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111자) · 유하 · 5월 22일
계단 한 칸
밤의 복도에서 세 번째 문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5월 22일 아침, 정 여사님의 비명이 서관 계단을 타고 운동장까지 내려왔다. 비명이라기보다는 고함이었다. 「이번엔 날짜까지 써 놨어!」 아침 점호를 마치고 식당으로 가던 아이들이 우르르 서관 쪽으로 몰렸다. 나도 그 틈에 끼었다. 한결이는 숟가락을 든 채 뛰어왔고, 도경 선배는 뛰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삼 층 방화문은 교감이 직접 열었다. 열쇠 꾸러미를 든 손이 자물쇠를 두 번 헛짚었다. 문이 열리자 아침 햇빛이 복도 창으로 길게 들어와 연녹색 벽을 비췄다. 창고 문 옆, 오래된 14와 15 아래 윤보라와 하목이 옆에 새 글씨가 올라와 있었다. 다른 글씨들보다 진했다. 연필심을 눕히지 않고 세워서 꾹꾹 눌러 쓴 글씨였다.
문재언 1985. 11. 19. 계단
계단에 선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누구냐, 몇 학년이냐, 장난이냐. 누군가 휴대전화를 찾다가 평일이라 사감실에 있다는 걸 떠올리고 제 주머니를 괜히 두드렸다. 교감은 벽 앞에 서서 한참 그 글씨를 봤다. 넥타이를 끝까지 조인 목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행정실에 페인트 가져오라고 해. 오늘 오전 중으로.”
그때 사감 선생님이 계단을 올라왔다. 아이들이 양쪽으로 비켜섰다. 선생님은 어젯밤과 같은 회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눈이 부어 있었는데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교감이 선생님을 보자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아이들이 다 듣도록.
“선생님, 이게 뭡니까? 누가 이런 장난을 칩니까?”
“사람이 죽은 날이다.”
선생님이 말했다. 계단이 조용해졌다. 햇빛 속에서 먼지가 도는 게 보일 만큼 조용했다.
“1985년 11월 19일 밤, 이 계단에서 2학년 문재언이 죽었다. 그때 사감이던 권영조 선생님이 때리고 밀었다. 나는 이 층 계단참에서 봤다. 경찰한테 못 봤다고 했다. 그게 사십일 년 전이다.”
선생님은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국어 시간에 시를 읽을 때처럼 한 줄에 한 번 숨을 쉬었다. 교감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붉던 목까지 하얘졌다.
“선생님, 지금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누가 선생님 보건실로 모셔라.”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계단에 선 아이들 백 명 가까이가 누구 하나 발을 떼지 않았다. 한결이가 숟가락을 쥔 채 제 입을 막고 있었는데, 막은 손바닥 사이로 「진짜예요」라는 말이 새어 나왔다. 참말이었다. 한결이는 이 일에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
행정실 직원 둘이 오전 내내 벽을 칠했다. 흰 페인트를 두 번 발랐다. 점심때 정 여사님이 들통을 들고 와서 벽을 보더니 대걸레 자루를 바닥에 탕 내려놓았다.
“내가 그랬잖아. 지워도 도로 올라온다고.”
흰 페인트 밑으로 연필 글씨가 비쳤다. 젖은 종이 뒷면에 글씨가 배어 나오듯 천천히, 윤곽부터 먼저 떠올랐다. 문재언. 1985. 11. 19. 계단. 윤보라도, 하목이도, 14와 15도 같이 떠올랐다. 페인트 냄새가 복도에 가득했는데 그 냄새를 뚫고 오래된 종이 냄새가 올라왔다. 행정실 직원 하나가 붓을 든 채 뒷걸음질을 쳤다. 다른 하나는 세 번째 칠을 하겠다고 우기다가, 칠한 자리 위로 윤보라라는 이름이 붓 자국을 따라 번져 올라오는 것을 보고 조용히 뚜껑을 닫았다. 정 여사님은 「이십 년 만에 내가 이긴 거야」라며 이상하게 흐뭇해했다.
