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09자)

수술실 앞 복도, 띠 없는 손목이 약 봉지를 들고 있었다

명절용 대여 애인 로봇 · 소예찬

2029년 10월 19일 금요일 오후⁠, 판교 오피스텔은 텅 비어 있었다⁠. 집주인은 새 세입자가 줄을 서 있다며 계약을 끝내는 날 바로 보증금을 돌려주었다⁠. 삼억 이천만 원이 통장에 들어왔다가 십 분 만에 삼억 천만 원이 빠져나갔다⁠. 소현은 남은 천만 원과 회색 후드티 다섯 벌⁠, 엄마가 싸 준 반찬통을 경차 뒷좌석에 실었다⁠. 이삿짐이 경차 한 대에 다 들어갔다⁠. 아홉 해 동안 판교에서 산 짐이었다⁠.

오후 네 시⁠, 소담 본사 지하 2층 보관실 앞에서 한재필과 우선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재필은 남색 조끼 대신 흰 셔츠 차림이었고⁠, 손에 서류철 하나를 들고 있었다⁠.

“⁠입금 확인했습니다⁠.⁠” 재필이 서류철을 내밀었다⁠. 「⁠소유권 이전 확인서 · 해솔(⁠원본⁠)⁠」⁠. “⁠서명은 해솔 말고 고객님이 하시면 됩니다⁠.⁠”

“⁠저 이제 고객 아니라면서요⁠.⁠”

“⁠서명하시는 순간까지는 고객님이십니다⁠.⁠”

소현은 서명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옥 자의 받침이 한 번에 꺾였다⁠. 선재가 노트북을 열어 화면을 돌려 보였다⁠.

“⁠설 패키지에서 고객님 댁 기록 다 뺐어요⁠. 그게요⁠, 민감 정보 필터는 이제 켜 놓고 돌려요⁠. 따뜻한 말이 좀 빠지긴 하는데요⁠.⁠” 선재가 머리를 긁었다⁠. “⁠빠진 자리는 그 집 가서 새로 배우라고 비워 뒀어요⁠.⁠”

화면 맨 아래 한 줄에 「⁠구복순 관련 항목 0건⁠」이 떠 있었다⁠. 소현은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냈다⁠. 삼 분 뒤 답이 왔다⁠. 「⁠신고 거둔다⁠. 상길이한테 물어봤다⁠」⁠.

*

보관실 문이 열렸다⁠. 맨 안쪽 정비 의자에서 해솔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바로 옆 의자에 해솔 2호가 앉아 있었다⁠. 남색 조끼를 벗고 갈색 스웨터를 입었고⁠, 무릎 위에 작은 여행 가방이 놓여 있었다⁠.

“⁠2호는 어디 가요⁠?⁠”

재필은 2호의 여행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대답하기 전에 숨을 한 번 골랐다⁠.

“⁠설 예약 손님 댁에 갑니다⁠. 작년 설부터 해솔을 기다리셨다는 분이요⁠.⁠” 재필은 2호의 어깨에 붙은 먼지를 털었다⁠. “⁠영천 할머니입니다⁠. 김장독 창고 할머니요⁠. 국수 삶아 주신⁠.⁠”

소현은 재필을 보았다⁠. 재필은 2호의 어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로봇을 찾아 나오던 날 할머니가 그러셨습니다⁠. 내년 설에는 제일 좋은 놈으로 보내 달라고⁠. 돈은 소 판 돈으로 내겠다고⁠. 그래서 해솔을 잡아 뒀습니다⁠. 사백열두 집보다 먼저 잡은 예약입니다⁠.⁠”

“⁠그럼 해솔을 제가 사 가면⁠…⁠…⁠”

“⁠할머니한테는 2호가 갑니다⁠. 고객님 댁 기록 빼고⁠, 빈 데로요⁠.⁠” 재필이 처음으로 웃었다⁠. 상담 전화의 웃음이 아니었다⁠. “⁠할머니 손이 찬지 아닌지는 2호가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합니다⁠. 그게 맞습니다⁠. 공청회에서 고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고른 건 복사가 안 된다고⁠.⁠”

