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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17,261자)

정전협정 — 총성이 멎어도 돌아오지 못했다

1950 · 네오

1953년 7월 27일 밤 열 시, 군사분계선 — 서해 한강 하구에서 판문점, 철원 북쪽, 김화, 금성 남쪽, 펀치볼 북쪽을 지나 동해안 고성 북쪽까지 이어진 군사분계선과 1945년의 38선. 서명 장소(판문점 오전 열 시, 문산 오후 한 시, 평양 밤 열 시, 개성 28일 오전 아홉 시 반), 포로 교환이 이루어진 판문점과 문산 「자유의 마을」, 중립국행 포로가 배를 탄 인천.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3년 7월 27일 월요일 이른 아침, 서울 경무대(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자리), 대통령 집무실.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54) 대장이 제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49) 중장과 함께 들어섰다. 대통령 이승만(75) 곁에는 국무총리 백두진(42)과 외무부 장관 변영태(58)가 앉아 있었다1. 판문점에서 서명이 시작되기까지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이승만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마침내 휴전을 얻어 내셨구려. 축하하오.”

클라크는 그 말을 그날 오전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로 보낸 전문에 그대로 적었다1. 축하는 거기까지였다.

클라크는 서명 순서를 설명했다. 공산 측은 한국 기자와 대만 기자를 서명장에서 빼라고 요구했고, 유엔군 측은 그 요구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판문점에서는 양측 수석대표가 사령관을 대신해 먼저 서명하고, 사령관들은 저마다 자기 사령부에서 따로 서명하기로 했다. 정전은 그날 밤 열 시에 발효될 터였다2. 양측 대표단이 마지막 남은 서명 절차에 합의한 것은 전날 오후 두 시 오 분이었다. 클라크는 오후 네 시에 도쿄와 문산에서 동시에 발표하기 전까지 한 마디도 기자들에게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2.

“저는 오후 한 시에 문산에서 서명합니다. 유엔기와 성조기 옆에 태극기도 세우겠습니다. 장군 한 분을 참관인으로 보내 주십시오.”

클라크는 장성급 참관인을 보내 달라고 다시 청했다1. 이승만은 그 청에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서명은 당신네가 하시오. 우리는 하지 않소.”

그날 판문점에도 문산에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은 서지 않았다3. 정전협정 문서에는 끝내 대한민국의 서명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 달 남짓 전인 6월 18일, 이승만은 송환을 거부한 반공포로 약 2만 6천 명을 수용소 철조망 밖으로 내보냈다. 협상을 깨뜨리려는 수였다3. 미국은 결국 상호방위조약과 군사·경제 원조, 국군 증강을 약속했고, 이승만은 휴전을 막지 않겠다고 물러섰다3. 막지 않는 것과 서명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클라크가 한 가지를 더 청했다. 북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한국인 포로들에게 대통령이 직접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유엔군은 누구도 억지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그 약속을 대통령의 입으로도 들려주라고 했다. 이승만은 그러겠다고 했다. 다만 서명이 끝난 뒤 국민에게 먼저 말하겠다고 했다1.

이야기는 곧 돈과 쌀로 넘어갔다. 클라크는 아직 공개하지 말아 달라며 한 가지를 귀띔했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 민간인에게 식량 1만 톤쯤을 내주려 한다는 것이었다. 국회가 임시로 쓸 건물을 찾는 일도 돕고, 전장에서 거둔 트럭을 한국 정부에 넘기고, 2억 달러의 미국 원조와 유엔의 한국 재건 기구가 하는 일을 한미 합동경제위원회로 함께 조율하기로 했다1.

“트럭은 몇 대나 되오?”

“세어 보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늘 하루는 다른 걸 세느라 바쁠 것 같습니다.”

클라크는 그날 오전의 전문에 회동이 아주 만족스러웠고 내내 분위기가 좋았다고 적었다1. 협정에 서명하지 않겠다는 나라와의 회동이었다.

*

같은 날 아침 아홉 시, 판문점(현 파주시 진서면), 중국·북한 측이 서명을 위해 새로 지은 건물 앞.

중국 측 대표단 비서처의 양관췬은 일찍 나와 있었다. 밤새 내린 비로 땅이 아직 젖어 있었다. 그의 앞에 대나무와 나무로 짠 동양식 건물이 서 있었다. 미리 만든 부재를 실어 와 그 자리에서 맞춘 집이었고, 중국 측 일꾼들이 며칠을 매달리고 26일 밤을 꼬박 새워 세웠다4. 개성(현 북한 개성시)과 문산(현 파주시 문산읍)을 잇는 길에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였다.

사십오 분을 기다리자 동쪽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났다. 유엔군 대표단이 탄 헬리콥터가 건물 동쪽에 내리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기수에 노란 깃발이 펄럭였다4.

