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18자)

돈은 없고, 외상이오

무림 고수들이 내 의원에 외상을 달았다 · 한도윤

화산 북쪽 기슭, 큰길과 냇물이 만나는 자리에 청하진이라는 장터 마을이 있었다. 늦겨울 밤이면 그 진은 냄새로 깨어 있었다. 눈 밑에서 썩던 낙엽이 녹으며 흙내를 올렸고, 대장간 아궁이에서 덜 꺼진 숯이 매캐하게 탔고, 진 서쪽 끝 소씨 의원 처마에 매단 쑥 다발은 바람이 들 때마다 마른 소리를 냈다.

초림은 그 밤 등잔 밑에서 침을 닦고 있었다. 길이가 제각각인 침 마흔두 대를 무명 수건으로 하나씩 문질러 침통에 꽂는 일은 아버지가 하던 순서 그대로였다. 짧은 것부터 긴 것으로, 끝이 무뎌진 것은 따로 빼 두었다. 침통 뚜껑 안쪽에는 아버지가 칼끝으로 새긴 「급한 사람부터」라는 글자가 있었다. 아버지는 글씨가 서툴러서 그 여섯 글자를 새기다가 손가락을 두 번 베였고, 벤 손가락에 직접 침을 놓으며 혼자 웃었다고 했다.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의원 앞문이 경첩째 안으로 넘어왔고, 문짝 위에 사람 하나가 엎어져 있었다. 문짝이 바닥에 닿으며 일으킨 찬바람에 등잔불이 옆으로 누웠다.

“문은 두드리는 거예요.”

초림이 말했지만 문짝 위의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흰 수염이 피에 젖어 붉었고, 허리에는 천으로 둘둘 만 긴 물건이 묶여 있었다. 초림은 등잔을 들고 다가가 노인의 왼팔을 걷었다.

손목에서 어깨까지 검은 실 같은 것이 살갗 밑을 기어 올라가 있었다.

수건이 손에서 떨어졌다. 초림은 그것을 줍지 않았다. 핏줄이 검은 실처럼 비치며 팔을 타고 심장으로 오르는 독, 사람들은 그것을 흑사산이라 불렀다. 화산 남쪽 골짜기에 숨어 독을 만들어 파는 문파 흑사곡의 물건이었다. 칠 년 전 이 방 안쪽 병상에서 아버지의 목까지 검은 실이 올라왔을 때, 열세 살이던 초림은 아버지 대신 침통을 들고 있었다.

“할머니!”

초림은 벽을 두 번 쳤다. 옆집 약방과 의원은 벽 하나를 나눠 쓰는 사이였다. 잠시 뒤 벽 너머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고, 오 할멈이 속곳 바람에 부엌칼을 쥐고 들어왔다.

“도둑이냐?”

“환자예요.”

“환자가 왜 문을 부수고 들어와?”

“그건 일어나면 물어볼게요. 숯불하고 뜨거운 물이요. 흑사산이에요.”

오 할멈의 얼굴에서 잠이 한 번에 빠졌다. 할멈은 부엌칼을 문짝 위에 내려놓고 말없이 아궁이로 갔다.

*

초림은 노인의 소매를 가위로 잘라 냈다. 그다음 침통에서 긴 침 세 대를 골라 등잔불에 끝을 한 번씩 지나가게 했다. 아버지가 남긴 침법의 이름은 회류삼침이었다. 흐름을 거꾸로 돌리는 세 대의 침. 독은 심장 쪽으로 오르려 하고, 침은 그 길목을 차례로 막아 독을 도로 손끝으로 내려보낸다.

첫 대는 어깨 꼭대기의 오목한 자리에 들어갔다. 노인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초림은 왼손으로 노인의 가슴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침을 반 바퀴 돌렸는데, 손바닥 밑에서 심장이 망치처럼 뛰는 것이 그대로 올라왔다.

둘째 대는 팔꿈치 안쪽 접히는 자리에, 셋째 대는 손목 안쪽 두 힘줄 사이에 들어갔다. 검은 실이 멈췄다. 한참 그대로 있다가, 실 끝이 아주 조금 손목 쪽으로 물러났다.

“됐냐?”

오 할멈이 김이 오르는 대야를 들고 물었다.

“아직요. 내려오기 시작했어요.”

초림은 노인의 가운뎃손가락 끝을 짧은 침으로 땄다. 처음 나온 피는 붉었다. 두 번째 방울부터 먹물처럼 검었다. 검은 피가 대야 물에 떨어질 때마다 쇠 비린내와 단내가 섞인 냄새가 올라왔고, 오 할멈이 코를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초림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칠 년 전 그 방에서 맡은 냄새였다.

