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822자)
후보 일번, 외상 손님
신이 죽은 신전에서 새 신 오디션을 엽니다 · 장연무
아침 미사에 온 사람은 둘, 염소는 하나였다. 리베 신전의 긴 의자는 서른두 개였고 그중 맨 앞 의자에 지팡이 할머니와 앞니 빠진 할머니가 나란히 앉았으며, 염소는 통로 한가운데 서서 성수반 가장자리를 핥고 있었다. 깨진 천창으로 늦여름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금 간 제단 위에 하얗게 누웠다.
캐스퍼 웰은 제주 잔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포도밭 어머니께 바치는 올해 첫 포도주였고, 혀끝에 대면 아직 날이 선 신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야 단맛이 따라왔다. 캐스퍼는 잔을 제단에 내려놓고 늘 하던 대로 손바닥을 제단 돌 위에 얹었다. 돌이 따뜻했다.
“어머니가 오늘도 숨을 쉬시네.”
지팡이 할머니가 말했다. 앞니 빠진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고, 염소가 매애 하고 거들었다. 캐스퍼는 제단 쪽을 보지 않고 축복의 말을 끝까지 외웠다.
미사가 끝나고 문을 열자 계단 아래에 검은 사제복을 단추 끝까지 채운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서른 남짓, 등이 곧고 구두에 먼지 한 톨이 없었다. 캐스퍼는 허리를 정확히 삼십 도로 숙였다.
“왕도 대신전 아델하이트 브룬 추기경님의 비서 겸 심문관, 오린입니다. 서부 신전 정리 건으로 왔습니다.”
“리베 신전의 캐스퍼 웰입니다. 정리라는 말이 아침부터 무섭군요. 포도주 한 잔 하시겠습니까?”
“근무 중입니다.”
오린이 봉투를 내밀었다. 붉은 밀랍에 대신전의 해 무늬가 찍혀 있었다. 캐스퍼가 봉투를 뜯는 사이 염소가 계단을 내려와 오린의 소맷자락을 씹기 시작했고, 오린은 소매를 빼지도 염소를 보지도 않고 서 있었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왕국을 비추는 빛의 신, 이 신을 모시는 왕도 대신전은 서부 리베 골짜기의 풍요의 신, 이른바 포도밭 어머니의 소멸을 확인했다. 신이 없는 신전은 수확이 끝나면 닫는다. 추기경이 내일 저녁 리베에 닿으니 사제는 열쇠를 내놓고, 신전 마당의 포도나무와 땅은 대신전 재산으로 넘긴다. 사제 캐스퍼 웰은 왕도로 와서 새 일을 받는다.
“새 일이 뭡니까?”
“문서 창고의 먼지 터는 일로 압니다.”
“정직하시군요.”
“거짓말은 죄입니다.”
오린이 말하고 다시 삼십 도로 숙였다. 그제야 염소가 씹던 소매를 놓았다. 오린의 소매 끝이 젖어 있었다.
*
신전 마당에는 이백 년 된 포도나무 마흔 그루가 있었다. 밑동은 사람 허벅지만큼 굵었고 껍질이 실처럼 일어나 손을 대면 부스러졌다. 캐스퍼는 세 번째 줄 끝 나무에서 송이 하나를 골라 맨 아래 알을 땄다. 해를 가장 덜 받은 알이었다.
이로 껍질을 터뜨리자 시큼한 즙이 혀 양옆을 찔렀다. 씨를 깨물었더니 떫은맛이 잇몸까지 번졌다. 씨가 아직 초록이었다. 캐스퍼는 알을 하나 더 따서 혀 위에 오래 굴렸다. 해마다 이맘때면 이 나무의 알은 혀 가운데에서 단맛이 먼저 퍼졌다. 올해는 이 단맛이 혀 뒤쪽 어딘가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열이레였다. 예년 같으면 이 나무는 첫서리 며칠 전에 거두었는데, 올해는 이날보다 열이레가 더 걸렸다. 리베 골짜기의 첫서리는 대개 구월 보름 무렵에 왔고, 포도밭 어머니가 있던 해에는 포도가 그보다 먼저 다 익었다. 올해는 서리가 포도를 열이레 앞지를 참이었다.
“사제 양반, 또 남의 포도 훔쳐 먹나?”
담 너머 비탈 아래에서 목소리가 올라왔다. 강가 가장 낮은 자리, 리베에서 가장 큰 포도밭의 주인 마르그리트가 챙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낫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마흔인데 팔뚝은 일꾼 누구보다 굵었고, 뒤로 일꾼 여섯이 바구니를 지고 따랐다.
“신전 포도는 신전 겁니다. 아직은요.”
“아직은.”
마르그리트가 웃지도 않고 따라 했다. 소문은 오린보다 먼저 와 있었다. 자기 밭의 알을 하나 따서 담 너머로 던졌고, 캐스퍼가 받아서 입에 넣었다. 마르그리트 밭의 알은 신전 것보다 더 셨다. 강가 바닥이라 해가 늦게 들고 서리는 먼저 왔다.
“열아흐레.”
