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208자) · 서한결 · 5월 21일(금)

성에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2010⁠, 정비고 앞 국도로 트랙터 한 대가 지나갔다⁠.

해가 지는 쪽으로 가는 차들 틈에 끼어 있던 그 트랙터는 오래된 파란색이었고⁠, 배기통에서 검은 연기를 끊어서 뱉었다⁠. 짐칸에는 매트리스 두 장이 겹쳐 묶여 있었고 그 위에 닭장 하나가 얹혀 있었다⁠. 닭장 옆에 노파 하나와 여자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아이는 열두어 살쯤 돼 보였고 두 손으로 닭장 문고리를 붙들고 있었으며⁠, 노파는 무릎 위에 보자기에 싼 무언가를 올려놓은 채 정비고 마당의 전차들을 오래 쳐다봤다⁠. 누가 운전하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트랙터가 정비고 앞에서 기침하듯 한 번 멈칫했다가 다시 굴러갔다⁠. 한결은 그 소리를 알았다⁠. 연료 필터가 막혀 가는 엔진이 내는 소리였다⁠.

“⁠저 트랙터⁠, 오늘 밤 안에 섭니다⁠.⁠”

옆에서 렌즈 천을 개던 폴란드 정비병이 트랙터 뒤꽁무니를 봤다⁠.

“⁠어디까지 간답니까⁠?⁠”

“⁠모르겠습니다⁠. 서쪽입니다⁠.⁠”

한결은 쫓아가서 필터 이야기를 해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폴란드어로 연료 필터를 뭐라고 하는지 몰랐고⁠, 안다 해도 달리는 트랙터 짐칸에 앉은 노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아이가 닭장 너머로 한결을 봤다⁠. 흙 묻은 정비복을 입은 동양 남자가 신기했는지 한참 보다가⁠, 손 대신 턱을 한 번 들어 보였다⁠. 한결도 턱을 들었다⁠. 트랙터는 차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 곧 안 보이게 됐다⁠.

*

제2제파는 밤에 올 것이었다⁠. 전에는 안 보이려고 밤에 왔는데⁠, 이번엔 저쪽도 열상이 있었다⁠. 열상 싸움은 단순해서 먼저 본 쪽이 먼저 쏘고 먼저 쏜 쪽이 대개 이긴다⁠. 먼저 보려면 렌즈가 깨끗해야 하고 냉각기가 살아 있어야 하는데⁠, 그 둘은 정비가 만든다⁠.

2205⁠, 한결은 열상 여섯 대를 봤다⁠. 냉각기 몸통에 손바닥을 대고 진동을 느꼈다⁠. 고르면 산 것이고⁠, 두 번 끊겼다가 다시 돌면 이번 주를 못 넘긴다⁠. 넷이 온전했고 하나는 죽었고 5호차 하나가 애매했다⁠. 죽은 차는 오늘 밤 안 나간다⁠. 애매한 차는 나간다⁠. 안 나가면 자리가 비고⁠, 빈 자리 하나는 옆 차에게 두 자리를 맡긴다⁠. 그것까지는 한결이 정할 일이 아니었다⁠.

브란도프스키가 정비고 입구에 서서 지도를 봤다⁠.

“⁠저쪽이 오늘 밤 쓸 방법은 셋 중 하나입니다⁠. 수가 많으면 그냥 밀고 들어옵니다⁠. 앞에 선 것부터 죽으니까 그건 우리한테 나쁘지 않습니다⁠. 둘째는 연막을 치고 들어오는 겁니다⁠. 적외선 연막이면 40초쯤 우리 눈을 막습니다⁠. 셋째는 안 오고 포만 쏘면서 우리를 묶어 두고 옆으로 도는 겁니다⁠.⁠”

“⁠어느 쪽일 것 같습니까⁠?⁠”

“⁠첫 40초에 갈립니다⁠. 판 서⁠, 5호차는 나갑니까⁠?⁠”

“⁠나가면 오늘 밤은 버팁니다⁠. 내일은 모릅니다⁠.⁠”

브란도프스키는 5호차 쪽을 한참 보다가 나간다고 적었다⁠.

