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030자) · 사천이백열아홉

들판의 불빛 열하나

드래곤이 처음으로 먹지 않은 아이 · 황보겸

지하 첫째 문의 명부는 밀랍 서판이었다⁠.

서판이 궤에 들어 있고 궤가 넷이다⁠.

한 궤에 서판이 삼백이다⁠. 넷이면 천이백이다⁠.

한 서판에 이름이 서넛 적혀 있다⁠.

보른이 궤 하나를 열었다⁠.

“⁠봐라⁠.⁠”

아셀이 첫째 서판을 들었다⁠.

밀랍이 굳어 있고 쇠 첨필로 판 자국이 남아 있었다⁠.

글자가 안 보였다⁠.

아셀이 말했다⁠.

“⁠…비어 있습니다⁠.⁠”

보른이 말했다⁠.

“⁠다 그렇다⁠.⁠”

“⁠…⁠”

“⁠적은 사람이 먹히면 적은 것도 지워진다⁠.⁠”

아셀이 서판을 궤에 도로 넣었다⁠.

“⁠그럼 이 궤 넷이 다 빈 것입니까⁠?⁠”

보른이 말했다⁠.

“⁠수만 남았다⁠.⁠”

아셀이 서판을 도로 넣으면서 물었다⁠.

“⁠아저씨⁠, 이 명부는 누가 적었습니까⁠?⁠”

보른이 말했다⁠.

“⁠열두 번째 자리다⁠.⁠”

“⁠…열두 번째 자리요⁠?⁠”

보른이 말했다⁠.

“⁠이 문을 지키는 자리다⁠.⁠”

“⁠…아저씨 자리 아닙니까⁠?⁠”

보른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하 관리인이다⁠. 열두 번째 자리는 따로 있다⁠.⁠”

아셀이 물었다⁠.

“⁠지금은 누굽니까⁠?⁠”

보른이 말했다⁠.

“⁠없다⁠.⁠”

“⁠…⁠”

“⁠스물아홉 해 전에 마지막이었다⁠.⁠”

아셀이 물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보른이 말했다⁠.

“⁠베린이다⁠.⁠”

아셀이 이 이름을 들었다⁠.

보른이 말했다⁠.

“⁠베린이 사천이백열아홉 가운데 대부분을 먹였다⁠.⁠”

“⁠…⁠”

“⁠마을째 먹이던 시절에 그 자리에 있었다⁠.⁠”

아셀이 물었다⁠.

“⁠…몇을 먹였습니까⁠?⁠”

보른이 말했다⁠.

“⁠모른다⁠.⁠”

“⁠…⁠”

“⁠다만 하나는 안다⁠.⁠”

보른이 명부 궤를 닫았다⁠.

“⁠마지막에 제가 들어갔다⁠.⁠”

아셀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갔습니까⁠?⁠”

보른이 말했다⁠.

“⁠그해에 먹일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아홉 살짜리였다⁠.⁠”

“⁠…⁠”

“⁠베린이 그 아이를 안 넣고 제가 들어갔다⁠.⁠”

아셀이 물었다⁠.

“⁠…왜요⁠?⁠”

보른이 말했다⁠.

“⁠모른다⁠.⁠”

“⁠…⁠”

“⁠기록이 없다⁠. 먹혔으니까⁠.⁠”

아셀이 물었다⁠.

“⁠그럼 아저씨는 어떻게 아십니까⁠?⁠”

보른이 벽에 기댔다⁠.

“⁠그 아홉 살짜리가 나다⁠.⁠”

“⁠…수요⁠?⁠”

보른이 서판 뒷면을 보였다⁠.

뒷면에 금이 그어져 있었다⁠.

“⁠이름은 지워지는데 금은 안 지워진다⁠.⁠”

아셀이 이 금을 셌다⁠.

첫째 서판에 금이 넷이었다⁠.

보른이 말했다⁠.

“⁠천이백 서판의 금을 다 세면 사천이백열아홉이다⁠.⁠”

“⁠…삼십 년 동안 세셨습니까⁠?⁠”

보른이 말했다⁠.

“⁠세 번 세었다⁠.⁠”

아셀이 물었다⁠.

