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213자) · 보른
눈에서 지운다
이름을 먹는 드래곤 · 백해원
돋은 마을 열하나에는 눈먼 사람이 많았다.
아셀이 그것을 세어 봤다.
첫째 마을에 눈먼 사람이 넷이었다. 스물 몇 채에 넷이면 많다.
둘째 마을에 일곱이었다.
셋째 마을에 셋이었다.
열하나를 다 도는 데 스무날이 걸렸다.
다 돌고 나니 눈먼 사람이 마흔둘이었다.
마흔둘 가운데 서른아홉이 나면서 먼 사람이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 먼 사람이다.
아셀이 그 서른아홉한테 하나씩 물었다.
“언제 머셨습니까?”
대답이 다 비슷했다.
「누가 없어지고 나서.」
아셀이 그 말을 열하나째 마을에서 다시 들었을 때 알았다.
미르가 이름을 먹으면 그 사람을 본 사람들의 눈에서 먼저 지운다.
지우는 자리가 눈이다.
눈이 성한 사람은 지워진다.
눈이 먼 사람은 안 지워진다.
그런데 먼 사람들은 그 전에 성했다.
성할 때 본 얼굴이 지워지고, 그다음에 눈이 먼 것이다.
아셀이 보른한테 그 말을 하러 도성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니 스무날 만이다.
아셀이 돌아와서 세비를 찾았다.
마당에 없었다.
담 밑에도 없었다.
관리인한테 물었다.
“서른하나가 어디 갔습니까?”
관리인이 말했다.
“…서른하나는 저기 있다.”
관리인이 가리킨 아이는 세비가 아니었다.
여덟쯤 된 아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아셀이 물었다.
“…저 아이는 언제 왔습니까?”
관리인이 말했다.
“두 해 됐다.”
아셀이 그 자리에 섰다.
두 해 전에 온 것은 세비다.
관리인이 말했다.
“왜 그러느냐?”
아셀이 물었다.
“…세비를 모르십니까?”
관리인이 물었다.
“세비가 누구냐?”
아셀이 대답을 못 했다.
아셀이 담 밑으로 갔다.
담 밑에 아무것도 없었다.
세비가 날마다 앉던 자리다. 앉던 자리라 흙이 눌려 있었다.
눌린 자국이 아직 있었다.
아셀이 그 자국에 앉았다.
앉아서 불러 봤다.
“세비.”
아무 일도 없었다.
아셀이 알았다.
부르는 것은 배 속에 있는 사람한테 하는 것이다.
밖에 있는 사람 이름을 부르면 아무 일도 안 난다.
세비는 배 속에 있다.
아셀이 일어섰다.
일어서서 다시 앉았다.
세비 누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이제 없다.
아셀이 안다.
아셀이 그것을 소리 내어 봤다.
“세하.”
안 잊었다.
아셀이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다.
세비가 말한 것이 떠올랐다.
「안 부르면 잊어버려.」
아셀이 그날부터 두 이름을 불렀다.
아셀이 그날부터 마당에 안 갔다.
마당에 가면 서른하나가 다른 아이다.
그 아이를 보면 세비가 없어진 것이 확인된다.
확인하지 않으면 없어진 것이 아닌 것 같다.
아셀은 그것이 틀린 생각인 줄 알면서 열흘을 그렇게 했다.
열흘째에 마당에 갔다.
가서 담 밑에 앉았다.
새 서른하나가 그것을 보고 왔다.
“…형, 거기 왜 앉아?”
아셀이 말했다.
“…여기 앉던 애가 있었어.”
그 아이가 물었다.
“누구?”
아셀이 말했다.
“너보다 먼저 서른하나였던 애.”
그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 말고 서른하나가 있었어?”
아셀이 말했다.
“있었어.”
그 아이가 물었다.
“이름이 뭔데?”
아셀이 말했다.
“세비.”
그 아이가 그 이름을 따라 했다.
“세비.”
아셀이 그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한 사람 더 알게 됐다.
아셀이 그 아이한테 물었다.
“…너 이름 있어?”
그 아이가 말했다.
“없어.”
“…”
“번호만 있어.”
아셀이 말했다.
“하나 지어.”
그 아이가 물었다.
“…지어도 돼?”
아셀이 말했다.
“돼.”