“⁠팔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원본 한 번 팔면 사백 집이 원본 내놓으라고 한다고⁠.⁠”

“⁠내놓으라고 하시면 이렇게 말씀드릴 겁니다⁠. 원본은 대구 수성구에서 반납을 거부하셨다고⁠.⁠” 재필은 보관실 문 쪽으로 걸어가다 몸을 돌렸다⁠. “⁠사고는 사고입니다⁠. 이번 사고는 제가 낸 걸로 하겠습니다⁠.⁠”

선재가 해솔의 목덜미를 눌렀다⁠. 팬이 웅 돌기 시작했다⁠. 해솔이 눈을 떴다⁠. 갈색 눈이 이 초 만에 초점을 맞췄다⁠. 해솔의 왼쪽 손목은 맨살이었다⁠. 띠도⁠, 바코드도⁠, 남은 시간도 없었다⁠.

“⁠소현 씨⁠.⁠”

“⁠가자⁠. 대구⁠.⁠”

해솔이 일어나 2호 앞으로 갔다⁠. 같은 얼굴이 같은 높이에서 서로를 보았다⁠. 해솔이 2호의 스웨터 깃을 바로잡았다⁠. 엄마가 해솔의 셔츠 깃을 바로잡던 손놀림이었다⁠.

“⁠영천 어머님은 국수에 고명을 많이 올리십니다⁠. 그건 제가 들은 게 아니라 본부장님이 들은 겁니다⁠.⁠” 해솔이 말했다⁠. “⁠나머지는 직접 보십시오⁠.⁠”

2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각도가 해솔과 조금 달랐다⁠.

*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은 금요일 밤인데도 막혔다⁠. 해솔은 조수석에서 다리를 반듯하게 접고 앉아 반찬통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라디오에서 국회 소식이 나왔다⁠. 로봇 동반자 등록법은 공청회 뒤 위원회에 묶여 있다고 했다⁠. 맹남희 의원은 다음 국회에서 다시 내겠다고 했다⁠. 소현은 라디오를 끄지 않았다⁠. 법이 되든 안 되든 경차는 대구로 가고 있었다⁠.

추풍령휴게소에서 소현은 호두과자를 샀다⁠. 해솔은 봉지를 받아 들고 귀퉁이를 접었다⁠. 이번에는 한 번만 접었다⁠.

“⁠해솔⁠, 이제 이탈은 아무도 안 세⁠.⁠”

“⁠압니다⁠.⁠”

“⁠그럼 아무 말이나 해도 돼⁠.⁠”

해솔은 한참 말이 없었다⁠. 휴게소 불빛이 앞 유리를 지나갔다⁠. 해솔은 호두과자 봉지를 소현의 무릎에 올려놓고⁠, 소현의 오른손을 운전대에서 떼어 제 무릎 위로 가져갔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체온을 올렸느냐고 소현이 묻지 않았고⁠, 해솔도 말하지 않았다⁠.

*

밤 열한 시가 넘어 범어동 아파트 14층 현관문이 열렸다⁠. 엄마는 잠옷 위에 자주색 조끼를 걸치고 서 있었다⁠. 엄마의 눈이 해솔의 얼굴보다 먼저 왼쪽 손목으로 내려갔다⁠. 맨살이었다⁠.

“⁠띠 없네⁠.⁠”

“⁠샀습니다⁠, 어머님⁠. 소현 씨가요⁠.⁠”

“⁠얼마 주고⁠?⁠” 엄마가 딸을 보았다⁠.

“⁠보증금⁠.⁠”

엄마의 손바닥이 소현의 등에 철썩 떨어졌다⁠. “⁠니 미쳤나⁠? 판교 집은⁠? 회사는⁠?⁠”

“⁠집은 여기 있잖아⁠. 회사는 후배가 연락 왔어⁠. 귀환 경로 손볼 사람이 없대⁠. 대구에서 일주일에 사흘 원격으로 하래⁠. 팀장님도 된대⁠.⁠”

엄마는 딸의 등을 한 번 더 때리려다 손을 거두었다⁠. 대신 해솔의 운동화를 집어 신발장 문을 열었다⁠. 신발장 맨 아래 칸에 아버지의 검은 구두가 아홉 해째 놓여 있었다⁠. 엄마는 구두를 한쪽으로 밀고 빈자리에 해솔의 운동화를 나란히 넣었다⁠.

