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404자)

한 해 살기

제주 한 달 살기 · 석담율

11월 18일 아침⁠, 평식 씨가 작업 트럭으로 우리를 공항까지 태워 주었다⁠. 앞자리에 미랑 씨⁠, 가운데에 대봉 씨⁠, 짐칸 쪽 창가에 내가 끼어 앉았다⁠. 대봉 씨 무릎 위에 귤 상자 두 개가 포개져 있었다⁠. 하나는 미랑 씨네 큰애 것이고⁠, 하나는 미랑 씨 시어머니 것이라고 했다⁠. 대봉 씨는 양복을 입지 않았다⁠. 작업복에 수건이었다⁠. 미랑 씨가 작업복 차림으로 비행기를 타겠느냐고 하자 대봉 씨는 서울 사람들이 귤 농사꾼 얼굴을 봐야 한다고 했다⁠.

공항 출국장은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로 붐볐다⁠. 대봉 씨는 귤 상자를 부치고 검색대 줄 끝에 붙었다⁠. 미랑 씨가 앞에⁠, 대봉 씨가 뒤에⁠. 나는 줄 밖 유리벽 앞에 서 있었다⁠. 평식 씨는 주차장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대봉 씨가 검색대 문을 지나자 삐 소리가 났다⁠. 직원이 대봉 씨를 옆으로 불러 세웠다⁠. 작업복 가슴 주머니를 두드렸다⁠. 대봉 씨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귤 가위였다⁠. 날이 짧고 손잡이가 두꺼운 가위⁠. 수학여행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르신⁠, 이건 기내 반입이 안 됩니다⁠.⁠”

“⁠귤 따는 가위우다⁠.⁠”

“⁠네⁠, 그래도 안 됩니다⁠.⁠”

“⁠서울에도 귤나무 있수과⁠?⁠”

“⁠없습니다⁠, 어르신⁠.⁠”

“⁠그럼 가위가 있어야 귤나무를 심지⁠.⁠”

직원이 웃음을 참으며 가위를 바구니에 담았다⁠. 대봉 씨는 가위가 든 바구니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미랑 씨가 검색대 너머에서 돌아왔다⁠. 아버지 얼굴을 보고 멈췄다⁠.

“⁠아빠⁠.⁠”

대봉 씨가 고개를 들었다⁠.

“⁠가기 싫으면 말해⁠. 이번에는 말해⁠. 사다리에서 떨어졌을 때처럼 사흘 뒤에 말하지 말고⁠.⁠”

검색대 앞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비켜 지나갔다⁠. 대봉 씨는 수건을 벗었다⁠. 짧은 회색 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윗밭 조생이 아직 안 달았다⁠. 열흘은 더 있어야 돼⁠.⁠”

“⁠그래서⁠?⁠”

“⁠조생 다 따고 갈게⁠. 1월에⁠. 둘째 나올 때 큰애 볼 사람 없잖아⁠. 2월 말까지 있다가⁠, 3월엔 내려와야 돼⁠. 가지 쳐야 하니까⁠. 그다음 겨울에도 그렇게 하고⁠.⁠”

미랑 씨 입술이 떨렸다⁠. 화를 내려는 떨림인지 다른 떨림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미랑 씨는 한참 아버지를 보다가 검색대 직원 바구니에서 가위를 집어 아버지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럼 사다리는 누가 잡아⁠?⁠”

미랑 씨가 유리벽 밖의 나를 돌아보았다⁠. 대봉 씨도 나를 보았다⁠. 나는 유리벽에 손바닥을 댔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선생님⁠, 아빠가 사다리 혼자 올라가면 바로 저한테 전화하세요⁠. 바로요⁠.⁠”

“⁠바로 할게요⁠. 사흘 뒤 말고⁠.⁠”

미랑 씨가 웃었다⁠. 울면서 웃는 얼굴이 대봉 씨와 똑같았다⁠. 미랑 씨는 아버지를 한 번 안고⁠, 배가 걸려서 반만 안고⁠, 혼자 검색대를 지나갔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대봉 씨는 가위를 손에 쥐고 미랑 씨가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부친 귤 상자 두 개는 미랑 씨와 함께 서울로 갔다⁠. 대봉 씨만 남았다⁠.

