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057자)
넷째 관문
상단 막내가 무림맹을 샀습니다 · 도경
양주 남쪽 쌀 도가 거리는 추수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골목마다 햅쌀 냄새가 났다. 도가 앞마다 쌀가마가 처마 밑까지 쌓였고, 볏짚 먼지가 늦은 햇살 속에 금가루처럼 떠다녔다. 그런데 보화가 지나가는 도가마다 문이 닫혔다. 사람이 문틈으로 내다보다가 보화 얼굴을 보면 빗장을 질렀다. 일곱 번째 도가 앞에서 보화는 닫힌 문에 대고 말했다.
“아저씨, 저 쌀 사러 온 거지 쌀 훔치러 온 거 아니에요!”
문 안에서 대답이 왔다. “알지! 그래서 문 닫는 거요!”
서리까지 열이레가 남아 있었다. 삼백 가마가 들었다. 보화 손에는 해염 소금을 팔아 모은 은 사백 냥이 있었는데, 양주 쌀 도가 가운데 그 은을 받아 줄 곳이 하나도 없었다.
도가 거리 끝 버드나무 아래로 돌아오니 낯선 사람이 앉아 있었다. 검은 무복이 아니라 회색 무명옷을 입었고, 허리의 장검은 그대로였다. 하연이었다. 하연은 버드나무 뿌리에 걸터앉아 만두 한 접시를 먹고 있었다. 접시에 만두가 다섯 개였다.
“당주님, 만두 사 드셨네요?”
“당주 아니다.” 하연이 만두를 삼키며 말했다. “맹주께서 갑문 일을 들으셨다. 당주 자리를 내놓았다. 지금은 재무당 말단이다.”
“그럼 금고 열쇠는요?”
“그대로 차고 있다. 아무도 안 받겠다더라. 빈 금고 열쇠를.” 하연이 열쇠를 들어 흔들었다. 짤랑 소리가 났다. “당주 녹봉이 없어지니까 오히려 만두를 사 먹을 수 있게 됐다. 말단 녹봉은 밀리지 않거든. 맹이 말단한테는 제때 준다.”
보화는 웃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하연은 마지막 만두를 보화에게 내밀었다. 보화는 받아서 반을 갈라 하연에게 돌려주었다.
“쌀 때문에 왔다.” 하연이 반쪽 만두를 들고 말했다. “맹에 딸린 남쪽 문파 가운데 청운문이라는 곳이 있다. 무공은 보잘것없는데 장원 땅이 넓다. 거기 쌀이 삼백 가마 있다. 상회하고는 상관없는 쌀이다.”
“값은요?”
“돈은 안 받는단다. 대신 맹이 앞으로 관문 통행세에서 받을 몫을 먼저 달란다. 한 해 치. 내가 맹 몫을 걸었다. 말단이 맹 몫을 건 거다. 들키면 말단 자리도 없다.”
“당주님, 맹 몫은 오 할이에요. 제가 갑문에서 올려 드렸잖아요. 한 해 치 오 할을 쌀 삼백 가마에 거시면 맹이 손해예요. 청운문하고 흥정 다시 하셔야…”
“하지 마라.” 하연이 손을 들었다. “이번만은 깎지 마라. 이미 쌀은 배에 실렸다. 지금쯤 갑문을 지나고 있을 거다. 수문장이 이번에는 돈 한 푼 안 받고 열어 줬단다. 네 덕에 수고비가 무서워졌다더라.”
보화는 하연을 오래 보았다. 그리고 주판을 품에 넣었다. 꺼내지 않았다.
“그럼 이건 당주님한테 진 빚이에요.”
“말단이다.”
“제 셈으로는 당주님이에요.”
하연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남은 반쪽 만두를 한입에 넣었다. 볼이 불룩해진 채로 열쇠만 한 번 더 짤랑 흔들었다.
*
쌀을 산 위로 올리는 일은 곽 씨의 아들 돌이가 맡았다. 돌이는 어깨가 바위 같은 스물네 살 청년이었는데, 낙안관으로 가는 마지막 고개가 수레로는 못 넘는 비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돌이가 데려온 밀짐꾼 마흔이 그 비탈에서 쌀가마를 지게로 옮겼다. 짐승 길만 타던 다리들이 처음으로 큰길 위를 걸었다. 걸으면서 다들 어색해했다. 길이 너무 넓어서 어디를 밟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곽 씨 아주머니는 객잔 문 앞에 서서 그 줄을 보았다. 아들이 지게를 지고 지나가며 고개를 꾸벅했다. 곽 씨는 손을 들지 않았다. 객잔 안은 비어 있었다. 지난 열흘 동안 수레가 하루에 관문 둘을 넘어갔고, 묵어 가는 손님은 셋뿐이었다.