“⁠세 번 다 같았습니까⁠?⁠”

보른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사천이백열둘이었다⁠.⁠”

“⁠…⁠”

“⁠두 번째에 사천이백열다섯이었다⁠.⁠”

“⁠…⁠”

“⁠세 번째에 사천이백열아홉이다⁠.⁠”

아셀이 이 자리에 섰다⁠.

“⁠…늘었습니다⁠.⁠”

보른이 말했다⁠.

“⁠해마다 하나씩 는다⁠.⁠”

“⁠먹이기 때문입니까⁠?⁠”

보른이 말했다⁠.

“⁠그것도 있고⁠.⁠”

“⁠또요⁠?⁠”

보른이 말했다⁠.

“⁠한 해에 하나씩 먹이는데 세 해에 셋이 늘어야 맞는다⁠.⁠”

“⁠…⁠”

“⁠그런데 열 해에 일곱이 늘었다⁠.⁠”

아셀이 셈을 했다⁠.

“⁠…셋이 모자랍니다⁠.⁠”

보른이 말했다⁠.

“⁠아니다⁠. 넷이 남는다⁠.⁠”

“⁠…⁠”

“⁠먹인 것이 열인데 늘어난 것이 일곱이면 셋은 안 늘었다⁠.⁠”

아셀이 물었다⁠.

“⁠안 는 것이 무엇입니까⁠?⁠”

보른이 말했다⁠.

“⁠뱉은 것이다⁠.⁠”

아셀이 고개를 들었다⁠.

“⁠…뱉었습니까⁠?⁠”

보른이 말했다⁠.

“⁠셋을 뱉었다⁠.⁠”

아셀이 물었다⁠.

“⁠누가 불렀습니까⁠?⁠”

보른이 말했다⁠.

“⁠모른다⁠.⁠”

“⁠…⁠”

“⁠그런데 누가 부르고 있다⁠.⁠”

아셀이 세비를 데리고 들어간 것은 이 이튿날이다⁠.

세비가 환기구를 앞서 갔다⁠. 작아서 빨랐다⁠.

들어가서 돌기둥 뒤에 섰다⁠.

미르가 목 아래 눈을 떴다⁠.

세비가 이 자리에 굳었다⁠.

아셀이 앞으로 나섰다⁠.

“⁠미르⁠.⁠”

미르가 코를 벌렸다⁠.

아셀이 말했다⁠.

“⁠이 아이 누나가 배 속에 있는지 봐 주십시오⁠.⁠”

세비가 뒤에서 말했다⁠.

“⁠…세하⁠.⁠”

소리가 작았다⁠.

미르가 코를 안 벌렸다⁠.

아셀이 말했다⁠.

“⁠더 크게⁠.⁠”

세비가 다시 불렀다⁠.

“⁠세하⁠.⁠”

미르가 코를 벌렸다⁠.

냄새가 나왔다⁠.

사람 냄새다⁠.

세비가 이 냄새를 맡고 주저앉았다⁠.

아셀이 물었다⁠.

“⁠…맡았어⁠?⁠”

세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냄새야⁠.⁠”

아셀이 물었다⁠.

“⁠…어떻게 알아⁠?⁠”

세비가 말했다⁠.

“⁠몰라⁠.⁠”

“⁠…⁠”

“⁠그냥 알아⁠.⁠”

세비가 이 자리에 앉아서 울었다⁠.

우는데 소리를 안 냈다⁠.

미르가 코를 닫았다⁠.

세비가 한참 울고 나서 물었다⁠.

“⁠…형⁠.⁠”

“⁠왜⁠?⁠”

“⁠이제 어떻게 해⁠?⁠”

아셀이 말했다⁠.

“⁠부르면 나와⁠.⁠”

세비가 고개를 들었다⁠.

“⁠…부르면 나와⁠?⁠”

아셀이 말했다⁠.

“⁠나온대⁠.⁠”

세비가 일어섰다⁠.

일어서서 불렀다⁠.

“⁠세하⁠.⁠”

미르가 목을 들지 않았다⁠.

세비가 다시 불렀다⁠.

“⁠세하⁠!⁠”

미르가 고개를 돌렸다⁠.

세비가 아셀을 봤다⁠.

“⁠…왜 안 나와⁠?⁠”

아셀이 대답을 못 했다⁠.

미르가 소리를 냈다⁠.

짧게 두 번이었다⁠.

아셀이 알아들었다⁠.

