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476자)

달빛 누룽지

내 복제인간이 나보다 일을 잘한다 · 류세온

십이월 십일 밤 아홉 시⁠, 여의도 한강공원 물빛무대 앞 잔디밭에 지름 십 미터짜리 철판이 깔렸다⁠. 철판 밑에서 가스 불꽃 백여 개가 푸르게 혀를 내밀었고⁠, 강바람이 불 때마다 불꽃들이 한쪽으로 누웠다가 일어났다⁠. 철판 위로 김이 올라 밤공기가 뿌옇게 흐렸다⁠. 볶은 쌀 냄새가 마포대교 쪽까지 흘러가 야간 러너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췄다⁠.

철판 둘레에 흰 앞치마를 두른 사람 예순넷이 섰다⁠. 다들 귀 뒤에 푸른 점이 있었다⁠. 행사 진행 요원이 이들 사이를 돌며 뒤집개를 하나씩 쥐여 주었다⁠. 철판 한가운데에는 둥근 무쇠 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늘도 타워 로비 유리장에서 꺼내 온 창업주의 판이었다⁠. 지름 일 미터의 검은 쇠가 십 미터 철판 한복판에서 달처럼 보였다⁠.

행사장 오른쪽 천막에는 간편식 업계 협의회 회원사 열한 곳의 대표와 임원들이 앉아 있었다⁠. 왼쪽에는 카메라 여섯 대와 기자들이 있었다⁠. 철판 위 사 미터 높이에 크레인 카메라가 매달려 있었고⁠, 무대 뒤 대형 화면에 이 카메라가 내려다보는 철판이 그대로 떴다⁠. 위에서 보면 철판은 둥근 달이었고⁠, 이 둘레에 사람들이 점처럼 박혀 있었다⁠. 재오 2가 시월에 그린 그림 그대로였다⁠.

재오는 무대 뒤 천막에서 앞치마 끈을 맸다⁠. 재오 2가 옆에서 같은 끈을 맸다⁠. 두 사람은 거울도 없이 서로를 보며 매듭을 고쳤다⁠. 재오 2의 앞치마 가슴께에는 「⁠심재오⁠」라고 수놓여 있었고⁠, 재오의 앞치마에도 똑같이 수놓여 있었다⁠. 행사 대행사가 이름 수를 하나만 주문해서 두 벌을 같은 글자로 만들었다고 했다⁠.

재오 3은 천막 구석 의자에 앉아 뒤집개를 쥐고 있었다⁠. 뒤집개가 손에서 떨려 쇠 손잡이가 의자 다리에 딱딱 부딪쳤다⁠. 재오 3은 이 소리를 멈추려고 뒤집개를 무릎 사이에 끼웠다⁠. 뒤에 경비 둘이 서 있었다⁠.

“⁠철판 앞에 서면 손이 데워져서 덜 떨릴 거야⁠.⁠”

재오 2가 말했다⁠. 재오 3이 고개를 들었다⁠.

“⁠해 봤어⁠?⁠”

“⁠아니⁠. 그냥 그럴 것 같아⁠.⁠”

“⁠이월의 우리는 그런 말 안 했어⁠. 모르는 거면 모른다고 했지⁠.⁠”

“⁠그럼 모르겠다⁠.⁠”

재오 3이 웃었다⁠. 광대뼈의 멍은 노랗게 빠져 가고 있었다⁠.

천막 뒤편에서 류강비가 고개를 내밀었다⁠. 류강비 뒤에 모자를 눌러쓴 첫 번째 강비가 있었다⁠. 차담이 이 둘 옆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안고 있었고⁠, 영미는 진료 가방을 메고 있었다⁠. 행사 관람객 출입증을 목에 건 보배도 있었다⁠. 지난주에 낮 근무로 돌려졌고⁠, 동면실 열쇠를 빼앗겼다고 했다⁠.

“⁠열한 시 십 분⁠.⁠”

재오가 말했다⁠. 다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이 흩어지고 나서 천막 입구의 비닐 자락이 걷혔다⁠. 한미주가 들어왔다⁠. 의자의 재오 3과 앞치마 끈을 맨 두 재오를 차례로 보았다⁠. 손에 누룽지는 없었다⁠. 대신 원고 두 장을 들고 있었다⁠.