보화가 객잔 앞을 지나다 걸음을 멈췄다. 곽 씨는 보화를 보지 않고 말했다.
“돌이 품삯은 세 냥이오?”
“우두머리라서 세 냥 반이요.”
“반은 왜 붙였소?”
“아주머니가 깎으실 줄 알고 미리 붙였어요.”
곽 씨가 처음으로 보화를 보았다. 웃지 않았다. 웃지 않는 얼굴로 한참 보다가 말했다. “객잔에 손님 셋이오. 그건 아가씨 빚이오.”
“네. 알아요. 셈에 넣어 놨어요.”
“셈으로 갚을 거요?”
“아니요. 손님으로 갚을게요. 아직 방법은 몰라요.”
곽 씨는 대답하지 않고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닫지 않았다.
*
낙안관 앞마당에 쌀 삼백 가마가 쌓였다. 산채 아이들이 가마 사이를 뛰어다니며 숨바꼭질을 했다. 마흑산은 가마 하나를 칼로 찢었다. 하얀 쌀이 쏟아졌다. 백 서생이 체를 들고 나섰는데, 마흑산이 체를 빼앗았다.
“네가 쳐라.”
마흑산이 체를 내민 상대는 대성이었다. 대성은 보화를 따라 산에 올라왔다가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녹림 총채주가 내민 체를 금씨 상단 장남이 받아 들었다. 대성은 쌀 한 바가지를 체에 붓고 흔들었다. 사각사각. 아버지 방 부엌에서 매일 아침 들리던 소리였다. 체 위에는 쌀만 남았다. 겨는 한 톨도 떨어지지 않았다.
“한 가마 더.” 마흑산이 말했다.
대성이 한 가마 더 쳤다. 그다음 가마도, 또 그다음 가마도. 다섯 가마째에 마흑산이 손을 들었다. 대성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체 잘 치는구나.”
“석 달 쳤습니다.” 대성이 말했다. “노태감 쌀로.”
마흑산이 대성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인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만큼이었다.
낙안관 빗장이 풀렸다. 보화는 누각 위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셋째 관문의 문이 열리는 소리는 앞의 둘보다 낮고 길었다. 금씨 상단 짐마차 열둘이 소금을 싣고 차례로 문을 지났다. 철우가 맨 앞 마차 곁에서 걸었다. 어깨의 무명천은 이제 얇았고, 허리의 칼집은 실로 꿰맨 자리가 그대로였다.
마흑산이 보화 곁에 와 섰다.
“관문은 열었다. 흥정은 끝나지 않았다.” 마흑산이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스무 달 안에 빚을 다 못 갚으면, 나는 관문을 다시 닫는다. 그리고 그때는 칼부터 꺼낸다.”
“알아요. 그때도 주판 옆에 놓을게요.”
“반쪽짜리를?”
“반쪽으로도 열 자리는 세요. 총채주님 빚이 아직 열 자리 안 넘어요.”
마흑산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웃음인지 아닌지 이번에도 알 수 없었다.
보화는 주판을 튕겼다. 연 관문 셋. 양주 북문에서 낙안관 너머 장터까지 이어진 길이 삼백 리. 처음 청석관 앞 느티나무 그늘에서 셀 때 영 리였던 길이었다.
*
짐마차 열둘 앞뒤로 산채 호위 스물이 붙었다. 호위 대장은 갈팔이었다. 갈팔은 출발하는 날 아침 보화를 찾아와 호위 대장 품삯이 얼마냐고 물었고, 보화가 넉 냥이라고 하자 별호를 붙여 부르면 얼마냐고 다시 물었다.
“별호는 왜요?”
“독두꺼비 대장. 이렇게 부르면 더 받아야지.”
“그럼 깎아야죠. 그 별호 들으면 손님이 놀라서 도망가요.”
갈팔은 결국 넉 냥에 별호 없이 대장이 되었다. 대신 두꺼비 깃발을 맨 앞 마차에 꽂게 해 달라고 졸랐고, 보화는 깃발값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찐빵 같은 두꺼비가 금씨 상단 마차 맨 앞에서 펄럭이며 북쪽으로 갔다. 지나가는 농부들이 그 깃발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아이는 “찐빵 장수다!” 하고 따라 뛰었다.
