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96자)

노란 공

국민 판사 추첨제 · 은해록

수원지방법원 대법정 두 번째 줄에 앉은 사람들 가운데 앞치마를 두른 사람은 이금분 하나였다⁠. 새벽 다섯 시에 들어온 생닭 오십 마리를 반쯤 손질하다가 소집 시각이 아홉 시 반이라는 것을 떠올렸고⁠, 손만 씻고 택시를 탔다⁠. 빨간 앞치마에는 어제 튀긴 기름이 얼룩져 있었다⁠. 법정 안은 난방이 세서 앞치마에 밴 기름 냄새가 두 번째 줄 전체로 퍼졌다⁠.

옆자리의 안경 쓴 남자가 코를 두 번 킁킁거리고 금분을 돌아보았다⁠.

“⁠혹시 통닭집 하세요⁠?⁠”

“⁠영통 금분이네요⁠. 후라이드 반⁠, 양념 반 좋아하시죠⁠?⁠”

“⁠어떻게 아셨어요⁠?⁠”

“⁠눈썹이요⁠. 반반 손님은 메뉴판 보다가 눈썹이 가운데로 모여요⁠. 하나만 고르기 싫어서⁠.⁠”

남자는 웃다가 제 눈썹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앞줄의 할머니가 고개를 돌려 쉿 소리를 냈다⁠.

판사석 앞에는 사람 키만 한 투명 원통이 놓여 있었다⁠. 원통 안에서 빨강⁠, 파랑⁠, 초록⁠, 노랑 공들이 서로 기대어 있었다⁠. 공에는 아무 글씨도 없었다⁠. 법원 경위가 원통 옆에 손잡이를 끼우는 동안 벽의 큰 화면에 글자가 떴다⁠.

「⁠국민 판사 추첨제 안내 · 임기 석 달 · 사건 하나 · 정식 판사 한 명과 나란히 앉음 · 판결의 결론과 판결문은 국민 판사가 정하고 씀 · 정당한 까닭 없이 거절하면 벌금 천만 원⁠」

뒷줄에서 누가 천만 원⁠, 하고 소리 내어 읽었다⁠. 금분은 저도 모르게 입속으로 계산했다⁠. 한 마리 삼만 원이면 삼백삼십 마리하고 조금 더였다⁠. 금요일 밤 장사로 치면 석 주 치였다⁠.

휴대전화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울렸다⁠. 「⁠띵동⁠! 한입배달 · 예약 주문 · 순살 두 마리 · 오후 한 시⁠」⁠. 경위가 금분을 쳐다보았다⁠. 금분은 전화기를 무음으로 돌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남편 오경호에게서 문자도 와 있었다⁠. 「⁠여보 뽑히지 마 뽑히면 박수 칠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법원장이 단상에 서서 짧게 인사하고 손잡이를 돌리라고 했다⁠. 경위가 손잡이를 돌리자 원통 안의 공들이 우르르 굴렀다⁠. 공끼리 부딪는 소리가 마른 콩 볶는 소리와 비슷했다⁠. 서른 명이 한꺼번에 숨을 멈췄고⁠, 금분은 공 대신 사람들 얼굴을 보았다⁠. 안경 쓴 남자는 눈을 감았고⁠, 앞줄 할머니는 두 손을 모았고⁠, 맨 끝의 젊은 여자는 휴대전화 화면을 몰래 보고 있었다⁠.

원통 아래 구멍으로 공 하나가 굴러 나왔다⁠. 노란 공이었다⁠.

법원장이 공을 받아 비틀어 열었다⁠. 공은 반으로 갈라졌고 안에서 접힌 종이가 나왔다⁠. 법원장이 종이를 펴서 마이크에 대고 읽었다⁠.

“⁠열일곱 번⁠.⁠”

금분은 제 손에 쥔 소집 통지서를 내려다보았다⁠. 통지서 오른쪽 위에 볼펜으로 17이라고 쓰여 있었다⁠. 법원 직원이 아침에 쓴 숫자였다⁠. 금분은 숫자를 한참 보다가⁠,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른 명이 모두 앞치마를 보고 있었다⁠.

