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167자)
기둥
무림 고수들이 내 의원에 외상을 달았다 · 한도윤
반장호는 아침 내내 주춧돌 하나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스무 개 가운데 맨 끝, 아버지가 정으로 쪼다 만 자국이 남은 돌이었다. 자국은 둥글게 반 바퀴쯤 돌다 끊겨 있었다. 칠 년 동안 눈과 비를 맞아서 끊긴 자리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 있었다.
“다른 돌에 세우면 안 되오?”
반장호가 물었다.
“거기 세우셔야 해요.”
“이 자국대로 파면 구멍이 한쪽으로 쏠리오. 아버님이 정을 비스듬히 대셨소.”
“그럼 비스듬히 파 주세요.”
반장호가 초림을 한참 보았다. 그다음 정을 들었다. 개산부의 손에 정이 들리자 손가락 하나만 한 연장처럼 작아 보였다. 반장호는 망치를 아주 짧게, 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가볍게 쳤다. 돌가루가 한 줌씩 떨어졌다. 아버지가 그어 놓은 반 바퀴를 따라, 그 비스듬한 각도 그대로, 나머지 반 바퀴가 이어졌다.
정오가 되기 전에 구멍이 다 파였다. 반장호는 손가락으로 구멍 둘레를 한 번 쓸고 일어났다. 비스듬한 구멍이었다. 기둥을 꽂으면 기둥이 아주 조금, 의원 쪽으로 기울어 설 것이었다.
“아버님이 의원 쪽을 보게 하려 하셨나 보오.”
반장호가 말했다. 초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갈라질 것 같았다.
*
소나무 통나무는 아침에 곽진이 마저 껍질을 벗겼다. 벗겨진 나무 살에서 송진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고, 그 냄새가 쑥 연기에 밴 의원 마당을 한 겹 덮었다. 백리운이 세 번째 바구니를 들고 산에서 내려왔다가 그 냄새에 걸음을 멈췄다.
기둥을 세우는 데 필요한 것은 사람 손이었다. 그리고 손은 남아돌았다.
화산 제자 열과 종남 제자 열이 밧줄 넷을 나눠 잡았다. 화산은 동쪽 밧줄 둘, 종남은 서쪽 밧줄 둘이었다. 기둥 밑동에는 짧은 밧줄이 하나 더 감겨 있었는데, 매청운이 그 끝을 아무 말 없이 백리운에게 건넸다. 백리운도 아무 말 없이 받았다. 화산 것도 종남 것도 아닌 다섯째 밧줄이었다. 진우경이 그것을 보고 콧수염을 한 번 만졌다. 쌍둥이가 기둥 밑동을 받쳤고, 반장호가 기둥 허리를 안았다. 매청운과 곽진은 기둥 꼭대기 쪽에 섰다. 기둥이 반쯤 일어서면 두 장로가 경공으로 꼭대기를 잡아 똑바로 세우기로 했다.
진 사람들도 왔다. 두부집 영감이 두부를 열 모 들고 왔고, 닭장수 아낙이 삶은 달걀을 한 바구니 들고 왔다. 달걀 바구니는 반장호 발치에 놓였다. 국숫집 주인은 솥을 통째로 들고 와서 마당 한쪽에 걸었다. 대장간 아낙은 쇠못 한 줌을 들고 왔다.
맹덕수는 맨손으로 왔다. 진장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손을 비비다가, 초림 앞에서 헛기침을 했다.
“소 의원. 진에서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오.”
“뭔데요?”
“올해 이 의원 장세를 안 받겠소.”
“원래 의원은 장세 안 내잖아요.”
“그러니 내년 것도 안 받겠소.”
오 할멈이 옆에서 크게 웃었다. 맹덕수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웃는 할멈을 보고 같이 웃었다. 진장이 할멈 앞에서 웃은 것은 할멈의 옛일이 퍼진 뒤 처음이었다.
“하나, 둘!”
진우경이 소리쳤다. 밧줄 넷이 팽팽해졌다. 기둥 밑동이 주춧돌의 비스듬한 구멍 쪽으로 미끄러져 갔고, 반장호가 숨을 들이쉬며 기둥 허리를 들어 올렸다. 소나무가 땅에서 떨어졌다. 한 자, 두 자. 화산 쪽 밧줄이 조금 더 당기자 기둥이 서쪽으로 기울었다. 종남 쪽 밧줄이 조금 더 당기자 동쪽으로 기울었다.
“같이 당겨!”