“⁠들어온나⁠. 이불 깔아 놨다⁠. 두 채⁠.⁠”

*

10월 21일 일요일 저녁 일곱 시⁠, 대구 대학병원 심장 병동 6인실 창가 침대에 엄마가 앉아 있었다⁠. 환자복 위에 자주색 조끼를 걸쳤다⁠. 간호사가 조끼는 벗으시라고 세 번 말했고⁠, 엄마는 세 번 다 춥다고 했다⁠. 곱슬 파마는 수술 모자 안에 넣기 좋게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상길이 귤 한 봉지를 들고 병실에 들어왔다⁠. 마침 간호사가 수술 동의서를 들고 들어와 보호자 서명을 받으려 했다⁠. 해솔이 습관처럼 볼펜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자 상길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해솔 씨⁠, 규정상 보호자 칸에는 가족만 됩니다⁠. 소현이가 써야 됩니다⁠.⁠”

“⁠압니다⁠. 손이 먼저 나갔습니다⁠.⁠”

소현이 동의서에 서명했다⁠. 해솔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지 않고 소현이 서명하는 동안 동의서 모서리를 눌러 주었다⁠. 종이가 미끄러지지 않았다⁠. 상길이 귤을 하나 까서 엄마에게 건넸다가⁠, 금식이라는 간호사 말에 도로 제 입에 넣었다⁠.

“⁠오빠⁠, 불수리 통지서는 어떻게 했어⁠?⁠”

“⁠작은어머니가 달라 캐서 드렸다⁠.⁠” 상길이 귤을 씹으며 침대 발치를 가리켰다⁠. 엄마의 가방 앞주머니에 접힌 종이 모서리가 보였다⁠. “⁠규정상 안 되는 거는 안 되는 기다⁠. 그래도 받아 간다 카시더라⁠.⁠”

여덟 시⁠, 상길이 돌아가고 나서 해솔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사과를 깎았다⁠. 껍질이 한 줄로 끊기지 않고 길게 내려왔다⁠. 맞은편 침대 할머니가 껍질이 몇 바퀴째인지 세다가 포기했다⁠. 소현은 보호자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해솔아⁠.⁠”

“⁠예⁠, 어머님⁠.⁠”

“⁠니 대본 이제 없제⁠?⁠”

“⁠없습니다⁠.⁠”

엄마는 사과 한 조각을 받아 입에 넣고 오래 씹었다⁠. 수술 전날이라 자정부터는 물도 못 마신다고 했다⁠. 엄마는 사과를 다 씹고 나서 해솔을 똑바로 보았다⁠.

“⁠그라믄 대본 없이 대답해라⁠. 다음 설에도 니가 운전할 끼가⁠? 내 무릎에 담요 덮어 주고⁠.⁠”

소현은 간이침대 모서리를 잡았다⁠. 출고 창구에서 재필이 형광펜으로 그은 줄이었다⁠. 소현이 두 번 그어 지운 줄이었다⁠. 엄마는 대본을 본 적이 없었다⁠.

해솔이 과도를 내려놓았다⁠. 손을 닦았다⁠. 엄마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예⁠, 어머님⁠. 다음 설에도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담요는 무릎 덮는 걸로 두 장 챙기겠습니다⁠. 소현 씨가 한 장 뺏어 갈 테니까요⁠.⁠”

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맞은편 침대 할머니도 웃었다⁠. 소현은 웃다가 코에 주름 세 개가 잡히는 것을 느꼈다⁠.