*

법원 직원이 판사실 옆 탈의실로 검은 법복을 가져왔다⁠. 앞치마를 벗으라고 했는데 매듭이 풀리지 않았다⁠. 열두 해 동안 아침마다 같은 자리에 묶은 끈이 기름에 절어서⁠, 손톱으로 파도 매듭이 꿈쩍하지 않았다⁠.

“⁠가위 있어요⁠?⁠”

“⁠앞치마를 자르시게요⁠?⁠”

“⁠아니요⁠. 그냥 위에 입을게요⁠. 이거 자르면 우리 집 닭이 안 튀겨져요⁠.⁠”

직원은 웃지도 못하고 법복을 펴 들었다⁠. 금분은 앞치마 위로 법복 소매에 팔을 꿰었다⁠. 탈의실 벽 거울에 통통하고 다부진 몸이 비쳤다⁠. 짙은 갈색 곱슬머리를 뒤로 틀어 올려 묶었는데⁠, 새벽부터 닭을 만지는 사이 잔머리가 귀 옆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둥근 얼굴에 숯으로 그은 것처럼 짙은 눈썹⁠, 놀라면 더 동그래지는 눈⁠. 검은 법복 깃 사이로 기름 얼룩 묻은 빨간 앞치마가 한 뼘 보였다⁠. 금분은 잔머리를 손가락으로 귀 뒤에 밀어 넣었다⁠. 손을 떼자 잔머리는 도로 튀어나왔다⁠. 직원이 노란 공을 두 쪽 맞춰서 건넸다⁠. 뽑힌 사람에게 기념으로 준다고 했다⁠. 금분은 공을 법복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공이 앞치마 주머니와 부딪쳤다⁠.

판사실 문에는 「⁠형사3부 부장판사 한병찬⁠」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안에 들어서자 쉰을 조금 넘긴 남자가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흰 셔츠 단추가 목 끝까지 채워져 있었고⁠, 책상 위 볼펜 네 자루가 길이 순서로 누워 있었다⁠.

“⁠한병찬입니다⁠. 석 달 동안 판사님 오른쪽에 앉습니다⁠.⁠”

“⁠이금분입니다⁠. 판사님 소리 들으니까 등이 간지럽네요⁠.⁠”

“⁠익숙해지실 겁니다⁠. 이 년 동안 국민 판사님 열한 분이 모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병찬은 탁자 위에 서류 묶음을 밀어 놓았다⁠. 두께가 금분이네 통닭 전단지 한 상자만 했다⁠. 맨 위 표지에 사건명이 있었다⁠. 「⁠업무상과실치사 · 세온대학병원 별관 중환자실 정전 사망 사건⁠」⁠. 표지 아래 피고인 칸을 읽다가 금분의 손이 멈췄다⁠.

「⁠피고인 조정목(⁠52⁠) · 세온대학병원 흉부외과 교수⁠」

금분은 이름을 두 번 읽었다⁠. 세 번째로 읽을 때는 이름 대신 금요일 밤 아홉 시의 주문 알림이 보였다⁠. 반반 한 마리⁠, 목 따로⁠, 무 많이⁠. 세 해 전 겨울⁠, 남편 경호의 가슴을 열고 열한 시간을 서 있었다는 의사였다⁠. 수술이 끝나고 수술실 앞에 나와 마스크를 내리던 얼굴을 금분은 기억했다⁠. 수술 뒤로 정목은 금요일마다 닭을 시켰다⁠. 닭 목만 따로 모아 달라는 손님은 영통에 정목 하나였다⁠.

병찬이 금분의 얼굴을 보다가 물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금요일마다 반반에 목 따로요⁠.⁠”

“⁠목 따로⁠.⁠”

병찬이 낱말을 그대로 되받아 말했다⁠. 판결문의 낯선 용어를 소리 내어 읽는 사람 같았다⁠. 금분은 남편 수술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다⁠. 병찬은 끝까지 듣고 메모지에 두 줄을 적었다⁠.

