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018자) · 12월 3일
사백열두 통
십이 년 전 내가 보낸 고백이 반송돼 돌아왔다 · 유하람
여덟 시에 강 선배가 선우를 선반 앞으로 불렀다. 부르지 않고 그냥 그 앞에 서 있었다. 선우가 알아서 갔다. 삼십 년 동안 그 사람이 누구를 부른 적은 없다. 서 있으면 사람이 온다.
“왼쪽이 오래된 거야. 아래 단 왼쪽 끝이 제일 오래됐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새것. 위로 올라갈수록 새것. 넷째 단 오른쪽 끝이 작년 거야.”
강 선배는 봉투 등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훑는 손이 부전지를 건드리지 않았다. 삼십 년 동안 그렇게 훑은 손이었다.
“세 가지만 남겼어. 뜯긴 채 돌아온 거. 답장이 든 거. 사람이 손으로 쓴 거. 기계로 찍은 건 안 남겼어. 고지서, 광고, 은행. 그건 태워도 돼. 다시 오니까. 이건 다시 안 와.”
“왜 남기셨습니까?”
“첫 번째 건 말 안 해.”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둘째 단 가운데를 가리켰다.
“여기부터 여기까지가 서울이야. 백 통쯤. 나머지는 지방이고 몇 통은 나라 밖이야. 서울 건 걸어서 가. 주소가 없어진 데가 반이야. 그래도 가. 없어진 자리에 서 보면 옆집이 알아.”
선우는 그것을 들었다. 듣고 나서야 자기가 무엇을 하기로 한 사람처럼 듣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아무것도 하기로 하지 않았는데.
센터장은 목도리를 풀고 왔다. 그것이 어제와 다른 점이었다. 손에는 태블릿과 종이 한 장. 종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 방에서 종이는 늘 봉투 안에 있는 것이지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석만 선생님.”
센터장은 선배를 그렇게 불렀다. 야간조에서 그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선배, 아니면 강 씨, 아니면 아저씨. 선생님은 위에서 내려온 말이었다.
“목록 만듭시다. 몇 통입니까?”
“사백열두 통입니다.”
“세 보셨네요.”
“넣을 때마다 셌습니다.”
센터장이 태블릿에 그 숫자를 적었다. 사백십이. 화면에 찍힌 숫자는 종이에 쓴 숫자보다 가벼워 보였다. 선우는 컨베이어 옆에서 그것을 봤다. 손은 바구니를 옮기고 있었다. 아침 여덟 시 반은 야간조가 가장 느려지는 시각이다. 열 시간 반을 서 있은 다리가 자기 것이 아니게 되는 때.
“그리고 이거.”
센터장이 종이를 내밀었다. 강 선배가 받았다. 선우 자리에서는 글자가 안 보였고 종이 위쪽의 관인만 보였다. 붉은 것.
“징계 회부 통보입니다. 미배달 우편물 임의 보관. 규정 십사조 위반. 삼 년 초과분 폐기 의무 불이행. 감사실에서 올린 거고 저는 전달만 합니다.”
강 선배는 종이를 읽지 않고 접었다. 반으로, 다시 반으로. 그러고는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선우가 어제 봉투를 넣은 자리와 같은 자리였다. 검은 점퍼에 그 종이가 들어가는 것을 선우는 봤다. 삼십 년 동안 그 주머니에는 자판기 동전만 들어 있었다.
“이십팔 일 남았는데요.”
강 선배가 말했다.
“정년까지요. 이십팔 일 남은 사람을 징계하면 뭐가 됩니까?”
“퇴직금 산정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기록에 남습니다. 저도 그게 뭔지 압니다.”
센터장은 그렇게 말하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 안다는 말에 무게가 있었다. 선우는 그 무게를 들었다. 나중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컨베이어가 멈췄다. 오 주임이 전원을 내린 것이다. 아홉 시 사십 분. 마감 이십 분 전에 기계를 끄는 것은 이 방 규칙이 아니었다. 오 주임은 달걀을 들고 있지 않았다. 그 손이 비어 있는 것을 선우는 처음 봤다.
