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025자) · 사천이백열아홉

들판의 불빛 열하나

이름을 먹는 드래곤 · 백해원

지하 첫째 문의 명부는 밀랍 서판이었다.

서판이 궤에 들어 있고 궤가 넷이다.

한 궤에 서판이 삼백이다. 넷이면 천이백이다.

한 서판에 이름이 서넛 적혀 있다.

보른이 궤 하나를 열었다.

“봐라.”

아셀이 첫째 서판을 들었다.

밀랍이 굳어 있고 쇠 첨필로 판 자국이 남아 있었다.

글자가 안 보였다.

아셀이 말했다.

“…비어 있습니다.”

보른이 말했다.

“다 그렇다.”

“…”

“적은 사람이 먹히면 적은 것도 지워진다.”

아셀이 서판을 궤에 도로 넣었다.

“그럼 이 궤 넷이 다 빈 것입니까?”

보른이 말했다.

“수만 남았다.”

아셀이 서판을 도로 넣으면서 물었다.

“아저씨, 이 명부는 누가 적었습니까?”

보른이 말했다.

“열두 번째 자리다.”

“…열두 번째 자리요?”

보른이 말했다.

“이 문을 지키는 자리다.”

“…아저씨 자리 아닙니까?”

보른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하 관리인이다. 열두 번째 자리는 따로 있다.”

아셀이 물었다.

“지금은 누굽니까?”

보른이 말했다.

“없다.”

“…”

“스물아홉 해 전에 마지막이었다.”

아셀이 물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보른이 말했다.

“베린이다.”

아셀이 그 이름을 들었다.

보른이 말했다.

“베린이 사천이백열아홉 가운데 대부분을 먹였다.”

“…”

“마을째 먹이던 시절에 그 자리에 있었다.”

아셀이 물었다.

“…몇을 먹였습니까?”

보른이 말했다.

“모른다.”

“…”

“다만 하나는 안다.”

보른이 명부 궤를 닫았다.

“마지막에 제가 들어갔다.”

아셀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갔습니까?”

보른이 말했다.

“그해에 먹일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아홉 살짜리였다.”

“…”

“베린이 그 아이를 안 넣고 제가 들어갔다.”

아셀이 물었다.

“…왜요?”

보른이 말했다.

“모른다.”

“…”

“기록이 없다. 먹혔으니까.”

아셀이 물었다.

“그럼 아저씨는 어떻게 아십니까?”

보른이 벽에 기댔다.

“그 아홉 살짜리가 나다.”

“…수요?”

보른이 서판 뒷면을 보였다.

뒷면에 금이 그어져 있었다.

“이름은 지워지는데 금은 안 지워진다.”

아셀이 그 금을 셌다.

첫째 서판에 금이 넷이었다.

보른이 말했다.

“천이백 서판의 금을 다 세면 사천이백열아홉이다.”

“…삼십 년 동안 세셨습니까?”

보른이 말했다.

“세 번 세었다.”

아셀이 물었다.

“세 번 다 같았습니까?”

보른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사천이백열둘이었다.”

“…”

“두 번째에 사천이백열다섯이었다.”

“…”

“세 번째에 사천이백열아홉이다.”

아셀이 그 자리에 섰다.

“…늘었습니다.”

보른이 말했다.

“해마다 하나씩 는다.”

“먹이기 때문입니까?”

보른이 말했다.

“그것도 있고.”

“또요?”

보른이 말했다.

“한 해에 하나씩 먹이는데 세 해에 셋이 늘어야 맞는다.”

“…”

“그런데 열 해에 일곱이 늘었다.”

아셀이 셈을 했다.

“…셋이 모자랍니다.”

보른이 말했다.

“아니다. 넷이 남는다.”

“…”

“먹인 것이 열인데 늘어난 것이 일곱이면 셋은 안 늘었다.”

아셀이 물었다.

“안 는 것이 무엇입니까?”

보른이 말했다.

“뱉은 것이다.”

아셀이 고개를 들었다.

“…뱉었습니까?”

보른이 말했다.

“셋을 뱉었다.”