대봉 씨가 검색대를 거꾸로 걸어 나왔다⁠. 직원이 어디 가시느냐고 불렀다⁠. 대봉 씨는 가위를 들어 보이며 귤 따러 간다고 했다⁠. 대봉 씨는 유리벽 앞까지 와서 내 앞에 멈췄다⁠. 수건을 다시 썼다⁠. 한 번만 썼다⁠.

“⁠선생⁠, 내 사다리 잡아 줄 수 있수과⁠? 1월까지⁠.⁠”

“⁠1월까지만요⁠?⁠”

“⁠3월에 다시 내려오면 그때 또 물으쿠다⁠.⁠”

나는 유리벽에 댔던 손바닥을 떼어 대봉 씨 작업복 가슴 주머니에 귤 가위를 도로 꽂아 주었다⁠.

*

모살개로 돌아오는 트럭에서 대봉 씨는 내내 창밖만 보았다⁠. 해안 도로가 끝나고 올레 입구가 보일 무렵 대봉 씨가 입을 열었다⁠.

“⁠선생⁠, 밖거리에 방이 두 칸이우다⁠.⁠”

“⁠알아요⁠.⁠”

“⁠작은방 하나 세 줍서⁠.⁠”

평식 씨가 운전대를 잡은 채로 쿡 웃었다⁠. 나는 창밖을 보며 표정을 단속했다⁠. 서른 해 동안 교실에서 웃음을 참을 때 쓰던 얼굴이었다⁠.

“⁠월세는요⁠?⁠”

“⁠귤 두 상자⁠.⁠”

“⁠한 달에요⁠?⁠”

“⁠한 달에⁠.⁠”

트럭이 올레 입구에 멈췄다⁠. 춘옥 삼촌이 솥을 씻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제 걸었던 솥이 아직 길가에 있었다⁠. 대봉 씨가 내리자 춘옥 삼촌이 눈을 크게 떴다⁠.

“⁠느 서울 간다며⁠?⁠”

“⁠1월에 가우다⁠. 조생 따고⁠.⁠”

“⁠그럼 어디 살아⁠?⁠”

“⁠선생 집 작은방에⁠. 월세 두 상자⁠.⁠”

춘옥 삼촌이 수세미를 든 채로 나를 보았다⁠.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세 상자⁠.⁠”

춘옥 삼촌이 말했다⁠. 대봉 씨가 입을 벌렸다⁠.

“⁠삼촌이 왜 정하우꽈⁠?⁠”

“⁠작년엔 니가 귤값을 몰랐지⁠. 이 선생이 라이브에서 다 말해 버렸잖아⁠.⁠”

대봉 씨는 수건을 벗어 춘옥 삼촌 솥 손잡이에 걸쳐 놓고⁠, 세 상자로 하겠다고 했다⁠.

*

대봉 씨가 작은방에 든 첫날 밤⁠, 밖거리 벽은 얇았다⁠. 대봉 씨의 라디오 소리가 벽을 넘어왔다⁠. 밤 열한 시 지역 방송이 귤 경락가를 읽었다⁠. 올해 조생 값이 조금 올랐다고 했다⁠. 대봉 씨가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한참 뒤 벽에서 똑똑 소리가 났다⁠. 두 번이었다⁠.

“⁠선생⁠, 자우꽈⁠?⁠”

“⁠아니요⁠.⁠”

“⁠춥수다⁠. 진피차 있수과⁠?⁠”

나는 주전자에 귤껍질을 넣고 물을 올렸다⁠. 툇마루에 담요 하나를 깔고 앉았다⁠. 대봉 씨가 작업복 위에 점퍼를 걸치고 나와 옆에 앉았다⁠. 하늘에 별이 많았다⁠. 서울에서는 셀 수 있던 별이 여기서는 셀 수 없었다⁠. 차를 한 모금씩 마셨다⁠. 쓴맛이 먼저 오고⁠, 기다리니 단맛이 왔다⁠. 이번에는 단맛이 많이 왔다⁠.