2251⁠, 렌즈를 닦았다⁠. 게르마늄 렌즈는 한 방향으로만 민다⁠. 부품이 없어서 할 일이 없던 폴란드 정비병 둘이 옆에 와 앉았다⁠. 한결이 천을 하나 밀어 주자 한 병사가 왔다 갔다 닦았다⁠. 한결은 손가락으로 허공에 한 방향을 그어 보이며 서툰 폴란드어를 꺼냈다⁠.

“⁠드바 라지⁠.⁠”

두 바퀴라고 하려던 말이었다⁠. 병사 둘이 멈췄고⁠, 담배를 문 쪽이 먼저 소리 없이 어깨를 흔들었다⁠. 한결이 말한 것은 두 바퀴가 아니라 두 번이었다⁠. 한 방향으로 두 번 닦으라는 말이 됐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병사가 정확히 두 번 닦고 한결을 쳐다봤다⁠. 한결도 웃었다⁠. 웃고 나서야 자기가 웃었다는 것을 알았다⁠.

*

0010⁠, 모스크바⁠.

긴 탁자 끝자리에 앉은 사람은 뒷모습만 보였다⁠. 창을 등지고 앉아 있어서⁠, 탁자 양옆에 앉은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그 뒤의 커튼 주름을 보며 말했다⁠. 탁자 위에는 서류철이 하나씩 놓여 있었고⁠, 서류철 첫 장에는 같은 숫자가 인쇄돼 있었다⁠. 60⁠.

총참모부에서 온 대장이 먼저 말했다⁠.

“⁠회랑이 아직 안 끊겼습니다⁠. 60시간 안에 가운데서 만나는 계획이었습니다⁠. 제2제파를 오늘 밤 더 밀어 넣어야 합니다⁠.⁠”

외무부 차관이 서류철을 넘기지도 않고 받았다⁠.

“⁠더 밀면 폴란드가 무너지기 전에 브뤼셀이 먼저 모입니다⁠. 우리가 증명하려는 건 회랑을 끊는 것이 아니라⁠, 끊어도 아무도 안 온다는 겁니다⁠. 서두를수록 그 증명이 흐려집니다⁠.⁠”

“⁠그럼 저 여단이 버티는 걸 보고만 있자는 겁니까⁠?⁠”

탁자 끝의 뒷모습이 한 번 움직였다⁠. 옆에 서 있던 배석자가 몸을 숙여 무언가를 듣고는 허리를 폈다⁠.

“⁠60시간은 틀렸습니다⁠. 증명은 시간이 아니라 5조 회의의 문구로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그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대장이 서류철 첫 장의 60 위에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줄은 한 번에 그어지지 않고 중간에서 한 번 끊겼다⁠.

*

0104⁠, 3호차 안⁠.

화면의 배경은 회색이었고 그 위에 밝은 것이 없었다⁠. 0112에 3⁠,400에서 밝은 것 하나가 떴다가 사라지고 4초 뒤에 다시 떴다⁠.

“⁠연막입니다⁠. 적외선입니다⁠.⁠”

열을 막는 연막이었다⁠. 안에 금속 가루가 들어 있어 40초 동안 우리 눈이 먼다⁠. 그 40초에 저쪽은 600미터를 좁힐 수 있었다⁠. 야누시는 보이지 않는 동안 포탑을 미리 돌려 연막 오른쪽 끝을 겨눴다⁠. 왼쪽은 늪이라 나오는 쪽은 대개 오른쪽이다⁠. 지도를 보면 안다⁠.

“⁠몇 초 남았어⁠?⁠”

“⁠열둘⁠, 열하나⁠…⁠…⁠.⁠”

토마시가 소리 내어 셌고 마레크는 엔진을 저속으로 내린 채 숨을 참았다⁠. 연막 안에서 무엇이 움직이는지 보이지 않는 동안⁠, 야누시는 조준경 대신 자기 손목시계 초침을 봤다⁠. 초침은 화면보다 믿을 만했다⁠.

