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177자) · 서한결 · 6월 4일(금)
두 바퀴 돌리니까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1005, 우편이 왔다. 3주 만이었다. 도로가 한 번 끊겼다가 이어진 뒤 처음 들어온 우편 트럭이었다.
부사관이 상자 앞에 서서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불린 병사들은 봉투를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뜯지 않고 저마다 트럭 뒤나 정비고 기둥 뒤처럼 남이 안 보는 자리로 갔다. 부사관은 마지막 이름을 부르고 상자를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판 서.”
봉투 하나였다. 겉에 한글이 적혀 있었고, 우표 위에 찍힌 소인은 6월 1일이었다. 서울에서 회사 바르샤바 지사를 거쳐 온 것이라 봉투 모서리에 지사 접수 도장이 하나 더 찍혀 있었다. 한결은 그것을 뜯지 않고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정비고 기둥 뒤에서 토마시가 편지를 읽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귀가 아직 덜 돌아와서 자기 웃음이 얼마나 큰지 몰랐다. 옆에 있던 병사가 무슨 내용이냐고 묻자, 토마시는 여자 친구가 드디어 개를 샀는데 이름을 토마시로 지었다고 했다. 병사들이 한꺼번에 웃었고, 토마시는 그게 왜 웃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편지를 다시 접었다.
“판 서는 안 읽습니까?”
“일 끝나고 읽겠습니다.”
“일은 안 끝납니다, 판 서.”
토마시가 너무 크게 말해서, 정비고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 들었다.
1112, 저쪽이 왔다. 이번에는 포보다 드론을 먼저 보냈다. 여섯이었고, 넷은 자폭용이고 둘은 관측용이었다. 넷이 낮게 흩어져 들어왔다. 한 줄로 오면 재밍(전파를 흐려 조종과 영상을 끊는 것) 한 번에 다 걸리지만 흩어지면 한둘은 통과한다. 넷이 다 통과할 필요는 없었다. 하나면 됐다. 전차 한 대 값이면 저것을 천 대 사고, 천 대를 다 잃어도 전차 한 대를 잡으면 남는 장사다. 이 싸움은 그 산수 위에서 돌았다.
1113, 재밍을 켜자 넷 가운데 둘이 떨어졌다. 나머지 둘은 흔들리지 않았다.
“광케이블 둘입니다. 산탄.”
2호차와 4호차가 쏘아 하나를 떨어뜨렸다. 남은 하나가 5호차 위로 올라갔다. 전차 기관총은 위로 60도쯤까지만 들린다. 포탑 바로 위는 어느 전차에게나 사각이고, 그래서 철망을 씌우는데 5호차의 철망은 앞쪽에만 있었다. 드론이 내려오는 데 2초가 걸렸다.
1115, 포탑 위 전차장 해치 뒤였다. 구멍은 손바닥보다 작았다. 안에서 무엇이 튀었는지는 밖에서 보이지 않았다. 해치가 열리고 둘이 나왔다. 셋째는 나오지 않았다.
1119, 브란도프스키가 무전을 잡고 길게 말했다. 그 안에 한결이 아는 폴란드어 단어가 하나 있었다. 정비.
“판 서, 5호차입니다. 하나 못 나왔습니다.”
1131, 한결은 가지 못했다. 관측용 드론 둘이 아직 위에 있었다. 그것들은 치지 않는 대신 보고 있다가, 사람이 밖으로 나오면 좌표를 넘겼다. 넘어가면 20분 뒤에 포가 온다. 쏘아 떨어뜨리려면 위를 향해 쏴야 하고, 쏘면 그 자리가 또 좌표가 된다. 관측 드론이 떠 있는 동안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쪽이 진다. 5호차 옆에는 아까 나온 둘이 엎드려 있었고, 그 둘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전병이 헤드셋을 벗고 브란도프스키에게 뭔가를 말했다. 브란도프스키가 짧게 옮겼다.
“병사 가족들한테 전사 통지 문자가 돌고 있답니다. 가짜입니다. 오늘 아침에만 서른 통이랍니다. 받은 사람 중에 5호차 전차장 부인이 있습니다.”
한결은 5호차 쪽을 봤다. 아침에 온 문자는 가짜였고, 그 문자가 가짜가 아니게 된 것은 40분 전이었다.
1140, 포가 왔다. 열여섯 발이 5호차 둘레에 떨어졌다. 엎드려 있던 둘이 있는 자리였다.
