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54자)

오후 세 시

구독자 십만 엄마 유튜버 · 윤은류

유월 삼십 일 오전 열 시⁠, 월명동 은행 지점 대출 창구 앞에서 남궁성율은 번호표를 한 장만 뽑았다⁠. 엄마가 두 장을 뽑으려는 손을 성율이 잡았다⁠. 엄마가 아들 손을 보고 웃었다⁠.

“⁠오늘은 반칙 안 혀⁠?⁠”

“⁠오늘은 한 줄이에요⁠.⁠”

대출 창구의 과장은 쉰쯤 된 남자였다⁠. 엄마가 내민 서류 봉투를 받아 하나씩 넘겼다⁠. 맨 위에 대출 만기 안내 편지가 있었고⁠, 편지 밑에 예늘이 밤새 정리한 종이들이 있었다⁠. 석 달 치 광고 수익 내역⁠, 세금 신고 확인서⁠, 채널 관리 화면을 뽑은 종이⁠. 과장이 안경을 이마에 올리고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동영상 채널 수익을 소득으로 내신 분은 저희 지점에서 처음이에요⁠.⁠”

“⁠처음은 다 있어요⁠. 나도 처음 찍을 때는 돋보기를 머리에 얹고 돋보기를 찾았어요⁠.⁠”

과장이 웃음을 참았다⁠. 종이를 마저 넘겼다⁠.

“⁠원금 삼백 넣으시고⁠, 소득 증빙은 이걸로 되겠습니다⁠. 다만 채널 수익이 들쭉날쭉해서 연대 보증인이 한 분 계셔야 해요⁠.⁠”

엄마가 대답하기 전에 성율이 신분증을 꺼내 창구 위에 놓았다⁠. 엄마가 아들 손등을 탁 쳤다⁠.

“⁠니가 왜 내⁠?⁠”

“⁠보증인이요⁠. 내가 서요⁠.⁠”

“⁠니 월급도 잡혀⁠?⁠”

과장이 대신 대답했다⁠.

“⁠어머님이 못 갚으시면 아드님이 갚으시는 겁니다⁠.⁠”

“⁠그라믄 안 혀⁠. 니 빚 아녀⁠.⁠”

“⁠엄마⁠.⁠”

성율은 신분증을 거두지 않았다⁠. 대기석의 할아버지 하나가 신문을 내리고 이쪽을 보았다⁠. 성율은 목소리를 낮췄다⁠.

“⁠지우라고 한 것도 나고⁠, 팔라고 한 것도 나고⁠, 무슨 방법이든 쓰라고 한 것도 나예요⁠. 이번에는 내가 하는 게 엄마 거 지키는 걸로 한번 해 볼게요⁠. 엄마 혼자 하게는 안 둔다고 했잖아요⁠.⁠”

엄마가 아들 얼굴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맛을 보기 전에 냄새부터 맡는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손등을 친 손으로 아들 신분증을 과장 앞으로 밀었다⁠.

“⁠우리 아들 월급은 잘 줘요⁠. 대기업이여⁠.⁠”

과장이 서류 두 장을 내밀었다⁠. 성율은 볼펜을 쥐고 보증인 칸에 서명했다⁠. 엄마는 돋보기를 쓰고 아들의 서명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 글씨를 닮았다고 했다⁠. 성율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은행 문을 나서자 유월 햇빛이 아스팔트에서 올라왔다⁠. 엄마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달력의 이십오 일 빨간 동그라미를 보았다⁠. 일 년 치 동그라미가 그대로였다⁠. 원금은 조금 줄었고⁠, 동그라미는 하나도 줄지 않았다⁠.

*

오춘엽은 학습관 3층 교실 문간에서 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칠판에 강사의 글씨가 있었다⁠. 「⁠4기 모집 — 목요일반 강사 남궁희자⁠」 시에서 다음 학기 예산이 나왔다고 했다⁠. 은결 후원은 끊겼고⁠, 대신 군산시 평생학습 예산에 「⁠시니어 크리에이터 품앗이 과정⁠」이라는 줄이 하나 생겼다⁠. 강사가 시청에 사흘을 드나들어 받아 낸 줄이었다⁠.