“…”
“지으면 안 넘어가.”
그 아이가 물었다.
“…뭐가 안 넘어가?”
아셀이 말했다.
“번호는 다음 애한테 넘어가는데 이름은 안 넘어가.”
그 아이가 한참 생각했다.
“…어려운데.”
아셀이 말했다.
“천천히 지어.”
하루에 한 번씩.
세비와 세하다.
지하로 내려가니 보른이 없었다.
지하 첫째 문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서른쯤 된 자였다.
“…보른 아저씨는요.”
그자가 물었다.
“누구요?”
아셀이 말했다.
“여기 삼십 년 계시던 분입니다.”
그자가 말했다.
“여기는 내가 오 년 지켰소.”
아셀이 그 자리에 섰다.
“…오 년이요?”
“오 년이오.”
아셀이 물었다.
“그전에는 누가 지켰습니까?”
그자가 말했다.
“내가 지켰소.”
아셀이 물었다.
“오 년 전에는요.”
그자가 말했다.
“…모르겠소.”
아셀이 계단에 앉았다.
보른이 먹혔다.
아셀이 없는 스무날 사이에 먹혔다.
먹히면 아무도 못 알아본다. 오 년 지켰다고 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아셀은 알아본다.
알아보는 까닭을 아셀은 그때 알았다.
아셀은 그 얼굴을 봤지만, 아셀 눈에서는 안 지워졌다.
지워지지 않은 까닭이 있다.
아셀은 미르가 안 먹은 사람이다.
미르가 안 먹은 사람은 미르가 지우지도 못한다.
아셀이 그날 밤 환기구로 들어갔다.
미르가 자고 있었다.
목 아래 눈이 떠 있었다.
아셀이 앞에 섰다.
“…보른 아저씨를 드셨습니까?”
미르가 코를 벌렸다.
아셀이 말했다.
“대답하십시오.”
미르가 소리를 한 번 냈다.
짧았다.
아셀이 말했다.
“…드셨군요.”
미르가 고개를 내렸다.
아셀이 물었다.
“왜 드셨습니까?”
미르가 대답하지 않았다.
아셀이 말했다.
“배가 부르시다고 하셨습니다.”
미르가 소리를 냈다.
길게 한 번이었다.
아셀이 그 소리를 세 번째로 들었다.
세 번 들으니 알겠다.
그 소리는 「안 먹었다」가 아니다.
「못 참았다」다.
아셀이 그 자리에서 미르한테 물었다.
“…세비를 드셨습니까?”
미르가 코를 벌렸다.
아셀이 말했다.
“열두 살입니다. 마당에 있던 아이입니다.”
미르가 소리를 냈다.
짧게 한 번이었다.
“…드셨군요.”
미르가 고개를 내렸다.
아셀이 물었다.
“왜 그 아이를 드셨습니까?”
미르가 소리를 냈다.
길게 한 번이었다.
「못 참았다」다.
아셀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 아이가 여기 왔었습니다.”
미르가 고개를 내렸다.
“누나 이름을 불렀습니다.”
미르가 고개를 내렸다.
아셀이 물었다.
“…부른 사람을 드셨습니까?”
미르가 대답하지 않았다.
아셀이 다시 물었다.
“부르면 냄새가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
“냄새가 나오면 배가 열립니까?”
미르가 목 아래 눈을 감았다.
감는 것을 아셀이 처음 봤다.
아셀이 말했다.
“…열리는군요.”
“…”
“열리면 못 참으시는군요.”
아셀이 일어섰다.
“그럼 부르는 사람이 제일 위험합니다.”
미르가 고개를 내렸다.
아셀이 그 자리에 섰다.
부르면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부르면 부른 사람이 먹힌다.
그래서 삼백 해 동안 아무도 안 나온 것이다.
부른 사람이 먹히면 그 사람 이름을 또 아무도 모르게 된다.
부르는 사람이 사라지는 구조다.
아셀이 물었다.
“…저는 왜 안 드십니까?”
미르가 코를 벌렸다.
벌렸다가 닫았다.
아셀이 알아들었다.
냄새가 안 난다.
아셀은 어미가 호적에 없다. 아셀이라는 이름은 지은 이름이다.
지은 이름은 냄새가 없다.
먹을 것이 없는 것이다.
