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5,338자)

이삿날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7년 4월 22일 목요일 오전 열 시⁠, 인천지방법원 형사 대법정⁠.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기 시작하자 방청석의 휴대전화 진동이 하나씩 꺼졌다⁠. 마지막까지 울리던 것은 옥경희의 휴대전화였다⁠. 아들의 전화였다⁠. 옥경희는 받지 않고 전원을 껐다⁠.

재판장은 공소사실을 하나씩 읽었다⁠. 412채⁠, 피해자 291명⁠, 보증금 398억 원⁠. 금고의 공동담보 근저당⁠, 돌려막기⁠, 리베이트⁠, 중개사무소 일곱 곳⁠. 2026년 11월 12일 출국⁠, 12월 4일 호치민 검거⁠, 2027년 1월 8일 송환⁠. 검사가 읽던 숫자를 재판장이 다시 읽었다⁠. 같은 숫자인데 재판장이 읽으니 무게가 달랐다⁠.

“⁠피고인 도상만은 피해자 일부에게 보증금의 30퍼센트를 지급하고 처벌불원서를 받았다⁠. 그러나 지급한 돈은 피고인이 같은 시기 부평구 청천동 신축 빌라 임차인들에게서 받은 보증금이었다⁠. 피해를 갚는 돈이 다른 피해를 만들었다⁠. 처벌불원서를 형을 정하는 데 유리하게 고려할 수 없다⁠.⁠”

맨 앞줄에서 옥경희가 고개를 숙였다⁠. 처벌불원서에 맨 먼저 도장을 찍은 사람이었다⁠. 사샤가 옥경희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옥경희는 손을 빼지 않았다⁠.

“⁠피고인 도상만을 징역 12년에 처한다⁠.⁠”

상만은 고개를 숙였다⁠. 영장 기각 날과 같은 각도였다⁠. 이번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없었다⁠. 상만은 피고인석을 나가며 방청석을 한 번 보았다⁠. 맨 뒷줄의 나윤을 찾는 눈이었다⁠. 찾고 나서 눈가 주름이 움직이지 않았다⁠. 교도관이 상만의 팔을 잡았다⁠.

“⁠피고인 반태식을 징역 2년에 처한다⁠. 피고인은 도주의 우려가 있으므로 법정에서 구속한다⁠.⁠”

태식의 변호인이 무언가 말하려 했다⁠. 태식이 변호인의 소매를 잡아 말렸다⁠. 태식은 방청석을 돌아보았다⁠. 둘째 줄 끝에 한솔이 앉아 있었다⁠. 4월부터 길병원에 다니는 신규 간호사였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온 얼굴이었다⁠.

“⁠한솔아⁠.⁠” 태식이 법정 경위가 다가오기 전에 말했다⁠. “⁠밥 챙겨 먹어⁠. 병원 밥 말고 집 밥⁠.⁠”

“⁠아빠도⁠.⁠”

교도관이 태식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태식은 문으로 걸어가다가 맨 뒷줄을 지나갔다⁠. 나윤과 눈이 마주쳤다⁠. 태식이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나윤은 알아들었다⁠. 18도⁠.

법정 밖 복도에서 한솔이 나윤을 기다렸다⁠. 간호사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한솔은 울지 않았다⁠. 야간 근무 뒤라 울 힘이 없다고 했다⁠.

“⁠면회 가면 아빠한테 물어볼래요⁠. 구치소 에어컨 몇 도냐고요⁠.⁠” 한솔이 말했다⁠. “⁠여름에 18도 아니면 아빠 못 견딜 거예요⁠.⁠”

“⁠소장님은 견디실 거예요⁠. 난로 30도도 견디셨어요⁠.⁠”

한솔이 처음으로 웃었다⁠. 복도 끝 자판기 앞에서 탁주엽이 율무차를 뽑고 있었다⁠. 탁은 나윤을 보고 종이컵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말없이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나윤은 탁이 무엇을 적는지 알았다⁠. 다 기록됩니다⁠. 오늘도⁠.