“⁠…둘을 먹여야 하나를 뱉는대⁠.⁠”

세비가 물었다⁠.

“⁠…뭘 먹여⁠?⁠”

아셀이 말했다⁠.

“⁠사람⁠.⁠”

세비가 이 자리에 섰다⁠.

한참 있다가 물었다⁠.

“⁠…누구를⁠?⁠”

아셀이 대답하지 못했다⁠.

세비가 말했다⁠.

“⁠나 먹이면 안 돼⁠?⁠”

아셀이 고개를 들었다⁠.

세비가 말했다⁠.

“⁠나 하나면 반이잖아⁠.⁠”

“⁠…⁠”

“⁠하나 더는 어떻게든 되잖아⁠.⁠”

아셀이 세비 팔을 잡았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세비가 말했다⁠.

“⁠왜⁠?⁠”

아셀이 말했다⁠.

“⁠…네가 먹히면 누나를 부를 사람이 없어⁠.⁠”

세비가 이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아무 말도 안 했다⁠.

아셀이 말했다⁠.

“⁠부를 사람이 있어야 나와⁠.⁠”

“⁠…⁠”

“⁠네가 있어야 누나가 나와⁠.⁠”

세비가 물었다⁠.

“⁠…그럼 나는 뭐야⁠?⁠”

아셀이 말했다⁠.

“⁠부르는 사람⁠.⁠”

세비가 나오면서 물었다⁠.

“⁠…형⁠.⁠”

“⁠왜⁠?⁠”

“⁠누나가 거기서 내 소리 들을까⁠?⁠”

아셀이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다⁠.

세비가 말했다⁠.

“⁠들었으면 좋겠는데⁠.⁠”

아셀이 말했다⁠.

“⁠들었을 거야⁠.⁠”

세비가 물었다⁠.

“⁠…어떻게 알아⁠?⁠”

아셀이 말했다⁠.

“⁠나도 들었어⁠.⁠”

“⁠…⁠”

“⁠문 밖에서 냈는데 안에서 대답했어⁠.⁠”

세비가 이 자리에 섰다⁠.

“⁠…그럼 누나도 대답했겠네⁠.⁠”

아셀이 말했다⁠.

“⁠했겠지⁠.⁠”

세비가 물었다⁠.

“⁠…그런데 왜 나는 못 들었지⁠?⁠”

아셀이 대답을 못 했다⁠.

세비가 말했다⁠.

“⁠…내가 귀가 나쁜가 봐⁠.⁠”

아셀이 말했다⁠.

“⁠아니야⁠.⁠”

“⁠…⁠”

“⁠너는 담 밑에서 불렀잖아⁠. 거기는 너무 멀어⁠.⁠”

이 밤에 아셀이 남쪽 성벽에 올라갔다⁠.

들판이 보였다⁠.

들판은 넓고 어두웠다⁠.

아셀이 한참 봤다⁠.

들판 가운데에 불빛이 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다⁠.

아셀이 이것을 세었다⁠.

열하나였다⁠.

이튿날 아침에 보른한테 말했다⁠.

“⁠아저씨⁠, 들판에 불빛이 열하나 있습니다⁠.⁠”

보른이 이 말에 일어섰다⁠.

“⁠…봤냐⁠?⁠”

“⁠봤습니다⁠.⁠”

보른이 말했다⁠.

“⁠작년에 여덟이었다⁠.⁠”

아셀이 물었다⁠.

“⁠…무엇입니까⁠?⁠”

보른이 말했다⁠.

“⁠돋은 마을이다⁠.⁠”

“⁠…⁠”

“⁠뱉은 것이 셋이면 마을이 셋 돋아야 한다⁠. 그런데 열하나다⁠.⁠”

아셀이 물었다⁠.

“⁠그럼 여덟은요⁠.⁠”

보른이 말했다⁠.

“⁠그 전에 돋은 것이다⁠.⁠”

아셀이 말했다⁠.

“⁠…그럼 누가 계속 부르고 있습니다⁠.⁠”

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부르고 있다⁠.⁠”

아셀이 물었다⁠.

“⁠가 봐도 됩니까⁠?⁠”

보른이 말했다⁠.

“⁠가면 못 돌아온다⁠.⁠”

“⁠…왜요⁠?⁠”

보른이 말했다⁠.