아셀이 그 자리에 앉았다.
“…배가 부른데 드셨습니까?”
미르가 고개를 내렸다.
아셀이 물었다.
“왜 못 참으셨습니까?”
미르가 코를 벌렸다.
벌리고 아셀 쪽으로 목을 뻗었다.
목 아래 눈이 아이 앞에 왔다.
그 눈이 젖어 있었다.
아셀이 처음 봤다.
미르가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짧게 두 번, 길게 한 번이었다.
아셀이 그것을 못 알아들었다.
밖에 나와서 성벽에 앉아 있었다.
들판에 불빛이 열둘이었다.
하나가 늘어 있었다.
아셀이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뱉었다.
보른을 먹고 하나를 뱉었다.
둘에 하나가 아니라 하나에 하나다.
아셀이 그 셈을 하다가 멈췄다.
보른이 먹히기 전에 누구를 불렀다.
부른 이름이 있어야 뱉는다.
보른은 삼십 년 동안 명부를 셋 번 세었다.
이름은 다 지워졌고 금만 남았다.
그런데 보른이 하나를 알고 있었다.
아셀이 성벽에서 내려왔다.
내려와서 지하로 갔다.
첫째 문 궤를 열었다.
서판 천이백을 하나씩 들춰 봤다.
이레가 걸렸다.
이렛날 밤에 하나를 찾았다.
궤 바닥에 서판이 하나 더 있었다.
밀랍이 새것이었다.
거기 글자가 남아 있었다.
지워지지 않은 글자다.
두 자였다.
아셀이 그것을 읽었다.
읽고 나서 손이 떨렸다.
그 두 자를 아셀은 들어 본 적이 있다.
문 너머에서 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의 주인이다.
아셀이 그 서판을 들고 열두 번째 문으로 갔다.
환기구로 들어갔다.
미르가 목 아래 눈을 떴다.
아셀이 서판을 들었다.
“미르.”
미르가 코를 벌렸다.
아셀이 두 자를 읽었다.
소리 내어 읽었다.
미르가 목을 들었다.
들어서 천장까지 갔다.
돌기둥이 울렸다.
미르가 입을 열었다.
입에서 냄새가 나왔다.
사람 냄새다. 여럿이 아니라 하나였다.
아셀이 그 냄새를 맡았다.
맡아 본 적 없는 냄새인데 낯설지 않았다.
미르가 소리를 냈다.
길고 낮았다.
그러고 뱉었다.
뱉은 것은 덩어리가 아니었다.
소리였다.
목소리 하나가 방에 남았다.
여자 목소리였다.
“…아셀.”
아셀이 그 자리에 섰다.
목소리가 다시 났다.
“…아셀.”
아셀이 대답했다.
“예.”
목소리가 말했다.
“…네가 컸구나.”
아셀이 물었다.
“…어디 계십니까?”
목소리가 말했다.
“…여기 있다.”
아셀이 방을 봤다.
아무도 없었다.
미르가 고개를 내렸다.
아셀이 물었다.
“…몸은 어디 있습니까?”
목소리가 말했다.
“없다.”
“…”
“먹힌 것은 몸이 아니라 이름이다. 몸은 그때 남쪽에 두고 왔다.”
아셀이 물었다.
“그럼 지금 어떻게 됩니까?”
목소리가 말했다.
“마을이 돋으면 거기 있다.”
아셀이 성벽을 생각했다.
불빛이 열둘이었다.
“…열두 번째가 어머니십니까?”
목소리가 말했다.
“아니다.”
“…”
“열두 번째는 보른이다.”
아셀이 그 자리에 앉았다.
목소리가 말했다.
“보른이 나를 불렀다.”
“…”
“내 이름을 서판에 새기고 불렀다. 새기고 나서 먹혔다.”
아셀이 물었다.
“…그럼 어머니는요.”
목소리가 말했다.
“아직 안 나왔다.”
“…”
“나는 지금 네 앞에 있는 소리일 뿐이다.”
아셀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나오십니까?”
목소리가 말했다.
“네가 불렀으니 반쯤 나왔다.”
“…나머지는 어찌 됩니까?”
목소리가 말했다.
“마을이 돋아야 한다.”
“…어떻게 돋습니까?”
목소리가 말했다.
“사람이 살아야 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