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42자)

달 궁

달에서 쫓겨난 토끼가 차린 떡집 · 차무겸

달빛 길은 오를 때가 내려올 때보다 차가웠다⁠. 발바닥에 닿는 빛이 얼음판 같았고⁠,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아래 세상이 한 뼘씩 작아졌다⁠. 청계광장의 달집 불길이 촛불만 해졌다가 성냥불만 해졌다⁠. 서울의 불빛이 쌀가루를 흩뿌린 것처럼 깔렸다⁠. 섣달 보름 밤 떨어지며 본 그대로였다⁠. 다른 것은 하나였다⁠. 불빛 사이 어딘가에 내 골목이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옥비가 내 한 걸음 뒤에서 올라왔다⁠. 옥비는 사람 모습을 풀고 회색 토끼가 되어 있었다⁠. 나도 토끼가 되었다⁠. 사람 몸으로 오르기에는 길이 너무 길었다⁠. 계수나무 떡메를 앞발로 끌어안았다⁠.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 둔 것들이 털 속에서 뭉클거렸다⁠. 인절미 세 조각과 송화가 준 귤 하나였다⁠.

“⁠귤은 왜 가져가나⁠?⁠”

옥비가 물었다⁠. 짐승 말이었다⁠.

“⁠버리기 아까워서⁠.⁠”

“⁠달에 귤 껍질 버리면 수비대가 치운다⁠.⁠”

“⁠그럼 네가 치워⁠.⁠”

옥비는 대답 대신 코를 씰룩였다⁠. 웃을 때 옥비는 코가 느려진다⁠. 삼백 년 동안 몰랐던 것을 나는 한 달 사이에 알았다⁠.

*

달 궁 방앗간 마당에 김이 자욱했다⁠.

절구들이 줄지어 돌고 있었다⁠. 쿵⁠, 쿵⁠. 쿵⁠. 젊은 토끼들이 공이를 쥐고 장단을 어긋나게 찧었다⁠. 담장 밑에 웅크려 있던 토끼들이 마당으로 나와 앉아 있었다⁠. 몸에서 김이 났다⁠. 절구마다 하얀 쌀알이 수북했다⁠. 청계광장 만 명의 소원이 쌀알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었다⁠. 쌀알이 절구 가장자리를 넘쳐 마당 바닥까지 흘러 있었다⁠.

나는 마당을 가로질러 내 절구 앞으로 갔다⁠. 삼백 년 동안 내가 찧던 절구였다⁠. 지금은 젊은 암토끼 하나가 찧고 있었다⁠. 젊은 토끼가 나를 알아보고 공이를 멈췄다⁠.

절구 테두리에 무명 끈이 칭칭 감겨 있었다⁠. 끈은 닳아서 군데군데 올이 풀려 있었다⁠. 끝이 안으로 접혀 매듭져 있었다⁠. 스승의 매듭이었다⁠. 나는 앞발로 끈을 쓸었다⁠. 거칠었다⁠. 공이 자루를 수백 년 쥐던 손바닥 자리가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할머니의 참나무 떡메 손잡이와 같았다⁠.

“⁠공이 계속 찧어⁠.⁠”

내가 젊은 토끼에게 말했다⁠. 젊은 토끼가 다시 공이를 들었다⁠. 쿵⁠. 절구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김 냄새가 났다⁠. 맛 없는 쌀에서도 찧으면 김은 난다⁠. 나는 스승의 끈에서 앞발을 떼었다⁠.

*

궁주는 마당 위 높은 단에 앉아 있었다⁠. 털이 눈처럼 흰 늙은 암토끼였다⁠. 귀 하나가 반쯤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궁주는 내가 단 아래에 와서 엎드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옥비가 내 옆에 엎드렸다⁠.

“⁠아롱⁠.⁠”

궁주의 목소리는 방울 속에서 듣던 것보다 작았다⁠. 늙은 토끼의 목소리였다⁠.

