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25자)

간판

강호 배달 라이더 · 하로운

오월 초사흘 저녁⁠, 비룡 청하방 둘째 지점 계산대에 진보덕이 앉아 있었다⁠. 비룡 앞치마를 벗어 계산대 위에 개켜 놓고⁠, 주판도 없이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대청에서 돌아온 뒤로 한마디도 안 했다고 할멈이 귀띔했다⁠.

나는 계산대 앞으로 갔다⁠. 라이더 서른여섯이 문간을 메웠다⁠. 대팔이 버드나무에서 떨어져 긁힌 팔뚝을 문지르며 맨 앞에 있었다⁠.

“⁠사장님⁠, 왜 찍으셨어요⁠.⁠”

진보덕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내 얼굴을 봤다⁠.

“⁠너희 밀린 품삯이 열흘치였다⁠. 주방에서 기다리다 깎인 것까지 하면 보름치⁠. 서른여섯이면 은자 열두 냥이다⁠. 네 빚이 은자 여덟 냥⁠. 전당포 서른 냥⁠. 내 손에 있는 건 동전 탑 열 개였다⁠. 국주 은자가 그걸 다 덮었다⁠. 알겠냐⁠?⁠”

“⁠그래서 혼자 정하셨어요⁠?⁠”

“⁠혼자 정하고 나중에 말하는 거⁠, 내가 원래 그렇다고 했잖냐⁠.⁠”

“⁠나중에도 말 안 하셨잖아요⁠!⁠”

진보덕이 입을 다물었다⁠. 문간에서 대팔이 코를 훌쩍였다⁠. 나는 계산대에 두 손을 짚었다⁠.

“⁠방 문주님이 풍운 만두라고 했어요⁠. 비룡 지점에서 나간 만두는 풍운 만두가 아니에요⁠. 곽만금이 그걸 알고 대청에서 웃은 거예요⁠. 간판이 비룡이면 시험은 시작도 하기 전에 진 거예요⁠.⁠”

진보덕은 오래 계산대 나뭇결을 손톱으로 긁었다⁠. 주판알 튕기던 손가락이 나뭇결을 따라 미끄러졌다⁠.

“⁠합병 종이에 이렇게 적혀 있다⁠. 단오 전에 물리면 받은 은자의 두 곱을 물어낸다⁠. 은자 예순 냥⁠.⁠”

“⁠예순 냥이요⁠?⁠”

“⁠전당포 서른 냥까지 하면 아흔 냥⁠. 그만큼이면⁠.⁠”

진보덕이 말을 멈췄다⁠. 할멈이 부엌에서 나와 진보덕 어깨를 툭 쳤다⁠.

“⁠그만큼이면 집 한 채지⁠.⁠”

*

문간 라이더들이 갈라지며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진보덕보다 머리 하나가 작고⁠, 손에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진보덕 마누라였다⁠. 사모님은 계산대 앞까지 와서 빗자루를 진보덕 코앞에 들이밀었다⁠.

“⁠집 팔 거면 빨리 팔아⁠. 전당포 영감 오늘 밤 술 먹으러 나가면 내일 아침까지 안 들어와⁠.⁠”

“⁠여보⁠.⁠”

“⁠집 잡힌 거 몰래 감춘 것도 괘씸한데⁠, 이제 와서 머뭇거리는 건 더 괘씸해⁠. 팔아⁠. 대신 가게 뒷방에 내 자리 하나 만들어⁠. 할멈 옆에⁠.⁠”

할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은 좁아도 아궁이는 따뜻해⁠.⁠”

사모님은 빗자루를 진보덕 손에 쥐여 주고 몸을 돌리다가⁠, 문간의 나를 봤다⁠.

“⁠네가 짚신이니⁠?⁠”

“⁠네⁠.⁠”

“⁠영감이 밤마다 네 품삯 깎았다고 자랑하더라⁠. 오늘은 자랑할 게 없겠네⁠.⁠”

진보덕이 빗자루를 든 채 일어났다⁠. 계산대 밑 서랍에서 진짜 「⁠풍운⁠」 도장을 꺼내 허리춤에 찼다⁠. 비룡 앞치마는 계산대에 두고⁠, 할멈 부엌에 걸린 낡은 숙수 앞치마를 둘렀다⁠.

