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474자)

졸업식

학생 귀신을 만난 은퇴 교장 · 하청오

교탁 위에 두루마리 열한 개를 나란히 놓았다⁠. 열두 번째는 백춘금의 것이었다⁠. 연보라 머리끈으로 묶어 금고에서 꺼낸 날부터 돌기둥과 셔터 앞을 오간 졸업장이었다⁠. 귀퉁이가 조금 닳아 있었다⁠. 나는 백춘금의 두루마리를 맨 앞에 놓았다⁠.

학교 직인을 나무 상자에서 꺼냈다⁠. 인주가 굳어서 쓸 수 없었다⁠. 쓸 필요도 없었다⁠. 1979년의 직인은 이미 졸업장마다 찍혀 있었다⁠. 나는 직인을 교탁 한쪽에 놓아두었다⁠. 사십팔 년 동안 금고에 갇혀 있던 도장도 졸업식은 봐야 했다⁠.

딸이 휴대전화로 졸업식 노래를 찾았다⁠. 반주만 나오는 영상이었다⁠. 첫 소절이 흘러나오자 복도의 할머니들이 먼저 따라 불렀다⁠. 가족들이 따라 불렀다⁠. 아이들이 따라 불렀다⁠.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열세 살 목소리가 할머니들 목소리 위에 얹혀 들렸고⁠, 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할머니들 노래가 유난히 높게 들렸다⁠. 하귀분의 오빠가 노래 중간에 목이 메어 입만 벌렸다⁠. 회장은 복도 벽에 등을 붙인 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도 않았다⁠.

“⁠지금부터 1978학년도 덕골국민학교 졸업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서른여덟 해 동안 해마다 이월에 한 말이었다⁠. 이번에는 사월이었다⁠.

*

“⁠졸업장⁠. 백춘금⁠.⁠”

백춘금이 교탁 앞으로 나왔다⁠. 꽃무늬 블라우스 소매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내렸다⁠. 나는 졸업장을 읽었다⁠. 위 사람은 본교 소정의 전 과정을 마쳤으므로⁠. 1979년 2월 15일⁠. 그리고 내가 덧붙이는 한 줄⁠. 2027년 4월 19일⁠, 덕골초등학교 교장 임길례가 대신 줌⁠.

두 손으로 내밀었다⁠. 백춘금이 두 손으로 받았다⁠. 다슬기 껍데기에 베인 자국이 많은 손이었다⁠. 손이 떨렸는데 졸업장은 떨어지지 않았다⁠. 백춘금이 허리를 숙였다⁠. 열세 살 때 배운 각도였다⁠.

맨 앞줄에서 서봉님이 손뼉을 쳤다⁠. 제일 먼저⁠, 제일 크게 쳤다⁠. 반장의 박수였다⁠. 아이들이 따라 쳤다⁠. 복도의 가족들이 따라 쳤다⁠. 경로당 할머니 일곱이 손뼉을 쳤다⁠. 도장 찍은 손들이었다⁠. 똥광을 내려놓던 할머니가 지팡이를 겨드랑이에 끼고 두 손으로 쳤다⁠.

백춘금은 졸업장을 안고 교실 문을 나가지 않았다⁠. 아이들 쪽으로 몸을 돌려⁠, 서봉님의 책상 옆으로 갔다⁠. 살아 있는 졸업생은 운동장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백춘금은 덕골에 남는 졸업생이었다⁠.

“⁠춘금아⁠.⁠” 서봉님이 올려다보았다⁠. “⁠축하한다⁠.⁠”

“⁠니가 밀어서 받은 거여⁠.⁠” 백춘금이 말했다⁠. “⁠니가 밀어서 받은 거⁠, 사십팔 년 걸려서 받었어⁠.⁠”

*

아이들은 하나씩 나왔다⁠. 순서는 아이들이 정했다⁠. 반장은 순서를 정하지 않았다⁠. 반장은 맨 마지막을 맡았다⁠.