“⁠돋은 마을은 지도에 없다⁠.⁠”

“⁠…⁠”

“⁠지도에 없는 데로 가면 도성 호적에서 지워진다⁠.⁠”

아셀이 말했다⁠.

“⁠저는 호적에 어미가 없습니다⁠.⁠”

보른이 이 사람을 봤다⁠.

아셀이 말했다⁠.

“⁠지워질 것이 반쯤밖에 없습니다⁠.⁠”

아셀이 들판으로 간 것은 같은 달 그믐이었다⁠.

도성 남문에서 들판까지 하루 길이다⁠.

가는 동안 아무도 안 만났다⁠. 들판에 사는 사람이 없다고 도성에서는 그렇게 안다⁠.

해가 질 때 불빛이 보였다⁠.

가까이 가니 마을이었다⁠.

목조 가옥에 돌담이고 지붕이 널과 이엉이다⁠. 우물이 돌 두레우물이다⁠.

도성 안에는 이런 집이 없다⁠. 도성은 석조다⁠.

아셀이 마을 어귀에 섰다⁠.

사람이 나왔다⁠.

마흔쯤 된 여자였다⁠.

“⁠…도성에서 왔소⁠?⁠”

“⁠왔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돌아가시오⁠.⁠”

아셀이 말했다⁠.

“⁠어머니를 찾으러 왔습니다⁠.⁠”

여자가 걸음을 멈췄다⁠.

“⁠…이름이 뭐요⁠?⁠”

아셀이 말했다⁠.

“⁠모릅니다⁠.⁠”

여자가 웃었다⁠.

“⁠모르는데 찾소⁠?⁠”

“⁠…압니다⁠.⁠”

“⁠…뭘 아오⁠?⁠”

아셀이 말했다⁠.

“⁠제 이름이 아셀입니다⁠. 미르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여자가 이 말에 얼굴을 굳혔다⁠.

“⁠…미르가 불렀소⁠?⁠”

“⁠미르가 아니라 배 속에서 불렀습니다⁠.⁠”

여자가 아셀을 오래 봤다⁠.

그리고 말했다⁠.

“⁠…들어오시오⁠.⁠”

마을은 스물 몇 채였다⁠.

집집이 불을 켜 놨다⁠. 초저녁인데 다 켜 놨다⁠.

아셀이 물었다⁠.

“⁠왜 다 켜 놓습니까⁠?⁠”

여자가 말했다⁠.

“⁠꺼지면 없어지오⁠.⁠”

“⁠…⁠”

“⁠여기는 지도에 없는 마을이오⁠. 불을 끄면 여기 있다는 표가 없어지오⁠.⁠”

아셀이 물었다⁠.

“⁠이 마을이 언제 돋았습니까⁠?⁠”

여자가 말했다⁠.

“⁠열두 해 전이오⁠.⁠”

“⁠…누가 불렀습니까⁠?⁠”

여자가 마을 안쪽을 가리켰다⁠.

“⁠저 집에 물어보시오⁠.⁠”

안쪽 집에 노인이 있었다⁠.

여든쯤 됐다⁠. 앞이 안 보인다고 했다⁠.

아셀이 앉았다⁠.

“⁠어르신⁠, 누가 이름을 부르셨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내가 불렀소⁠.⁠”

“⁠…누구를요⁠?⁠”

노인이 말했다⁠.

“⁠내 형이오⁠.⁠”

“⁠어떻게 이름을 아셨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안 잊었소⁠.⁠”

아셀이 물었다⁠.

“⁠먹히면 아무도 못 알아본다고 들었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그렇소⁠.⁠”

“⁠…그런데 어떻게 아십니까⁠?⁠”

노인이 제 눈을 가리켰다⁠.

“⁠나는 눈이 안 보이오⁠.⁠”

아셀이 이 말을 못 알아들었다⁠.

노인이 말했다⁠.

“⁠미르는 눈에서 지우오⁠.⁠”

“⁠…⁠”

“⁠보는 사람한테서 지우고 적은 것에서 지우오⁠.⁠”

노인이 제 귀를 짚었다⁠.

“⁠소리에서는 못 지우오⁠.⁠”

아셀이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노인이 말했다⁠.

“⁠나는 형 얼굴을 모르오⁠. 이름은 아오⁠.⁠”

“⁠…⁠”

“⁠형이 나를 부르던 소리를 아오⁠.⁠”

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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