희자가 교실에 들어서자 춘엽이 칠판을 가리켰다⁠.

“⁠희자 선생⁠, 인자 진짜 선생이여⁠.⁠”

“⁠목요일만⁠.⁠”

“⁠목요일만 선생이믄 나머지는 뭣이여⁠?⁠”

“⁠반찬 집이지⁠.⁠”

강사가 강의 계획서 종이를 내밀었다⁠. 첫 시간 제목이 비어 있었다⁠. 강사는 희자 선생님이 정해 달라고 했다⁠. 희자는 돋보기를 쓰고 한참 생각하다가 볼펜으로 썼다⁠. 「⁠첫 시간 — 간 보기⁠. 찍기 전에 맛부터⁠.⁠」

춘엽이 계획서를 들여다보더니 볼펜을 빼앗아 맨 아래 여백에 고양이를 그렸다⁠. 털실 뭉치를 굴리는 고양이였다⁠.

교실 문이 열리고 지팡이 끝이 먼저 들어왔다⁠. 득갑의 아내였다⁠. 득갑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 들어왔다⁠. 팔을 잡아 주려다 아내가 손을 내저어 그만두는 것이 보였다⁠. 아내는 지팡이를 짚고 칠판 앞까지 혼자 걸어왔다⁠. 희자 앞에서 멈췄다⁠.

“⁠목요일반 신청허러 왔어요⁠. 식혜 채널 헐라고요⁠.⁠”

“⁠사모님 식혜는 달다 달어⁠.⁠”

“⁠그 말을 화면에서 또 들을라고요⁠. 이번에는 내 화면에서⁠.⁠”

교실이 웃었다⁠. 득갑은 웃지 않고 아내 뒤에서 수강 신청서를 들고 서 있었다⁠. 신청서 맨 위에 아내의 이름이 굵고 반듯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용접봉을 쥐던 손의 글씨였다⁠. 춘엽이 고양이 그린 계획서를 득갑 아내에게 내밀었고⁠, 아내는 고양이 옆에 엿기름 봉지를 그렸다⁠. 둘은 그림을 보며 한참 웃었다⁠.

*

차예늘은 엄마 미용실 안쪽 창고를 비웠다⁠. 파마약 상자와 롤 바구니를 선반 위로 올리고⁠, 접이식 책상 하나를 들였다⁠. 노트북 하나⁠, 모니터 하나⁠. 모니터는 낚시 할아버지가 회 떠 주고 받은 돈으로 사 주었다고 우겼다⁠. 할아버지는 아니라고 했다⁠.

서울에서는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대신 군산과 전주와 여수에서 연락이 왔다⁠. 동기들의 영상을 붙여 달라는 연락이었다⁠. 득갑 아저씨의 경첩 영상⁠, 춘엽 아주머니의 뜨개 영상⁠, 서예 할머니의 젓가락 종이 영상⁠. 편집비는 반찬이었고⁠, 가끔은 회였고⁠, 한 번은 털실 덮개였다⁠. 예늘은 채널 열두 개를 맡았다⁠. 열두 개 영상을 붙이면 한 달 방세가 나왔다⁠. 서울 월급의 절반이었다⁠.

엄마가 롤을 말다가 창고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서울 안 가서 아깝지 않냐⁠?⁠”

“⁠아까워요⁠.⁠”

“⁠그라믄⁠?⁠”

“⁠그래도 여기서 붙이는 건 제 손이 붙이는 거예요⁠.⁠”

엄마가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틈으로 파마약 냄새가 밀려들었다⁠. 예늘은 모니터 속의 득갑 아저씨를 붙였다⁠. 경첩에 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리는 장면이었다⁠. 느린 화면도 북소리도 넣지 않았다⁠. 끽 소리가 줄어드는 소리를 그대로 두었다⁠.

*

강현곤은 오후 두 시 사십 분에 남궁반찬 유리문을 밀었다⁠. 셀카봉은 없었다⁠. 손에 반찬 통 세 개를 겹쳐 들고 있었다⁠. 맨 위 통 뚜껑에 마스킹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서툰 글씨였다⁠. 「⁠장조림 잘 먹었습니다⁠. 메추리알이 잘 까졌어요⁠. 현곤 엄마⁠.⁠」

희자는 테이프 글씨를 돋보기로 읽었다⁠. 읽고 나서 테이프를 떼어 계산대 서랍 안쪽에 붙였다⁠. 서랍에는 「⁠혼자 사시나 봐요⁠」가 칠해진 종이가 반으로 접혀 들어 있었다⁠. 테이프는 접힌 종이 옆에 붙었다⁠.