양관췬 옆에서 같은 대표단의 통역 지차오주(21)가 속기용 종이철을 고쳐 쥐었다.

“처음 개성에 올 때는 흰 깃발이었지요.”

“그래서 우리 기자들이 ‘미군이 백기를 들고 항복하러 왔다’고 썼고, 저쪽은 펄쩍 뛰었지. 노란색으로 바꾼 게 그 덕이야.”

회담 초기의 일이었다. 그 뒤로 양측은 판문점에 오가는 사람의 팔에 노란 천을 두르고 차와 헬리콥터에 노란 깃발을 달기로 했다4.

두 사람의 자리는 뒷줄 오른쪽 맨 끝이었다. 앉아서 영어를 받아 적다가, 연설 순서가 생기면 바로 일어나 연단으로 나갈 수 있는 자리였다. 중국 측은 연설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정해 두었다. 누가 먼저 말하느냐부터 다툼이 될 일이었다4.

“해리슨 장군이 오늘도 시계를 볼까요?”

지차오주의 물음에 양관췬이 입꼬리를 올렸다. 유엔군 측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55) 중장은 1952년 5월에 회담장에 처음 나왔다. 그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앉아 서류를 한 번 훑어보더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오늘은 휴회하고 내일 봅시다” 하고 일어섰다. 그날 회의는 이십오 초 만에 끝났다. 중국 측은 그 이십오 초를 오래 기억했다4. 그가 수석대표로 처음 나오기로 한 날에는 회담장에 아예 나타나지 않아 휴회가 되었고, 미국 측은 해리슨이 늦잠을 잤다고 알려 왔다. 부임하고 열흘 동안 휴회만 세 번이었다. 병든 몸으로 회담을 지휘하던 중국 측의 리커눙(51)은 그를 날마다 땡땡이칠 궁리만 하는 초등학생 같다고 했다4.

“늦잠 자는 장군이라니, 우리 쪽이었으면 벌써 군법회의감이지요.”

“오늘은 서명할 거요. 저쪽도 집에 가고 싶어 하니까.”

기자들도 긴장해 있었다. 두 수석대표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펜을 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시 뒤집힐 수 있었다. 지난 두 해 동안 회담은 몇 번이나 그렇게 멈추었다4.

건물 안은 개성 시절의 낮고 비좁은 천막보다 훨씬 넓고 밝았다4. 동쪽 끝에 작은 네모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 서명을 기다리는 협정문 열여덟 권이 쌓여 있었다. 그 남쪽과 북쪽에 긴 탁자가 하나씩 놓였다4.

양관췬의 눈에 두 편은 앉은 모습부터 달랐다. 중국·북한 쪽 사람들은 졸업식에 나온 학생들처럼 허리를 펴고 앉았다. 맞은편에는 비스듬히 기대앉은 사람, 다리를 꼰 사람,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섞여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이긴 사람이 아니라 어서 끝내고 돌아가고 싶은 사람의 자세로 읽었다4.

열 시 정각, 해리슨은 동쪽 문으로, 북한군 대장 남일(37)은 서쪽 문으로 들어왔다. 악수도 없었고 목례도 없었다5. 두 사람은 각자 자기 쪽에서 준비한 협정문 아홉 권에 서명했고, 서명을 돕는 장교들이 문서를 맞바꾸어 다시 서명을 받았다6. 두 사람은 끝내 서로를 거의 쳐다보지 않았다. 열여덟 권에 서명하는 데 십 분이 걸렸다7. 열 시 십 분, 의식이 끝났다6.

학교 강당보다 넓은 그 건물에서 한국 기자에게 돌아간 자리는 두 개뿐이었다5. 협정문의 정식 이름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유엔군 총사령관만 들어 있었다4.

*

같은 날 오후 한 시, 문산 유엔군 전진기지.

판문점에서 넘어온 협정문이 클라크 앞에 놓였다. 사령관의 서명이 이어졌다2. 서명을 마친 그는 기자들 앞에서 짧은 성명을 읽었다.

“이 시간, 저는 기뻐할 마음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기자들이 그 말을 받아 적었다5.

그는 이듬해 낸 회고록에 그날을 이렇게 적었다. 자신은 미국 역사에서 승리 없는 정전협정에 서명한 첫 육군 사령관이라는,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이름을 얻었다8.

그날 이승만은 담화를 냈다. 그는 휴전에 서명하지도 협력하지도 않는다고 못 박았다5. 그리고 북쪽 사람들에게 따로 말을 건넸다.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담화는 경무대에서 나왔다5.

그는 국민에게 한 가지를 더 알렸다. 석 달 안에 열릴 정치회담이 깨지면, 한국에 군대를 보낸 유엔 16개국이 한국과 함께 싸우기로 했다는 보장을 받았다는 것이었다9.

*

같은 날 밤 열 시, 전선의 한 고지.