“⁠선생⁠, 내일부터 내가 집세 내는 사람이우다⁠.⁠”

“⁠네⁠.⁠”

“⁠집세 내는 사람이 집주인 어깨에 기대도 되우꽈⁠?⁠”

“⁠월세 밀리지 않으면요⁠.⁠”

대봉 씨 어깨가 내 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고개를 대봉 씨 어깨에 얹었다⁠. 작업복에서 귤껍질 냄새가 났다⁠. 예순과 쉰여덟이 담요 한 장을 나눠 덮고 별 아래 앉아 있었다⁠. 대봉 씨 손이 담요 밑에서 내 손을 찾았다⁠. 가위 자국이 하얀 손이 내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들어왔다⁠. 우리는 차가 다 식을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다⁠. 식은 차도 끝에 단맛이 남았다⁠.

일주일이 지나자 모살개의 아침이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여덟 시 사십 분이면 나는 돌담집 밖거리에서 나와 안거리 손님들 아침상을 확인했다⁠. 할망 집 빈방은 다섯이 되었다⁠. 돌담을 맞댄 집이 하나 더 붙었다⁠. 현 삼촌네 할망이었다⁠. 할망은 하얀 조개껍데기를 아직 몸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손님 아침상을 차리는 날마다 품삯을 받았고⁠, 받은 돈을 봉투에 따로 모았다⁠. 손주 등록금 봉투라고 했다⁠. 리조트 보상금에 대면 한참 모자란 봉투였다⁠. 할망은 봉투를 꺼내 볼 때마다 나를 흘겨보았고⁠, 흘겨본 다음에는 꼭 빙떡 하나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총회에서 손주 학비가 날아갔다고 하던 하르방은 아직 나한테 인사를 하지 않았다⁠. 현 삼촌네 밭이 있던 자리에는 섬바람 회사 땅이라는 팻말이 박혀 있었다⁠. 뽑힌 귤나무 자리에 잡초가 올라왔다⁠. 지키지 못한 것은 지키지 못한 채로 거기 있었다⁠.

양 본부장은 가끔 셔츠 차림으로 올레를 걸어 올라왔다⁠. 양식장 땅의 작은 호텔 설계를 다시 하는 중이라고 했다⁠. 객실은 열두 개⁠, 차는 해안 도로에 세우고 손님은 올레를 걸어 들어온다⁠. 평식 씨네 하청이 공사를 맡았다⁠. 1단계 공사비보다 한참 작은 공사였지만 직원 열두 명 가운데 아홉 명이 일을 이어 갔다⁠. 양 본부장은 회사에서 직급이 하나 내려갔다고 했다⁠. 말하면서 웃었다⁠. 양 본부장이 웃는 것을 이제는 자주 보았다⁠.

한번은 양 본부장이 올레를 올라오다 정낭 앞에서 멈추고 셔츠 주머니에서 빨간 깃발을 꺼냈다⁠. 첫날 우영팟에 박혀 있던 깃발⁠, 내가 대봉 씨에게 건네고 대봉 씨가 다시 나에게 건네고 내가 양 본부장에게 돌려준 깃발이었다⁠. 양 본부장은 깃발을 정낭 돌기둥 꼭대기에 단단히 묶었다⁠.

“⁠호텔 손님 길 표시입니다⁠. 해안 도로에서 걸어 올라오다가 이 깃발 보면 다 온 겁니다⁠.⁠”

주황빛으로 바랜 깃발이 바닷바람에 탁탁 소리를 냈다⁠. 첫날 무밭 흙을 튀기며 박히던 날과 같은 소리였다⁠.

마을회관에서는 할망들이 귤 상자 하나를 놓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삼 년 안에 돌담집을 되사려는 돈이었다⁠. 춘옥 삼촌이 맨 처음 물질해서 모은 돈 봉투를 넣었고⁠, 고추 할망이 손님 아침상 품삯을 넣었다⁠. 상자는 아직 바닥이 보였다⁠. 할망들은 상자를 들여다볼 때마다 바닥이 덜 보이게 귤을 몇 알씩 얹어 두었다⁠.

