과 새우깡을 찍더니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아버님, 봉투 필요하세요?”
“…….”
“아버님?”
“필요 없어요.”
서른다섯에 아버님이었다. 윤석은 소주를 점퍼 주머니에 꽂고 구장 철문 옆의 쪽문으로 다시 들어갔다. 경비실 아저씨가 손을 들었다가, 그가 누군지 알아보고는 그냥 손을 내렸다. 오늘 방출된 선수의 마지막 밤을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불펜 마운드는 밤이슬에 젖어 있었다. 강화의 갯벌 냄새가 펜스를 넘어와 흙냄새에 섞였고, 윤석은 투수판에 등을 대고 누워 소주를 반쯤 비웠다. 하늘은 흐렸고 별은 두 개쯤 보였다. 그는 상자에서 꺼내 온 공을 배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실밥을 더듬었다. 직구를 쥐는 자리, 슬라이더를 쥐는 자리, 서른 살에 2군 투수코치에게 배운 체인지업을 쥐는 자리. 체인지업을 스무 살에 알았더라면 팔이 그렇게 일찍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게 던지지 않고도 타자를 잡는 공이니까.
“마흔 개.”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마흔 개만 던졌으면.”
소주가 바닥났을 때 그는 공을 쥔 채 잠들었다.
*
처음 들린 것은 소리였다. 경운기 같은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털털털, 멈추었다가, 다시 털털털. 그다음은 냄새였다. 파스 냄새가 방 안에 꽉 차 있었고, 그 밑에 바다 냄새가 깔려 있었다. 창문이 바람에 덜컹거렸다. 강화의 갯벌 냄새가 아니었다. 소금기가 더 맑고 차가웠다.
병원인가 싶었다. 마운드에서 얼어 죽기 직전에 경비 아저씨가 발견했나 보다고, 윤석은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경운기가 돌 리는 없었다.
머리맡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오래전에 들은 벨소리였다. 손을 뻗어 집어 든 것은 위로 밀어 올리는 슬라이드폰이었고, 작은 화면에 시계가 떠 있었다. 「2011. 02. 09 (수) 06:10」.
윤석은 일어나 앉았다.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아침마다 허리를 손으로 받치고 일어나던 버릇대로 손이 허리로 갔는데, 받칠 것이 없었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굽혔다. 무릎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한 번 더 굽혔다. 역시 조용했다. 세 번째로 깊이 앉았다 일어났을 때, 옆 침대의 경운기가 멈추었다.
“뭐 혀, 새벽부터. 스쿼트를 혀?”
옆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사람은 예솔이었다.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 같은 머리에 볼에는 베개 자국이 빨갛게 나 있었고, 얼굴에 주름이 하나도 없었다. 대리운전 손님 차 뒷좌석에서 새우처럼 구부리고 자던 마흔 가까운 얼굴이 아니었다. 스무 살이었다.
윤석은 한참 그 얼굴을 보았다. 목구멍 안쪽에서 뭔가가 올라오려고 했는데,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너 머리 왜 이래?”
“니 머리도 똑같어.” 예솔이 하품을 했다. “어제 단체로 바리깡 밀었잖여. 기억 안 나?”
윤석은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보았다. 이마에 여드름이 세 개 나 있었고, 턱선이 날카로웠고, 눈 밑이 검지 않았다. 그는 수도꼭지를 틀어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나서 오른팔을 들어 팔꿈치 안쪽을 보았다.
흉터가 없었다.
엄지로 그 자리를 문질렀다. 매끈한 살 밑에서 힘줄이 팽팽하게 버티고 있었다. 수술 자국이 있던 자리를 열다섯 해 동안 문지르던 버릇이 손가락에 남아 있어서, 엄지는 없는 흉터의 모양을 따라 그 자리를 두 번 더 오갔다.
“야, 윤석이. 너 오늘 좀 이상혀.”
“결아.” 윤석은 화장실 문틀을 잡고 물었다. “나 지금 몇 살이냐?”
“스물. 술 덜 깼냐? 어제 마신 것도 없으면서.”
“와, 이거 진짜 킹받네.”
“킹이 뭘 받어?”