최종열(17)은 전주사범학교 2학년이던 1951년 4월에 전선으로 끌려왔다. 대대 본부중대에 들어가 가파른 산길로 탄약 상자를 져 날랐고, 처음에는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 군번은 이듬해에야 나왔다. 열사흘 전인 7월 14일에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10.

처음 전선으로 올라가던 날, 그가 탄 지프 옆에 포탄이 떨어졌다.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탄약 상자를 지고 오르는 비탈에는 거두지 못한 시신이 누워 있었고, 그는 그 위를 넘어 다녔다. 하루 사이에 학도병 스무 명이 여섯 명으로 줄어든 날도 있었다10.

그날 아침부터 국군과 인민군은 전쟁이 끝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 총알을 주고받았다10. 저녁이 되도록 사격은 그치지 않았다. 같은 열 시, 평양에서는 김일성(38)이 협정문에 서명했다6.

열 시쯤, 하늘이 갑자기 환해졌다. 양쪽에서 조명탄을 잇달아 쏘아 올렸다. 낙하산에 매달린 불덩이들이 천천히 내려오며 밤을 대낮보다 밝게 비추었다10.

옆의 병사가 철모를 벗었다.

“이제 진짜 끝난 겁니까?”

“끝났으면 조명탄은 왜 쏘는데?”

“보라고 쏘는 거지요. 우리 아직 살아 있는 거.”

그 불빛 아래로 비탈이 드러났다. 숨진 채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국군도 인민군도 있었다. 최종열은 그들을 동포라고 불렀다. 이 작은 산 하나를 두고 그렇게까지 싸워야 했는지, 그는 그 자리에서 물었다10.

조명탄이 하나씩 꺼지자 고지는 다시 어두워졌다. 기관총도 박격포도 더는 울리지 않았다. 삼 년 동안 밤마다 포성에 묻혀 있던 풀벌레 소리가 비탈 아래에서 올라왔다. 누군가 참호 벽에 기대 성냥을 그었고, 아무도 불을 끄라고 소리치지 않았다.

일흔 해 뒤, 아흔 살이 된 그에게 기자가 그날 밤의 마음을 물었다.

“살았다는 생각, 그 외에는 없었다.”

그 말은 2023년 6월 지역 신문에 실렸다10.

양쪽 군대는 사흘 안에 군사분계선에서 2킬로미터씩 물러나야 했다4. 그 며칠 사이 미 해병대 진지 앞에는 맨손의 중국군 병사들이 완충지대를 건너와 담배를 청했다. 해병들은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9.

*

7월 28일 오전 아홉 시 반, 개성, 송악당이라는 건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52)가 협정문에 서명했다6. 전날 밤 개성에서는 대표단의 축하 공연이 열렸다. 상하이에서 온 배우들이 중국 저장 지방의 노래극인 월극으로 옛 사랑 이야기 「서상기」를 무대에 올렸다. 양관췬은 이튿날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를 꾸리는 일 때문에 그 공연을 놓쳤다. 그는 조선에서 월극을 볼 기회를 놓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4.

서명을 마친 펑더화이는 지원군 고급 장교 백여 명 앞에서 자유를 사랑하는 민족이 깨어나 조국을 위해 일어서면 누구도 꺾을 수 없다고 말했다4. 그러나 그가 뒷날 쓴 자술서에는 서명하던 순간의 다른 생각이 남았다.

“서명하면서 생각했다. 선례가 열렸고 앞날은 길다. 인민에게도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때 우리 전장의 조직이 막 갖추어졌는데, 그것을 충분히 써서 적에게 더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조금 아쉬웠다.”

그 생각은 뒷날 『펑더화이 자술』에 실렸다4.

같은 날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방송으로 연설했다. 미제와 이승만 도당에 맞선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고 했고, 정전협정 조인을 미제와 이승만 도당의 군사적, 정치적, 도덕적 패배의 증거라고 불렀다23. 협정문에는 승리를 가리는 규정이 없었다. 군사분계선은 38선 근처에 그어졌다. 북한은 협정 체결 스무 해째인 1973년 7월 27일을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일로 정했고, 1996년부터는 국가 명절 전승절로 높였다24.

*

1953년 8월 5일, 문산 「자유의 마을」, 돌아온 포로를 맞는 곳.

본국 송환 작전 ‘빅 스위치’의 첫날, 공산 측은 유엔군 포로 4백 명을 돌려보냈다. 그 가운데 미군은 70명이었다11. 접수대 앞에서 군의관이 이름을 불렀고,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대답 대신 손을 들었다. 넉 달 전 4월의 ‘리틀 스위치’ 때는 앓거나 다친 포로만 오갔다. 그때 유엔군 측은 북한군 5,194명, 중국군 1,030명, 민간인 억류자 446명, 모두 6,670명을 보냈다. 그 가운데 357명은 들것에 실려 갔다. 돌아온 유엔군 측 환자와 부상병은 684명이었고, 미군이 149명이었다12.