“⁠첫 공판에서 밝히셔야 합니다⁠. 친족이나 고용 관계가 아니면 대개 기피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이 제도는 원래 동네 사람이 동네 사람을 재판하자고 만든 것이니까요⁠.⁠”

병찬은 서류 묶음 첫 장을 넘겼다⁠. 노란 메모지가 붙어 있었고⁠, 반듯한 글씨가 세 줄 있었다⁠. 「⁠긴급피난 · 인과관계 입증 곤란 · 무죄가 상당⁠」⁠. 금분은 메모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건 뭐예요⁠?⁠”

“⁠제 법리 의견입니다⁠. 지난겨울 한파 밤에 별관 전기가 나갔습니다⁠. 비상 발전기 두 대 가운데 한 대가 돌지 않았고⁠, 비상 전기가 들어오는 빨간 콘센트는 스물네 병상 가운데 열두 병상 몫만 남았습니다⁠. 피고인이 어느 병상의 인공호흡기를 거기 꽂을지 정했습니다⁠. 아침까지 열두 명이 숨졌습니다⁠.⁠”

병찬은 숫자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말했다⁠. 금분은 빨간 콘센트라는 말에서 눈을 깜박였다⁠. 가게 주방 벽에도 콘센트가 여섯 개 있었고⁠, 튀김기 두 대가 그중 둘을 썼다⁠.

“⁠법리대로라면 이 사건은 무죄입니다⁠. 판사님이 할 일은 이 결론을 사람이 알아듣는 말로 쓰시는 겁니다⁠.⁠”

“⁠닭도 안 튀겨 보고 맛을 정해요⁠?⁠”

“⁠기름 온도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온도는 정해져 있어도 닭은 다 달라요⁠. 같은 날 들어온 닭도 어떤 놈은 칠 분⁠, 어떤 놈은 팔 분이에요⁠.⁠”

병찬은 대꾸하지 않고 창밖을 보았다⁠. 법원 마당 건너편 정문에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병찬이 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두 해 전에 이 법원에서 국민 판사 한 분이 울면서 판결문을 쓰셨습니다⁠.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혔고⁠, 국회는 지금 그 판결문을 들고 다닙니다⁠. 제도를 없애자는 법안이 다음 달 법사위에 올라갑니다⁠.⁠”

“⁠그래서 저보고 울지 말라고요⁠?⁠”

“⁠우셔도 됩니다⁠. 판결문만 울지 않으면 됩니다⁠.⁠”

금분은 법복 주머니에서 노란 공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공은 조금 굴러가다가 메모지 앞에서 멈췄다⁠.

“⁠판사님⁠. 저는 손님 눈을 먼저 봐요⁠. 눈 보면 뭘 시킬지 알아요⁠. 이 재판도 사람들 눈부터 볼게요⁠. 메모는 그다음에 읽을게요⁠.⁠”

*

정문 앞에는 영정 열두 장이 접이식 탁자 위에 나란히 서 있었다⁠. 사진 속 얼굴들은 나이도 웃는 모양도 다 달랐다⁠. 넥타이를 맨 할아버지⁠, 단발머리 아주머니⁠, 군복 입은 젊은 남자⁠. 맨 앞자리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여자는 검은 리본을 꿰매고 있었다⁠. 입술 사이에 시침핀 두 개를 물고 있었다⁠.

편미경이었다⁠. 영통중앙상가 2층 수선집 사장이었다⁠. 금분의 빨간 앞치마 오른쪽 주머니를 지난가을 꿰매 준 사람이 미경이었다⁠. 미경은 바늘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미경의 눈이 법복 깃 사이의 빨간 앞치마에서 멈췄다⁠. 미경이 시침핀을 입에서 빼냈다⁠.

“⁠금분 씨가 판사야⁠?⁠”

“⁠…⁠…네⁠. 오늘 뽑혔어요⁠.⁠”

미경은 대답하지 않고 금분의 앞치마를 보았다⁠. 주머니 귀퉁이 실밥이 다시 터져 있었다⁠.

“⁠주머니 또 터졌네⁠.⁠”

“⁠이따 갖다 드릴게요⁠.⁠”

“⁠우리 엄마 4번 병상이었어⁠.⁠”

미경은 한마디만 하고 바느질로 돌아갔다⁠. 금분은 4번이라는 숫자를 들고 정문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 동안 등 뒤에서 미경의 눈길을 느꼈다⁠. 돌아보지 않았는데도 알았다⁠. 열두 해 동안 손님 눈을 읽었더니 등에도 눈이 생겼다⁠.