“⁠오늘 밤 절구가 백서른이 돌았다⁠. 백 년 만이다⁠.⁠”

“⁠네⁠.⁠”

“⁠내년 대보름에도 돌겠느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궁주가 단 아래로 내려왔다⁠. 다리를 조금 절었다⁠. 궁주는 내 앞에 앉아 내 앞발 사이의 계수나무 떡메를 보았다⁠. 손잡이에 감긴 광목을 보았다⁠.

“⁠사람들은 해마다 달을 덜 본다⁠. 백 년 동안 그랬다⁠. 네 떡이 아니어도 달은 식고 있었다⁠. 오늘 밤은 하룻밤이다⁠. 땅의 하룻밤이 달의 한 해를 데우지는 못한다⁠.⁠”

궁주의 말에는 틀린 데가 없었다⁠. 옥비가 처음 장독대에서 한 말과 같았다⁠. 해마다 쌀알이 줄었다⁠.

“⁠그래서 너에게 묻는다⁠. 돌아오너라⁠. 늙은 방아꾼의 자리가 비었다⁠. 방앗간지기를 다시 맡아라⁠. 떡메도 네 손에 둔다⁠. 맛을 아는 토끼는 위험하다⁠. 그런데 오늘 밤 맛을 아는 토끼가 절구 백서른을 돌렸다⁠.⁠”

방앗간 마당의 절구 소리가 등 뒤에서 쏟아졌다⁠. 삼백 년 동안 내 귀가 듣던 소리였다⁠. 내 절구에 스승의 끈이 감겨 있었다⁠. 돌아오라는 말은 따뜻했다⁠. 궁주는 나를 용서하고 있었다⁠.

나는 떡메를 들어 궁주 발 앞에 내려놓았다⁠.

계수나무가 단 아래 돌바닥에 닿는 소리가 났다⁠. 손잡이의 광목이 돌바닥 위에 하얗게 펼쳐졌다⁠. 떡메를 놓은 앞발이 가벼웠다⁠. 섣달 보름 밤 떨어지는 내내 놓지 않던 물건이었다⁠.

“⁠안 돌아갈래요⁠.⁠”

궁주가 떡메를 내려다보았다⁠.

“⁠떡메는 돌려드릴게요⁠. 대신 길을 닫지 말아 주세요⁠. 대보름마다 떡메 하나가 골목으로 내려오게 해 주세요⁠. 낙원동 떡집 골목이요⁠. 달이 뜨면 시루 뚜껑을 열고 김 위에서 쳐요⁠. 사람들은 김을 끝까지 보고 빌어요⁠. 하룻밤이어도 해마다면 열 해고⁠, 백 해예요⁠.⁠”

“⁠누가 내려가느냐⁠?⁠”

나는 옥비를 보았다⁠. 옥비는 엎드린 채 코가 멈춰 있었다⁠.

“⁠수비대장이요⁠. 떡을 제일 잘 뒤집어요⁠.⁠”

궁주의 반쯤 남은 귀가 움찔했다⁠.

“⁠너를 붙잡아 온 토끼에게 떡메를 맡기자는 것이냐⁠?⁠”

“⁠저를 붙잡은 토끼라서요⁠. 한 달 내내 제 떡을 막았어요⁠. 막는 토끼가 들고 내려가야 떡메가 다시 떡 속으로 안 들어가요⁠.⁠”

궁주가 옥비를 보았다⁠. 옥비의 접힌 귀를 보았다⁠. 궁주는 담장 위 그을음을 처음부터 다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

궁주는 오래 말이 없었다⁠. 마당의 절구 소리만 들렸다⁠. 나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인절미 한 조각을 꺼냈다⁠. 콩가루가 털에 묻어났다⁠. 궁주 앞 돌바닥에 내려놓았다⁠.

“⁠땅의 떡이에요⁠. 사람 손으로 친 거요⁠. 차갑지 않아요⁠.⁠”

궁주가 코를 대었다⁠. 콩가루 냄새를 맡자 귀가 움찔했다⁠. 궁주는 오래 망설이다가 인절미 끝을 조금 베어 물었다⁠. 씹었다⁠. 늙은 턱이 천천히 움직였다⁠. 삼켰다⁠.