“종남이 늦었소!”
“화산이 빨랐소!”
기둥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반장호의 팔뚝에 힘줄이 섰다. 그때 오 할멈이 국숫집 솥뚜껑을 국자로 두드렸다. 땅, 땅. 쉬지 않고 같은 박자로.
“이 소리에 맞춰! 화산이고 종남이고 내 국자 소리에 맞춰!”
땅. 밧줄 넷이 같이 당겨졌다. 땅. 기둥이 반쯤 섰다. 매청운과 곽진이 동시에 땅을 찼다. 두 노인이 기둥 꼭대기에 동시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래로 눌렀다.
기둥 밑동이 주춧돌 구멍에 들어갔다. 쿵, 하는 소리가 땅으로 퍼졌다. 기둥이 섰다. 아주 조금, 의원 쪽으로 기운 채.
마당이 조용해졌다. 국숫집 솥에서 물 끓는 소리만 났다. 두부집 영감이 가장 먼저 박수를 쳤다. 그다음 닭장수 아낙이, 대장간 아낙이, 화산 제자와 종남 제자가 쳤다. 진우경은 박수를 치다가 옆의 종남 제자와 어깨가 부딪쳤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칼을 찾지 않았다.
“쐐기는 누가 박소?”
곽진이 기둥 꼭대기에서 물었다. 기둥과 주춧돌 사이의 틈을 막을 나무 쐐기였다. 매청운이 손을 들었다. 곽진이 손을 들었다. 진우경과 종남 제자 하나도 들었다.
초림은 두부집 영감에게 망치를 건넸다.
“영감님이요.”
“나? 내가 왜?”
“공짜 약 먹고 문짝 부수고 들어오셨잖아요. 그 문짝 값이요.”
영감이 망치를 받아 들고 쐐기를 박았다. 세 번 만에 박혔다. 일흔둘의 손이 망치를 내려놓고 기둥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송진이 손바닥에 묻었다. 영감은 그것을 닦지 않았다.
*
기둥이 선 뒤에도 일은 이어졌다. 백리운의 바구니가 세 개가 되었고, 홍련이 국수를 일흔 그릇 말았고, 탁노개는 남은 국수 국물로 거지들을 먹였다. 반장호는 달걀 바구니 앞에서 한참 서 있다가 닭장수 아낙에게 고개를 반만 숙였다. 아낙이 얼굴을 붉히며 달아났다. 반장호는 그 뜻을 그날도 몰랐다.
초림은 기둥 밑에 앉았다. 기둥은 생각보다 굵었다. 등을 대면 등이 다 가려졌다. 아버지가 이 나무를 베어 온 날을 초림은 기억했다. 다섯 사람이 사흘을 굴렸고, 아버지는 그 사흘 동안 굴리는 사람들 어깨에 침을 놓아 주었다. 품삯 대신이었다.
“담아.”
할멈이 옆에 앉았다. 손에 무명 끈 한 가닥을 들고 있었다. 붉은 물을 들인 끈이었다.
“기둥에 매는 거다. 새 집이 서면 첫 기둥에 붉은 끈을 맨다. 아픈 것이 이 집을 보면 비켜 가라고.”
“할머니가 지어낸 거죠?”
“내가 지었다. 흑사곡에선 독 단지에 매는 끈이었다. 그걸 거꾸로 쓰는 거다.”
할멈이 끈을 기둥에 둘렀다. 매듭이 한 번에 지어졌다. 짚신 끈이 자꾸 풀리던 그 손이었다.
*
연비가 온 것은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혼자였다. 신발에 진흙이 묻어 있었다. 이제 그것을 감추지 않았다.
연비는 마당에 들어서지 않았다. 문 밖에 섰다. 초림이 문 앞으로 나갔다. 둘 사이에 매청운이 고친 문짝이 활짝 열려 있었다.
“기둥이 섰군.”
“하나요.”
“열아홉 남았소.”
“알아요.”
연비가 기둥 쪽을 보았다. 붉은 끈이 바람에 흔들렸다. 연비가 그 끈을 오래 보았다. 흑사곡에서 그것이 무엇에 매이던 끈인지 연비도 알았다.
“마지막 흥정을 하러 왔소.”
“의원은 안 팔아요.”
“의원이 아니오. 그대요.”
연비가 초림을 보았다.