“⁠원고대로 해요⁠. 한 글자도 빼지 말고⁠, 더하지도 말고⁠.⁠”

한미주가 원고를 재오에게 내밀었다⁠. 재오는 받지 않았다⁠. 재오 2가 대신 받았다⁠.

“⁠십만 넘으면요⁠.⁠”

재오가 말했다⁠.

“⁠다 지키신다고 했죠⁠. 재오 2 재등록⁠, 신고 철회⁠, 강비 씨 형 숙소 방⁠. 재오 3 계속 출근⁠.⁠”

“⁠넘으면 아무도 반납 안 해요⁠. 저는 숫자는 지켜요⁠.⁠”

“⁠숫자 말고 사람은요⁠?⁠”

한미주는 천막 밖 철판을 돌아보았다⁠. 김이 오르는 철판 둘레에서 예순네 명이 뒤집개를 시험 삼아 철판에 대 보고 있었다⁠. 쇠가 쇠에 닿는 소리가 잘게 이어졌다⁠.

“⁠사람을 지키려고 숫자를 지키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는 숫자를 못 지켜서 사람을 내보냈어요⁠. 저는 반대로 해요⁠. 그게 다예요⁠.⁠”

한미주가 천막을 나갔다⁠. 재오 3이 무릎 사이의 뒤집개를 빼서 철판 쪽으로 들어 보였다⁠. 손이 떨렸다⁠.

“⁠저 말은 진짜야⁠. 그 사람 거짓말은 안 해⁠.⁠”

“⁠알아⁠.⁠”

재오가 말했다⁠. 영미가 정한 규칙대로라면 한미주는 이 집 사람이었다⁠. 재오는 앞치마 끈을 풀었다가 다시 묶었다⁠. 두 번째 매듭이 첫 번째보다 단단했다⁠.

*

열 시 오십 분⁠, 무대에 조명이 들어왔다⁠. 한미주가 마이크 앞에 섰다⁠. 회색 정장 위에 흰 앞치마를 둘렀고⁠, 앞치마 가슴께에 쌀가루가 묻어 있었다⁠. 앞에 원고는 없었다⁠.

“⁠1989년 영등포 시장에서 우리 아버지가 저 판 하나로 누룽지를 굽기 시작했습니다⁠.⁠”

한미주가 철판 한가운데의 무쇠 판을 가리켰다⁠. 크레인 카메라가 이 판으로 내려가 화면을 채웠다⁠.

“⁠제가 열다섯 살 때 아버지는 공장 정문에서 이백 명을 내보냈습니다⁠. 저는 정문 옆에 서서 그 사람들이 나가는 걸 봤습니다⁠. 저 판도 그날 공장 마당에 있었어요⁠. 아무도 그 판을 보지 않았습니다⁠. 다들 정문만 봤어요⁠.⁠”

천막의 대표들이 조용해졌다⁠. 기자 하나가 수첩에 무언가를 적다가 펜을 멈췄다⁠.

“⁠오늘도는 지난 석 달 동안 한 사람도 자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안 자릅니다⁠. 원본은 쉬고⁠, 복제는 일하고⁠, 회사는 삽니다⁠. 오늘 여기 계신 열한 곳도 그렇게 될 겁니다⁠. 그 첫 얼굴을 소개합니다⁠. 원본과 복제⁠, 심재오 과장님들⁠.⁠”

박수 속에서 재오와 재오 2가 무대로 걸어 나왔다⁠. 같은 앞치마⁠, 같은 이름⁠, 같은 걸음이었다⁠.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두 사람은 마이크 둘 앞에 섰다⁠. 원고는 대표실에서 받은 그대로였다⁠.