“⁠엄마 허리는⁠?⁠”

“⁠좀 나아요⁠. 장조림 다 드시고 또 달래요⁠.⁠”

“⁠그라믄 또 담아야지⁠.⁠”

현곤이 진열대 위의 삼각대를 보았다⁠.

“⁠할머니⁠, 저 한 번만 찍어 봐도 돼요⁠? 편집 안 하고 그대로요⁠.⁠”

“⁠편집은 우리 예늘이가 혀⁠.⁠”

“⁠그럼 예늘 누나한테 맡길게요⁠.⁠”

“⁠니 채널에 올릴라고⁠?⁠”

“⁠아니요⁠. 우리 엄마 보여 드리려고요⁠.⁠”

희자는 국자를 들고 잠깐 생각했다⁠. 국자 끝으로 진열대 앞 의자를 가리켰다⁠.

“⁠오늘은 안 돼⁠. 오늘은 우리 아들이 찍는 날이여⁠. 다음 목요일에 학교로 와⁠. 4기 모집혀⁠. 서른여섯은 시니어가 아니지마는⁠, 청강은 받어⁠.⁠”

현곤이 웃었다⁠. 이번에는 웃음이 금방 꺼지지 않았다⁠.

*

류옥채는 같은 날 오후 두 시 오십 분⁠, 대전 어머니 집 부엌에서 애호박을 썰고 있었다⁠. 일 년에 두 번 오던 집에 이번 달에만 세 번째로 왔다⁠.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딸의 칼질을 보며 두께가 고르지 않다고 했다⁠.

“⁠볶으면 다 똑같아져요⁠.⁠”

“⁠안 똑같아져⁠. 얇은 것은 타고 두꺼운 것은 설어⁠.⁠”

류옥채는 칼을 내려놓고 남은 애호박을 다시 썰었다⁠. 어머니가 말한 두께로⁠. 새우젓을 반 숟가락 넣고 볶았다⁠. 어머니가 나무 주걱을 받아 가 두 번 뒤적이고 돌려주었다⁠.

어머니 식탁 위에 태블릿이 세워져 있었다⁠. 소리를 켜 둔 채였다⁠. 월명동 반찬 가게의 오후 세 시가 곧 시작될 참이었다⁠. 어머니는 석 달 전부터 이 채널을 보았다고 했다⁠. 딸이 사러 다니는 채널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 양반 국수는 무슨 국수였냐⁠?⁠”

“⁠멸치 국수요⁠. 애호박은 볶아서⁠.⁠”

“⁠새우젓으로⁠?⁠”

“⁠네⁠.⁠”

“⁠그라믄 맛있는 국수여⁠.⁠”

류옥채는 주걱을 쥔 채 웃었다⁠. 어머니가 한 말이 군산에서 들은 말과 똑같았다⁠. 은결의 협력 채널 폴더는 지난주에 비웠다⁠. 대구 떡집 할머니의 계약서는 다시 썼다⁠. 광고는 한 해 두 편⁠, 내용은 할머니가 고르는 것으로⁠. 회사는 이번 분기 매출이 줄었고⁠, 이사회는 류옥채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류옥채는 설명했다⁠. 다음 분기에도 채널을 살 것이라고⁠. 대문 앞까지 가는 사람은 붙이지 않을 것이라고⁠.

태블릿에서 「⁠LIVE⁠」가 떴다⁠. 화면 속 반찬 가게 아주머니가 열무를 들고 있었다⁠. 찍는 손이 바뀌어 있었다⁠. 어머니가 화면을 가리켰다⁠.

“⁠오늘은 아들이 찍네⁠.⁠”

류옥채는 애호박을 그릇에 담고 국수 물을 올렸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화면 속의 국자를 보았다⁠.