9월 초까지 유엔군 측은 북한군 70,183명과 중국군 5,640명, 모두 75,823명을 넘겼다. 공산 측이 돌려보낸 유엔군 포로는 12,773명이었다. 국군이 7,862명, 미군이 3,597명, 영국군이 945명, 튀르키예군이 229명이었다12.

명단은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 1951년 12월 양측이 포로 명부를 맞바꿀 때, 공산 측 명부에 오른 국군은 11,559명뿐이었다13. 유엔군 측은 국군 실종자를 8만 8천 명이 넘는다고 보았다14. 1954년까지 이어진 교환에서 돌아온 국군은 8,343명이었다. 적어도 7만 명이 넘는 국군이 포로로 남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었다15. 문산에서 이름을 기다린 집 가운데, 끝내 이름이 불리지 않은 집이 불린 집보다 많았다.

*

1954년 2월 9일, 인천항.

돌아가기를 거부한 포로들의 일은 그해 겨울에야 끝났다. 1953년 9월 23일, 유엔군 측은 송환을 거부한 북한군 7,900명과 중국군 14,704명, 모두 22,604명을 중립국송환위원회에 넘겼다. 이튿날 공산 측도 미군 23명, 영국군 1명, 국군 333명을 넘겼다12. 포로들을 지킨 것은 인도군이었다. 이승만은 인도가 이름만 중립이라며 인도군이 한국 땅에 내리는 것을 막았다. 인도군은 인천항 배에서 미군 헬리콥터를 타고 판문점으로 날아갔다16. 위원장은 인도군 소장 코단데라 티마이야(44)였다17. 각자의 나라가 포로를 설득할 시간은 90일이었다13. 설득은 10월 15일에 시작해 12월 23일에 끝났다. 포로들은 한 사람씩 천막에 불려 들어가 고향 쪽 장교들의 말을 들었다. 중국군 포로 가운데 마음을 바꿔 대륙으로 돌아간 사람은 137명이었다. 유엔군 쪽에서는 미군 2명과 국군 8명이 돌아왔다. 미군 21명, 영국군 1명, 한국인 325명은 끝내 공산 측에 남았다. 돌아가지 않은 북한군·중국군 포로 21,839명은 이듬해 초 남쪽과 대만으로 갔다12.

부두에는 남쪽도 북쪽도 고르지 않은 포로 88명이 서 있었다. 중립국송환위원회 최종 보고서는 북한인 74명, 한국인 2명, 중국인 12명으로 적었다18. 그들은 인도의 항구 마드라스(현 인도 첸나이)로 가는 배에 올랐다19.

그 줄에 서기까지 쉬운 사람은 없었다. 북한군 공병국에서 훈련 참모를 지낸 소좌 주영복은 일제 때 일본군으로 끌려간 이력이 있어, 북으로 돌아가면 숙청될 것이 뻔했다. 그는 중립국을 고른 것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뜻을 같이하던 동료가 그의 이름을 흘렸고, 그는 반공포로들에게 붙잡혀 얻어맞고 그들이 만든 감옥에 갇혔다. 그는 스스로를 ‘포로의 포로’라고 불렀다. 몸을 추스른 그는 죽을 고비를 넘겨 철조망 너머 중립국행 막사로 건너갔다18.

현동화(18)도 그 줄에 있었다. 1932년 함경북도 청진(현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의 넉넉한 집에서 태어났고, 북한군 장교를 길러 내는 군사학교를 거쳐 전쟁에 나왔다. 수용소에서는 반공의 편에 섰다18. 그는 북에 남은 식구들이 이미 죽었으리라 여겼다. 혈혈단신으로 남쪽에 남아 억눌려 사느니 중립국 멕시코로 갔다가 거기서 미국으로 건너가고 싶었다18.

인도군 장교가 명단을 짚으며 물었다.

“최종 목적지는?”

“멕시코요. 거기서 미국으로 갈 겁니다.”

“이 배는 인도로 갑니다. 멕시코는 인도에서도 한참 멉니다.”

“그러니 일찍 떠나는 겁니다.”

장교가 웃음을 참으며 명단에 표시를 했다.

배 위에서도 편이 갈렸다. 배가 인천 부두를 떠나자마자 포로 스무 명이 인솔자인 인도군 그레왈 소령을 찾아가, 인도에 눌러살 테니 반공 단체 사람들과 따로 재워 달라고 청했다18.

현동화는 멕시코에 가지 못했다. 그는 인도에 남아 1962년 대한민국 국적을 얻었고, 한국과 인도를 오가는 무역으로 사업을 일구었다18.

*

후일담. 정전 뒤, 각자의 장부.

전쟁이 멈춘 뒤 각자의 장부는 이렇게 맞지 않았다.