“센터장님. 야간조 대표로 말씀드립니다.”
“말씀하세요.”
“저 선반은 야간조 전체가 알고 있었습니다. 강 선배 혼자 한 게 아닙니다.”
“그럼 야간조 전체를 회부할까요?”
오 주임 입이 닫혔다. 은비가 옆에서 뭐라고 하려다가 오 주임 팔에 막혔다. 센터장은 그 침묵을 오래 두지 않았다.
“저는 이 방 사람들을 벌주러 내려온 게 아닙니다. 삼십일일에 이 방이 닫힙니다. 그때까지 선반이 비어 있어야 하고, 비우는 방법은 규정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걸 하는 겁니다.”
선우는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손이 비었다. 열두 시간 만에 처음 비는 손이었다.
“센터장님.”
“네.”
“규정에 하나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배달은 규정 아닙니까?”
센터장이 선우를 봤다. 이 방에서 십이 년을 말없이 일한 사람이 말을 한 것이다. 야간조 일곱 사람이 다 그쪽을 봤다.
“배달은 우편물의 기본이죠.”
“그럼 사백열두 통을 배달하면 됩니다. 폐기 대상은 배달 불능 우편물이고, 배달이 되면 불능이 아닙니다.”
“삼십 년 전 주소로요.”
“찾으면 됩니다.”
“누가요.”
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 하지 않았다. 대신 선반으로 갔다. 스무 걸음. 둘째 단에서 봉투 하나를 뽑았다. 아무거나 뽑은 것이 아니었다. 어젯밤 여덟 시간 동안 스무 걸음 옆에서 봉투 등을 보다가 눈에 들어온 것. 서울 주소. 마포. 우표는 1997년 것이었다.
“제가요.”
센터장은 그를 한참 봤다.
“근무 시간 외에 하세요. 국 업무 아닙니다. 그리고 그거 하나 배달한다고 사백열한 통이 사라지진 않습니다.”
“압니다.”
“열 시에 퇴근입니다.”
“압니다.”
센터장은 태블릿을 옆구리에 끼고 올라갔다. 계단 문이 닫혔다. 컨베이어는 다시 켜지지 않았다. 아홉 시 오십 분. 은비가 선우 옆으로 와서 봉투를 봤다.
“마포구 염리동. 그 동네 재개발 다 됐을 텐데요.”
“가 봐야 알아요.”
“선우 씨, 열두 시간 서 있었는데 지금 가게요?”
“지금 안 가면 안 가요.”
그것은 자기한테 하는 말이었다. 지금 안 하면 안 한다. 십이 년 전에 답장이 없다고 믿고 나서 그가 배운 유일한 것이었다. 미루면 미룬 것이 십이 년이 된다.
강 선배가 선반 앞에서 부전지 하나를 뗐다. 선우가 뽑은 봉투의 것. 노란 종이가 그 사람 손끝에 붙어 있다가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삼십 년 만에 처음 떼는 부전지였다.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봉투를 선우 손에 다시 놓아 주었다. 손에서 손으로. 그때 선우는 봉투가 세 장 무게라는 것을 알았다. 종이 두 장에 사진 한 장.
열 시 십 분에 우체국 정문을 나왔다. 눈이 그쳐 있었다. 어제 온 눈이 도로 가장자리에 회색으로 밀려 있었다. 뒷계단이 아니라 정문. 십이 년 동안 뒷계단에서 첫차를 보고 정문으로 나와 지하철을 탔다. 오늘은 버스를 탔다. 마포 가는 것. 밤을 새운 몸이 버스 창에 기대자 창이 차가웠다. 그 찬 것이 잠을 막았다.
버스에서 그는 봉투를 무릎에 놓고 갔다. 앞자리 등받이에 붙은 광고와 창밖 간판을 번갈아 봤다. 마포대교를 건널 때 강이 보였다. 십이 년 동안 이 시각에 강을 본 적이 없었다. 늘 지하철이었고 지하철에는 강이 없다. 물은 회색이었고 가장자리가 얼어 있었다. 얼음 위에 어제 온 눈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보는 동안 봉투가 무릎에서 조금 미끄러졌다. 그는 그것을 잡았다. 잡으면서 사진 한 장의 모서리가 봉투 안에서 손가락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삼십 년 된 사진의 모서리는 부드럽다.
