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60자)

증거

강호 배달 라이더 · 하로운

오월 초사흘 아침⁠, 서호검문 대청 기둥 열여섯 사이가 사람으로 메워져 있었다⁠. 문파 대표들 자리 뒤로 각 문파 제자들이 서서 목을 뺐고⁠, 객잔 주인들 자리 뒤로 상단 사람들이 줄지었다⁠. 대청 밖 마당까지 사람이 넘쳤다⁠. 버드나무 위에는 이번에도 대팔이 매달려 있었고⁠, 옆 가지에 라이더 셋이 더 매달렸다⁠. 가지가 휘청거렸다⁠. 서호검문 제자 하나가 장대로 가지를 털까 말까 망설이다가 문주 눈치를 보고 그만뒀다⁠. 연무장에서 정강이가 부러졌던 제자였다⁠. 아직 목발을 짚고 있었다⁠.

나는 다시 문턱으로 갔다⁠. 진보덕의 비단 장포는 없었다⁠. 해진 회색 무명옷에 붉은 허리띠⁠, 짚신⁠. 머리띠는 잘린 끝을 할멈이 이어 붙여 줬다⁠. 허리띠 안쪽에 기름종이 꾸러미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이틀 동안 반석은 비룡표국 소금 창고에 갇혀 있었다⁠. 비룡 짐꾼 맏이가 창고 앞에 표사 둘이 밤낮으로 지킨다고 전해 왔다⁠. 어젯밤 나는 소금 창고 지붕에 엎드려 기와 한 장을 살짝 들어냈다⁠. 깨지 않고 들어냈다⁠. 틈으로 소금 냄새가 올라왔고⁠, 어둠 속에 반석이 소금 가마니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왼 발목에 부목 대신 소금 가마니 끈이 칭칭 감겨 있었다⁠.

“⁠사형⁠.⁠”

“⁠짚신이냐⁠. 기와 깨지 마라⁠. 그거 국주 거다⁠.⁠”

“⁠깨지 않았어⁠. 들어냈지⁠. 지금 꺼내 줄게⁠.⁠”

“⁠표사 둘이 문 앞에 있다⁠. 나를 업고 지붕으로 못 간다⁠. 너 혼자면 가고⁠.⁠”

반석이 고개를 들어 기와 틈을 올려다봤다⁠. 틈으로 들어간 별빛 한 줄이 반석 얼굴을 가로질렀다⁠.

“⁠내일 표결에 가⁠. 내 발목은 도망 안 간다⁠. 도망을 못 가지⁠.⁠”

“⁠웃기지 마⁠.⁠”

“⁠웃으라고 한 소리다⁠. 가서 그거 내밀어⁠. 그리고 사부 흉내 좀 내지 마라⁠. 하나⁠, 둘⁠, 셋 셀 때 네 목소리 다 들린다⁠.⁠”

나는 기와를 도로 덮었다⁠. 덮기 전에 할멈이 싸 준 만두 다섯 개를 틈으로 떨어뜨렸다⁠. 아래서 받아 드는 소리가 났다⁠.

방규철이 탁자를 주먹으로 한 번 치자 대청이 조용해졌다⁠.

“⁠배달 무공 금지령 표결을 열겠네⁠. 표결 전에 할 말이 있는 사람은 하게⁠.⁠”

곽만금이 먼저 일어났다⁠. 오늘은 칼자국 표사가 곽만금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믐 밤 비룡표국 금고 방에 도둑이 들었소⁠. 지붕 창으로 들어와 지붕으로 달아났지⁠. 짚신을 신고⁠.⁠”

곽만금이 칼자국한테 손을 내밀었다⁠. 칼자국이 짚신 한 짝을 꺼내 곽만금 손에 올렸다⁠. 그믐 밤 바람 창에서 벗겨진 내 짚신이었다⁠. 곽만금은 짚신을 탁자 위에 탁 내려놓았다⁠.