미군은 3년 동안 약 180만 명이 한국에서 복무했고, 싸움에서 전사한 미군은 3만 3천여 명이었다25. 국군의 전사자는 13만 7천여 명이다26.

중국은 2014년 10월 29일 신화사를 통해 항미원조 열사가 모두 19만 7,653명이라고 밝혔다. 이 명부에는 전사하거나 실종된 장병만이 아니라 따라간 민병과 민공, 정전 뒤 귀국하기 전 조선을 다시 세우다 숨진 사람, 부상이 도져 숨진 사람까지 들어 있다. 2020년 시진핑의 연설도 19만 7천여 명의 영웅 아들딸이라고 했다27. 서방의 추산은 18만에서 40만까지 갈린다27.

북한이 스스로 밝힌 인명 피해의 총계는 찾지 못했다. 김일성은 7월 28일 연설에서 희생을 수만 명이라고만 했다23. 북한 땅에는 미군이 쏟아부은 폭탄 63만 5천 톤의 대부분이 떨어졌다. 네이팜도 3만 2,500톤이 들어 있었다. 북한은 평양 한 곳에만 폭탄 40만 발이 떨어졌다고 주장한다28.

*

후일담. 1994년 10월 23일 새벽, 서해.

수산청 어업지도선이 바다를 떠돌던 작은 배에서 예순네 살의 남자를 건져 올렸다. 조창호(20)였다.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의 산 한석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포병 관측장교로 싸우다 중국군에게 사로잡혔다. 북한에서 탈출을 꾀하다 들켜 13년을 감옥과 노동 수용소에서 보냈고, 자강도 탄광에서 일하다 규폐증을 얻었다. 그는 압록강에서 나무배를 타고 중국을 거쳐 바다로 나왔다20.

그는 국군포로 귀환 1호로 불렸다21. 북한은 남쪽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국군포로가 없다고 말해 왔다. 조창호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제 몸으로 보여 주었다15. 10월 25일, 그는 국방부 장관 앞에 서서 귀환을 신고했다20. 사로잡힌 지 43년 만이었다. 2023년 7월까지 북한에서 돌아온 국군포로는 80명이었고, 그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은 13명이었다14. 조창호는 2006년 11월 19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20.

남과 북으로 흩어진 가족을 찾겠다고 정부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2025년 11월 말까지 134,516명이었다. 그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은 34,368명, 넷 중 하나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평균 나이는 82.7세다. 남북이 함께 여는 가족 상봉은 2018년 8월 뒤로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22.

1953년 7월 27일 오전 열 시, 판문점에서 십 분 만에 서명이 끝난 문서는 지금도 정전협정이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사료 출처