마당 가장자리에서 젊은 토끼들이 공이를 멈추고 고개를 내밀었다⁠. 콩가루 냄새가 김을 타고 마당에 퍼졌다⁠. 맨 앞의 어린 수컷이 재채기를 했다⁠. 옆의 토끼도 했다⁠. 수비대 토끼 하나가 따라 했다⁠. 방앗간 마당에 재채기가 번졌다⁠. 옥비가 엎드린 채 앞발로 얼굴을 가렸다⁠.

궁주가 인절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래서였구나⁠.⁠”

궁주는 떡메를 앞발로 끌어당겼다⁠.

“⁠길은 열어 두마⁠. 대보름마다 떡메 하나가 내려간다⁠. 수비대장이 들고 간다⁠. 달이 지기 전에 돌아온다⁠.⁠”

옥비의 귀가 솟았다⁠. 접힌 귀까지 솟으려다 도로 접혔다⁠.

“⁠대신 아롱⁠.⁠”

궁주가 나를 보았다⁠.

“⁠너는 오늘 내려가면 다시는 이 길에 오르지 못한다⁠. 떡메도 다시는 네 손에 쥐지 못한다⁠. 땅의 토끼가 되거라⁠. 땅의 토끼는 땅의 떡메로 친다⁠.⁠”

나는 엎드린 채 고개를 숙였다⁠. 방앗간 마당의 절구 소리를 한 번 더 들었다⁠. 쿵⁠, 쿵⁠. 쿵⁠. 스승의 끈이 감긴 절구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네⁠.⁠”

*

옥비는 성문까지 나를 배웅했다⁠. 달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성문 너머로 달빛 길이 아래로 곧게 뻗어 있었다⁠.

옥비가 수비대 옷깃에서 마른 잎 하나를 꺼냈다⁠. 계수나무 잎이었다⁠. 잎에 이빨 자국이 꼭꼭 박혀 있었다⁠. 올라오는 길에 몰래 갉은 것이었다⁠.

“⁠송화에게⁠.⁠”

“⁠네가 줘⁠. 내년 대보름에⁠.⁠”

“⁠내년까지 기다리게 할 수 없다⁠.⁠”

옥비가 잎을 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귤 옆이었다⁠. 제 발로 내려가는 토끼가 든 물건은 같이 내려간다⁠. 나는 잎을 꺼내 보지 않았다⁠. 남의 편지였다⁠.

“⁠아롱⁠.⁠”

“⁠응⁠.⁠”

“⁠섣달 보름에 너를 붙잡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오늘 떡메를 빌려준 것도 잘한 일이었다⁠.⁠”

“⁠둘 다 잘했다고⁠?⁠”

“⁠수비대장은 보고를 틀리게 하지 않는다⁠.⁠”

옥비가 코를 천천히 씰룩였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길 위로 발을 내디뎠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절구 소리가 다시 귀에 감긴다⁠. 삼백 년 들은 소리는 한 번 감기면 풀리지 않는다⁠.

*

내려가는 길은 짧았다⁠. 서울의 불빛이 한 뼘씩 커졌다⁠. 청계광장은 비어 있었다⁠. 달집이 검은 재로 내려앉아 연기 한 줄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광장을 지나 종로를 지나⁠, 낙원상가 지붕을 넘어⁠, 골목의 좁은 하늘로 내려갔다⁠.

할머니네 옥상 장독대에 발이 닿았다⁠.

등 뒤에서 달빛 길이 끝에서부터 흐려졌다⁠. 달이 낙원상가 너머로 내려가고 있었다⁠. 하얀 빛줄기가 가늘어지다가 사라졌다⁠. 나는 사람 모습이 되었다⁠. 무명옷 위에 할머니의 광목 앞치마가 그대로 있었다⁠. 찢어 낸 자락만큼 짧았다⁠.

해가 아직 오르지 않았다⁠. 장독대 위로 푸른 새벽빛이 깔려 있었다⁠. 맨 앞⁠, 가장 큰 항아리 뚜껑 위에 사기 그릇 하나가 있었다⁠.