검은 피가 붉게 바뀌기까지 반 시진, 지금으로 치면 한 시간쯤이 걸렸다. 초림이 침을 하나씩 뽑았을 때 노인의 팔에는 검은 실 대신 침 자국 세 개만 남았다.

노인이 눈을 떴다. 천장을 보고, 초림을 보고, 자기 팔을 보더니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눕으세요.”

“살았군.”

“살았으니까 눕으세요.”

노인은 눕지 않았다. 피 묻은 수염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리고,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아 초림에게 고개를 숙였다. 몸짓은 반듯했는데 꿇은 무릎이 부서진 문짝 위였다.

“목숨을 빚졌소. 그런데 돈은 없고, 외상이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아궁이에서 장작 하나가 무너지는 소리만 났다.

“누구신데요?”

“화산파 장로 매청운이오.”

화산 꼭대기에 도사들이 사는 도관을 두고 매화 검법을 쓰는 검 문파 화산파는 이 진 사람들에게 하늘 같은 이름이었다. 장날이면 화산 제자들이 내려와 쌀을 사 갔고, 진 아이들은 그 제자들 흉내를 내며 막대기를 휘둘렀다. 오 할멈이 대야를 내려놓았다.

“화산 장로가 왜 돈이 없어요?”

“화산은 청빈을 숭상하오.”

“그럼 청빈하게 바닥에서 주무세요. 병상이 하나뿐이라서요.”

매청운은 그 말을 듣자마자 쓰러지듯 병상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노부는 중환자요.”

오 할멈이 초림의 옆구리를 찔렀다. 초림은 한숨을 쉬고 노인에게 솜이불을 덮었다. 이불 끝이 매청운의 수염에 걸렸고, 매청운은 눈도 안 뜨고 그것을 빼냈다.

*

초림이 문짝을 일으켜 세우고 있을 때 바깥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세 번. 고르고 공손하게.

“두드리는 사람도 있네.”

오 할멈이 중얼거렸다. 초림은 문짝을 벽에 기대 놓고 빈 문틀 앞에 섰다.

문 앞에는 여자가 하나 서 있었다. 스물대여섯쯤 되어 보였고, 검은 여우털을 목에 둘렀고, 등불을 든 사내 둘을 양옆에 세워 두고 있었다. 눈 위에 선 여자의 신발에는 진흙 한 점이 없었다. 여자는 사내들에게 업혀 왔거나, 땅을 밟지 않는 걸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늦은 밤에 실례하오. 흑사곡 소곡주 연비요.”

흑사곡에서는 곡의 우두머리를 곡주라 부르고, 그 뒤를 이을 사람을 소곡주라 불렀다.

여자는 자기 이름을 남의 집 문패 읽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 노인은 우리 손님이오. 데려가겠소.”

“환자예요. 손님이 아니고요.”

“우리가 독을 대접했으니 우리 손님이오.”

연비는 초림의 어깨 너머로 방 안을 보았다. 등잔 밑에 검은 피가 고인 대야가 있었다. 연비의 눈이 대야에서 한참 머물렀다.

“흑사산을 침으로 뺐소?”

초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흑사산에 맞으면 반 시진 안에 죽소. 우리 곡 사람이 아니면 푸는 약이 없소. 그런데 저 노인은 앉아 있군.”

“누워 있어요. 중환자라서요.”

방 안에서 매청운이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너무 크게 해서 꾀병이라는 것이 다 들렸다.

연비가 소매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가 손바닥 위에서 묵직하게 처졌다.

“은자 쉰 냥이오. 노인을 내주시오. 의원 문짝 값까지 쳐 주겠소.”

은자 쉰 냥이면 이 의원 같은 집을 두 채 살 수 있었다. 초림은 등 뒤에서 오 할멈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를 들었다.

“환자는 파는 게 아니에요.”

“그럼 사지 않고 데려가겠소.”

연비가 턱을 조금 들었다. 왼쪽 사내가 등불을 내려놓고 문틀 안으로 한 발을 들였다. 초림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손에 쥐고 있던 긴 침을 들어 사내의 손목 앞에 대었다. 살갗에 닿지는 않을 만큼, 털 한 올이 사이에 들어갈 만큼.

“여기를 찌르면 사흘 동안 젓가락을 못 들어요.”

사내가 멈췄다.

“여기는 열흘이요.”

침 끝이 팔꿈치로 옮겨 갔다. 사내의 눈이 초림의 손을 따라갔다.

“여기는 평생이고요.”