“⁠안녕하세요⁠, 심재오입니다⁠.⁠”

둘이 동시에 말했다⁠. 박자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관객석이 다시 웃었다⁠. 천막의 한 대표가 무릎을 쳤다⁠. 두 사람은 다음 줄도 같이 읽었다⁠. 이 맛을 처음 말한 사람은 부산의 한 아주머니였습니다⁠. 제사가 다 끝나고 손님이 다 가고⁠, 새벽 부엌 바닥에 앉아 솥을 긁어 먹던 맛⁠. 남의 상을 다 차리고 나서 처음 제 입에 넣는 맛⁠.

재오 2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원고를 읽던 입을 다물고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화면에 숫자가 떠 있었다⁠. 십만 이백 상자⁠. 이 화면을 재오에게 보여 주었다⁠. 재오가 화면을 보고⁠, 재오 2를 보았다⁠. 재오 2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원고를 동시에 접었다⁠.

열한 시 십 분이었다⁠.

“⁠그 아주머니처럼 남의 상을 다 차리고 나서야 제 입에 넣는 사람들이 오늘 이 철판 앞에 서 있습니다⁠.⁠”

재오가 말했다⁠. 원고에 없는 말이었다⁠. 무대 옆의 한미주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는 상을 다 차리고 나서 제 입에 넣기 전에 탱크로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재오 2가 말을 이었다⁠. 무대 뒤를 향해 손짓했다⁠.

류강비가 무대로 올라왔다⁠. 첫 번째 강비가 모자를 벗고 이 옆에 섰다⁠. 두 사람은 크레인 카메라 바로 아래⁠, 무쇠 판 앞까지 걸어 나가 나란히 섰다⁠. 카메라가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대형 화면에 같은 얼굴 둘이 떴다⁠. 둘이 동시에 왼쪽 귀를 젖혔다⁠. 화면에 푸른 점 둘이 크게 잡혔다⁠.

“⁠사내 복제인 1호 류강비입니다⁠. 이쪽은 저보다 일 년 먼저 깬 저입니다⁠.⁠”

류강비가 말했다⁠. 허리를 접지 않았다⁠.

“⁠같은 날 스캔한 같은 사람의 몸입니다⁠. 형은 이 년 전에 월급을 달라고 했다가 반납됐습니다⁠. 그다음에 제가 만들어졌습니다⁠. 법은 한 사람에 하나입니다⁠.⁠”

첫 번째 강비가 마이크에 입을 댔다⁠.

“⁠월급은요⁠?⁠”

관객석에서 몇 사람이 웃다가 멈췄다⁠. 웃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다들 웃고 나서야 알았다⁠. 첫 번째 강비는 마이크를 놓지 않고 앞줄의 기자를 내려다보았다⁠.

“⁠기자님⁠, 그쪽 회사는 월급 줘요⁠? 저 빨래 잘 개요⁠. 각 잡아서⁠.⁠”

기자가 수첩을 든 채 입을 벌렸다⁠. 류강비가 형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형은 소매를 빼내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귤 세 개도 받았다고⁠.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천막의 대표들이 서로를 보았다⁠.

재오 3이 뒤집개를 쥔 채 철판 앞에서 걸어 나왔다⁠. 경비 둘이 따라오려 했지만⁠, 철판 둘레의 복제 예순넷이 이 사이를 어깨로 막아섰다⁠. 아무도 그렇게 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재오 3이 마이크 앞에 섰다⁠. 철판의 열기에 데워진 손이 아까보다 덜 떨렸다⁠.

“⁠제 귀 뒤의 점은 십일월 첫날 오전 열한 시 오십 분에 오늘도 로비에서 찍었습니다⁠. 서른 명 넘게 봤습니다⁠. 그 전 열나흘 동안 저는 점 없이 원본으로 출근했고⁠, 전체 회의 무대에서 행복한 원본이라고 말했습니다⁠. 원고는 대표님이 주셨습니다⁠.⁠”

재오 3이 숨을 골랐다⁠.

“⁠저는 심재오의 세 번째 몸입니다⁠.⁠”

차담이 무대 옆 철판 난간으로 갔다⁠. 종이봉투를 열어 팔찌를 하나씩 꺼내 난간에 걸었다⁠. 은행⁠, 보험사⁠, 통신사⁠, 카드사⁠, 그리고 오늘 천막에 앉은 회사 셋의 이름이 찍힌 팔찌였다⁠. 크레인 카메라가 이 팔찌들을 비췄다⁠. 천막 앞줄의 한 대표가 의자에서 반쯤 일어났다⁠. 제 회사 이름을 화면에서 읽은 얼굴이었다⁠.