그릇이 바로 놓여 있었다⁠.

그릇 안에 찹쌀이 소복이 담겨 있었다⁠. 낱알이 통통하고 뽀얬다⁠. 할머니가 창고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고른 쌀이었다⁠. 광장에서 돌아와 장독대로 올라왔을 할머니가 눈에 선했다⁠. 굽은 손가락으로 그릇을 뒤집고⁠, 됫박을 기울이고⁠, 쌀이 넘치지 않게 손바닥으로 위를 쓸었을 것이었다⁠. 그릇 옆 뚜껑 위에 쌀 몇 톨이 흘러 있었다⁠.

나는 그릇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코가 저절로 씰룩였다⁠. 단맛이 날 쌀이었다⁠. 씹을수록 늘어나는 단맛⁠. 할머니가 이번 대보름에 빈 것의 맛이 날 쌀이었다⁠.

나는 손을 대지 않았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계수나무 잎을 꺼내 그릇 옆에 놓았다⁠. 옥비가 여덟 해 동안 놓던 자리였다⁠. 귤은 꺼내지 않았다⁠. 달까지 갔다 온 귤이었다⁠. 송화에게 직접 줄 생각이었다⁠.

나는 일어나 서쪽 하늘을 보았다⁠. 달이 낙원상가 지붕 끝에 반쯤 걸쳐 있었다⁠. 가장자리가 번지지 않았다⁠. 맑았다⁠.

삼백 년 동안 나는 남의 소원을 찧었다⁠. 소원을 빌어 본 적은 없었다⁠. 빌 것이 생긴 적이 없었다⁠. 나는 두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콩가루를 털고⁠, 손바닥을 마주 댔다⁠. 할머니가 하던 대로 했다⁠. 무엇을 빌었는지는 할머니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달이 지붕 너머로 다 내려갈 때까지 끝까지 보았다⁠. 마지막 한 점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

부엌에 불이 켜져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쌀뜨물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안반 위에 상인회장이 엎드려 자고 있었다⁠. 오른손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물집 잡힌 손바닥이었다⁠. 안반 위 휴대전화 화면이 켜진 채였다⁠. 주무관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시장님이 내년 대보름에도 골목 떡메치기로 하자고 하십니다⁠. 떡도 맛있었다고요⁠.⁠」 상인회장은 이 문자를 읽고 잠든 얼굴이었다⁠. 입가에 콩가루가 묻어 있었다⁠. 부엌 바닥에 함지 세 개가 놓여 있었고⁠, 함지마다 찹쌀이 물에 잠겨 있었다⁠. 물이 아직 뿌옇지 않았다⁠. 씻어서 갈아 준 물이었다⁠. 할머니가 부엌 의자에 담요를 덮고 앉아 졸고 있었다⁠. 창틀에서 쑥떡이 눈을 떴다⁠.

나는 머릿수건을 벗고 귀를 꺼냈다⁠.

“⁠어디 갔다 왔냐⁠?⁠”

“⁠달⁠.⁠”

“⁠콩고물 두 배는⁠?⁠”

“⁠이따가⁠.⁠”

나는 소매를 걷고 상인회장 옆 함지 앞에 쪼그려 앉았다⁠. 두 손을 물에 넣었다⁠. 물이 손목까지 차가웠다⁠. 손바닥 밑에서 쌀알이 서로 비비며 사각거렸다⁠. 상인회장이 씻어 둔 쌀이었다⁠. 내 손가락 사이로 쌀알이 굴렀다⁠. 붕대 감은 손으로 씻었을 쌀이 내 손바닥에서 천천히 물을 먹고 있었다⁠.

할머니가 눈을 떴다⁠. 나를 보고 말없이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소금이었다⁠.

나는 함지 물을 한 번 갈았다⁠. 뿌연 물이 하수구로 빠져나가는 동안 셔터 틈으로 첫 햇빛이 들어왔다⁠. 골목 안쪽에서 방앗간 기계가 돌기 시작했다⁠. 함지 물에 비친 부엌 형광등 아래로 내 손이 보였다⁠. 사람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에 처음 굳은살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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