두칠도 호위로 따라왔다. 두칠은 산채에서 받은 첫 품삯으로 신발을 샀다고 했다. 새 신발이 발에 안 맞아 뒤꿈치가 까졌는데도 벗지 않고 걸었다. 쉬는 참마다 신발을 벗어 흙을 털고, 소매로 닦고, 다시 신었다. 철우가 그것을 보다가 자기 무명천 한 자락을 찢어 두칠에게 건네며 뒤꿈치를 가리켰다. 두칠은 그 천 조각을 받고 한참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뒤꿈치가 아니라 손목에 감았다. 철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화가 대신 말해 주었다. 두칠은 얼굴이 빨개져서 천을 풀어 뒤꿈치에 다시 감았다.
밤에는 들판에 모닥불을 피웠다. 보화는 불가에서 주판을 튕기며 이번 길에 넘긴 소금과 받을 값을 셌다. 열두 마차, 백이십 섬. 북쪽 장터에서 섬에 세 냥이면 삼백육십 냥. 셋째 창고를 되찾는 데 드는 천 냥까지 아직 멀었다. 하지만 수레가 한 달에 몇 번 오가느냐에 따라 그 거리는 줄어드는 쪽으로만 움직였다. 보화는 그 방향이 마음에 들었다.
낙안관에서 북쪽으로 이틀을 더 가자 산이 낮아지고 들판이 넓어졌다. 들판 끝에 성벽이 보였다. 청석관이나 흑풍관처럼 절벽을 막은 관문이 아니었다. 들판 한가운데 쇠로 덮은 성문이 서 있었고, 성벽 위에 붉은 깃발이 수십 개 나부꼈다. 깃발마다 조정의 문양이 있었다. 넷째 관문 철문관이었다.
성문 앞에 관군이 줄지어 섰다. 창끝이 해를 받아 번쩍였다. 그 앞에 갑옷 입은 장수 하나가 말 위에 앉아 있었다. 마흔 줄이었고, 투구 끝에 붉은 술이 달렸다. 장수 곁에 가마 한 채가 서 있었다. 검은 옻칠에 금박 학.
발이 걷히고 노태감이 내렸다. 하얀 수염이 들바람에 흩날렸다. 노태감은 보화를 보고 웃었다. 상회 회관에서 내려다보던 그 웃음이었다.
“금씨 막내, 먼 길 왔구나. 산적 관문 셋을 열었다지. 장하다.” 노태감이 장수를 가리켰다. “이분은 관군 천 명을 거느리고 철문관을 지키시는 조정의 천총이시다. 앞으로 철문관 너머로 가는 짐은 조정이 허가한 상회 짐만 지난다.”
보화가 마차에서 내려 장수 앞으로 걸어갔다. 철우가 반걸음 뒤에 섰다. 관군들의 창끝이 한꺼번에 기울었다.
“천총님, 통행세가 얼마예요?”
장수가 보화를 내려다보았다. “조정은 흥정하지 않는다.”
“흥정 말고 값을 여쭤본 거예요.”
“값도 없다.” 장수가 손을 내밀었다. “무림맹 패를 가졌다지. 내놓아라.”
보화는 품에서 쇠패 넷째 장을 꺼냈다. 철문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패였다. 오래 품고 다녀 사람 몸 온도로 미지근했다. 장수가 패를 받아 들고 한 번 보더니, 말 위에서 그대로 땅에 던졌다. 쇠패가 마른 흙에 떨어져 한 번 튀고 엎어졌다. 먼지가 일었다.
“철문관은 맹 것이 아니다. 조정 것이다. 맹 패는 여기서 쇳조각이다.”
노태감이 웃었다. 관군들 가운데 몇이 따라 웃었다.
보화는 엎어진 쇠패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패를 주웠다. 손가락으로 먼지를 털었다. 털면서 관군들을 보았다. 웃는 관군의 볼이 홀쭉했다. 갑옷 끈이 낡아 실로 이어 맨 자리가 여럿이었다. 창을 쥔 손등이 터 있었다. 청석관 누각 위에서 배를 꼬르륵 울리던 두칠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보화는 일어서서 패를 품에 넣었다. 그리고 장수에게 물었다.
“천총님, 관군 녹봉은 몇 달 밀렸어요?”
장수의 눈썹이 움직였다.
한 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