재열의 명예훼손 사건은 2월에 무혐의로 끝났다⁠. 현수막의 「⁠사기꾼⁠」은 오늘 판결문의 「⁠사기⁠」가 되었다⁠. 재열은 무혐의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사샤가 단톡방에 대신 썼다⁠. 「⁠위원장님 현수막 맞았어요⁠. 아이고⁠, 18만 원 거시기 잘 썼네요⁠.⁠」

*

나윤의 사건은 4월 초에 끝났다⁠. 검찰은 사기 방조를 빼고 공인중개사법 위반으로만 약식기소했다⁠. 법원은 벌금 300만 원에 리베이트 50만 원 추징을 명했다⁠. 나윤은 김밥집 석 달 월급에서 350만 원을 모아 냈다⁠. 엄마의 「⁠305⁠」 통장에는 손대지 않았다⁠. 「⁠305⁠」 통장의 1천만 원은 검찰이 압수해 갔다⁠. 엄마는 통장 표지만 돌려받았다⁠. 표지를 냉장고 문에 자석으로 붙여 두었다⁠.

305호는 3월 매각기일에 LH가 우선매수로 샀다⁠. 나윤은 302호처럼 LH 임대로 남았다⁠. 마용배 차장이 계약서를 건네며 말했다⁠. “⁠사안별로 다른데요⁠, 계 실장님 사안은 이렇게 됐습니다⁠.⁠” 웃으면서 말했다⁠.

*

저녁 일곱 시⁠, 305호⁠. 옥경희가 찜기를 들고 왔다⁠. 나윤은 냉동실 맨 안쪽에서 지퍼백을 꺼냈다⁠. 10월 27일 뷔페의 떡이었다⁠. 여섯 달 가까이 얼어 있었다⁠. 지퍼백 겉에 옥경희의 큰 글씨가 아직 남아 있었다⁠. 「⁠증거⁠」⁠.

“⁠증거 먹는 거야⁠.⁠” 옥경희가 떡을 찜기에 올렸다⁠. “⁠판결 났으니까 증거는 이제 떡이야⁠.⁠”

떡이 쪄지는 동안 둘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옥경희는 처음으로 305호 안에 들어왔다⁠. 선인장을 보고 몇 살이냐고 물었다⁠. 나윤은 네 살이라고 했다⁠. 으뜸 사무소 창가에서 네 해를 살았다⁠.

“⁠나 그 종이 찍은 거⁠.⁠” 옥경희가 찜기 뚜껑을 보며 말했다⁠. “⁠판사가 소용없다고 했지⁠.⁠”

“⁠네⁠.⁠”

“⁠잘됐어⁠. 소용없어서⁠.⁠” 옥경희가 콧등을 문질렀다⁠. “⁠2⁠,400은 청천동 애들한테 보낼 거야⁠. 그 신혼부부 말고 다른 집⁠. 피해지원센터에 물어봤어⁠. 그렇게 보내는 길은 없대⁠. 그래서 그냥 내가 들고 있어⁠. 누구 돈인지 아니까 못 써⁠.⁠”

“⁠할머니 돈이에요⁠.⁠”

“⁠알아⁠. 니가 그랬지⁠. 그래도 못 써⁠.⁠” 옥경희가 찜기 뚜껑을 열었다⁠. 김이 올라왔다⁠. 떡이 말랑하게 풀려 있었다⁠. “⁠됐다⁠. 증거가 다시 떡이 됐어⁠.⁠”

떡은 맛이 없었다⁠. 여섯 달 동안 냉동실 냄새를 먹었다⁠. 둘은 떡을 다 먹었다⁠.