“그대 혼자 흑사곡으로 오시오. 오늘 밤, 나와 같이. 그러면 내가 아버지를 이 진에서 돌려세우겠소. 이 기둥도, 저 할멈도, 그대 고수들도 아무도 다치지 않소. 곡에 오면 그대는 의원으로 사오. 흑사곡 사람들을 고치는 의원으로. 우리 곡에도 손목에 실이 오른 사람이 백이 넘소.”
초림은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백이 넘는 손목. 연비의 숙부, 연비의 어머니. 지금 연비의 손목.
“그 백 사람 고치고 나면요?”
“나면?”
“곡주는 그 사람들한테 또 독 가루를 쥐여 주실 거잖아요. 풀 줄 아는 의원이 곡 안에 있으니까. 더 세게, 더 많이.”
연비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손목 실은 곡에 가서 고치는 게 아니에요. 소곡주가 독을 내려놓으면 더 안 올라요. 할머니는 이십 년 전에 내려놓으셨어요. 할머니 손목엔 실이 없어요.”
연비가 약방 문간의 할멈을 보았다. 할멈은 소매를 걷었다. 늙고 거친 손목이 드러났다. 검은 실은 없었다. 대신 오래된 화상 자국이 손목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흑사곡을 나오던 밤, 할멈이 곡의 표식을 지지려고 숯을 댄 자리였다.
연비는 그 손목을 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안 오겠다는 것이오?”
“네.”
“그럼 나는 아버지 옆에 서겠소. 오늘 밤 아버지가 이 문을 지날 때, 나는 아버지 뒤에 있을 것이오.”
“알아요.”
“알면서도.”
“네.”
연비가 돌아섰다. 두 걸음을 걷다가 멈췄다.
“소 의원. 한 치 두 푼은 내가 준 것이오. 그건 갚지 않아도 되오.”
“외상 안 해요.”
초림이 말했다.
“나중에 목까지 오면 오세요. 그때 갚을게요.”
연비가 웃었는지 아닌지 초림은 보지 못했다. 연비는 돌아보지 않고 길을 건넜다. 시약소 간판이 내려져 있었다. 언제 내렸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
해가 화산 너머로 떨어지고 마당에 횃불이 켜졌다. 국숫집 솥이 비고 진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갈 무렵, 탁노개가 울타리 너머에서 동냥 그릇을 엎었다. 동전 쏟아지는 소리가 마당에 크게 났다.
“온다.”
거지들이 진 어귀에서부터 전해 온 말이었다. 고수 아홉이 동시에 일어섰다. 아무도 물독 쪽으로 가지 않았다. 칼은 물독 안에 그대로 있었다. 초림이 그렇게 하자고 하지 않았다. 아홉이 스스로 그렇게 했다.
화산과 종남 제자 스물이 마당 가장자리로 물러섰다. 진우경이 초림 옆에 섰다가 매청운의 눈짓을 받고 반 걸음 뒤로 갔다. 할멈은 약방 문간에서 부엌칼을 쥐었다. 첫날 밤 속곳 바람으로 들고 왔던 그 칼이었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횃불이 한 번 흔들렸을 뿐이었다.
의원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두드리지도 부수지도 않았다. 그냥 열었다. 매청운이 두 번 고친 문짝이 경첩 위에서 소리 없이 돌았다.
들어선 사람은 쉰을 넘긴 사내였다. 마른 몸에 검은 도포를 입었고,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횃불 빛에 두 손이 드러났다. 손등에서 손끝까지가 먹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검었다. 실이 아니었다. 실이 너무 많아서 살갗 전체가 검었다. 그 손을 단 사람이 멀쩡히 서서 숨을 쉬고 있었다.
사내 뒤에 연비가 서 있었다. 약속대로였다.
“흑사곡 곡주 연무혈이오.”
사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다. 그는 마당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홉 고수를, 스무 제자를, 붉은 끈이 매인 기둥 하나를, 그리고 기둥 아래 선 초림을.
“좋은 기둥이군. 비스듬히 섰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먼 길을 왔소. 남쪽 오독문과 서쪽 만독방이 이 진 이야기를 들었소. 독을 만드는 문파들 말이오. 침 한 대로 독을 푸는 계집이 화산 아래 있다고. 그 문파들이 내게 묻더군. 흑사곡 독이 이제 값이 얼마냐고.”
연무혈이 검은 손을 들어 초림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횃불 빛 속에서 떨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직접 왔소. 흥정은 안 하오. 고르시오, 소 의원.”
곡주가 웃었다.
“의원을 내놓든지, 침 놓는 손을 내놓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