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36자)

첫눈

지리산에 풀어 준 호랑이 · 하윤슬

12월 3일 새벽⁠, 육한담은 관사 창을 열다가 손을 멈췄다⁠. 마당이 하얬다⁠. 밤사이 눈이 발목 높이로 쌓여 있었다⁠. 장관이 심은 묘목 가지에도 눈이 얹혀 있었다⁠. 첫눈이었다⁠. 반야봉 어깨부터 만수천 바닥까지 산이 한 가지 색이었다⁠.

방바닥에는 상자 네 개가 테이프를 붙인 채 놓여 있었다⁠. 옷 상자 둘⁠, 책 상자 하나⁠, 연해주에서 가져온 물건 상자 하나⁠. 노트북과 안테나와 수신기는 지난주에 모두 반납했다⁠. 감사 결과는 사흘 전에 나왔다⁠. 한담의 사직서는 받아들여졌고⁠, 표정훈은 석 달 감봉을 받고 센터장 자리에 남았다⁠. 표정훈은 감사 결과가 나온 날 저녁 관사 문을 두드리고⁠, 연해주 재활센터에 자리가 하나 있다는 말을 전했다⁠. 한담은 아직 답하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준호였다⁠.

「⁠선배 첫눈 발자국 기록 오늘부터 제가 해요⁠. 목걸이 없으니까 눈 오는 날이 제 출근날이에요⁠」

「⁠누나 발자국 찾으면 사진 보낼게요⁠. 새끼 발자국도요⁠. 아직 굴 밖에 안 나왔겠지만⁠」

「⁠연해주 가시면 답장은 해 주세요⁠. 초코바 거기도 팔아요⁠? 검색해 봤는데 팔아요⁠」

한담은 「⁠판다⁠」라고만 답했다⁠. 준호는 웃는 얼굴 그림을 세 개 보냈다⁠.

열한 시에 이삿짐 차가 오기로 되어 있었다⁠. 한담은 작업복을 입지 않고 회색 등산 점퍼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무내골에 다녀오고 싶었다⁠.

*

무내골 들머리의 합판은 눈에 덮여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회관 처마 밑에는 새 징 하나가 걸쳐져 있었다⁠. 남원 장에서 주영길이 사 온 징이었다⁠. 지난주에 시험 삼아 한 번 쳤더니 마을 개들이 한 시간 동안 짖었고⁠, 윗집 할매가 징채를 감추었다고 했다⁠. 징채는 아직 찾지 못했다고 했다⁠.

“⁠아아⁠, 이장입니다⁠.⁠”

회관 문이 열리고 주영길이 메가폰을 들고 나왔다⁠. 한담을 보고 메가폰을 내렸다⁠.

“⁠아가씨⁠, 오늘 가는가⁠?⁠”

“⁠열한 시요⁠.⁠”

“⁠그라믄 막걸리 한 병 가져가⁠.⁠” 주영길은 처마 밑 상자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상표의 범 얼굴이 바뀌어 있었다⁠. 웃는 범 얼굴 밑에 작은 범 얼굴 둘이 더 그려져 있었다⁠. 수염이 각각 세 가닥이었다⁠. “⁠손자 놈이 새로 그렸어⁠. 새끼 둘이라고⁠. 이번 병부터 만 원이여⁠. 새끼 값이 붙어서⁠.⁠”

한담은 병을 받아 들고 웃었다⁠. 오랜만에 웃었다⁠. 주영길은 한담이 웃는 것을 보고 메가폰을 들어 올렸다가⁠, 징채 찾는 중이라 시끄러우면 안 된다며 도로 내렸다⁠.

칠구의 외양간 앞은 눈이 치워져 있었다⁠. 외양간 안쪽에 새로 지은 우리가 보였다⁠. 송판 냄새가 났다⁠. 밤이면 송아지와 어미 소를 새 우리 안에 들였다⁠. 우리 둘레에 전기 울타리 선이 둘러쳐져 있었다⁠. 센터 돈이 아니라 환경부 예산이라고⁠, 칠구는 지난주 회관에서 몇 번이나 고쳐 말했다⁠.