어느 오후 양 본부장은 불턱에서 춘옥 삼촌과 몸국을 먹었다⁠. 둘이 그을린 돌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춘옥 삼촌이 무슨 말을 하자 양 본부장이 숟가락을 든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나중에 들으니 양 본부장 어머니가 불턱에서 부르던 노래를 춘옥 삼촌이 불러 주었다고 했다⁠. 이어도사나⁠, 끝 소절까지⁠.

가족 단톡방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엄마 첫 월급 언제 나와⁠?⁠」

「⁠손님들 숙박비 정산은 이번 주 금요일⁠. 엄마 몫 떼고 나머지는 할망들 몫⁠.⁠」

「⁠엄마가 월급 받는다니 이상하다⁠」

「⁠어머님 저희 겨울휴가 거기로 갈게요⁠. 귤 따기 신청할게요⁠」

「⁠며느리 한 팀 접수⁠. 재온이는 운반 조⁠.⁠」

「⁠엄마 나 또 상자 날라⁠?⁠」

「⁠오십 개 나르면 몸국⁠.⁠」

재온은 한참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 사진 한 장을 올렸다⁠. 서울 회사 책상 위에 흉터 귤 하나가 놓여 있었다⁠. 껍질이 한 줄로 길게 까여 있었다⁠. 끊기지 않은 껍질이었다⁠.

*

11월 마지막 주⁠, 윗밭 조생이 다 익었다⁠. 대봉 씨가 새벽부터 사다리를 들고 올라갔고⁠, 나는 뒤따라 올라가 사다리 다리를 붙잡았다⁠. 사다리 위에서 대봉 씨가 귤 하나를 따서 꼭지를 두 번 자르고 아래로 떨어뜨렸다⁠. 나는 두 손으로 받았다⁠.

껍질을 까서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혀끝에 신맛이 살짝 닿았다가 금방 물러났다⁠. 단맛이 혀 가운데에 두껍게 깔리고⁠, 삼키고 나서도 목구멍 안쪽에 오래 남았다⁠. 첫날 툇마루에서 대봉 씨가 건넨 극조생은 혀끝이 오그라들도록 셨다⁠. 열흘만 더 달아 두면 끝맛이 꿀이 되겠다고 내가 말했다⁠. 윗밭 조생은 열흘이 아니라 한 달을 더 매달려 있었다⁠.

“⁠달다⁠.⁠”

“⁠선생 온 날부터 한 달 열흘이우다⁠.⁠”

대봉 씨가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사다리 다리의 새 고무가 흙에 눌려 있었다⁠. 대봉 씨는 내 바구니를 들여다보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칭찬 도장 같은 끄덕임이었다⁠.

해가 높이 올랐을 때 나는 밀짚 바구니를 귤로 가득 채워 윗밭 돌담 앞으로 내려왔다⁠. 내가 대봉 씨와 손으로 다시 쌓은 윗밭 담은 아니었다⁠. 돌담집 마당 끝⁠, 첫날 말뚝이 박혀 있던 우영팟 옆의 검은 담이었다⁠. 바구니가 무거워서 두 팔로 안아야 했다⁠. 흰 셔츠 위에 귤색 조끼⁠, 귀 아래까지 오는 회색 단발⁠, 동그란 안경⁠. 서른 해 동안 교실 책걸상을 옮긴 팔은 아직 쓸 만했다⁠.

담 너머에서 대봉 씨가 귤 상자 하나를 들어 담 위로 올리고 있었다⁠. 볕에 그을린 얼굴⁠, 짧은 회색 머리⁠, 무릎이 하얗게 닳은 작업복⁠, 머리에 질끈 동여맨 수건⁠. 상자 모서리가 담 맨 위 돌에 닿았을 때 대봉 씨가 멈췄다⁠. 상자를 든 채로 나를 보았다⁠.

담 옆에 귤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고⁠, 아주 멀리⁠, 담 너머 귤밭 너머에 바다가 옅은 줄 하나로 누워 있었다⁠. 바람이 담 틈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귤 바구니를 안고 담 앞에 서서 대봉 씨를 마주 보았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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