0114⁠, 연막 오른쪽에서 나왔다⁠. 2⁠,900에서 쏘았고 맞았다⁠. 불꽃이 옆으로 튀었다가 아래로 흘렀다⁠. 날탄은 터져서 뚫는 탄이 아니다⁠. 아주 무거운 쇳덩이가 아주 빠르게 부딪혀서 손바닥보다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안쪽에서 쇳물이 흩어진다⁠. 밖에서 보면 작은 구멍 하나였다⁠. 4초 뒤에 그 차의 해치가 안에서 밀려 열렸고⁠, 열린 자리로 불이 위로 섰다⁠. 두 번째가 같은 자리에서 나왔다⁠. 옮기는 것이 규칙인데 야누시는 옮기지 않았다⁠. 옮기는 4초 동안 저쪽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쪽 포탄이 포탑 왼쪽을 길게 긁고 지나갔고 조준경 왼쪽 절반이 검게 죽었다⁠. 토마시가 얼굴을 조준경에 더 붙였다⁠. 눈이 아파도 붙였다⁠. 0118⁠, 두 번째 것의 포탑이 차체에서 떨어져 옆으로 돌며 떨어졌다⁠. 그 무거운 것이 공중에 떠 있는 시간이 있었고⁠, 땅에 닿은 다음에야 소리가 왔다⁠.

0148⁠, 5호차의 열상이 전투 중에 죽었다⁠. 5호차는 눈으로 보며 능선 뒤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눈으로는 3⁠,000미터에서 아무것도 못 본다⁠. 브란도프스키가 1호차를 그쪽으로 보내 한 대에게 두 자리를 맡겼다⁠. 한 자리가 비면 그 옆이 옆구리를 내놓게 되고⁠, 그 옆이 죽으면 또 그 옆이 내놓게 된다⁠. 그래서 자리는 비우지 않는다⁠. 1호차 포탑이 좌우로 쉬지 않고 도는 소리가 무전 너머로도 들렸다⁠.

한결은 정비고에서 그 무전을 들으며 죽은 5호차 냉각기를 머릿속으로 뜯었다⁠. 여분이 없었다⁠. 창원에서 오는 배는 그단스크에 있었고⁠, 그단스크에서 여기까지 오는 트럭은 이틀째 소식이 없었다⁠.

*

0203⁠, 3호차가 세 발째를 쏘고 나서 포탑이 돌지 않았다⁠. 포탑이 안 돌면 전차가 아니었다⁠. 차체를 통째로 돌리면 능선 위로 옆구리가 나온다⁠. 야누시는 굳은 채로 한 방향만 지키기로 하고 무전을 넣었다⁠.

0207⁠, 1⁠,900미터 뒤에서 한결이 그 무전을 받았다⁠.

“⁠판 서⁠, 3호차 포탑 선회 정지입니다⁠. 선회만 안 된답니다⁠.⁠”

한결은 3초를 썼다⁠. 밤에 선회가 멈추는 원인은 둘이다⁠. 유압이면 새는 곳을 찾느라 밝은 데서 2시간이 들고⁠, 전기면 포탑 뒤 접속함이라 어두운 데서 20분이다⁠. 유압이 새면 승무원이 소리로 먼저 안다⁠.

“⁠전기입니다⁠. 쏠 때마다 흔들리는 자리라⁠, 앞의 두 발에 헐거워졌다가 세 발째에 빠진 겁니다⁠.⁠”

“⁠판 서는 못 갑니다⁠. 우리 정비병이 가겠습니다⁠. 부품만 주십시오⁠.⁠”

부품 상자에 접속함 커넥터가 둘 있었다⁠. 하나는 새것이었고 하나는 지난주에 뜯어낸 중고였다⁠. 중고는 접점 하나가 눌려 있었다⁠. 눌린 접점은 진동에서 빠진다⁠. 한결은 새것을 병사 손에 쥐여 주었다⁠. 병사가 중고를 가리키며 뭐라고 물었고⁠, 한결은 고개를 저었다⁠.