외양간 문간에 나미자가 서 있었다⁠. 손에 보온병을 들고 있었다⁠.

“⁠어르신은요⁠?⁠”

“⁠방금 올라갔어⁠. 범바위 위로⁠. 오늘은 혼자 간다 혔어⁠. 준호는 센터에서 눈 발자국 보는 일 맡았다고 아침부터 나갔고⁠.⁠”

나미자는 개울 건너 비탈을 턱으로 가리켰다⁠. 눈 위에 장화 자국이 한 줄로 이어져 억새밭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장화 자국 옆으로 무언가를 끈 듯한 얕은 골이 함께 났다⁠. 지게 다리가 눈에 끌린 자국이었다⁠.

“⁠멧돼지 지고 갔어⁠. 이번 주만 세 번째여⁠. 품삯이 한 번에 십오만 원⁠. 송아지 한 마리 값 될 때까지 한다고⁠.⁠”

“⁠총은요⁠?⁠”

“⁠메고 갔어⁠. 공포탄만 넣었다고⁠. 경찰서에서 꺼낼 때 계장님 앞에서 넣었대⁠.⁠”

나미자가 보온병을 한담에게 내밀었다⁠.

“⁠가려믄 이거 가져가⁠. 니 거 아니고 그 양반 거⁠. 커피 안 가져갔어⁠.⁠”

*

한담은 칠구의 장화 자국을 따라 올랐다⁠. 자국 안에 발을 넣으면 걷기가 쉬웠다⁠. 칠구의 보폭은 한담보다 짧았다⁠. 지게를 진 사람의 보폭이었다⁠. 억새밭에 이르자 눈 덮인 억새가 허리까지 눕혀져 있었고⁠, 장화 자국은 억새 사이로 곧게 나 있었다⁠. 한담은 숨을 쉴 때마다 코끝이 얼었다⁠. 눈 냄새가 났다⁠. 차고 맑아서 다른 냄새를 다 덮는 냄새였다⁠. 덮인 냄새들 사이로 아주 가늘게 피 냄새가 섞여 내려왔다⁠. 멧돼지 피였다⁠.

너덜겅 아래에서 한담은 걸음을 멈췄다⁠. 장화 자국이 너덜겅을 건너 참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굽잇길이 보였다⁠. 굽잇길 중간에 칠구가 있었다⁠. 지게를 진 채 멈춰 있었다⁠. 지게 위에 검은 멧돼지가 묶여 있었다⁠. 칠구는 움직이지 않았다⁠. 굽잇길 위쪽⁠, 스무 걸음 떨어진 참나무 아래를 보고 있었다⁠.

참나무 아래에 호단이 있었다⁠.

*

호단은 해가 오른 뒤에 굴을 나왔다⁠. 낮에 굴을 나온 것은 새끼를 낳은 뒤 처음이었다⁠. 새끼 둘은 눈을 뜬 지 여러 날이 지났다⁠. 굴 안을 기어다니며 서로의 귀를 물었고⁠, 호단의 꼬리 끝을 물었고⁠, 배가 고프면 젖을 찾아 울었다⁠. 첫째는 벌써 굴 입구까지 기어 나가 바깥 냄새를 맡으려 했고⁠, 호단은 그때마다 목덜미를 물어 안쪽으로 데려왔다⁠. 둘째는 첫째의 꼬리를 물고 따라다녔다⁠. 젖이 모자랐다⁠. 밤마다 범바위 위 빈터에서 멧돼지를 먹었다⁠. 소 냄새가 밴 사내의 냄새가 묻은 멧돼지였다⁠. 사흘 전 밤에 먹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굴 밖의 산이 달라져 있었다⁠. 하얗고 차가웠다⁠. 발을 디디면 발밑이 사각사각 꺼졌다⁠. 소리가 다 멀었다⁠. 개울물 소리도⁠, 새소리도⁠, 산 아래 마을의 소리도 하얀 것 밑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냄새도 대부분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한 냄새가 하얀 것을 뚫고 아래에서 올라왔다⁠. 멧돼지 피 냄새였다⁠.