*

2027년 5월 28일 금요일 오전 아홉 시⁠, 해든빌⁠. 단톡방 공지가 맨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재열이 올린 공지였다⁠. 「⁠특별법 5월 31일까지⁠. 아직 결정 신청 안 한 집 오늘 필로티로⁠. 서류는 계 실장⁠.⁠」

C동 앞에 1톤 트럭이 서 있었다⁠. 사샤의 이삿날이었다⁠. 사샤의 짐은 상자 열한 개와 매트리스⁠, 할아버지의 손풍금⁠, 그리고 냉장고였다⁠. 상자 하나가 더 있었다⁠. 아침에 송현동 엄마가 택시로 보낸 김장 김치 한 통이었다⁠. 통 뚜껑에 엄마의 큰 글씨가 있었다⁠. 「⁠C204 사샤⁠」⁠. 사샤는 김치통을 할아버지 상자 위에 올렸다⁠. 아이고⁠, 할아버지 옆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예요⁠. 냉장고가 문제였다⁠. 양문형 대형 냉장고였다⁠. 사샤가 2023년 이사 올 때 공장 동료 넷과 같이 들인 냉장고였다⁠.

“⁠원룸에 안 들어가요⁠. 문이 좁아요⁠. 냉장고 옵션도 있고요⁠.⁠” 사샤가 냉장고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버리면 돈 들어요⁠. 폐가전 스티커 만 원⁠.⁠”

“⁠302호 냉장고가 작아요⁠.⁠” 예슬이 말했다⁠. 배가 조금 나와 있었다⁠. 넉 달째였다⁠. “⁠아기 오면 이유식 얼려야 하는데⁠, 지금 냉동실에 얼음틀 하나 넣으면 끝이에요⁠.⁠”

사샤가 휴대전화를 보여 주었다⁠. 서울갈비 계정의 마지막 글이었다⁠. 문 닫은 가게 사진 아래 한 줄⁠. 「⁠사정으로 잠시 휴업합니다⁠」⁠. 1주년 풍선이 유리문 안에서 바람이 빠진 채 천장에 붙어 있었다⁠.

“⁠잠시가 12년이에요⁠.⁠” 사샤가 말했다⁠. “⁠베트남 동료가 그러는데⁠, 가게 자리에 쌀국숫집이 들어온대요⁠.⁠”

“⁠바꿔요⁠.⁠” 사샤가 손뼉을 쳤다⁠. “⁠제 큰 거 302호로⁠, 302호 작은 거 제 원룸으로⁠. 아이고⁠, 거시기⁠, 물물교환이요⁠. 고려인 할아버지들이 연해주에서 했던 거요⁠.⁠”

302호의 작은 냉장고는 트럭으로 먼저 내려갔다⁠. 재열이 혼자 등에 지고 내려갔다⁠. 남은 것은 사샤의 큰 냉장고였다⁠.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C동 2층에서 내려 B동 3층으로 올려야 했다⁠.

필로티 탁자에는 옥경희가 앉아 있었다⁠. 결정 신청을 아직 못 한 세 집의 서류를 받고 있었다⁠. 달력 뒷면에 큰 글씨가 붙어 있었다⁠. 「⁠사흘 남음⁠」⁠. 탁자 옆 기둥에는 8월에 붙인 「⁠4만⁠」이 아직 남아 있었다⁠. 비를 맞아 「⁠만⁠」이 번져 있었다⁠.

“⁠실장⁠, 이 집 확정일자 이거 맞아⁠?⁠”

나윤은 서류를 받아 순서대로 보았다⁠. 계약서⁠, 확정일자⁠, 전입신고⁠. 맞았다⁠. 옥경희는 서류를 봉투에 넣었다⁠. 봉투 겉에 큰 글씨로 쓴 집 호수가 칸 밖으로 넘쳐 있었다⁠.

*

열한 시⁠, B동 계단⁠. 재열이 냉장고 위쪽을 잡았고 나윤이 아래쪽을 받쳤다⁠. 사샤는 계단 위에서 손짓으로 길을 냈고⁠, 예슬은 3층 복도에서 302호 문을 열고 있었다⁠. 사샤의 휴대전화에서 타슈켄트의 어머니가 영상통화로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러시아어로 무언가를 계속 말했다⁠. 사샤가 옮겼다⁠.

“⁠엄마가 그러는데요⁠, 왼쪽으로 기울었대요⁠.⁠”

“⁠사샤 씨 엄마 화면에서는 오른쪽이에요⁠.⁠” 나윤이 말했다⁠.