캐스퍼가 말하자 마르그리트의 눈썹이 한쪽만 올라갔다.
“다음 주에 딴다. 벨렌스 대신전 매입상이 덜 익은 것도 받아 준대. 값은 셋에 하나지만 얼어 터진 걸 바닥에 버리는 것보단 낫지.”
“다 익을 때까지 기다리시면 셋을 다 받습니다.”
“서리 맞고 열아흐레를 더 버티라고? 신이 죽었다며. 아, 원래 없었나?”
“있었습니다.”
“있었으면 지금은 어디 갔는데?”
캐스퍼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르그리트가 낫으로 담장 돌을 한 번 툭 쳤다.
“신이 있을 때도 포도가 익은 건 해가 좋아서였어. 사제 양반은 혀는 좋은데 머리가 나빠.”
일꾼들이 웃음을 참으며 마르그리트를 따라 비탈을 내려갔다. 캐스퍼는 입안에 남은 마르그리트의 신 즙을 오래 삼키지 못했다.
*
이날 밤 리베 사람들은 엘사의 선술집 「구멍 난 술통」에 모였다. 엘사는 마르그리트의 동생으로 서른다섯이었고, 언니와 달리 웃음이 헤펐지만 외상값 앞에서는 언니보다 무서웠다. 천장에 매단 마늘 꾸러미 아래로 사람들 머리가 빽빽했고, 덜 마른 새 술통에서 나무 진 냄새가 올라왔다.
“대신전 매입상한테 파는 수밖에 없소.”
리베 촌장이 탁자를 두드렸다. 쉰 넘은 사내로 목소리가 크고 결정이 빨랐다.
“셋에 하나 값이라도 빈손보단 낫지. 신이 없는데 뭘 기다리오?”
“따는 날을 늦춰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캐스퍼가 일어서자 사람들 눈이 쏠렸다가 이내 흩어졌다. 캐스퍼는 사제였고, 사제의 말은 지난 삼 년 동안 미사에 오는 두 할머니만 들었다.
“어떻게든, 뭘 하실 건데요?”
엘사가 맥주 거품을 걷으며 물었다. 악의는 없었다. 캐스퍼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잔을 들었다. 마을에서 가장 싼 포도주였고, 첫 모금이 식초처럼 목구멍을 긁었다.
“그 술은 울고 있구먼.”
구석 자리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났다. 불그레한 얼굴에 배가 나온 사내가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빈 술병 세 개를 앞에 세워 두고 있었다. 겉보기에 마흔쯤, 수염에 포도주 얼룩이 말라 있었다. 엘사가 행주를 던졌다.
“바쿨 아저씨, 외상이 벌써 넉 달 치예요. 오늘은 물만 드세요.”
“물은 술이 되다 만 거야.”
바쿨이라는 사내가 행주를 머리에 얹은 채 손가락을 들어 캐스퍼의 잔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다시 마셔 봐, 사제.”
캐스퍼는 잔을 다시 입에 댔다. 혀가 먼저 놀랐다. 식초 같던 술이 혀 가운데에서 둥글게 퍼졌고, 잘 익은 검은 포도의 껍질 맛과 볕에 마른 흙냄새가 뒤를 받쳤다. 삼키고 나서도 목 안쪽에 단맛이 오래 남았다. 꿀이 아니었다. 꿀 맛이라면 캐스퍼는 이 마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캐스퍼는 잔을 엘사에게 내밀었다. 엘사가 맛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시잖아요. 늘 그 맛인데.”
캐스퍼가 다시 맛보았다. 달았다. 같은 잔에서 그에게는 달고 엘사에게는 셨다.
캐스퍼는 바쿨의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술꾼이 행주를 머리에서 내려 접으며 트림을 했다.
“당신, 뭡니까?”
“술의 신. 바쿨이라고 해. 한때는 서쪽 산골 마을 하나가 다 날 믿었지. 지금은 너 반쪽.”
“저 반쪽이요?”
“넌 사제잖아. 신이란 게 있다고는 믿지. 그래서 네 잔까지는 내 손이 닿아. 엘사 잔에는 안 닿고.”
바쿨은 빈 술병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밀어 줄을 세웠다. 병이 탁자 위에서 달그락거렸다.
“신은 자기를 믿는 사람이 손대는 것에만 손이 닿아. 잔이든 밭이든. 믿는 사람이 많으면 한 번에 많이 하고, 적으면 이 꼴이지.”
“포도밭도 됩니까? 포도를 익히는 것도?”
“익히는 게 내 일이야. 술이 되기 전 일까지.”
“그럼 리베 사람들이 당신을 믿으면.”
“그럼 리베 포도는 서리보다 먼저 익겠지. 근데 누가 날 믿어? 외상값 넉 달 치인 놈을?”
바쿨이 엘사 쪽으로 턱을 들었다. 엘사가 계산대 너머에서 외상 분필 판을 탁 하고 뒤집어 보였다. 하얀 줄이 빽빽했다. 캐스퍼는 이 판과 술꾼과 제 잔을 번갈아 보다가, 잔을 한 번에 비웠다. 단맛이 혀 끝에서 끝까지 갔다.