호단은 냄새를 따라 내려갔다⁠. 빈터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냄새가 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냄새와 함께 다른 냄새도 올라왔다⁠. 소 냄새가 몸에 깊이 밴 냄새⁠, 땀과 담배와 마른 풀⁠, 그리고 쇠기름⁠. 외양간 안에서 맡았던 냄새였다⁠. 빈터의 멧돼지마다 묻어 있던 냄새였다⁠.

참나무 아래에서 호단은 멈췄다⁠. 굽은 길 아래에서 사내가 올라오다 멈췄다⁠. 사내의 등 위에 멧돼지가 있었다⁠. 사내의 어깨에 쇠막대가 메어져 있었다⁠. 쇠막대에서 쇠기름 냄새가 났다⁠. 호단의 귀가 뒤로 눕혀졌다⁠. 꼬리 끝이 하얀 것 위에서 한 번 휘었다⁠.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호단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의 숨이 하얗게 나왔다가 흩어졌다⁠. 호단의 숨도 하얗게 나왔다⁠. 둘 사이의 하얀 것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

한담은 너덜겅 아래 바위 뒤에 몸을 붙였다⁠. 쉰 걸음 아래였다⁠. 보온병을 쥔 손이 얼어 있었다⁠.

호단은 눈 위에서 커 보였다⁠. 연한 주황 털이 흰 눈 앞에서 타는 것처럼 진했고⁠, 굵은 검은 줄무늬가 참나무 그림자와 섞였다⁠. 가슴의 흰 털이 눈과 이어져 어디까지가 가슴이고 어디부터가 눈인지 알 수 없었다⁠. 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목걸이가 감겨 있던 자리의 털이 아직 조금 눌려 있었다⁠. 호박색 눈이 칠구를 보고 있었다⁠. 옆구리가 홀쭉했다⁠. 젖이 불어 배 밑이 처져 있었다⁠.

칠구의 손이 어깨의 총 끈에 닿았다⁠. 한담은 숨을 멈추었다⁠. 칠구는 총 끈을 쥐었다가 놓았다⁠. 총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무릎을 천천히 굽혔다⁠. 지게 다리가 눈에 닿았다⁠. 칠구는 어깨에서 지게 끈을 하나씩 벗었다⁠. 서두르지 않았다⁠. 외양간에서 송아지 받을 때처럼 손이 느렸다⁠. 지게가 눈 위에 반듯하게 놓였다⁠. 칠구는 지게에 묶인 멧돼지의 끈을 풀었다⁠. 멧돼지가 눈 위로 굴러 떨어졌다⁠. 눈이 붉어졌다⁠.

칠구가 몸을 일으켰다⁠. 호단을 보았다⁠. 목소리는 낮았다⁠. 바람이 한담 쪽으로 불어 말이 내려왔다⁠.

“⁠묵어라⁠.⁠”

호단의 귀가 앞으로 돌아갔다⁠.

“⁠이것 묵고⁠, 다시는 내려오지 마라⁠. 내려오믄 나는 징 친다⁠. 우리 이장 형님이 징을 샀어⁠. 징 쳐도 내려오믄⁠, 그때는 내가 쏜다⁠. 협약서에 그렇게 써 놨어⁠. 나도 도장 찍었고⁠.⁠”

칠구는 한 걸음 물러났다⁠. 등을 돌리지 않았다⁠. 뒷걸음이었다⁠. 장화가 자기 발자국 안으로 들어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지게는 내려놓은 자리에 두었다⁠. 다섯 걸음을 물러난 뒤에 칠구가 한마디를 더 했다⁠.

“⁠새끼들 잘 멕여라⁠.⁠”

칠구는 계속 물러났다⁠. 굽잇길 아래 너덜겅이 시작되는 자리까지 뒷걸음으로 내려왔다⁠. 거기서야 몸을 돌렸다⁠. 바위 뒤의 한담과 눈이 마주쳤다⁠. 칠구는 놀라지 않았다⁠. 한담이 따라온 것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

호단은 사내가 물러나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 사내는 소리를 낮게 냈고⁠, 멧돼지를 하얀 것 위에 내려놓았고⁠, 뒤로 물러났다⁠. 쇠막대는 사내의 어깨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사내의 냄새가 멀어졌다⁠. 멧돼지 피 냄새가 가까웠다⁠.