아셀이 물었다.

“누가 불렀습니까?”

보른이 말했다.

“모른다.”

“…”

“그런데 누가 부르고 있다.”

아셀이 세비를 데리고 들어간 것은 그 이튿날이다.

세비가 환기구를 앞서 갔다. 작아서 빨랐다.

들어가서 돌기둥 뒤에 섰다.

미르가 목 아래 눈을 떴다.

세비가 그 자리에 굳었다.

아셀이 앞으로 나섰다.

“미르.”

미르가 코를 벌렸다.

아셀이 말했다.

“이 아이 누나가 배 속에 있는지 봐 주십시오.”

세비가 뒤에서 말했다.

“…세하.”

소리가 작았다.

미르가 코를 안 벌렸다.

아셀이 말했다.

“더 크게.”

세비가 다시 불렀다.

“세하.”

미르가 코를 벌렸다.

냄새가 나왔다.

사람 냄새다.

세비가 그 냄새를 맡고 주저앉았다.

아셀이 물었다.

“…맡았어?”

세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냄새야.”

아셀이 물었다.

“…어떻게 알아?”

세비가 말했다.

“몰라.”

“…”

“그냥 알아.”

세비가 그 자리에 앉아서 울었다.

우는데 소리를 안 냈다.

미르가 코를 닫았다.

세비가 한참 울고 나서 물었다.

“…형.”

“왜?”

“이제 어떻게 해?”

아셀이 말했다.

“부르면 나와.”

세비가 고개를 들었다.

“…부르면 나와?”

아셀이 말했다.

“나온대.”

세비가 일어섰다.

일어서서 불렀다.

“세하.”

미르가 목을 들지 않았다.

세비가 다시 불렀다.

“세하!”

미르가 고개를 돌렸다.

세비가 아셀을 봤다.

“…왜 안 나와?”

아셀이 대답을 못 했다.

미르가 소리를 냈다.

짧게 두 번이었다.

아셀이 알아들었다.

“…둘을 먹여야 하나를 뱉는대.”

세비가 물었다.

“…뭘 먹여?”

아셀이 말했다.

“사람.”

세비가 그 자리에 섰다.

한참 있다가 물었다.

“…누구를?”

아셀이 대답하지 못했다.

세비가 말했다.

“나 먹이면 안 돼?”

아셀이 고개를 들었다.

세비가 말했다.

“나 하나면 반이잖아.”

“…”

“하나 더는 어떻게든 되잖아.”

아셀이 세비 팔을 잡았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세비가 말했다.

“왜?”

아셀이 말했다.

“…네가 먹히면 누나를 부를 사람이 없어.”

세비가 그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아무 말도 안 했다.

아셀이 말했다.

“부를 사람이 있어야 나와.”

“…”

“네가 있어야 누나가 나와.”

세비가 물었다.

“…그럼 나는 뭐야?”

아셀이 말했다.

“부르는 사람.”

세비가 나오면서 물었다.

“…형.”

“왜?”

“누나가 거기서 내 소리 들을까?”

아셀이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다.

세비가 말했다.

“들었으면 좋겠는데.”

아셀이 말했다.

“들었을 거야.”

세비가 물었다.

“…어떻게 알아?”

아셀이 말했다.

“나도 들었어.”

“…”

“문 밖에서 냈는데 안에서 대답했어.”

세비가 그 자리에 섰다.

“…그럼 누나도 대답했겠네.”

아셀이 말했다.

“했겠지.”

세비가 물었다.

“…그런데 왜 나는 못 들었지?”

아셀이 대답을 못 했다.

세비가 말했다.

“…내가 귀가 나쁜가 봐.”

아셀이 말했다.

“아니야.”

“…”

“너는 담 밑에서 불렀잖아. 거기는 너무 멀어.”

그 밤에 아셀이 남쪽 성벽에 올라갔다.

들판이 보였다.

들판은 넓고 어두웠다.

아셀이 한참 봤다.

들판 가운데에 불빛이 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다.

아셀이 그것을 세었다.

열하나였다.

이튿날 아침에 보른한테 말했다.