도판식이 첫 번째로 나왔다⁠. 졸업장을 받고 허리를 숙이고⁠, 교실 문으로 가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복도의 회장에게 갔다⁠. 회장 앞에서 까치발을 하고 목덜미에 대고 마지막으로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회장이 목을 움츠렸다⁠. 도판식이 부산에서 온 누나를 보고 씩 웃었다⁠. 누나는 동생을 볼 수 있었다⁠. 어릴 때 동생에게 줄넘기 엇걸기를 가르친 누나였다⁠. 누나가 웃다가 울었다⁠. 도판식은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은행나무 밑을 지나 정문까지 단숨에 뛰었고⁠, 돌기둥 앞에서 누나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햇빛이 도판식을 지나갔다⁠.

이깨순은 졸업장을 받고 교단 앞에서 딸을 보았다⁠. 딸이 휴대전화로 아이돌 노래 후렴을 틀었다⁠. 이깨순이 팔을 뻗고⁠, 손목을 안으로 꺾고⁠, 어깨를 튕겼다⁠. 손목이 정확했다⁠. 딸이 따라 췄다⁠. 서른네 살의 뻣뻣한 춤과 열세 살의 반듯한 춤이 교단 앞에서 같은 박자를 탔다⁠. 할머니들이 손뼉으로 박자를 맞췄다⁠. 이깨순은 춤을 마치고 딸에게 말했다⁠. “⁠누나⁠, 이제 손목은 누나가 틀려요⁠.⁠”

하귀분은 졸업장을 받기 전에 오빠에게 갔다⁠. 오빠가 크레파스 상자의 비닐을 손톱으로 뜯었다⁠. 사십팔 년 만에 상자가 열렸다⁠. 스물네 색 크레파스가 처음 그대로 누워 있었다⁠. 하귀분이 빨간 크레파스 하나를 집어 들었다⁠. 크레파스는 분필만큼 가벼웠다⁠. 하귀분이 칠판 앞으로 가서 서울 누나 그림 옆에 그림을 그렸다⁠. 은행나무 하나⁠, 정문 돌기둥 둘⁠, 그리고 돌기둥 사이로 걸어 나가는 아이들⁠. 아이들 뒤에 키 큰 어른 하나⁠, 목에 안경을 건 어른 하나⁠. 하귀분은 크레파스를 오빠 손에 돌려주었다⁠. 오빠는 빨간 크레파스를 상자에 넣지 않고 손에 쥔 채로 동생이 졸업장을 받는 것을 보았다⁠.

쌍둥이는 둘이 같이 나왔다⁠. 졸업장도 둘이 같이 받겠다고 했다⁠. 나는 두 장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내밀었다⁠. 형이 오른손을⁠, 동생이 왼손을 받았다⁠. 받고 나서 둘이 동시에 막내를 향해 손가락 하트를 내밀었다⁠. 검지와 엄지가 정확했다⁠. 막내가 하트를 마주 내밀었다⁠. 쌍둥이가 운동장으로 나갈 때 막내가 운동장까지 따라 나갔다⁠. 은행나무 밑에서 멈췄다⁠. 쌍둥이는 정문 앞에서 돌아보고⁠, 둘이 똑같이 손을 흔들었다⁠.

나머지 아이들도 나왔다⁠. 아이들마다 가족이 왔거나⁠, 오지 않았다⁠. 가족이 오지 않은 아이에게는 할머니 하나가 일어나 손뼉을 쳤다⁠. 아이네 집 옆에 살던 할머니였다⁠.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나갈 때마다 복도의 어른들이 창가로 몰렸다⁠. 볼 수 있는 사람은 아이를 보았고⁠, 볼 수 없는 사람은 볼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만 보고도 무엇이 지나가는지 알았다⁠.

*

교실에 서봉님 하나가 남았다⁠.

서봉님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교탁 앞까지 걸어왔다⁠. 걸음이 반장의 걸음이었다⁠. 나는 마지막 두루마리를 들었다⁠.

“⁠졸업장⁠. 서봉님⁠.⁠”

서봉님이 두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 하고⁠, 손끝을 가지런히 모은 손이었다⁠. 상장을 받을 때 배운 손이었다⁠. 처음 춘금의 졸업장을 갖다주겠다고 내밀던 손과 같은 손이었다⁠. 이번에는 자기 졸업장을 받는 손이었다⁠.