염리동은 반쯤 남아 있었다. 언덕 위쪽은 아파트가 됐고 아래쪽 골목 세 줄이 남아 있었다. 봉투의 주소는 아래쪽이었다. 염리동 오십칠 번지. 번지는 지금 쓰지 않는 방식이라 골목 어귀 부동산에서 물었다. 부동산 주인이 봉투를 보고 눈썹을 올렸다.
“1997년? 이걸 지금 배달해요?”
“네.”
“우체국이 그렇게 느려요?”
“보통은 안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오십칠 번지가 지금 어느 집인지 알려 주었다. 파란 대문. 골목 두 번째 줄 끝. 아직 사람 산다고 했다. 할머니 혼자.
파란 대문은 페인트가 벗겨져 아래쪽 철이 보였다. 초인종이 없어서 문을 두드렸다. 손으로 세 번. 안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동안 선우는 봉투를 두 손으로 들고 서 있었다. 받는 사람 칸을 다시 봤다. 박순례. 보내는 사람. 이영자. 부산 영도.
문이 열렸다. 일흔은 넘어 보이는 여자였다. 카디건 위에 조끼, 조끼 위에 목도리.
“누구셔.”
“우체국에서 왔습니다. 박순례 씨 맞으십니까?”
“맞는데. 우체부가 아침에 왔다 갔는데.”
“이건 좀 늦은 겁니다.”
선우는 봉투를 내밀었다. 두 손으로. 여자는 한 손으로 받으려다가 봉투 앞면을 보고 두 손이 됐다. 이영자. 그 이름을 본 얼굴이 바뀌는 것을 선우는 봤다. 바뀌는 것이 아니라 열리는 것이었다. 삼십 년 동안 닫혀 있던 문이 아니라 얼굴이.
“영자.”
“네.”
“영자가 이걸 언제 부쳤어.”
“1997년 삼월입니다. 소인이요.”
여자는 봉투를 뜯지 않았다. 대문 안쪽으로 한 걸음 물러나서, 문설주에 어깨를 기대고, 봉투를 가슴에 댔다. 종이 세 장 무게. 그것을 가슴으로 받았다.
“영자는 그해 여름에 갔어. 부산에서. 나는 장례도 못 갔어. 싸웠거든. 그 전해에. 뭘로 싸웠는지도 이제 몰라. 그러고 편지가 안 왔어. 나는 안 온 줄 알았어. 삼십 년을.”
선우는 서 있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는 우체국 사람이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왜 이제 와.”
“…찾지를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한테 하는 말 아니야.”
여자는 봉투를 뜯었다. 옆면을. 손톱으로 결을 따라, 천천히. 선우는 그 손을 봤다. 삼십 년 전 봉투를 뜯는 손은 다 같은 방식이었다. 급하지 않은 사람의 손. 안에서 종이 두 장과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사진은 뒤집혀 있었다. 여자는 그것을 뒤집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지 않았다. 열어 둔 채였다.
선우는 대문 앞에 잠깐 더 서 있었다. 열린 문 안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두 장. 그다음은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는 파란 대문을 조용히 밀어 닫았다. 닫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십이 년 동안 손이 배운 것 가운데 하나였다.
골목을 내려오면서 손을 봤다. 비어 있었다. 봉투 하나가 나갔을 뿐인데 손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 손바닥이 넓어진 것 같았다. 그는 그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조끼 안주머니. 거기 다른 봉투가 있었다. 한 장 무게. 그것은 아직 그대로였다.
사백열한 통.
버스 정류장에서 그는 그 숫자를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해 봤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열한 시 사십 분. 밤을 새운 사람이 서 있기에는 햇빛이 너무 밝았다. 그런데 그는 오늘 처음으로 낮에 우체국 밖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