“⁠도둑이 가져간 것 가운데에는 풍운 라이더들이 화방에 판 쪽지를 비룡이 거둬들여 모아 둔 묶음도 있었소⁠. 연합에 증거로 바치려 했던 것이지⁠. 증거를 훔쳐 간 자가 지금 문턱에 서 있소⁠.⁠”

수백 개의 눈이 문턱으로 돌아왔다⁠. 나는 허리띠를 풀었다⁠. 기름종이 꾸러미를 펼쳐 문턱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무 도장 하나와 노끈으로 묶인 쪽지 묶음⁠.

“⁠제가 가져왔습니다⁠. 문주님⁠, 이 도장 좀 봐 주십시오⁠.⁠”

*

방규철이 자리에서 내려와 문턱까지 걸어왔다⁠. 도장을 집어 들어 등불 쪽으로 기울였다⁠. 대청 뒤쪽에서 사람 하나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비룡 앞치마를 두른 진보덕이었다⁠. 용 꼬리가 여전히 옆구리로 말려 있었다⁠.

“⁠문주님⁠, 이것도 같이 보시오⁠.⁠”

진보덕이 품에서 「⁠풍운⁠」 도장을 꺼냈다⁠. 계산대 맨 아래 서랍에서 나온 진짜였다⁠. 진보덕은 밀랍 한 조각과 인주 그릇까지 들고 왔다⁠. 문턱 바닥에 밀랍을 녹여 두 덩이로 나누고⁠, 한 덩이에 진짜를⁠, 한 덩이에 가짜를 찍었다⁠. 두 자국을 나란히 놓았다⁠.

방규철이 무릎을 꿇고 들여다봤다⁠. 문파 대표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뺐다⁠.

“⁠획이 다르군⁠.⁠”

“⁠가짜는 진짜보다 반 치 굵습니다⁠. 밀랍에 찍힌 자국을 보고 깎아서⁠, 밀랍이 녹아 번진 만큼 굵어진 겁니다⁠.⁠”

방규철이 소매에서 화방 쪽지를 꺼냈다⁠. 첫 연합 회의 날 포두가 주워 왔다던 쪽지였다⁠. 쪽지 끝 밀랍 자국을 두 자국 옆에 나란히 놓았다⁠. 굵었다⁠. 반 치⁠.

대청이 웅성거렸다⁠. 곽만금이 웃었다⁠.

“⁠도둑이 가져온 물건이 무슨 증거요⁠? 내 금고에서 나온 가짜 도장이면⁠, 내가 증거로 거둬 둔 걸 수도 있지⁠. 그리고 이 짚신 대표는 방금 내 금고를 털었다고 제 입으로 말했소⁠. 연합은 도둑 말을 듣는 자리요⁠?⁠”

몇몇 문파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둑은 도둑이었다⁠. 방규철도 도장을 손에 쥔 채 곽만금을 봤다가 나를 봤다⁠. 쪽지 묶음은 아직 노끈에 묶여 있었다⁠.

화산 자리에서 사람 하나가 일어났다⁠.

*

설매였다⁠. 도복 소매를 걷어 올리고⁠, 손목에 붉은 실 한 가닥을 감고 있었다⁠. 송학 진인이 수염을 떨며 설매 소매를 붙잡았지만⁠, 설매는 소매를 빼냈다⁠.

“⁠화산 위설매입니다⁠. 저 쪽지 묶음 맨 위에 제 이름이 있을 겁니다⁠.⁠”

설매가 문턱까지 걸어왔다⁠. 노끈을 풀었다⁠. 맨 위 쪽지를 펼쳐 대청을 향해 들었다⁠.

“⁠세 번째 창으로 사부님 몰래 만두를 시킨 건 저입니다⁠. 이 라이더가 날랐습니다⁠. 이 라이더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청에서 처음 그 쪽지가 나왔을 때도 날랐다고만 하고⁠, 시킨 사람 이름은 끝까지 안 댔습니다⁠.⁠”

설매가 숨을 한 번 고르고 나를 봤다⁠. 귀가 빨갛지 않았다⁠.

“⁠그런데 화방 노름판 제 패 숫자가 사월 열닷새부터 바뀌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날 밤 세 번째 창 맞은편 지붕에 비룡 표사 하나가 엎드려 있었던 걸 제가 봤습니다⁠.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표사였습니다⁠. 사부님이 무서워서 그때는 말을 못 했습니다⁠.⁠”

칼자국이 곽만금 뒤에서 한 발 물러났다⁠. 무당 자리에서 현진이 손을 번쩍 들었다⁠.