보배가 관객석 맨 앞에서 소리쳤다⁠. 마이크가 없었는데도 강바람을 뚫고 들렸다⁠.

“⁠파주에서 지난달 트럭 두 대가 나갔어요⁠! 해외 연구소로⁠! 그 팔찌 찬 사람들이에요⁠! 내가 키웠어요⁠!⁠”

*

무대 스피커가 뚝 끊겼다⁠. 음향 천막 쪽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이크 두 개의 빨간불이 꺼졌다⁠. 강바람 소리와 가스 불꽃 소리만 남았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한꺼번에 무대 쪽으로 돌았다⁠.

한미주가 무대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무쇠 판 앞에 섰다⁠. 재오와 재오 2가 이 양옆에 섰다⁠. 대형 화면에 세 사람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양으로 떴다⁠. 무쇠 판을 가운데 두고 같은 앞치마 둘과 쌀가루 묻은 앞치마 하나였다⁠.

“⁠다 하셨어요⁠?⁠”

한미주가 물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 마이크가 꺼진 무대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멀리 갔다⁠.

“⁠십만 넘었습니다⁠.⁠”

재오 2가 말했다⁠.

“⁠알아요⁠. 봤어요⁠. 잘하셨어요⁠. 원본 안도⁠, 복제 철판도⁠, 숫자도 다 맞았어요⁠.⁠”

한미주는 재오를 보았다⁠.

“⁠그런데 심재오 씨는 숫자 대신 사람 얘기를 했네요⁠. 여덟 달 동안 안 하던 걸 하필 오늘⁠.⁠”

“⁠여덟 달 전에 하려던 얘기예요⁠.⁠”

“⁠그럼 여덟 달 늦었네요⁠.⁠”

“⁠넘으면 아무도 반납 안 한다고 하셨잖아요⁠.⁠”

재오 2가 말했다⁠. 한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 때문에는 안 해요⁠. 숫자는 지켰어요⁠. 오늘 반납 사유는 숫자가 아니에요⁠.⁠”

한미주는 음향 천막에 손을 들어 보였다⁠. 앞치마 옷깃에 달린 작은 마이크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스피커가 다시 살아났다⁠. 한미주의 목소리가 한강공원 잔디밭 위로 퍼졌다⁠.

“⁠오늘도 대표 한미주입니다⁠. 행사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이 무대와 철판에 선 복제 전원은 근무지 무단 이탈과 회사 명예 훼손으로 오늘 밤 거울바이오에 반납합니다⁠. 회수 차는 본사 앞으로 오고 있습니다⁠.⁠”

관객석이 술렁였다⁠. 천막의 대표들이 휴대폰을 꺼냈다⁠. 기자들이 한미주에게 몰려들었다⁠.

철판 둘레에서 복제 예순넷이 뒤집개를 내려놓았다⁠. 하나가 먼저 내려놓았고⁠, 옆 사람이 따라 내려놓았고⁠, 이 옆 사람이 따라 내려놓았다⁠. 쇠 뒤집개가 철판 가장자리에 부딪치는 소리가 둥근 철판을 따라 한 바퀴 돌았다⁠. 아무도 누룽지를 뒤집지 않았다⁠. 지름 십 미터의 철판 위에서 쌀이 타기 시작했다⁠. 탄내가 볶은 쌀 냄새를 밀어내며 강바람에 실려 퍼졌다⁠. 공원 너머 여의도 대로 위로 흰 승합차 세 대가 비상등을 깜박이며 본사 쪽으로 지나갔다⁠. 옆면에 작은 글씨로 같은 회사 이름이 찍혀 있었다⁠.

재오는 한미주의 앞치마 옷깃을 보았다⁠. 작은 마이크에 빨간불이 아직 켜져 있었다⁠. 무쇠 판을 돌아 한미주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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