“아저씨, 들판에 불빛이 열하나 있습니다.”

보른이 그 말에 일어섰다.

“…봤냐.”

“봤습니다.”

보른이 말했다.

“작년에 여덟이었다.”

아셀이 물었다.

“…무엇입니까?”

보른이 말했다.

“돋은 마을이다.”

“…”

“뱉은 것이 셋이면 마을이 셋 돋아야 한다. 그런데 열하나다.”

아셀이 물었다.

“그럼 여덟은요.”

보른이 말했다.

“그 전에 돋은 것이다.”

아셀이 말했다.

“…그럼 누가 계속 부르고 있습니다.”

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부르고 있다.”

아셀이 물었다.

“가 봐도 됩니까?”

보른이 말했다.

“가면 못 돌아온다.”

“…왜요?”

보른이 말했다.

“돋은 마을은 지도에 없다.”

“…”

“지도에 없는 데로 가면 도성 호적에서 지워진다.”

아셀이 말했다.

“저는 호적에 어미가 없습니다.”

보른이 그를 봤다.

아셀이 말했다.

“지워질 것이 반쯤밖에 없습니다.”

아셀이 들판으로 간 것은 그달 그믐이었다.

도성 남문에서 들판까지 하루 길이다.

가는 동안 아무도 안 만났다. 들판에 사는 사람이 없다고 도성에서는 그렇게 안다.

해가 질 때 불빛이 보였다.

가까이 가니 마을이었다.

목조 가옥에 돌담이고 지붕이 널과 이엉이다. 우물이 돌 두레우물이다.

도성 안에는 이런 집이 없다. 도성은 석조다.

아셀이 마을 어귀에 섰다.

사람이 나왔다.

마흔쯤 된 여자였다.

“…도성에서 왔소?”

“왔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돌아가시오.”

아셀이 말했다.

“어머니를 찾으러 왔습니다.”

여자가 걸음을 멈췄다.

“…이름이 뭐요?”

아셀이 말했다.

“모릅니다.”

여자가 웃었다.

“모르는데 찾소?”

“…압니다.”

“…뭘 아오?”

아셀이 말했다.

“제 이름이 아셀입니다. 미르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여자가 그 말에 얼굴을 굳혔다.

“…미르가 불렀소?”

“미르가 아니라 배 속에서 불렀습니다.”

여자가 아셀을 오래 봤다.

그리고 말했다.

“…들어오시오.”

마을은 스물 몇 채였다.

집집이 불을 켜 놨다. 초저녁인데 다 켜 놨다.

아셀이 물었다.

“왜 다 켜 놓습니까?”

여자가 말했다.

“꺼지면 없어지오.”

“…”

“여기는 지도에 없는 마을이오. 불을 끄면 여기 있다는 표가 없어지오.”

아셀이 물었다.

“이 마을이 언제 돋았습니까?”

여자가 말했다.

“열두 해 전이오.”

“…누가 불렀습니까?”

여자가 마을 안쪽을 가리켰다.

“저 집에 물어보시오.”

안쪽 집에 노인이 있었다.

여든쯤 됐다. 앞이 안 보인다고 했다.

아셀이 앉았다.

“어르신, 누가 이름을 부르셨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내가 불렀소.”

“…누구를요?”

노인이 말했다.

“내 형이오.”

“어떻게 이름을 아셨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안 잊었소.”

아셀이 물었다.

“먹히면 아무도 못 알아본다고 들었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그렇소.”

“…그런데 어떻게 아십니까?”

노인이 제 눈을 가리켰다.

“나는 눈이 안 보이오.”

아셀이 그 말을 못 알아들었다.

노인이 말했다.

“미르는 눈에서 지우오.”

“…”

“보는 사람한테서 지우고 적은 것에서 지우오.”

노인이 제 귀를 짚었다.

“소리에서는 못 지우오.”

아셀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노인이 말했다.

“나는 형 얼굴을 모르오. 이름은 아오.”

“…”

“형이 나를 부르던 소리를 아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들판의 불빛 열하나 · 이름을 먹는 드래곤 · 나오늘 AI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