나는 읽었다⁠. 한 줄을 덧붙였다⁠. 두 손으로 내밀었다⁠. 서봉님이 받았다⁠.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서봉님은 나를 보지 않고 교단 옆의 추동섭을 보았다⁠.

“⁠추 선생님⁠. 줄 잡아 주셔요⁠.⁠”

추동섭이 서봉님을 보았다⁠.

“⁠소풍 갈 때처럼요⁠. 선생님이 맨 앞에서 잡고요⁠. 이번엔 제가 맨 뒤 할게요⁠. 반장이 맨 뒤도 해 봐야지요⁠.⁠”

딸이 체육 창고에서 줄넘기 줄을 가져왔다⁠. 추동섭이 맨 앞 손잡이를 쥐었다⁠. 일흔두 살의 손이 손잡이 나무를 오래 쥐어 보았다⁠. 서봉님이 줄 맨 끝을 쥐었다⁠. 십 미터 줄의 앞과 끝이었다⁠. 가운데는 비어 있었다⁠. 줄이 교실 바닥에 길게 누웠다⁠.

추동섭이 앞장서서 교실 문을 나갔다⁠. 줄이 팽팽해졌다⁠. 서봉님이 따라 나갔다⁠. 복도의 가족들과 할머니들이 양옆으로 길을 비켰다⁠. 회장도 비켰고⁠, 군수도 비켰다⁠. 마상태가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고⁠, 화면 속에서 털모자를 쓴 노인이 보고 있었다⁠.

운동장에는 아침 햇빛이 고르게 깔려 있었다⁠. 은행나무 가지마다 연둣빛 잎이 손톱만 하게 돋아 있었다⁠. 추동섭이 은행나무 밑을 지났다⁠. 서봉님이 은행나무 밑을 지났다⁠. 줄을 잡고 있어서 멈추지 않았다⁠. 추동섭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정문까지 걸었다⁠. 손에 쥔 줄의 무게로 서봉님이 따라오는 것을 알았다⁠. 비닐봉지 하나만큼의 무게였다⁠.

정문 돌기둥 앞에서 추동섭이 멈췄다⁠. 사십팔 년 동안 사탕 봉지를 두던 자리였다⁠. 서봉님이 줄 끝을 쥔 채 멈췄다⁠. 둘 사이에 줄이 십 미터 누워 있었다⁠.

서봉님이 운동장을 돌아보았다⁠. 6학년 교실 창문에 어른들 얼굴이 가득 붙어 있었다⁠. 은행나무 밑에 백춘금이 졸업장을 안고 서 있었다⁠. 서봉님이 백춘금에게 소리쳤다⁠.

“⁠춘금아⁠! 꺾기는 니가 다른 사람한테 가르쳐 줘라⁠!⁠”

백춘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를 내지 못하고 끄덕였다⁠.

서봉님이 줄 끝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폈다⁠. 줄 끝이 흙바닥에 떨어졌다⁠. 아무도 서봉님의 손을 펴게 하지 않았다⁠. 서봉님이 폈다⁠. 줄을 놓았는데 서봉님은 은행나무로 미끄러져 돌아가지 않았다⁠. 졸업생이었다⁠.

서봉님이 추동섭 앞으로 걸어갔다⁠. 추동섭이 줄 손잡이를 쥔 채 서봉님을 내려다보았다⁠. 서봉님이 담임에게 허리를 숙였다⁠. 추동섭이 마주 허리를 숙였다⁠. 둘이 허리를 펴는 데 시간이 오래 들었다⁠.

“⁠선생님⁠, 한 뼘이었지요⁠.⁠” 서봉님이 말했다⁠. “⁠이제 안 모자라요⁠.⁠”

서봉님이 돌기둥 사이로 걸어 나갔다⁠. 정오 가까운 햇빛이 서봉님을 지나갔다⁠. 양 갈래 머리 끝의 빨간 고무줄이 마지막까지 빛났다⁠.

