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238자) · 서한결 · 5월 19일(수)

회선이 하나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전화는 세 번 울리고 끊겼다가 다시 울렸다⁠.

“⁠서 책임님⁠. 본사 무인체계사업팀 박 팀장입니다⁠. 지금 어디십니까⁠?⁠”

“⁠브라니에보입니다⁠. 모롱에서 북동쪽으로 90킬로미터⁠, 전선에서 12킬로미터입니다⁠.⁠”

위성 전화라 목소리가 반 박자씩 늦게 왔고⁠, 그 늦음이 끝난 뒤에도 수화기 너머는 한참 조용했다⁠.

“⁠서 책임님⁠. 계약서 어디에 전선 정비가 있습니까⁠?⁠”

“⁠지원 장소가 안 적혀 있습니다⁠.⁠”

“⁠안 적혀 있으면 안 가는 겁니다⁠. 오늘 중으로 바르샤바로 빠지십시오⁠. 항공편은 저희가 잡습니다⁠.⁠”

“⁠3호차 장전기가 임시 결속입니다⁠. 야전 전화선을 두 바퀴 물려 놨습니다⁠. 한 벨트는 가고⁠, 그다음은 제가 다시 가야 합니다⁠.⁠”

“⁠그거 기록에 남습니까⁠?⁠”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으면 우리 제품이 전화선으로 굴러갔다는 게 남습니다⁠. 서 책임님⁠, 그 한 줄이 어디까지 가는지 아십니까⁠? 폴란드 국방부 감사관 책상까지 갑니다⁠. 다음 계약 협상 테이블에 그 종이가 올라옵니다⁠.⁠”

“⁠안 남기면 다음 정비관이 모릅니다⁠. 모르면 열여섯 발 쏘고 또 섭니다⁠.⁠”

박 팀장이 숨을 한 번 쉬는 소리가 반 박자 늦게 들렸다⁠.

“⁠서 책임님⁠, 저 이 회사 열아홉 해 다녔습니다⁠. 현장에서 사람이 다친 건 두 번 봤는데⁠, 두 번 다 누군가 규정에 없는 걸 선의로 했을 때였습니다⁠. 선의는 보고서에 안 들어갑니다⁠. 들어가는 건 결과뿐입니다⁠.⁠”

“⁠결과는 3호차가 쐈다는 겁니다⁠.⁠”

“⁠오늘은 그렇죠⁠.⁠”

그 말 뒤로 한동안 잡음만 이어졌다⁠. 한결은 수화기를 귀에서 조금 떼고 정비고 쪽을 봤다⁠. 3호차 승무원들이 해치 위에 걸터앉아 통조림을 따고 있었는데⁠, 포수 하나가 뚜껑에 손가락을 베어 욕을 하자 나머지 둘이 웃었다⁠.

“⁠일단 빠지십시오⁠. 그건 나중에 정리합시다⁠.⁠”

전화가 끊겼다⁠. 돌아보니 다율이 정비지원차 옆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판 서님도 받으셨습니까⁠? 저는 아침에 받았습니다⁠. 철수하랍니다⁠.⁠”

“⁠가실 겁니까⁠?⁠”

“⁠저는 아직 세 대가 나가 있고⁠, 3번차는 회수도 못 했습니다⁠. 차체는 껍데기고 값나가는 건 안에 든 겁니다⁠. 표적 판단하는 부분이요⁠. 그게 넘어가면 저쪽이 우리가 뭘 보고 쏘는지를 압니다⁠.⁠”

다율이 노트북 화면을 보여 줬다⁠. 초록 점 둘과 회색 점 하나였다⁠. 회색이 3번차였다⁠. 마지막 위치는 능선 너머 400미터까지만 찍혀 있었고⁠, 그 뒤 30초는 회선이 전차 쪽에 먼저 걸려 있어서 올라오지 못했다⁠.