*
이튿날 저녁, 아델하이트 브룬은 해가 지기 한 시간 전에 리베에 들어왔다. 검은 마차 한 대와 말 탄 경비병 넷이 따랐다. 추기경은 쉰이었고 붉은 망토 아래로 은빛이 섞인 머리를 단단히 묶어 올렸다. 추기경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신전 마당의 포도나무 쪽으로 걸어가 세 번째 줄 끝에서 알 하나를 따 입에 넣었다.
캐스퍼가 따던 이 나무, 이 줄이었다. 아델하이트는 씨를 깨물고 잠깐 눈을 감았다.
“열이레쯤 늦었군.”
캐스퍼의 등이 서늘해졌다. 아델하이트는 씨를 손바닥에 뱉어 오린이 내민 손수건에 싸고, 신전 계단을 올라갔다. 오린이 붉은 밀랍과 대신전의 흰 끈을 꺼냈다. 경비병 둘이 신전 문을 닫았다.
계단 아래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장터 나갔다 오던 사람들, 엘사와 선술집 손님들, 지팡이 할머니와 앞니 빠진 할머니, 염소. 밭에서 올라오던 마르그리트도 낫을 든 채 걸음을 멈췄다.
“리베 신전의 신, 포도밭 어머니는 소멸했다.”
아델하이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계단 아래 맨 끝까지 갔다.
“대신전 법에 따라 신이 없는 신전은 닫는다. 이 시각부터 문 안에서의 예배는 금한다. 내일 새벽 일꾼들이 마당의 포도나무를 뽑을 걸세. 이백 년 묵은 뿌리라 땅이 깊이 파일 테니, 그 자리에는 대신전 곳간을 짓는다.”
오린이 문고리 두 개에 흰 끈을 걸어 묶고, 매듭 위에 붉은 밀랍을 떨어뜨렸다. 아델하이트가 반지를 눌렀다. 해 무늬가 밀랍에 박혔다.
“열쇠.”
아델하이트가 손을 내밀었다. 캐스퍼는 허리춤의 열쇠 꾸러미를 만졌다. 쇠가 손바닥에 차가웠다. 계단 아래에서 촌장이 헛기침을 했고, 누군가 이제 끝났다고 중얼거렸다. 지팡이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려다 다시 앉았다.
“추기경님. 신이 있는 신전은 닫지 못하는 것이 대신전 법이지요?”
“그렇네. 그래서 닫는 것이네.”
“이 신전에는 신이 있습니다.”
아델하이트가 처음으로 캐스퍼를 똑바로 보았다. 회색 눈이었다.
“포도밭 어머니는 갔네.”
“어머니 말고요. 지금 새 신을 들이는 중입니다.”
계단 아래가 조용해졌다. 엘사가 들고 있던 빈 바구니를 떨어뜨렸다. 캐스퍼는 자기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왔는지 그제야 들었고, 들은 김에 끝까지 가기로 했다.
“새 신 오디션입니다. 떠도는 신, 정령, 반신 누구든 와서 재주를 보이고, 리베 사람들이 심사합니다. 첫서리 전에 이 골짜기 포도를 지킬 신을 뽑겠습니다.”
“신은 고르는 것이 아니네. 섬기는 것이지.”
“그럼 대신전은 어떻게 빛의 신을 모시게 되었습니까? 왕국 사람들이 고른 것 아닙니까?”
오린이 숨을 들이켰다. 아델하이트는 아무 표정 없이 반지 낀 손을 내렸다.
“지금 한 말을 다시 할 수 있겠나, 사제?”
캐스퍼는 대답 대신 문고리의 흰 끈을 움켜쥐었다. 밀랍이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러지며 해 무늬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끈이 풀리고 문이 안쪽으로 반 뼘 열렸다. 이 틈으로 신전 안의 서늘한 돌냄새와 아침에 바친 포도주 냄새가 흘러나왔다.
“리베 신전, 새 신 오디션을 엽니다!”
캐스퍼의 목소리가 장터 사회자처럼 높아졌다. 계단 아래에서 웃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터졌다. 마르그리트가 낫을 내리고 이마를 짚었다.
아델하이트가 천천히 경비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었지. 이 문 안은 이제 이단 집회장이네.”
아델하이트가 손을 들었다. 경비병 넷이 칼자루에 손을 얹고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캐스퍼는 계단 아래를 훑었다. 사람들 맨 뒤, 선술집에서 따라 나온 바쿨이 공짜 구경에 술병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캐스퍼는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가 술꾼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 어, 외상은 내일.”
바쿨이 버티는 것을 캐스퍼가 등을 밀어 추기경 앞 계단에 세웠다. 경비병들의 칼끝과 바쿨의 불그레한 코 사이가 한 뼘이었다.
“참가 번호 일번, 술의 신 바쿨입니다!”
바쿨이 딸꾹질을 했다. 아델하이트의 회색 눈이 술꾼의 얼굴에 가 닿았고, 처음으로 이 눈이 깜박이지 않고 오래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