*

오월에 군의회가 재의에서 매입안을 고쳤다⁠. 학교는 군이 사들였고⁠, 체험관 대신 마을 쉼터로 쓰기로 했다⁠. 내 계약은 풀린 그대로였다⁠. 계약금은 돌아왔고⁠, 지붕과 보일러에 들어간 퇴직수당의 절반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려 달라고 하지 않았다⁠. 지붕은 아이들이 앉아 있던 교실을 덮고 있었다⁠.

마상태는 감사를 받고 면사무소로 발령이 났다⁠. 쉼터 담당이었다⁠. 첫 출근 날 등산 조끼를 입고 와서 정문 현수막을 갈았다⁠. 「⁠덕골 마을 쉼터⁠」 가칭이 아니었다⁠. 추동섭은 이장을 그만두었다⁠. 쉼터 운동장의 풀을 날마다 뽑으러 왔다⁠. 이장은 백춘금이 맡았다⁠. 쉼터 매점도 백춘금이 맡았다⁠. 첫날 마상태가 교장 선생님 매점이라고 했던 매점이었다⁠. 회장은 쉼터 개소식에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정문 돌기둥 아래에 흰 국화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유월 첫 주에 마상태가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우고 왔다⁠. 요양원 의사가 반나절 외출을 허락했다고 했다⁠. 노인은 동백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6학년 교실 문간에서 휠체어를 멈추게 하고⁠, 모자를 벗었다⁠. 두 손으로 모자를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한참 교실을 둘러보다가 아들에게 말했다⁠. “⁠가자⁠.⁠” 모자는 교탁 위에 두고 갔다⁠. 마상태가 모자를 집으려다 손을 거두었다⁠.

같은 주말에 남편이 처음으로 덕골에 왔다⁠. 파크골프 채를 트렁크에 싣고 왔다⁠. 운동장이 넓어서 연습하기 좋겠다고 했다⁠. 경로당 할머니들이 남편을 둘러싸고 서울 양반이냐고 물었고⁠, 남편은 수원이라고 대답하는 대신 엄지를 들었다⁠. 할머니들이 따라서 엄지를 들었다⁠. 그날부터 경로당 단톡방에도 엄지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쉼터의 무급 교장이 되었다⁠. 할머니들 한글 교실은 6학년 교실에서 열었다⁠. 첫 수업 날 경로당 할머니 일곱이 왔다⁠. 할머니들은 받아쓰기보다 휴대전화 동영상 보는 법을 먼저 배우고 싶어 했다⁠. 가짜 영상 거르는 법은 딸이 서울에서 화상으로 가르쳤다⁠.

수업이 끝난 오후에 백춘금이 매점 문을 닫고 6학년 교실로 왔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공깃돌 다섯 알을 꺼냈다⁠. 섬진강에서 주운 납작한 돌이었다⁠.

“⁠선생⁠, 앉으시오⁠. 꺾기 가르쳐 주께⁠.⁠”

나는 교단 앞 계단에 앉았다⁠. 무릎이 시큰거렸다⁠. 백춘금이 맞은편에 앉아 돌 다섯 알을 손바닥에 올렸다⁠. 한 번에 던지고⁠, 손등으로 받고⁠, 손등의 돌을 다시 던져 꺾어 쥐었다⁠. 손이 빨랐다⁠. 사십팔 년 동안 쓰지 않은 손이 기억하는 빠르기였다⁠.

“⁠해 보시오⁠.⁠”

나는 돌을 던졌다⁠. 손등에 하나가 남았다⁠. 하나를 꺾으려다 놓쳤다⁠. 돌이 교단 앞 마룻바닥을 굴러 맨 앞줄 가운데 책상 다리에 부딪혀 멈췄다⁠. 백춘금이 웃었다⁠. 나도 웃었다⁠. 목에 건 돋보기가 웃음에 흔들려 가슴께에서 달랑거렸다⁠.

창밖에서 은행나무 잎이 손바닥만 하게 자라 있었다⁠. 추동섭이 은행나무 밑에서 허리를 굽히고 풀을 뽑다가⁠, 교실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굴러간 돌을 주우러 맨 앞줄 가운데 책상으로 갔다⁠. 책상 위에 빨간 고무줄 하나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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