1148, 포격이 멎자 한결이 뛰었다. 뒤에서 브란도프스키가 뭐라고 소리쳤지만 듣지 않았다. 포격이 멎은 뒤 20분은 대개 안전하다. 저쪽도 진지를 옮기기 때문이다. 1,200미터를 가고 오는 데 12분이 걸리니 남는 것은 8분이었다. 8분이면 사람을 끌고 나오는 것은 되고 차를 고치는 것은 안 된다.
1155, 둘 다 숨이 붙어 있었다. 한결은 가까운 쪽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뒤로 끌었다. 장비까지 하면 백 킬로그램이 넘었다. 능선 뒤까지 35미터를 끄는 데 4분이 걸렸고, 그동안 세 번 쉬었다. 쉴 때마다 위를 봤다. 벌 소리는 계속 났다. 끌려오는 사람은 눈을 뜨고 있었고, 한결의 소매를 한 손으로 붙들고 폴란드어로 같은 말을 계속했다. 한결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일 때마다 그 손이 조금씩 힘을 풀었다. 뒤따라 뛰어온 위생병 둘이 남은 하나를 들것에 실었다.
1240, 한결은 5호차 안으로 들어갔다. 전차장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한결은 그 자리를 보지 않고 뒤로 갔다. 포탑 안쪽 벽에 구멍이 여럿 났고 포탑 선회와 조준 장치로 가는 배선 다발 둘이 끊겨 있었다. 끊긴 자리는 붙일 수 있었다. 문제는 조준 장치 안쪽이었다. 렌즈와 거울이 여러 장 겹친 그 사이로 파편이 들어갔으면 통째로 갈아야 했고, 갈 것이 없었다. 오늘 안에는 안 됐다.
*
1330, 정비고 작업대에 앉아 봉투를 뜯었다. 안에 종이가 두 장 들어 있었다.
편지는 어머니 글씨였고 짧았다. 지난달에 아버지가 입원하셨다가 퇴원하셨다는 것, 지금은 집에 계신다는 것, 걱정하지 말라는 것. 마지막 줄은 이것이었다.
밥은 어떻게 먹느냐?
두 번째 종이를 폈다. 집 보일러 배관 도면이었다. 작년 겨울 한결이 손으로 그려 거실 벽에 붙여 두고 나온 것이었다. 연필 선 위에 다른 글씨가 올라와 있었다. 굵고 삐뚤빼뚤한 아버지 글씨였다. 거실 밸브 옆에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여기 두 바퀴 돌리니까 따뜻해졌다.
한결은 그 줄을 세 번 읽었다. 세 번째 읽을 때는 손가락으로 글씨를 따라갔다. 연필을 너무 세게 눌러서 종이 뒷면까지 글씨가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그는 반 바퀴라고 적어 두었다. 두 바퀴를 돌리면 밸브가 다 열린다. 다 열면 그 방만 따뜻하고 다른 방들이 식는다. 두 사람이 한 방만 쓰고 있었다. 그 방이 거실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퇴원한 뒤로 안방까지 걸어가는 대신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다는 것을 한결은 알았다. 도면 모서리에 밥풀 하나가 말라붙어 있었다. 봉투를 붙이다가 풀이 모자라서 밥풀로 붙인 것이었다.
한결은 답장을 쓸 종이를 찾다가 그만두었다. 밥은 어떻게 먹느냐는 물음에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늘 점심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도면을 무릎 위에 펴 놓은 채 한동안 앉아 있었고, 정비고 밖에서 누군가 5호차 쪽으로 들것을 하나 더 들고 가는 소리를 들었다.
1420, 무전이 왔다. 5호차 승무원 하나가 후송 중에 죽었다. 한결이 끌고 온 사람이 아니라 들것에 실려 간 다른 하나였다.
1508, 한결은 5호차 배선을 폈다. 다발 둘을 잇는 데는 네 시간이 걸린다. 오늘 안에 안 된다고 했는데 하고 있었다. 작업대 위, 0.2라고 적힌 종이 옆에 도면을 세웠다. 거실 밸브 옆에 화살표가 있었다.
*
0117, 기준을 65로 올린 첫날 밤이었다. 55일 때 화면에 열하나가 떴는데 65로 올리자 다섯이 떴다.
“여섯이 다 가짜였습니까, 진짜가 섞여 있습니까?”