“⁠아이고⁠, 그럼 엄마 말 반대로 하세요⁠.⁠”

1층에서 2층까지는 괜찮았다⁠. 2층 계단참에서 재열이 숨을 골랐다⁠. 나윤의 팔이 떨렸다⁠. 냉장고 아래쪽 모서리가 손바닥을 눌렀다⁠. 손에 땀이 찼다⁠.

“⁠쉬었다 가요⁠?⁠” 재열이 물었다⁠.

“⁠아니요⁠. 쉬면 못 들어요⁠.⁠”

“⁠실장님⁠.⁠” 재열이 냉장고 너머로 말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만 넘어왔다⁠. “⁠2024년에 우리 이사 올 때⁠, 실장님이 이 계단에서 예슬이 화분 들어 줬잖아요⁠. 그것도 다 기억해요⁠.⁠”

“⁠몬스테라요⁠. 지금도 살아 있어요⁠?⁠”

“⁠살아 있어요⁠. 예슬이가 물을 너무 줘서 잎이 노래요⁠.⁠”

재열이 웃었다⁠. 2층에서 3층까지 열여섯 계단이었다⁠. 나윤은 계단을 세었다⁠. 하나⁠, 둘⁠. 일곱에서 냉장고가 기울었다⁠. 재열이 위에서 버텼다⁠. 나윤이 아래에서 버텼다⁠. 열에서 사샤가 내려와 옆을 잡았다⁠. 열여섯에서 3층 복도에 닿았다⁠.

3층 복도 창 아래로 가스 계량기가 줄지어 있었다⁠. 2026년 8월 7일 아침 나윤이 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던 복도였다⁠. 복도 끝에 재열이 후드를 쓰고 서 있던 자리가 있었다⁠. 오늘은 거기 아무도 없었다⁠. 봄볕만 있었다⁠.

302호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냉장고가 문틀을 지나갈 차례였다⁠. 문 높이가 냉장고와 겨우 맞았다⁠. 재열이 먼저 뒷걸음으로 현관에 들어갔다⁠. 나윤은 냉장고 아래를 받치고 문 앞에 멈췄다⁠.

302호 문짝 가운데에 테이프 자국이 네 군데 남아 있었다⁠. 네모난 자국이었다⁠. 「⁠법원 경매 진행 중⁠」 안내문이 붙어 있던 자리였다⁠. 안내문은 LH가 집을 산 날 예슬이 떼어 냈다⁠. 테이프 자국은 떨어지지 않았다⁠. 예슬이 물티슈로 닦고⁠, 재열이 손톱으로 긁었지만 회색 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냉장고 윗면이 테이프 자국 아래를 지나갔다⁠. 나윤의 두 손이 냉장고 밑을 받치고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냉장고는 기울지 않았다⁠. 나윤의 손은 미끄러지지 않았다⁠.

예슬이 현관 안에서 냉장고 문짝을 손으로 받쳤다⁠. 사샤가 뒤에서 냉장고 옆구리를 밀었다⁠. 화면 속 타슈켄트의 어머니가 손뼉을 쳤다⁠. 냉장고가 문지방을 넘었다⁠. 302호 현관 바닥에 냉장고 바퀴 자국이 남았다⁠. 2024년 4월 나윤이 같이 닦은 바닥이었다⁠.

재열이 냉장고 전원 코드를 벽에 꽂았다⁠. 냉장고가 웅 소리를 내며 돌기 시작했다⁠. 나윤은 문 밖 복도에 서 있었다⁠. 손바닥을 바지에 닦았다⁠. 손바닥에 냉장고 모서리 자국이 빨갛게 남아 있었다⁠.

“⁠실장님⁠, 들어와요⁠.⁠” 예슬이 말했다⁠. “⁠물 드세요⁠. 냉장고가 아직 안 차가워요⁠.⁠”

나윤은 테이프 자국 아래를 지나 302호에 들어갔다⁠.

출처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 부칙 · 2027년 5월 31일까지 효력 — 피해자 결정 신청 기한 공인중개사법 제33조 · 금지행위 — 개업공인중개사 등이 사례·증여 등 어떠한 명목으로도 중개보수 외 금품을 받는 행위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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