“⁠회선이 하나라서 그렇습니다⁠. 우선순위가 전차에 있습니다⁠.⁠”

“⁠서운하십니까⁠?⁠”

“⁠당연한 겁니다⁠. 전차에는 사람이 타니까요⁠.⁠”

“⁠아까 그 트랙터 말입니다⁠. 3번차 영상은 저만 뽑을 수 있으니⁠, 제가 보고 안 올렸으면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올리고 나서 계속 생각합니다⁠. 안 올렸으면 오늘 밤에 잘 잤을 텐데요⁠.⁠”

한결은 대답하는 대신 주머니에서 궤도 연결핀을 꺼내 손바닥 위에서 셌다⁠. 열넷이었다⁠.

“⁠3번차가 어느 방향입니까⁠? 오늘 밤 2중대가 그쪽으로 나갑니다⁠. 견인고리(⁠끌 때 케이블을 거는 쇠고리⁠) 규격만 맞으면 가는 길에 끌고 오면 됩니다⁠.⁠”

“⁠맞습니다⁠. 전차 규격 그대로 썼습니다⁠.⁠”

“⁠그건 잘 만드셨네요⁠.⁠”

다율이 짧게 웃었다⁠. 반년 동안 한결이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웃고 나서 다율은 스스로 놀란 얼굴로 노트북을 덮었다⁠.

*

2중대는 2140에 나갔다⁠. 정비지원차는 대열 뒤에서 세 번째였다⁠.

“⁠판 서⁠, 두 분 다 타셨습니까⁠? 오늘 이건 정비 지원이 아닙니다⁠. 아시죠⁠.⁠”

“⁠압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폴란드의 5월 밤은 열 시가 넘어야 어두워졌고 그날은 그믐이었다⁠. 한결이 정비용으로 갖고 다니던 PVS-04K(⁠국군 제식 야간투시경⁠)를 다율에게 넘겼다⁠.

“⁠전지는 리튬입니다⁠. 알카라인은 밤에 죽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한국에서 알카라인 넣고 야간 점검 나갔다가 2시간 동안 손전등 없이 걸었습니다⁠.⁠”

2214에 대열이 섰다⁠. 앞에서 짧은 무전이 왔고 모두가 엔진을 껐다⁠. 55톤짜리 12대가 한꺼번에 조용해지자 소리가 사라지는 대신 종류가 바뀌어⁠, 식어 가는 궤도에서 쇠가 우는 소리가 났다⁠. 그 위로 얇은 날갯소리가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드론입니다⁠. 헬기면 소리가 두껍습니다⁠. 그리고 안 지나가고 돌고 있습니다⁠.⁠”

“⁠산개⁠. 나무 밑으로⁠.⁠”

전차들이 흙먼지가 안 뜨게 아주 천천히 갈라졌다⁠. 정비지원차만 움직이지 않았다⁠. 30분 전에 발전기 벨트 장력을 보느라 한결이 배터리 단자를 풀어 놓았고⁠, 다시 무는 데는 3분이 걸렸다⁠. 3분 동안 그 소리가 머리 위에 있었다⁠. 한결과 다율과 운전병이 내려서 3⁠.5톤짜리를 밀었다⁠. 셋이 밀어서 될 무게가 아니었는데 내리막이라 됐다⁠. 나무 밑에 들어가자 운전병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판 서⁠. 이건 정비 지원입니까⁠?⁠”

“⁠이건 운동입니다⁠.⁠”

*

같은 시각⁠, 동쪽으로 20킬로미터⁠.

일리야는 탁자 앞에서 조종기를 쥐고 있었다⁠. 스무 살이었고⁠, 넉 달 전까지 모스크바 외곽의 전자제품 수리점에서 휴대전화 액정을 갈았다⁠. 천막 안에는 발전기 배기 냄새와 식은 보르시 냄새가 섞여 있었고⁠, 탁자 다리 하나가 짧아서 누군가 그 밑에 탄약 상자 뚜껑을 괴어 놓았다⁠. 조종기를 쥔 그의 엄지는 액정 수리할 때처럼 가볍게 떠 있었다⁠. 그의 모니터에는 초록빛 열상 속으로 흩어지는 전차들이 보였다⁠. 한 대만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 셋이 내려서 트럭을 밀고 있었다⁠.