“⁠차돌아⁠, 따라와⁠. 전당포 들렀다가 무림문 간다⁠.⁠”

*

전당포 영감은 이미 술상 앞에 앉아 있었다⁠. 코끝이 빨갛고 주판이 술병 옆에 놓여 있었다⁠. 진보덕이 집문서를 내밀자 영감은 주판을 끌어당겨 따르륵 튕겼다⁠.

“⁠잡힌 서른 냥 빼고⁠, 집 판 돈으로 쉰 냥 더⁠. 팔십 냥⁠.⁠”

“⁠아흔은 받아야 하오⁠. 대들보가 느티나무요⁠.⁠”

“⁠느티나무면 뭐 하나⁠, 지붕에 짚신 제비가 뛰어다녀서 기와가 다 들썩일 텐데⁠.⁠”

영감이 술잔을 들다 말고 나를 봤다⁠. 눈이 가늘어졌다⁠.

“⁠너⁠, 짚신 제비 맞지⁠? 내가 풍운 「⁠한 줄 평⁠」에 라이더 시끄러움 쓴 사람이다⁠.⁠”

“⁠별 넷 주신 분이요⁠?⁠”

“⁠그래⁠. 시끄러운데 만두가 뜨거워서 넷 줬다⁠.⁠”

영감은 주판을 들어 손에 가늠해 보더니⁠, 예고도 없이 내 얼굴로 던졌다⁠. 나는 고개만 옆으로 꺾었다⁠. 주판이 내 귀 옆을 지나 벽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주판알이 사방으로 굴렀다⁠. 영감이 손뼉을 쳤다⁠.

“⁠예선장에서 못 봐서 아쉬웠는데⁠, 이제 봤다⁠. 아흔 냥⁠. 구경 값 열 냥 얹었다⁠.⁠”

진보덕이 바닥의 주판알을 하나씩 주워 영감 앞에 놓았다⁠. 다 주울 때까지 아무 말도 안 했다⁠. 숙수 시절부터 진보덕은 남의 물건을 바닥에 두고 가는 법이 없었다⁠.

*

비룡표국 대청에는 아직 그믐 밤 연회의 등불이 반쯤 남아 있었다⁠. 바닥 틈에 대팔이 엎은 만두 부스러기가 끼어 있었다⁠. 곽만금은 대청 높은 자리에서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동파육이었다⁠. 우리를 보고도 젓가락을 내려놓지 않았다⁠.

진보덕은 대청 한가운데로 걸어가 무명 보따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풀자 은자 덩이가 쏟아졌다⁠. 진보덕이 품에서 합병 종이를 꺼내 은자 위에 얹었다⁠.

“⁠국주⁠, 물리겠소⁠. 받은 은자 두 곱이오⁠. 예순 냥⁠. 세어 보시오⁠.⁠”

곽만금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칼자국 표사가 은자를 세는 동안 곽만금은 진보덕을 내려다봤다⁠.

“⁠집을 팔았구려⁠.⁠”

“⁠팔았소⁠. 장사는 장사고⁠.⁠”

곽만금 입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안 나왔다⁠. 곽만금은 접시의 동파육을 젓가락으로 한 점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20년 전 취선 동파육이 항주 제일이던 때가 있었소⁠. 그때 숙수가 진 사장이었지⁠. 표국 졸개 시절 내 품삯으로는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먹었소⁠. 지금은 날마다 먹소⁠. 맛은 그때만 못하지⁠.⁠”

“⁠그때만 못한 건 국주 입이오⁠. 고기는 똑같소⁠.⁠”

곽만금이 진보덕을 오래 봤다⁠. 화가 난 얼굴도 웃는 얼굴도 아니었다⁠. 오래 못 본 사람을 알아보는 얼굴이었다⁠. 알아보는 눈빛은 금방 지나갔다⁠. 칼자국이 은자를 다 세고 고개를 끄덕였다⁠. 곽만금은 합병 종이를 집어 반으로 찢었다⁠.