“⁠무당 현진이오⁠! 그 묶음에 내 밤참도 있소⁠? 있다면 밤참은 비룡으로만 시켰소⁠. 풍운은 봉인 때문에 몰래 먹을 수가 없어서⁠.⁠”

대청 여기저기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미파 대표가 묶음 속에서 「⁠아미 둘째 제자 보약⁠」을 찾아 들고 얼굴을 붉혔다⁠. 보약도 비룡으로만 시켰다고 했다⁠.

객잔 주인들 자리 뒤에서 앞치마 두른 사내 하나가 손을 들었다⁠. 수염이 반쪽만 자라 있었다⁠. 취선 숙수였다⁠. 취선 주인이 고개를 돌려 노려봤지만 숙수는 손을 내리지 않았다⁠.

“⁠취선 주방 숙수요⁠. 비룡은 음식을 먼저 내줄 때마다 주방에 두 닢씩 쥐여 줬소⁠. 비룡 짐꾼이 대나무 조각이랑 같이 앞치마에 넣어 주고 갔지⁠. 그 돈 받고 풍운 주문을 늦게 내줬소⁠. 내가 그랬소⁠.⁠”

숙수는 손을 내리고 진보덕을 봤다⁠.

“⁠사부님 앞에서 말하려고 오늘 수염 반쪽 마저 깎을까 하다가⁠, 반쪽 남은 게 내 꼴 같아서 그냥 왔소⁠.⁠”

진보덕은 아무 대답도 안 했다⁠.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칼 쥐는 법을 처음 가르칠 때처럼 짧게⁠.

곽만금이 손뼉을 쳤다⁠. 소리가 커서 웃음이 멎었다⁠.

“⁠제자들 밤참 이야기로 비룡을 몰아세우시오⁠? 그 묶음 맨 아래를 보시오⁠. 화산 장로 이야기도 있을 게요⁠. 장로님 체면을 생각하면⁠, 그 묶음은 그대로 덮는 게 연합의 도리 아니겠소⁠?⁠”

곽만금이 송학 진인을 향해 웃었다⁠. 노름판 관리인이 「⁠학 노인⁠」 쪽지를 탁자에 꽂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국주가 표결 날 쓸 거라고 아껴 두랬다⁠. 곽만금은 쪽지를 칼처럼 쓰고 있었다⁠. 진인이 일어나면 진인이 베이고⁠, 앉아 있으면 화산이 입을 다문다⁠.

나는 송학 진인을 봤다⁠. 단교 위에서 표결 날은 진인이 정하라고 했다⁠.

*

송학 진인이 칼집을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대청이 다시 조용해졌다⁠. 진인은 문턱까지 오지 않고 제자리에서 말했다⁠. 느린 하오체였다⁠.

“⁠그 묶음 맨 아래 쪽지에 학 노인이 있을 게요⁠.⁠”

설매가 묶음을 넘겨 맨 아래 쪽지를 꺼냈다⁠. 좋은 종이였다⁠. 설매 손이 처음으로 떨렸다⁠.

“⁠학 노인은 송학이외다⁠.⁠”

대청이 숨을 들이켰다⁠.

“⁠제자들에게 결승까지 기름 한 방울 금하고⁠, 나는 밤마다 동파육 한 접시를 먹었소⁠. 비룡으로만 시켰소⁠. 풍운은 화산 거처에 못 들어오게 내가 막았으니까⁠. 그러니 이 쪽지가 노름판에 있었다면⁠, 판 자는 비룡이외다⁠. 화산 체면은 오늘 송학이 다 먹어 치웠소⁠. 동파육처럼⁠.⁠”

어디선가 누가 웃음을 참다가 실패했다⁠. 공동파 대표였다⁠. 웃음이 번졌다⁠. 비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대청 기둥 열여섯이 다 같이 흔들리는 웃음이었다⁠. 송학 진인은 웃음이 다 지나갈 때까지 서 있었다⁠. 흰 수염 아래 목이 붉었지만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화산 제자들이 하나둘 사부를 올려다봤다⁠. 육포 씹다 물구나무를 섰던 사형 둘은 입을 막고 어깨를 떨었다⁠. 그러고는 앉으면서 설매를 향해 한마디만 했다⁠.