1. 미 국무부,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FRUS) 1952–1954』 vol. XV, part 2, 문서 722 — 클라크가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전문 GX 7452(문산리, 1953.7.27 오전 열 시 삼십오 분), 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15p2/d722 — 이른 아침 경무대 회동(테일러·백두진·변영태 동석), 이승만의 축하(원문: “Rhee congratulated me on having finally obtained an armistice.”), 오후 한 시 문산리 서명과 유엔기·성조기·태극기 게양, 장성급 참관인 파견 재요청, 송환 거부 한국인 포로에게 직접 호소해 달라는 요청과 이승만의 「서명 뒤 국민에게 먼저」 답. 2. 같은 책, 문서 720 — 클라크 전문 C 64007(도쿄, 1953.7.26 오후 세 시 십구 분), 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15p2/d720 — 26일 열네 시 오 분 대표단 합의 완료와 열여섯 시 도쿄·문산리 동시 보도 발표(그 전 누설 금지), 27일 열 시 판문점 수석대표 서명, 직후 문산리 사령관 서명, 22시 정전 발효. 각주: 공산 측이 대만·한국 기자 배제를 요구해 사령관 동시 서명이 무산되고 수석대표가 먼저 서명하기로 한 경위. 3.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정전을 위한 노력(1951.7.10~1953.7.27)」, theme.archives.go.kr/next/625/process/armistice.do — 1953.6.18 반공포로 약 2만 6천 명 석방, 휴전 묵인의 대가로 받은 상호방위조약·원조·국군 증강 약속, 7월 27일 한국 정부가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음. 4. 『新民周刊』 2023년 7월 24일 호, 정전 70주년 특집 9~11쪽(img1.xinmin.cn/xmzk/2023-07-24/90724.pdf, 100724.pdf, 110724.pdf) — 중국 측 대표단 양관췬(杨冠群)의 회고: 비 갠 아침, 대나무·나무 조립식 서명 건물을 며칠 만에 26일 밤샘으로 완성, 아홉 시쯤 개성–문산 도로의 인파, 사십오 분 뒤 헬리콥터와 노란 깃발, 흰 깃발 일화와 노란 천·노란 깃발 합의, 지차오주(冀朝铸)와 양관췬의 뒷줄 오른쪽 끝자리, 「연설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작은 네모 탁자의 협정문 열여덟 권과 양쪽 긴 탁자, 해리슨의 이십오 초 회의와 첫날의 「늦잠」 휴회, 부임 열흘 동안 세 번의 휴회, 리커눙(李克农)의 「수업을 빼먹으려는 초등학생」 비유, 협정의 정식 명칭, 정전 명령(22시 완전 정전, 72시간 안에 2킬로미터 후퇴), 27일 밤 개성 축하 공연과 월극 「서상기」를 놓친 일, 펑더화이의 송악당 발언과 『자술』의 문장, 클라크 회고록의 문장(중국어 번역). 5. 뉴데일리 연재 「이승만史 (2) 한미동맹의 탄생⑫ 휴전협정 조인 거부」(2017.10.2), newdaily.co.kr/site/data/html/2017/10/02/2017100200017.amp.html — 조선일보 1953.7.29 보도 인용: 열 시 정각 동쪽·서쪽 문으로 입장, 악수도 목례도 없음, 학교 강당보다 큰 회장에 한국 기자석 두 자리,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 없음. 클라크 성명(원문: “I cannot find it in me to exult in this hour.”), 이승만 담화 「우리는 그 휴전조약에 서명하거나 협동하자는 것이 아니다」와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2차 자료이며 담화 원문 전체는 보지 못했다. 6. 澎湃新闻, 「历史上的今天|一纸协定 维和朝韩66年」(2019.7.27), m.thepaper.cn/newsDetail_forward_4020734 — 열 시 정각 시작, 각자 준비한 아홉 권에 서명 후 보조 인원이 맞바꿈, 열 시 십 분 종료, 22시 김일성 평양 서명, 28일 오전 아홉 시 삼십 분 펑더화이 개성 송악당 서명, 22시부터 모든 적대 행위 정지. 7.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Prologue』 2003년 여름호, 「The Korean War Armistice」, archives.gov/publications/prologue/2003/summer/korean-war-armistice — 특별히 지은 방, 두 대표가 서로를 거의 알은척하지 않음, 십 분 동안 3개 언어 협정문 열여덟 부 서명, 22시 발효. 8. Mark W. Clark, 『From the Danube to the Yalu』(1954) — 「승리 없는 정전협정에 서명한 첫 미 육군 사령관이라는 부럽지 않은 이름(unenviable distinction)」. 원서는 보지 못했고 JSTOR 발췌 소개와 4번 자료의 중국어 번역으로 확인했다. 9. 『The Charlotte News』 1953.7.28(wjcash.org/WJCash21/Charlotte.News.Articles/7-28-53.htm) — 이승만이 국민에게 보낸 메시지(90일 안에 열릴 정치회담이 깨지면 16개국이 한국과 함께 싸운다는 보장), 맨손의 중국군이 새 완충지대를 건너 유엔군 벙커 가까이 와 담배를 청했고 해병들은 어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보도. 10. 