“⁠총 든 사람이 트럭을 밉니까⁠?⁠”

일리야가 물었다⁠. 소콜로프는 옆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총이 없다⁠. 그러니까 민다⁠.⁠”

“⁠고도 올릴까요⁠? 소리가 들릴 겁니다⁠.⁠”

“⁠올려⁠. 소리를 빼고 재밍기도 꺼⁠. 저쪽이 잃어버린 무인차가 저 앞에 있다⁠. 신호가 살아나면 누가 주우러 나온다⁠.⁠”

2231⁠, 날갯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높아졌다⁠. 2238⁠, 나무 밑에서 사람 둘이 나와 동쪽으로 걸었다⁠. 한 사람은 가슴에 네모난 것을 안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빈손이었다⁠. 둘이 서 있는 무인차 앞에 닿아 하나는 옆에 앉고 하나는 차 밑으로 엎드려 들어갔다⁠.

“⁠둘 중 하나는 노트북⁠, 하나는 손이다⁠. 손을 봐⁠.⁠”

일리야가 배율을 올렸다⁠. 차 밑에서 삐져나온 팔 하나가 무언가를 돌리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았고⁠, 한 번 돌리고 멈췄다가 다시 돌렸다⁠. 수리점에서 나사를 풀 때 사장이 늘 그렇게 하라고 하던 손이었다⁠.

소콜로프가 좌표를 포병 회선으로 넘기고 연필로 수첩에 적었다⁠.

총 없음⁠. 손⁠.

*

2231⁠, 3호차 안⁠.

야누시는 전차장 자리에서 열상 화면 아래쪽에 뜬 밝은 것 셋을 보고 있었다⁠. 포탑 안에 사람이 있으면 사람이 열을 내서⁠, 차체보다 포탑이 먼저 떴다⁠.

“⁠토마시⁠, 왼쪽 것 배율 올려⁠.⁠”

“⁠포탑 있습니다⁠. 우리 쪽을 보고 있습니다⁠.⁠”

“⁠철갑탄⁠. 마레크⁠, 엔진 저속⁠.⁠”

“⁠저속으로 내립니다⁠.⁠”

포탄이 장전기에서 올라오는 6초 동안 차가 흔들리면 조준이 흔들렸다⁠. 마레크는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2233 첫 발이 맞았고⁠, 두 번째 것은 오른쪽으로 움직여 한 발이 짧았다⁠. 토마시가 100을 올려 두 번째 발로 잡았다⁠. 맞으면 화면이 하얘졌다가 가라앉는 데 4초가 걸렸는데⁠, 그 4초 사이에 세 번째가 사라졌다⁠. 야누시는 30미터 후진을 명했다⁠. 2238 세 번째가 먼저 쏘아 포탄이 차체 앞 흙을 튀겼다⁠. 토마시가 10시 방향 연기를 보고 포탑을 천천히 돌렸고⁠, 2239 세 번째가 섰다⁠. 해치를 조금 열자 화약과 기름과 사람 냄새가 섞인 안쪽 공기가 찬 밤공기와 부딪혔다⁠. 저쪽 연기는 세 군데였는데⁠, 그 뒤에서 하나가 더 빠져나가는 소리가 났다⁠.

*

2242⁠, 1⁠,100미터 떨어진 자리⁠.

3번차의 왼쪽 궤도가 끊겨 있었다⁠. 연결핀 한 자리가 뜯겨 나가 궤도가 스무 뼘쯤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끌려면 궤도를 떼야 합니다⁠. 혼자 하면 12분입니다⁠.⁠”

궤도는 장력부터 푼다⁠. 유동륜을 뒤로 물려 궤도를 느슨하게 한 다음에 핀을 뽑는다⁠. 장력을 안 풀고 뽑으면 궤도가 튀어 사람 다리를 부러뜨린다⁠. 유압 밸브는 우리 전차와 자리가 달라서 찾는 데만 2분이 걸렸고⁠, 차체 밑에 엎드려야 손이 닿았다⁠. 흙은 낮 동안 데워졌다가 식어서 배에 닿는 곳마다 축축하고 찼다⁠. 밸브 손잡이에 누군가 페인트로 화살표를 그려 놓았는데 방향이 반대였다⁠. 창원 조립 라인에서 누가 그렸는지 한결은 짐작이 갔고⁠, 돌아가면 한마디 하겠다고 생각했다가 그만두었다⁠. 엎드리면 하늘이 안 보였다⁠. 하늘이 안 보이는 것이 그날 밤에는 편했다⁠.