“⁠결승 날은 동파육이 아니라 만두를 먹어라⁠. 동파육은 소화가 늦다⁠.⁠”

*

방규철이 문턱에서 일어나 대청 가운데로 걸어갔다⁠. 손에 진짜 도장과 가짜 도장을 하나씩 쥐고 있었다⁠.

“⁠위조한 도장과 문파 거처의 일을 사고판 노름판은 연합이 가릴 일이 아니네⁠. 관아 일일세⁠. 포두⁠.⁠”

기둥에 기대 있던 포두가 군밤 봉지를 내려놓았다⁠.

“⁠나는 시키는 것만 하는 사람인데요⁠.⁠”

“⁠알고 있네⁠. 그러니 연합 회장이 시키네⁠. 이 도장과 묶음을 지부 나리께 가져가게⁠. 화방도 다시 덮고⁠.⁠”

포두가 곽만금을 흘끔 봤다⁠. 곽만금은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았다⁠.

“⁠지부 나리께 가져가는 건 좋소⁠. 다만 도둑이 훔쳐 간 내 물건인 것도 같이 아뢰시오⁠. 그리고 그 도둑 일당 하나는 지금 내 표국에 있소⁠. 관아가 데려가겠다면 언제든 내드리지⁠.⁠”

반석이었다⁠. 내 주먹이 쥐어졌다⁠. 방규철이 손을 들어 나를 막았다⁠.

“⁠그건 관아가 정할 일이네⁠. 이제 금지령을 보지⁠.⁠”

방규철은 탁자로 돌아가지 않고 대청 한가운데 그대로 머물렀다⁠.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목 안쪽 들쭉날쭉한 흉터가 드러났다⁠.

“⁠30년 전⁠, 나는 국숫집 심부름꾼이었네⁠. 국수 그릇을 이고 지붕을 탔지⁠. 하루는 늦을까 봐 남의 처마 끝을 네 번째로 디뎠네⁠. 기와가 깨졌고⁠, 나는 떨어졌고⁠, 깨진 기와와 내가 같이 길 가던 노파 위로 떨어졌네⁠. 노파는 그 뒤로 지팡이를 짚었어⁠. 나는 손목에 이걸 얻었고⁠.⁠”

대청이 조용했다⁠. 버드나무 가지에서 대팔이 숨도 안 쉬었다⁠.

“⁠그래서 지붕 위의 사람을 믿지 못하네⁠. 지붕 위의 사람은 아래를 못 봐⁠. 오늘 일로 보니 기와를 깨는 사람 말고⁠, 규칙을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네⁠. 그래도 내 손목은 그대로야⁠.⁠”

방규철이 나를 봤다⁠.

“⁠그러니 시험을 하겠네⁠. 단오 결승 첫 북이 울릴 때⁠, 호심정 심판석에 풍운 만두 한 판이 있어야 하네⁠. 식지 않은 채로⁠. 길은 자네가 찾게⁠. 다만 비무 하나 넘지 말고⁠, 남의 기와 한 장 깨지 말 것⁠. 해내면 금지령 대신 라이더 조합과 연합이 같이 배달 길 규칙을 만드네⁠. 못 하면 금지령이 서고⁠, 자네는 항주를 떠나게⁠.⁠”

문파 대표들이 하나씩 손을 들었다⁠. 송학 진인이 들고⁠, 현진의 장로가 들고⁠, 공동과 아미가 들었다⁠. 곽만금도 손을 들었다⁠. 웃으면서⁠.

“⁠좋은 시험이오⁠. 다만 풍운은 이제 없소⁠. 내 지점이 됐으니⁠. 그리고 회장님⁠, 호심정은 섬이지요⁠. 단오 날엔 용선 놀이가 있어 서호 배는 비룡이 다 빌려 두었소⁠. 나룻배 한 척까지⁠.⁠”

곽만금이 문턱의 나를 내려다봤다⁠.

“⁠짚신 대표⁠, 물 위를 걸을 줄 아시오⁠?⁠”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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