송은현, 「〔한국전쟁 그리고 정전 70주년〕(상) 당시 학도병에게 듣는 6.25와 정전」, 전북일보 2023.6.21, jjan.kr/article/20230621580136 — 최종열(당시 90세)의 전주사범학교 2학년 징집(1951.4), 대대 본부중대 탄약 운반, 1952년 군번, 1953.7.14 화랑무공훈장, 7월 27일 아침부터의 사격, 밤 열 시쯤 조명탄(「갑자기 하늘이 환해졌다」), 쓰러진 「동포」들, 「살았다는 생각, 그 외에는 없었다」. 11. 『The Charlotte News』 1953.8.5(wjcash.org/WJCash21/Charlotte.News.Articles/8-5-53.htm) — 교환 첫날 유엔군 포로 4백 명 귀환, 미군 70명. 12. 영문 위키백과 「Operation Big Switch」(2026년 10월 열람) — 빅 스위치 1953.8.5 시작, 75,823명(북한 70,183·중국 5,640), 12,773명(국군 7,862·미군 3,597·영국 945·튀르키예 229 등), 9월 23일 22,604명(북한 7,900·중국 14,704) 인계, 24일 미군 23·영국 1·국군 333명 인계, 해설 기간 뒤 한국인 325·미군 21·영국 1명 공산 측 잔류, 리틀 스위치(4.20~5.3) 6,670명과 684명. 1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포로교환협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66868 — 정전 뒤 60일 안 인계, 인계 뒤 90일 해설 기간, 1951년 12월 명부 교환에서 공산 측 국군 명단 11,559명. 14. 윤광섭, 「[윤광섭의 자명고] 회담장의 안과 밖 그리고 미완의 협상」, 매일신문 2023.7.28, imaeil.com/page/view/2023072616445498754 — 유엔군 측 추정 국군 실종 8만 8천여 명, 2023년 7월 현재 귀환 국군포로 80명 가운데 생존 13명. 15. 김기호, 「[아침을 열면서] 날 잊지 말아라」, 경기일보 2020.6.28, kyeonggi.com/article/202006281130400 — 1954년까지 귀환 국군 8,343명, 최소 7만여 명 포로 잔류 또는 실종 추정, 조창호의 탈북이 북한의 「국군포로는 없다」는 주장을 뒤집었다는 평가. 16. 김태훈, 세계일보 2025.11.18, segye.com/newsView/20251118510315 — 중립국송환위원회 의장국 인도, 이승만의 인도군 상륙 금지, 인천항에서 판문점까지 미군 헬리콥터 이동. 17. 영문 위키백과 「Neutral Nations Repatriation Commission」(2026년 10월 열람) — 위원장 인도군 소장 K. S. 티마이야, 5개국 구성. 18. 이희원, 「한국전쟁의 중립국행 포로 수기로 보는 제3지대의 불/가능성」, 『한국민족문화』 92(2025.11), 75~109쪽, pncc.pusan.ac.kr — 중립국송환위원회 최종 보고서의 88명(북한인 74·한국인 2·중국인 12, 이선우 2013 인용), 현동화 구술·정동현 씀 『격랑의 세월 인도에 닻을 내리고』(2003): 1932년 청진 출생, 부유한 집안, 군사학교 입교 뒤 참전, 수용소에서 반공 입장, 북의 식구가 죽었으리라는 생각과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가려던 기대(87쪽), 1962년 대한민국 국적, 한–인도 무역 사업. 19. James Fretwell, 「The Korean War POWs who rejected North and South Korea to go to neutral India」, NK News 2024.2.9, nknews.org/?p=938979 — 1954.2.9 한국인 76명·중국인 12명이 인천에서 마드라스로 출항. 20. 한국어 위키백과 「조창호 (군인)」(2026년 10월 열람, 조선일보·동아일보·KBS·MBC 보도 인용) — 1930.10.2 출생, 1951년 5월 인제 한석산 전투에서 중국군에 피포, 포병 관측장교, 탈출 기도로 13년 수감, 탄광 노동과 규폐증, 압록강 나무배 탈출, 1994.10.23 새벽 수산청 어업지도선 구조, 10.25 국방부 장관에게 귀환 신고, 2006.11.19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 21. 자유아시아방송(RFA), 「조창호씨: “남북관계 발전 불구, 국군포로 문제 해결 안돼 유감”」(2005.9.30), rfa.org/korean/in_focus/sk_estimate_sk_pow_alive_546-20050930.html — 「국군포로 1호」, 1994년 10월 귀환. 22. 헤럴드경제, 「이재정 의원 “이산가족 4명 중 3명 이미 사망, 생존자 평균연령 82.7세…”」(2026.1.18), heraldk.com/article/2026011822055907832 — 2025년 11월 말 기준 신청자 134,516명, 생존자 34,368명(약 25%), 평균 82.7세, 2018년 8월 이후 상봉 중단. 23. 김일성, 조국해방전쟁 승리 연설(1953.7.28 방송) 및 최고사령관 명령 제470호(1953.7.27), 『Kim Il Sung Works』 vol. 7, 454~470쪽(1981) —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정전협정 조인은 미제와 이승만 도당의 「군사적·정치적·도덕적 패배」, 희생 「수만 명」. 북한의 주장이다. 정전협정문에 「승리」 규정은 없다. 24. 매일신문 2019.7.30(imaeil.com/page/view/2019073009563273791); 데일리안(dailian.co.kr/news/view/729024/); 한국경제·연합 2017.7.26(hankyung.com/amp/201707265753Y) — 북한이 1973년 7월 27일을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일」로 정하고 1996년부터 국가 명절 「전승절」로 높였다는 대목.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25. 