거짓말이었다. 그 자리를 찌르면 하루쯤 팔이 저릴 뿐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흑사산이 침 세 대에 빠지는 것을 대야로 막 보고 온 사람이었다. 사내가 발을 뺐다.

연비가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리는 웃음이었다.

“의원 이름이 소씨라 했소?”

“간판에 그렇게 적혀 있잖아요.”

“소문경의 딸이오?”

초림의 손에서 침이 아주 조금 떨렸다. 아버지의 이름을 이 진 바깥 사람의 입으로 들은 것은 칠 년 만이었다.

“네 아버지도 그 침을 썼소. 그리고 우리 독에 죽었지. 침이 독보다 빠르지는 않았던 모양이오.”

“그날은 침 놓는 사람이 독에 맞았어요. 오늘은 아니고요.”

연비가 주머니를 도로 소매에 넣었다.

“노인은 오늘 두고 가겠소. 대신 내일 청하진에 있는 약재를 내가 다 사겠소. 당귀 한 뿌리, 감초 한 쪽까지. 침만으로 몇 사람이나 살리는지 보겠소.”

연비가 돌아섰다. 두 사내가 등불을 들고 뒤를 따랐다. 눈 위에 사내들의 발자국만 남았고, 연비가 선 자리는 아무 자국 없이 하얗기만 했다.

*

진 어귀를 벗어나 냇물 소리가 들리는 데까지 와서야 연비는 걸음을 늦췄다. 왼쪽 사내가 제 손목을 주무르며 뒤에서 투덜거렸다.

“소곡주, 그 침 진짜 평생 갑니까?”

“하루 간다.”

“그런데 왜 물러나셨습니까?”

연비는 대답 대신 왼손 장갑을 벗었다. 등불 빛에 손목 안쪽이 드러났다. 두 힘줄 사이로 머리카락만 한 검은 실 하나가 손바닥 쪽에서 팔꿈치 쪽으로 손가락 한 마디만큼 올라와 있었다. 독을 오래 다룬 흑사곡 사람의 몸에는 언젠가 그 실이 생겼고, 실이 목에 닿으면 곡주의 해약도 듣지 않았다. 연비는 그것을 사내들에게 보이지 않게 소매로 덮고, 장갑을 다시 꼈다.

“그 의원이 아까 침 꽂은 자리가 어디였는지 봤느냐?”

“손목이었습니다.”

“여기였다.”

연비가 장갑 위로 자기 손목 안쪽을 눌렀다. 사내들은 그 손가락이 왜 오래 떨어지지 않는지 묻지 않았다.

*

오 할멈이 문틀에 기대 섰다.

“저 계집이 진짜 약재를 다 사면 어쩔래?”

“산에 가서 캐야죠.”

“이월에? 눈 속에서?”

“눈 속에서 나는 것도 있어요.”

“있긴 있지. 네 아버지가 그거 캐러 갔다가 발가락 두 개가 얼어서 와서 나한테 침을 맞았다. 의원이 약방 할멈한테.”

초림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뒷문을 열었다. 의원 뒤쪽 빈터에 눈이 덮여 있었다. 눈 밑으로 둥근 돌이 두 줄로 솟아 있었다. 열 개씩 두 줄, 스무 개. 아버지가 큰 의방을 짓겠다며 냇가에서 하나씩 굴려 와 박은 주춧돌이었다. 병자를 눕혀 돌보는 큰 의원, 약재 창고 하나에 병상 스무 개. 아버지는 그 주춧돌 위에 기둥 하나 세우지 못하고 죽었다. 맨 끝 돌 하나에만 아버지가 정으로 쪼다 만 자국이 남아 있었다. 거기 기둥 구멍을 팔 생각이었을 것이다.

“할머니, 화산 장로가 외상을 하면 뭘로 갚을까요?”

“돈 말고 뭐가 있겠니?”

“돈 말고 다른 거요.”

오 할멈이 초림을 한참 보더니 혀를 찼다. 그리고 부엌칼을 집어 들고 제 집으로 돌아갔다.

방 안에서 매청운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코 고는 사이사이에 잠꼬대가 섞였다.

“곽진 이 늙은이가…… 나보다 엄살이 심하니…… 아침이면 기어 올 거다…….”

초림은 문짝을 다시 경첩에 끼우다가 손을 멈췄다. 곽진. 종남산에 터를 둔 검 문파 종남파의 장로 이름이 그랬다. 화산파와 백 년째 서로 이웃 문파를 못 견뎌 하는 집이었다.

동이 틀 무렵, 다시 끼운 문짝을 누가 두드렸다. 이번에는 아주 다급하게, 쉬지 않고.

“문 여시오! 저 영감보다 먼저 봐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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