*

밤 여덟 시 반⁠, 금분이네 통닭은 금요일답게 정신이 없었다⁠. 튀김기 두 대에서 기름이 동시에 끓었고⁠, 주문 출력기는 혼자 영수증을 뱉었다⁠. 알바생 엄찬별이 포장 상자를 접으면서 휴대전화 화면을 금분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사장님⁠, 판사복 사진 인스타에 올려도 돼요⁠? 해시태그는 판사님이 튀긴 닭⁠.⁠”

“⁠올리면 너 순살로 만든다⁠.⁠”

“⁠그것도 해시태그로 쓸게요⁠.⁠”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가게 앞에서 멎었다⁠. 경호가 헬멧을 벗으며 들어왔다⁠. 세 해 전 수술 뒤로 무거운 것을 못 들어서 배달만 맡았다⁠. 가슴 한가운데 긴 흉터가 있었고⁠, 흉터 위에 늘 내복을 두 겹 입었다⁠.

“⁠여보⁠, 아까 문자 봤어⁠? 뽑혔다길래 오토바이 위에서 박수 쳤어⁠. 신호 대기 중에⁠.⁠”

“⁠핸들 놓고⁠?⁠”

“⁠법적으로 신호 대기 중에는 괜찮아⁠. 도로교통법 몇 조였더라⁠, 칠십오 조⁠?⁠”

“⁠아무 데나 갖다 붙이지 마⁠.⁠”

계산대 위 작은 텔레비전에서 밤 뉴스가 소리 없이 돌았다⁠. 아래로 자막이 흘렀다⁠. 「⁠국민 판사제 폐지 법안 발의 … ‘⁠감정 재판에 사법 신뢰 무너져⁠’⁠」⁠. 휴대전화에서는 상가 단톡방이 계속 울렸다⁠. 「⁠영통중앙상가 상인회 · 떡집⁠: 금분 사장님 판사 되셨대요⁠?⁠?⁠」 「⁠정육점⁠: 축하해야 되나 위로해야 되나⁠」 「⁠미용실⁠: 판사님 단골 할인 되나요ㅋㅋ⁠」⁠.

아홉 시 정각이었다⁠. 주문 출력기가 멈추고⁠, 계산대 태블릿에 새 주문 창이 떴다⁠.

「⁠띵동⁠! 한입배달 · 새 주문 · 반반 한 마리 · 목 따로 · 무 많이 · 주문자 조정목⁠」

창 아래 요청사항 칸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사장님⁠, 오늘 법정에서 뵀습니다⁠. 오늘까지만 시키겠습니다⁠.⁠」

금분은 태블릿 앞에서 손을 닦았다⁠. 앞치마에 손바닥을 문지르고⁠, 한 번 더 문질렀다⁠. 화면 아래에 단추 두 개가 있었다⁠. 초록색 「⁠주문 수락⁠」과 회색 「⁠주문 거절⁠」⁠. 열두 해 동안 회색 단추를 누른 것은 닭이 떨어진 날뿐이었다⁠.

경호가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여보⁠. 선생님이야⁠.⁠”

“⁠알아⁠.⁠”

찬별이 상자를 접던 손을 멈췄다⁠.

“⁠사장님⁠, 이거 받으면 법적으로 뭐가 돼요⁠? 뇌물이에요⁠, 매출이에요⁠?⁠”

“⁠둘 다 아니야⁠. 닭이야⁠.⁠”

튀김기에서 타이머가 울렸다⁠. 금분은 타이머를 끄지 않았다⁠. 태블릿 불빛에 동그란 눈이 하얗게 비쳤다⁠. 금분은 검지로 회색 단추를 눌렀다⁠. 「⁠거절 사유를 선택해 주세요⁠」 창이 다시 떴다⁠. 「⁠재료 소진 · 영업 종료 · 배달 불가 · 기타⁠」⁠. 금분은 기타를 누르고⁠, 한 글자씩 쳤다⁠.

「⁠선고 날까지 못 받습니다⁠. 그날 오세요⁠.⁠」

전송을 누르자 기름솥에서 닭 한 바구니가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타이머는 계속 울렸고⁠, 경호가 대신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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