오후 세 시, 교감이 전교 방송을 했다. 서관 착공을 6월 1일 월요일로 앞당긴다고 했다. 교육청 긴급 안전진단 결과라고 했다. 서관 1층 도서관도 오늘부로 폐쇄. 목소리가 평소보다 빨랐다. 숫자를 짚을 때의 박자가 아니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도경 선배가 교감실로 올라갔다. 나와 한결이는 교감실 앞 복도에서 기다렸다. 두꺼운 문 너머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선배 목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높아지지 않았고, 교감 목소리는 중간에 두 번 높아졌다.
“서명 철회하겠습니다. 학생 대표 의견이 바뀌었습니다.”
“이미 교육청에 올라갔다. 네 서명은 서류 맨 뒷장에 붙어서 도청까지 갔어.”
“그럼 철회서도 도청까지 보내 주십시오.”
“도경아, 네 아버님도 이사다. 아버님 얼굴을 생각해라.”
“아버지는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게 맞다고 하셨습니다.”
문이 열렸다. 선배가 나왔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 철회서는 교감 책상 위에 두고 나왔다고 했다. 받든 안 받든 거기 있다고 했다. 선배는 복도를 걸어가다 한 번 멈춰서 벽에 이마를 댔다. 삼 초쯤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걸었다. 한결이가 선배 뒤를 따라가면서 주머니에서 초코파이를 꺼내 선배 손에 쥐여 줬다. 선배는 그걸 받아서 뜯지도 않고 한참 들고 다녔다.
네 시에 검은 승용차 두 대가 교문을 올라왔다. 한 대에서는 서류 가방을 든 양복 차림 남자 둘이 내렸다. 도경 선배가 창가에서 그걸 보고 말했다.
“재단 변호사야. 이사회 때 본 적 있어.”
다른 한 대는 관사 앞에 섰다. 운전석에서 교감이 내렸다. 관사 대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향나무 너머로 텔레비전 불빛이 꺼지는 게 보였다.
저녁에 사감실 문에 쪽지가 붙었다. 이사회 결정으로 여숙희 선생님의 사감직을 해임하고 5월 25일부터 신임 사감이 부임한다는 내용이었다. 쪽지 아래 교감 도장이 반 칸쯤 어긋나 있었다. 두 번 찍은 도장이었다.
*
사감실 불은 그날 밤 늦게까지 켜져 있었다. 우리 셋이 문을 두드리자 선생님이 들어오라고 했다. 선생님은 짐을 싸고 있지 않았다. 창가 제라늄은 잎이 몇 장 더 떨어져 있었고, 책상 서랍 하나가 빠져나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서랍 안에는 사십일 년 치 순찰 일지가 묶여 있었다. 날짜마다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이상 없음. 대신 책상에 원고지를 펴 놓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가늘고 반듯한 글씨였다.
“토요일에 읍내 경찰서에 간다. 사십일 년 늦은 신고다.”
“받아 줄까요? 너무 오래돼서 벌은 못 줄 거라던데요.”
도경 선배가 물었다. 선생님이 펜을 멈췄다.
“벌은 못 줄지도 모르지. 그래도 기록은 남는다. 경찰 기록에도, 이 학교 명부에도. 명부가 재단 사무실 어디 있든, 사유 칸은 내가 적는다.”
선생님은 원고지를 한 장 넘겼다. 맨 위에 제목이 있었다. 진술서. 그 아래 첫 줄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1985년 11월 19일 밤 서율원 서관 이 층 계단참에 있었다.
한결이가 사감실 전화기를 가리켰다.
“선생님, 저 전화 한 통만 써도 돼요? 시내 사는 친구한테요. 전 학교 친구인데 어제 편지가 왔어요. 이상한 얘기가 적혀 있어서요.”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이가 허리를 굽혀 수화기를 들었다. 꼬인 줄이 한결이 팔에 감겼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한결이는 대부분 듣기만 했고, 「진짜?」 「몇 칸?」 「밤에만?」 하고 세 번 물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한결이 얼굴이 이상했다. 무서운 얼굴이 아니었다. 뭔가를 세기 시작한 사람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알았다. 거울에서 자주 보던 얼굴이었다.