다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휘소 천막 안에는 화면 둘과 난로 하나가 있었는데 난로는 꺼져 있었다. 연기가 위로 오르면 위에서 본다. 둘은 겉옷 깃을 세운 채 화면 앞에 붙어 앉았고,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화면 불빛 속에서 흩어졌다. 기준을 내리면 다 보이고, 다 보이면 고르는 시간을 사수가 낸다. 기준을 올리면 고르는 시간이 줄어드는 대신 안 보인 것 가운데 진짜가 있다. 어느 쪽이 나은지는 아침이 돼야 알았다.
0148, 3호차에서 무전이 왔다. 정면 1,800에 뭔가 있다고 했다. 화면에는 없었다. 다율이 그 자리를 확대하자 흐린 것이 하나 있었다. 번호는 없고 숫자만 작게 떠 있었다. 61이었다.
“저거 띄우십시오.”
“지금 내리면 아까 뺀 여섯도 다 돌아옵니다. 3호차 사수가 열하나 가운데 골라야 합니다.”
0203, 브란도프스키가 무전으로 한 문장을 말했다. 한결이 아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아니다. 쏘지 말라는 뜻이었다.
0209, 그 자리에서 사격이 났다. 우리 쪽이 아니었다. 첫 발은 2호차 왼쪽 40미터, 둘째는 20미터였다. 좁혀 온다는 것은 저쪽이 보고 고치고 있다는 뜻이었고 셋째는 맞는다. 셋째 전에 2호차가 먼저 쐈다. 0212, 1,800에서 날탄이 튀지 않고 그대로 들어갔다. 그런데 저쪽은 하나가 아니었다. 2시 방향에서 포탑을 미리 돌려 놓고 기다리던 둘째가 있었다. 한 대를 미끼로 세우고 다른 하나가 옆에서 기다리는 방법이었다. 우리도 쓰는 방법이었다.
0215, 2호차 오른쪽 앞이 뚫렸다. 뚫린 자리에서 불이 처음엔 작다가 3초 뒤에 커졌다. 해치 셋이 다 열렸고 둘이 나와 땅을 굴렀다. 옷에 붙은 불은 그렇게 끄라고 배운다. 0217에 3호차와 4호차가 같이 쏘아 둘째를 세웠다. 화면 속 2호차 자리에는 불이 기둥처럼 서 있었고, 다율은 그 불을 열상이 아니라 천막 틈으로 들어오는 주황빛으로 먼저 봤다. 화면 속 숫자들은 그동안에도 제자리에서 깜빡였다. 61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0246, 2호차의 조종수와 전차장이 후송됐다. 조종수는 팔이었고 전차장은 화상이었다. 셋째는 나오지 못했다. 포탑은 날아가지 않았다. 탄약칸 위 판이 먼저 터지면서 불을 위로 뺐고, 그 판 덕분에 둘이 나왔다. 만든 사람이 그것까지는 생각했다. 셋 가운데 하나는 거기에 들지 못했다.
*
0405, 다율이 정비고 뒤 드럼통 옆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은 들고 있지 않았다. 한결이 옆에 앉았다.
“61이었습니다. 제가 55로 뒀으면 떴을 거고, 떴으면 쐈을 거고, 쐈으면 2호차가 안 맞았을 겁니다.”
한결은 그 셈을 따라가 봤다. 세 단계였다. 그중 확실한 것은 첫 번째뿐이었다. 두 번째는 사수가 정하고 세 번째는 저쪽이 정한다.
“55였으면 그날 밤 헛간도 떴습니다. 1호차가 헛간에 쐈으면 그 40초 동안 저쪽이 먼저 쐈을 겁니다.”
“그건 안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도 안 일어날 수 있었던 일입니다.”
다율이 한참 있다가 말했다.
“55와 65 사이를 숨기지 않고 점선으로 띄우겠습니다. 실선은 쏠 만한 것, 점선은 사람이 한 번 더 볼 것입니다.”
“오늘 밤에 켜십시오. 대신 사흘 뒤에 소각로로 같이 재 봅시다. 신 선임님이 혼자 재면 자기 체계를 자기가 채점하는 겁니다.”
다율이 일어섰다. 앉아 있던 자리에 서리가 눌린 자국이 남았다.
“약속하신 겁니다.”
“예. 약속합니다.”
0545, 한결은 작업대 앞에 앉아 세 번째 종이를 접어 세웠다. 사흘 뒤 날짜를 적고 그 아래 숫자를 하나 적었다.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