순서를 알려 줄 말이 없었다⁠. 전원을 먼저 내리지 않으면 접점이 탄다⁠. 뚜껑 나사 여섯 개는 대각선으로 풀어야 방수 고무가 안 씹힌다⁠. 잠금쇠를 먼저 젖히지 않고 당기면 배선이 뽑힌다⁠. 끼울 때는 딸깍 소리를 들어야 한다⁠. 한결은 그것을 폴란드어로 말할 수 없어서 종이를 꺼냈다⁠. 나사 여섯 개를 동그라미로 그리고 대각선 순서대로 1부터 6까지 번호를 달았다⁠. 잠금쇠는 화살표로 그렸고⁠, 딸깍은 글자로 못 쓰니까 귀를 그렸다⁠. 전원 스위치는 크게 그리고 그 위에 가위표를 쳤다⁠.

병사가 붉은 필름을 씌운 손전등으로 종이를 비추다가 귀 그림을 짚었다⁠.

“⁠딸깍⁠?⁠”

한결이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가 종이를 품에 넣고 뛰었다⁠. 1⁠,900미터를 뛰면 8분이었다⁠. 걸으면 안 넘어지고 뛰면 넘어지는 길이었는데⁠, 그는 뛰었다⁠.

0234⁠, 병사가 3호차 차체 위로 기어올라 포탑 뒤에 엎드렸다⁠. 밤이슬 위에 흙먼지가 앉은 장갑판은 미끄러웠다⁠. 엎드리면 앞에서 오는 것은 포탑이 막아 주지만 위에서 오는 것은 못 막는다⁠. 포탄이 위에서 왔다⁠. 그는 그림대로 나사를 풀고⁠, 잠금쇠를 젖히고⁠, 새것을 끼웠다⁠. 밖이 너무 시끄러워 딸깍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잠금쇠가 제자리로 넘어갈 때 손끝에 턱이 걸렸다⁠.

0243⁠, 3호차가 정면으로 돌았고 돌자마자 2⁠,100에 있던 것을 잡았다⁠.

0312⁠, 무전이 왔다⁠.

“⁠판 서⁠, 17분이었습니다⁠. 20분이라고 하셨는데 17분입니다⁠.⁠”

“⁠그 병사는 어떻습니까⁠?⁠”

“⁠돌아오는 길에 두 번 넘어졌답니다⁠. 무릎이 다 까졌습니다⁠. 그런데 종이는 안 젖었답니다⁠.⁠”

0340쯤 병사가 정비고로 돌아왔다⁠. 바지 무릎 두 군데가 찢어져 피와 흙이 엉겨 있었다⁠. 그는 품에서 한결의 그림을 꺼내 펴 보이고는⁠, 귀 그림 옆에 연필로 뭔가를 한 줄 적어 넣었다⁠. 폴란드어였다⁠. 한결이 무슨 뜻이냐고 손짓으로 묻자 병사가 자기 손끝을 짚었다가 턱을 긁는 시늉을 했다⁠. 소리 대신 손끝에 턱이 걸린다는 말이었다⁠. 다음 사람을 위해 그림을 고쳐 놓은 것이었다⁠.

0408에 사격이 멎었다⁠. 두 대가 못 왔다⁠. 한 대는 견인하면 되고 한 대는 안 됐다⁠.

0412⁠, 한결은 정비고 기둥 옆에 섰다⁠. 바닥에 아까 그 병사가 놓고 간 렌즈 천이 떨어져 있었다⁠. 주워 드니 천 위에 성에가 하얗게 앉아 있었고⁠, 손바닥의 온기에 성에가 녹으면서 천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0431⁠, 한결은 부품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 중고 커넥터 하나가 남아 있었다⁠. 접점이 눌린 채였다⁠.

5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성에 ·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