앞쪽에서 포성이 섞여 들려왔다⁠. 우리 것은 짧고 무겁게 끊겼고 저쪽 것은 조금 더 길게 끌렸다⁠. 한결은 그 차이를 반년 만에 배웠다⁠.

“⁠판 서님⁠. 40초라고 했는데 400초 걸립니다⁠. 지우는 건 40초인데⁠, 지운 게 맞는지 확인하는 게 오래 걸립니다⁠.⁠”

다율은 노트북을 무릎에 올리고 화면 불빛을 겉옷 자락으로 덮고 있었다⁠. 그 차 안에 2년 짠 표적 판단부가 들어 있었다⁠.

2251⁠, 무전이 들어왔다⁠.

“⁠판 서⁠, 3분입니다⁠. 저쪽 포가 오늘은 빨리 옵니다⁠.⁠”

“⁠왜 빨라집니까⁠?⁠”

“⁠미군 포대가 오늘부로 빠졌습니다⁠. 아침에 통보만 왔습니다⁠. 되받을 포가 없으니 저쪽은 진지를 옮길 필요 없이 받자마자 쏩니다⁠. 뛰십시오⁠.⁠”

2254에 다율이 노트북을 닫았다⁠.

“⁠지웠습니다⁠. 전부입니다⁠.⁠”

핀은 뽑지 못했다⁠. 궤도를 그대로 두고 둘이 뛰었다⁠. 2257에 동쪽에서 포가 왔다⁠. 여덟 발이었고⁠, 소리가 난 다음에 흙이 등 위로 쏟아졌다⁠. 여덟 발이 다 무인차가 있던 자리에 떨어졌다⁠. 여덟 문이 한 번씩 쏘고 바로 옮긴 것이다⁠. 다율은 팔로 머리를 감싸고 노트북을 배 밑에 깔고 있었다⁠. 귀가 먹먹해서 자기 숨소리가 머리 안에서 울렸고⁠, 입안에 흙이 씹혔다⁠. 한결이 먼저 일어나 다율의 겉옷 등판을 쥐고 끌어 올렸다⁠.

“⁠노트북은요⁠?⁠”

“⁠배 밑에 있습니다⁠. 제가 깔고 있었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계속 깔고 뛰십시오⁠.⁠”

“⁠그게 어떻게 됩니까⁠?⁠”

한결도 그 말이 안 되는 줄 알았다⁠. 둘은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나무 쪽으로 다시 뛰었다⁠.

나무 밑에 닿았을 때 브란도프스키가 서 있었다⁠.

“⁠두 분 다 오셨습니다⁠. 차는 못 가져오셨군요⁠.⁠”

“⁠대대장님⁠, 3호차는요⁠?⁠”

“⁠셋 잡고 하나 놓쳤습니다⁠.⁠”

2310에 3호차가 들어왔다⁠. 야누시가 검댕 묻은 얼굴로 해치에서 내렸다⁠. 한결은 포신 뿌리에 손바닥을 댔다⁠. 오늘 밤 몇 발을 쐈는지는 손이 안다⁠.

“⁠열한 발입니까⁠?⁠”

야누시가 폴란드어로 짧게 대답했고 브란도프스키가 옮겼다⁠.

“⁠12발이랍니다⁠. 이번엔 제대로 셌답니다⁠.⁠”

2318⁠, 한결은 정비지원차에 올라탔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궤도 연결핀이 만져졌다⁠. 세어 봤다⁠. 열넷이었다⁠. 하나도 안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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