미 국방부, 한국전쟁 미군 사상자 통계(Defense Casualty Analysis System 등) — 한국 전구 복무 약 180만 명, 전투 전사 3만 3천여 명(전체 사망 3만 6천여 명과 구분). 정확한 표와 수치는 원자료로 확인이 더 필요하다. 2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통계 — 국군 전사 13만 7천여 명. 정확한 표기와 구분은 원자료로 확인이 더 필요하다. 27. 신화사(선양), 2014.10.29(人民政协网 rmzxw.com.cn/sy/yw/2014/10/29/399633.shtml, 원문 확인) — 항미원조 열사 197,653명(전사·실종 장병과 지원 민병·민공, 정전 뒤 조선 재건 중 숨진 사람, 부상이 도져 숨진 사람을 포함한 열사 명부); 시진핑 2020.10.23 연설(「19만 7천여 명의 영웅 아들딸」). 서방 추산 18만~40만, 183,108명(2006 민정 열사 명단 기준 직접 전투 희생), Zhang Shu Guang(1995) 전사 약 15만 2천은 재인용이며 범위가 서로 다르다. 28. AP 2017.7.24(globalnews.ca/news/3620192/north-korea-digging-up-bombs) — 미군이 한반도에 떨어뜨린 폭탄 63만 5천 톤(네이팜 3만 2,500톤 포함)·대부분 북쪽, 평양 한 곳에 폭탄 40만 발이라는 북한 주장(조선중앙통신 2010.8.5는 42만 8천 발; globalsecurity.org 사본, 원문 미열람). 북한 발표의 공장 8,700개·학교 5,000개·병원 1,000개·살림집 60만 채 파괴 수치는 독립 검증한 자료가 없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1953·1954·1994년 장면의 인물도 1950년 기준으로 적었다. 클라크 1896년생, 테일러 1901년생, 이승만 1875년생, 백두진 1908년생, 변영태 1892년생, 해리슨 1895년생, 김일성 1912년생(1화 [나이]와 같은 근거), 펑더화이 1898년생, 지차오주 1929년생, 리커눙 1899년생, 티마이야 1906년생(이상 한국어·영어·중국어 위키백과 인물 항목). 남일은 한국어 위키백과의 1913년생을 따랐다. 최종열은 2023년 6월 기사의 「90세」와 「1951년 4월 18세」에서 1933년생으로 셈했다(출생연도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현동화는 18번 자료의 1932년, 조창호는 20번 자료의 1930년을 따랐다. 양관췬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서명 시간 — 중국 측 자료와 NARA는 십 분, 조선일보 1953.7.29 보도는 십일 분. 협정문은 중국 측 자료가 「양측이 아홉 권씩」, NARA가 「열여덟 부」로 적었는데 같은 수를 달리 센 것이다. 클라크와 이승만의 회동 — FRUS 전문은 서명 전 이른 아침으로, 뉴데일리 연재는 서명 뒤 클라크가 경무대를 찾아 보고했다고 적었다. 본문은 당일 오전 열 시 삼십오 분에 발신된 FRUS 전문을 따랐다. 반공포로 석방 인원은 국가기록원 약 2만 6천 명, 브런치·여러 글 약 2만 7천 명, 매일신문(윤광섭) 3만 5천여 명으로 다르다. 귀환 국군은 경기일보 8,343명, 빅 스위치 국군 7,862명이 다르다(앞의 숫자는 리틀 스위치와 1954년까지의 귀환을 합친 수로 보인다). 중립국행 인원은 88명이 정설이나, 중국인 가운데 한 명이 만주 출신 조선인으로 밝혀져 한국인 76·중국인 12로 적는 자료(NK News)와 북한인 74·한국인 2·중국인 12로 적는 보고서가 있다. 펑더화이 『자술』 인용문은 「既开」와 「即开」로 자료마다 한 글자가 다르다. 남일의 출생연도는 1913년과 1915년 두 설이 있다. [재구성] 모든 대화의 문장과 몸짓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이승만의 「축하하오」(FRUS 전문의 뜻을 옮김), 클라크의 참관인 요청 대사(요청 자체는 기록), 이승만이 곧바로 답하지 않은 모습과 「서명은 당신네가 하시오」(정부가 대표를 보내지 않고 서명을 거부한 사실 위에 쓴 말), 양관췬과 지차오주의 대화(흰 깃발 일화, 자리 배치, 이십오 초 회의는 양관췬의 회고와 4번 자료에 있다. 두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눈 말은 기록에 없다), 클라크 성명과 이승만 담화는 기록의 뜻을 살려 옮겼다. 최종열 옆 병사와의 대화와 철모를 벗는 몸짓, 「일흔 해 뒤 기자」 대목의 시점(인터뷰는 2023년), 문산 천막의 군의관과 손을 드는 귀환병, 인도군 장교와 현동화의 대화(현동화가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가려 했다는 것은 그의 구술 수기에 있다), 장교가 웃음을 참는 모습이 여기에 든다. 최종열이 7월 27일 밤에 있던 고지의 이름과 부대는 기사에 나오지 않아 「전선의 한 고지」로 적었다. 현동화가 2월 9일 인천 부두의 줄에 선 장면은 88명의 출항 기록 위에 쓴 것이며, 그가 겪은 승선 절차의 세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조창호가 「예순네 살」이었다는 대목은 1930년 출생에서 셈했다. 정전 밤 고지의 풀벌레 소리, 성냥을 긋는 병사와 아무도 불을 끄라고 하지 않은 장면, 클라크와 이승만의 트럭 대화, 해설 천막에 한 사람씩 불려 들어가는 모습의 세부도 재구성이다. [재구성] 10-17 추가분(김일성 7월 28일 연설, 전쟁 뒤 각자의 장부)은 대화 없이 기록의 숫자만 옮겼다. 미국·국군 수치는 원자료 확인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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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 총성이 멎어도 돌아오지 못했다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