*

오후 세 시⁠, 월명동 골목의 발소리가 뚝 끊겼다⁠. 점심 반찬을 사 간 사람들은 다 들어갔고⁠, 저녁 반찬을 사러 나올 사람들은 아직 연속극 앞에 있었다⁠. 남궁성율은 내일 아침 첫 기차로 서울에 올라갔다⁠. 무급 휴직이 오늘로 끝났다⁠.

엄마가 진열대 위에 손바닥만 한 삼각대를 폈다⁠. 성율이 삼각대를 접어 엄마 손에 돌려주었다⁠. 엄마가 아들을 보았다⁠. 성율은 빨간 스웨터를 입은 휴대전화를 들어 가로로 돌렸다⁠. 손이 흔들리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찍을게요⁠.⁠”

엄마는 삼각대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불룩해졌다⁠. 흰 위생모를 고쳐 쓰자 정수리에 둥글게 묶은 머리가 위생모 밑에서 불룩 솟았다⁠. 흰머리가 반쯤 섞인 머리칼 몇 가닥이 귀 옆으로 빠져나왔다⁠. 다홍색 앞치마였다⁠. 화면 귀퉁이의 구독자 숫자는 십구만 사천이었다⁠. 공동 라이브 날 이십일만까지 올랐다가 아들의 문자가 화면에 뜬 뒤로 이만 가까이 빠졌다⁠. 엄마는 숫자를 보지 않았다⁠.

“⁠돋보기는⁠?⁠”

“⁠머리에요⁠.⁠”

엄마가 이마를 더듬었다⁠. 돋보기가 위생모 위에 있었다⁠. 엄마가 웃었다⁠. 성율이 녹화 단추를 눌렀다⁠.

“⁠자⁠, 우리 학생들⁠. 오늘은 열무여⁠. 오늘은 우리 아들이 찍어⁠. 손이 많이 늘었어⁠. 처음엔 화면이 비뚤었는디⁠.⁠”

엄마가 열무를 다듬었다⁠. 누런 잎을 떼고⁠, 뿌리 쪽 흙을 칼등으로 긁고⁠, 한 뼘 길이로 잘랐다⁠. 소금물에 이십 분⁠. 고춧가루에 멸치액젓 두 숟가락⁠, 매실청 한 숟가락⁠, 밀가루 풀 한 국자⁠. 열무를 버무리는 손이 빨랐다⁠. 화면 속에서 손등 위로 오후 햇빛이 유리문을 지나 비스듬히 들어왔다⁠. 경첩은 울지 않았다⁠.

댓글창에 줄이 올라왔다⁠. 「⁠프랑크푸르트 출석⁠」 「⁠아드님 찍는 거 티 남⁠. 각도가 착함⁠」 「⁠선생님 목요일 수업 신청했어요⁠」 줄들 사이로 「⁠월명동아들⁠」이 한 줄 달았다⁠. 「⁠오늘 촬영 담당입니다⁠. 비뚤면 말씀 주세요⁠.⁠」 성율이 언제 쳤는지 엄마는 몰랐다⁠.

엄마가 국자 끝으로 양념을 떠서 혀끝에 댔다⁠. 한 번 대고⁠, 눈을 감았다가⁠, 국자를 화면 앞으로 내밀었다⁠.

“⁠성율아⁠, 간 봐⁠.⁠”

성율은 휴대전화를 든 채 고개를 숙여 국자 끝에 혀를 댔다⁠. 액젓의 짠맛이 먼저 오고⁠, 매실의 신맛이 뒤를 받치고⁠, 고춧가루의 단내가 마지막에 목으로 넘어갔다⁠. 화면이 아주 조금 기울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맞아요⁠.⁠”

“⁠짜지 않어⁠?⁠”

“⁠안 짜요⁠.⁠”

엄마가 국자를 거두고 열무를 마저 버무렸다⁠. 성율은 휴대전화를 들고 한 걸음 물러났다⁠. 화면 한가운데 진열대가 있고⁠, 진열대 뒤에 엄마가 있고⁠, 엄마 손에 국자가 있었다⁠. 유리문 너머 골목에서는 미용실 원장이 롤을 단 채 이쪽을 들여다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성율은 원장을 화면 밖으로 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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