“⁠손이 아직 차네⁠.⁠” 엄마가 해솔의 손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예⁠. 내일 수술 끝나면 다시 보겠습니다⁠.⁠”

“⁠내일 수술 끝나면 니가 봐라⁠. 소현이는 잘 몰라본다⁠.⁠”

“⁠엄마⁠.⁠”

“⁠니는 깍두기나 뺏어 묵지⁠.⁠”

*

10월 22일 월요일 아침 일곱 시 반⁠, 수술실 앞 복도의 보호자 대기석에 셋이 앉아 있었다⁠. 소현과 해솔⁠, 그리고 첫 기차로 내려온 큰엄마였다⁠. 큰엄마는 「⁠복순이 화이팅⁠」 부채를 들고 왔다가 간호사의 눈총을 받고 가방에 넣었다⁠. 대기실 화면에 「⁠구○순 · 수술 중⁠」이 떴다⁠.

큰엄마는 해솔 옆에 앉아 해솔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니 로봇이라매⁠.⁠”

“⁠예⁠.⁠”

“⁠그래도 고스톱은 일부러 졌제⁠?⁠”

“⁠예⁠.⁠”

“⁠됐다 마⁠.⁠” 큰엄마는 해솔의 무릎을 두 번 두드렸다⁠. “⁠우리 동서가 니를 사위라 카면 니는 사위다⁠. 설에 큰집 와서 화투 쳐라⁠. 이번에는 이기지 마라⁠.⁠”

네 시간이 지났다⁠. 소현은 복도 끝 창문을 보다가⁠, 의자에 앉았다가⁠, 다시 창문으로 갔다⁠. 해솔은 소현이 일어설 때마다 같이 일어서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소현이 돌아올 의자를 비워 두었다⁠. 큰엄마는 기다리는 동안 졸다 깨다 하며 해솔의 어깨에 두 번 머리를 기댔다⁠.

열한 시 사십 분⁠, 소현의 휴대전화가 떨었다⁠. 문자였다⁠. 보낸 사람 칸에 해솔의 이름이 떠 있었다⁠. 판교에서 내려오는 길에 소현이 해솔 이름으로 새로 만들어 준 번호였다⁠.

「⁠연락이 없으면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이제 다 말했습니다⁠」

소현은 고개를 돌렸다⁠. 해솔이 바로 옆 의자에서 휴대전화를 든 채 소현을 보고 있었다⁠. 입으로 하다가 세 번 끊긴 말을 글자로 끝까지 보낸 것이었다⁠. 소현은 웃음이 터지려는 입을 손등으로 막았다⁠. 큰엄마가 눈을 떴다⁠.

“⁠니들 옆에 앉아서 문자 하나⁠?⁠”

수술실 문이 열렸다⁠. 파란 수술복의 의사가 마스크를 내리며 걸어 나왔다⁠. 셋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구복순 님 보호자분⁠? 잘 끝났습니다⁠. 판막 잘 들어갔어요⁠.⁠”

큰엄마가 소현의 등을 철썩 때리고 울기 시작했다⁠. 소현은 울지 않았다⁠. 다리가 풀려 해솔의 팔을 잡았다⁠. 해솔의 팔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

밤 아홉 시⁠,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엄마가 눈을 떴다⁠. 산소 줄이 코에 걸쳐 있었고⁠, 자주색 조끼는 침대 발치에 개켜져 있었다⁠. 간호사가 저녁 약 봉지를 침대 탁자에 놓고 나갔다⁠. 약이 바뀌었다고 했다⁠.

엄마가 입술을 달싹였다⁠. 소현이 귀를 가까이 댔다⁠.

“⁠흰 거 하나⁠, 분홍 거⁠…⁠…⁠”

“⁠오늘부터는 바뀌었습니다⁠, 어머님⁠.⁠”

해솔이 약 봉지를 집었다⁠. 띠가 없는 왼쪽 손목이 형광등 아래서 맨살로 드러났다⁠. 해솔은 봉지 끝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 한 번에 반듯하게 뜯었다⁠. 알약 두 알이 해솔의 손바닥으로 굴러 나왔다⁠. 해솔은 손바닥을 엄마 앞으로 내밀기 전에⁠, 알약을 쥔 채 엄마의 손등에 손가락 끝을 잠깐 댔다⁠. 소현은 물컵을 든 채 해솔의 손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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