“⁠좋소⁠. 풍운 간판은 돌려 드리지⁠. 그런데 진 사장⁠, 간판 하나로 뭐가 달라지오⁠? 내일 단오에 서호에 뜬 배는 다 비룡 거요⁠. 용선도⁠, 놀잇배도⁠, 나룻배도⁠. 풍운 만두가 호심정에 가려면 날아가야 할 게요⁠.⁠”

“⁠우리 라이더는 원래 날아다니오⁠.⁠”

“⁠지붕 위에서나 그렇지⁠.⁠”

대청 문이 열렸다⁠. 포두가 군밤 봉지 대신 관아 패를 들고 들어왔다⁠. 뒤에 관아 사령 둘이 따라왔다⁠. 포두는 곽만금 앞에서 패를 들어 보였다⁠. 하품은 하지 않았다⁠.

“⁠지부 나리 영이오⁠. 위조 도장 일에 증인이 필요하니⁠, 비룡표국에 있는 육반석을 관아로 넘기시오⁠. 증인은 관아가 지킨다고 하셨소⁠.⁠”

“⁠나는 시키는 것만 한다더니⁠.⁠”

“⁠그러니까요⁠. 지부 나리가 시켰소⁠.⁠”

곽만금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한참 뒤 칼자국에게 턱짓했다⁠.

*

반석은 들것에 실려 나왔다⁠. 소금 창고에서 사흘을 보낸 얼굴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 왼 발목에 감긴 소금 가마니 끈 사이로 시퍼런 멍이 무릎까지 번져 있었다⁠. 들것이 내 앞을 지날 때 반석이 손을 들어 내 짚신 앞코를 툭 쳤다⁠.

“⁠짝 맞췄네⁠.⁠”

그믐 밤에 한 짝 잃은 짚신 대신⁠, 할멈이 새로 삼아 준 짚신이었다⁠.

포두는 반석을 관아로 데려가지 않았다⁠. 무림문을 나서자마자 들것 메는 사령들한테 청하방 쪽으로 가라고 했다⁠.

“⁠증인은 관아가 지키라 했지⁠, 관아 안에서 지키라고는 안 했소⁠. 지붕 타는 놈들이 지키는 게 제일 잘 지키겠지⁠.⁠”

포두는 군밤을 하나 까서 반석 입에 넣어 주고 돌아갔다⁠.

*

오월 초나흘 아침⁠, 풍운 골목에 사다리 둘이 걸쳐졌다⁠. 라이더 서른여섯이 처마 밑에 몰려들었다⁠. 대팔이 사다리 위에서 비룡 둘째 지점 간판을 떼어 냈고⁠, 짐꾼 맏이가 받아 들고 길을 건너 비룡 지점 문간에 세워 놓았다⁠. 반석은 들것에 누운 채 할멈 부엌 문턱에 실려 있었다⁠.

담벼락에 기대 두었던 옛 간판을 다섯이 들어 올렸다⁠. 오래 비바람을 맞은 나무가 사다리 끝에서 기우뚱했다⁠. 대팔이 「⁠운⁠」 자를 한 번 더 소매로 닦았다⁠. 간판이 처마에 박혔다⁠. 「⁠풍운배달⁠」⁠.

박수 대신 구호가 나왔다⁠. 대팔이 선창했다⁠.

“⁠주방 늦음은⁠!⁠”

“⁠주방 탓이다⁠!⁠”

이번엔 할멈도 국자를 안 던졌다⁠. 사모님이 뒷방 창문에서 빗자루를 흔들었다⁠. 진보덕은 문간에 서서 간판을 올려다보다가⁠, 향 한 묶음을 꺼냈다⁠. 반 시진짜리였다⁠. 진보덕은 향을 꺾지 않고 손에 쥔 채로 기다렸다⁠.

골목 어귀에서 서호검문 제자가 목발을 짚고 걸어왔다⁠. 연무장에서 정강이가 부러졌던 제자였다⁠. 품에서 향 한 대를 꺼내 진보덕에게 내밀었다⁠. 서호검문 사당에서 쓰는 굵은 향이었다⁠.

“⁠문주님이 내일 이 향을 풍운에서 피우라 하셨소⁠. 결승 준비 북이 울릴 때 제가 와서 불을 붙이겠소⁠. 풍운에서 찐 만두인지 제가 보고⁠, 향이 꺼지기 전에 호심정에 닿는지 문주님이 보시오⁠.⁠”

진보덕은 향을 받아 들고 길이를 손가락으로 쟀다⁠. 반 시진짜리보다 조금 길고⁠, 한 시진짜리보다 짧았다⁠.