윤석은 입을 다물었다. 2011년에는 아무도 화가 나는 것을 킹이 받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
숙소 식당은 일곱 시에 열렸다. 오키나와 북쪽 바닷가 마을의 비즈니스호텔을 구단이 통째로 빌린 캠프였고, 식당 창밖으로 회색 바다가 낮게 일렁였다. 1군 선배들은 창가 쪽 긴 탁자에, 신인과 육성선수는 주방 앞 작은 탁자에 앉았다. 쟁반을 들고 서 있는 동안 윤석은 저 자리 배치가 열다섯 해 동안 하나도 안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2026년에도 신인은 주방 앞에 앉았다.
창가 탁자 가운데에 강현태가 있었다. 서른하나, 등번호 39번의 주전 마무리였다. 그는 일본식 낫토를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실이 늘어지는 것을 보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걸 왜 아침마다 주냐? 콧물을 밥에 비벼 먹으라는 거야, 뭐야.”
선배들이 웃었다. 강현태가 웃기면 다 웃는 탁자였다.
신인 탁자에는 서경호가 먼저 앉아 있었다. 1라운드 1순위로 들어온 동기였고, 키가 크고 순하게 생긴 얼굴로 밥을 천천히 씹고 있었다. 지난 생에 그해 6월 윤석 대신 1군에 오른 사람이었다. 윤석은 경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고, 경호는 동기에게도 반쯤 존대를 섞어 인사했다.
“윤석 씨, 잘 잤어요?”
“어, 경호 씨도.”
예솔이 국을 뿜을 뻔했다. “씨? 니들 뭐여, 은행 창구여?”
밥을 반쯤 먹었을 때 창가에서 강현태가 손가락을 들었다. 손가락 끝이 신인 탁자를 훑다가 윤석에게서 멈추었다.
“어이, 육성. 이따 내 가방 불펜까지 들어라.”
캠프의 관습이었다. 신인이 선배 가방을 불펜까지 들어 주는 것. 지난 생에 윤석은 그 가방을 두 주 동안 들었고, 들 때마다 영광인 줄 알았다. 가방 안에서 진통제 병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났던 것도 그때는 이상한 줄 몰랐다.
윤석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선배님 가방은 선배님이 드셔야죠.” 그가 말했다. “어깨 아끼시는 건 알지만, 가방 정도는 괜찮으실 거예요.”
식당이 조용해졌다. 낫토를 젓던 젓가락이 멈추었다. 강현태가 고개를 천천히 돌렸고, 그 눈이 아침 공기 속에서 9회의 눈으로 바뀌었다. 다른 선배들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서 서로 얼굴을 보았다.
“너 몇 번이냐?”
“육성 십일 번입니다.”
누군가 킥 웃었다가 얼른 기침으로 바꿨다. 예솔이 식탁 밑으로 윤석의 정강이를 찼다. 세게 찼다.
강현태는 웃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한 번 돌렸다. 오른쪽만 돌렸고, 돌리다가 아주 짧게 멈추었다. 그 멈춤을 본 사람은 식당에서 윤석 하나였다.
“어깨는 누가 아프대?”
“아니면 다행이고요.”
그때 식당 문가에서 투수코치 염동진이 쟁반을 들고 들어오다가 그 장면을 다 보았다. 그는 혀를 한 번 차고 신인 탁자로 와서 윤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칭찬하는 손이 아니었다.
“입이 그렇게 살았으면 팔도 살았겠지. 내일 불펜, 신인 첫 순서 너다. 실컷 던져 봐.”
창가에서 강현태가 낫토 그릇을 밀어 놓으며 덧붙였다. “내가 옆에서 봐 줄게. 신인이 몇 개 던지나.”
밥을 다 먹고 방에 돌아오자 예솔이 문을 닫자마자 윤석의 뒤통수를 쳤다. “니 미쳤냐? 강현태한테 어깨 얘기를 왜 혀? 우리 육성이여, 육성. 바람 불면 날아가는 거.”
“알아.”
“아는 놈이 그려?”
윤석은 침대에 걸터앉아 오른손을 폈다 쥐었다.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얇았다. 열다섯 해 동안 두꺼워졌던 굳은살이 아직 생기기도 전이었다. 창문이 다시 덜컹거렸고, 오키나와의 2월 바람이 틈으로 들어와 파스 냄새를 흔들었다.
내일이었다. 열다섯 해 전, 강현태가 보는 앞에서 공 백사십 개를 던지다가 그의 팔꿈치 안쪽에서 처음으로 무언가가 딸깍 소리를 낸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