“시내 의림고 비상계단이요. 낮에는 스물두 칸인데 밤에 세면 스물세 칸이래요. 작년 겨울부터요. 걔네 학교 작년에 학생 셋이 사유 없이 나갔대요.”
선생님이 원고지 위에 펜을 내려놓았다. 펜이 굴러가다 원고지 모서리에서 멈췄다.
“여기만이 아니구나.”
선생님이 말했다. 목소리에 놀라움이 없었다. 오래 짐작해 온 사람이 확인하는 목소리였다.
*
5월 28일 목요일 밤, 나는 삼 층에 올라갔다. 한 번만 더 올라가면 끝이라는 말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감 확인란은 비어 있었지만 이사회는 다음 주에 다시 모인다고 했다. 어차피 끝날 거라면 내 발로 올라가서 끝내고 싶었다.
도경 선배와 한결이가 같이 왔다. 신임 사감은 체육 선생님이 임시로 맡았는데, 아직 순찰 길을 몰라서 기숙사 동관 일 층 휴게실 소파에서 코를 골고 있었다. 한결이가 그 옆을 지나가며 소파 팔걸이에 초코파이 하나를 올려놓았다. 뇌물이 아니라 사과라고 했다.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는 한결이도 설명하지 못했다.
서관 계단은 밤공기에 젖어 있었다. 이 층 계단참 난간 기둥에 누가 흰 국화 한 송이를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꽃잎 끝이 벌써 누렇게 말라 가고 있었다. 누가 붙였는지 우리는 묻지 않았다. 셋 다 짐작이 갔고, 셋 다 그 앞에서 잠깐 걸음을 늦췄다. 복도는 아흔여덟 걸음이었다. 연 문이 넷이 된 뒤로 복도는 또 길어졌다. 세 번째 문 너머 안쪽 복도에서 왼쪽 세 번째 문은 이제 조용했다. 숨소리가 나지 않았다. 문 아래로 빛도 새지 않았다. 그 앞에 서 있으면 춥지 않았다.
왼쪽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사이에서 둘이 멈췄다. 나한테는 벽이었다. 연녹색 페인트, 손톱으로 긁은 자국.
“여기 둘 있어. 한결이 거랑 네 거.”
도경 선배가 말했다.
“한결이 거는 문 아래 빛이 약해졌어. 네 거는 아직 따뜻하고.”
한결이 제적 예정 서류는 이사회에서 보류됐다. 사감 선생님이 기숙사비 석 달 치를 대신 냈다는 걸 우리는 나중에 행정실 정 여사님한테 들었다. 정 여사님은 행정실 직원이랑 친했다.
나는 내 문이 있다는 자리 앞에 섰다. 아무것도 안 보였다. 손바닥을 댔다. 벽이 아니었다. 한 뼘 앞에서 손이 멈췄다. 무언가 미지근한 것이 거기 있었다. 나무결 같았다.
“내 문은 내가 못 열어요. 남이 열어 줘야 해요.”
나는 도경 선배와 한결이를 돌아봤다.
“열어 주세요. 두 사람 중 누구든, 아직 아무한테도 안 한 말로요.”
한결이가 침을 삼켰다. 도경 선배가 한결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한결이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나한테는 안 보이는 문 앞에 섰다. 한결이 입술이 움직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는 몰랐다. 한결이도 아직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때 멀리서 소리가 올라왔다. 창밖, 산 아래 도로에서 무거운 트럭이 기어를 바꾸는 소리였다. 한 대가 아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줄지어 산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새벽 네 시였다. 월요일이 아니라 금요일 새벽이었다. 공사 가림막을 실은 트럭이었다.
한결이 입이 다시 닫혔다. 도경 선배가 창으로 달려갔다. 나는 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손바닥 밑의 미지근한 나무에서 소리가 났다. 전화기 신호음이었다.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이 딸깍, 하고 끊겼다.
누가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숨소리가 났다. 넉 초가 아니었다. 짧고 급한, 겁먹은 사람의 숨이었다. 나는 그 숨을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리려 했다. 두 번째 학교 본관 이 층 화장실, 세면대 밑이었다. 트럭 불빛이 복도 창을 하나씩 훑고 지나가면서 벽의 연필 이름들을 차례로 비췄다. 나는 손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