“⁠문주님도 쩨쩨하시구먼⁠. 알겠소⁠.⁠”

담 위로 매화 가지가 날아왔다⁠. 이번엔 가지가 부러지지 않았다⁠. 「⁠오늘 준결승 이김⁠. 내일 결승 상대는 무당 현진⁠. 만두는 둘 몫으로⁠. 현진도 먹고 싸워야 공평하지⁠. 위 공자⁠.⁠」 대팔이 쪽지를 어깨 너머로 읽고 소리쳤다⁠. “⁠결승 상대가 만두 반쪽 도사래⁠!⁠”

진보덕이 향을 쥔 손으로 골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 단오 부름은 하나다⁠. 호심정 심판석⁠, 만두 한 판⁠. 알겠냐⁠?⁠”

*

할멈 부엌 문턱에서 반석이 나를 불렀다⁠. 들것에 누운 채 손짓했다⁠. 나는 문턱에 쪼그려 앉았다⁠.

“⁠배는 다 묶였다⁠. 용선 서른 척⁠, 놀잇배 쉰 척⁠, 나룻배까지⁠. 국주가 단오 하루 값으로 다 빌렸어⁠. 호심정 가는 길은 물뿐이다⁠.⁠”

“⁠알아⁠.⁠”

“⁠물 위로 가라⁠.⁠”

“⁠해 본 적 없다니까⁠. 화방 갈 때도 빠졌잖아⁠.⁠”

반석이 웃었다⁠. 웃다가 발목이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다⁠.

“⁠사부가 왜 물 위를 한 번도 안 보여 줬는지 아냐⁠?⁠”

“⁠빠지면 축축하다고⁠.⁠”

“⁠사부도 못 했다⁠.⁠”

나는 반석을 내려다봤다⁠. 반석은 부엌 천장 그을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열다섯 살 때 밤에 오줌 누러 나갔다가 봤다⁠. 사부가 연자관 뒤 연못에서 혼자 연잎을 딛다가 첨벙 빠지는 거⁠. 세 번 빠지고 네 번째에 연잎 둘까지 갔다⁠. 그러고 또 빠졌어⁠. 다음 날 아침에 사부가 감기 걸려서 우리한테 연자삼초수는 원래 물 위가 진짜라고 하더라⁠. 콧물을 흘리면서⁠.⁠”

할멈이 부엌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웃었다⁠. 웃는데 눈이 따가웠다⁠.

“⁠사부가 못 한 걸 네가 해⁠. 연잎 둘에서 끝나지 말고⁠.⁠”

대팔이 부엌 문턱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럼 우리는 뭐 해⁠? 서른여섯이 다 물 위로 뛸 수는 없잖아⁠. 나는 노도 반은 허공을 젓는데⁠.⁠”

“⁠배를 모아⁠.⁠”

“⁠배는 곽만금이 다 빌렸다며⁠.⁠”

반석이 들것에서 고개를 들었다⁠.

“⁠국주가 빌린 건 용선이랑 놀잇배랑 나룻배다⁠. 이름 있는 배⁠. 고깃배는 안 빌렸다⁠. 연밥 따는 쪽배도⁠. 너무 작아서 빌릴 것도 없다고 했어⁠. 국주 눈에는 작은 배가 안 보인다⁠.⁠”

할멈이 국자로 솥뚜껑을 땅 쳤다⁠. 작은 것도 모이면 크다는 소리였는지⁠, 그냥 솥이 끓는다는 소리였는지는 할멈만 알았다⁠.

대팔의 눈이 커졌다⁠. 비룡 짐꾼 맏이가 무릎을 쳤다⁠. 짐꾼 맏이의 처가가 서호 서쪽 연밭에서 연밥을 딴다고 했다⁠. 처가 동네에만 쪽배가 스무 척이 넘는다고⁠, 노 젓는 건 처가 식구들이 다 자기보다 낫다고 했다⁠.

반석이 내 짚신 앞코를 다시 툭 쳤다⁠. 나는 일어났다⁠. 등에 「⁠풍운배달⁠」 함을 메고⁠, 할멈이 쪄 둔 빈 찜기 하나를 손에 들었다⁠. 연습용이었다⁠. 골목 끝으로 서호의 물빛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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