호단은 참나무 아래에서 나왔다⁠. 하얀 것 위에 앞발을 디뎠다⁠. 왼 앞발에 패인 홈이 차가운 것에 닿아 시렸다⁠. 멧돼지 앞에서 호단은 고개를 들어 굽은 길 아래를 한 번 보았다⁠. 사내는 바위 근처에서 몸을 돌리고 있었다⁠. 바위 뒤에 다른 냄새가 하나 있었다⁠. 약 냄새는 아니었다⁠. 약 냄새가 빠진⁠, 고무 냄새도 빠진⁠, 그래도 아는 냄새였다⁠. 철창 문이 열리던 날 곁에 있던 사람의 살 냄새였다⁠.

호단은 멧돼지의 목덜미를 물었다⁠. 무거웠다⁠. 뒷다리에 힘을 주고 끌었다⁠. 하얀 것 위로 멧돼지가 미끄러졌다⁠. 호단은 위로⁠, 굴이 있는 데로 끌어 올렸다⁠. 한 번 쉬고⁠, 다시 끌었다⁠. 굴에서 새끼들이 우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

칠구는 바위 앞을 지나가며 한담에게서 보온병을 받아 갔다⁠. 묻지 않고 받아 갔다⁠.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시고⁠, 뚜껑을 닫았다⁠.

“⁠품삯 받으러 간다⁠.⁠”

“⁠송아지 한 마리 값 되셨어요⁠?⁠”

“⁠아직 멀었어⁠.⁠” 칠구는 장화에 묻은 눈을 털었다⁠. “⁠니는 오늘 간다매⁠.⁠”

“⁠열한 시요⁠.⁠”

“⁠가⁠.⁠”

칠구는 한마디만 남기고 장화 자국을 밟으며 억새밭으로 내려갔다⁠. 몇 걸음 가다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범은 인자 아무도 안 따라다니냐⁠?⁠”

“⁠눈 오면 발자국이 있어요⁠.⁠”

“⁠그럼 됐어⁠.⁠”

칠구의 등이 억새 사이로 작아졌다⁠. 한담은 바위 뒤에서 나와 굽잇길로 올라갔다⁠. 지게가 놓였던 자리까지 갔다⁠.

눈 위에 발자국이 두 줄 있었다⁠. 아래에서 올라온 장화 자국과 위에서 내려온 범 발자국이었다⁠. 둘은 스무 걸음을 사이에 두고 멈춰 있었다⁠. 장화 자국은 멈춘 자리에서 다시 아래로 돌아 내려갔다⁠. 뒷걸음이라 발끝이 위를 향해 있었다⁠. 범 발자국은 멈춘 자리에서 앞으로 나와 지게 자리까지 왔다⁠. 왼 앞발 자국이 오른 앞발 자국보다 얕았다⁠. 지게 자리의 눈은 붉었고⁠, 붉은 자리에서 굵은 골 하나가 위로 이어졌다⁠. 골 양옆으로 범 발자국이 깊게 박혀 있었다⁠. 골은 참나무 숲을 지나 범바위로 올라갔다⁠.

한담은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닿았다⁠. 첫 총회 날 윗집 할매가 넣어 준 귤이었다⁠. 말라서 쪼그라들어 있었다⁠. 한담은 귤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 보았다⁠. 가벼웠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굵은 눈송이가 장화 자국 안에 쌓이고⁠, 범 발자국 안에 쌓이고⁠, 붉은 자리 위에 쌓였다⁠. 산 아래 무내골에서 징 소리가 한 번 올라왔다⁠. 누군가 징채를 찾은 모양이었다⁠. 범바위로 올라간 골이 눈에 덮여 조금씩 얕아졌다⁠. 한담은 골이 끝나는 데까지 눈으로 따라갔다가⁠, 손바닥의 귤을 쥐고 아래로 내려갔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작가를 구독하면 다음 화가 올라올 때 알려 드립니다.

15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첫눈 · 지리산에 풀어 준 호랑이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