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35자)

운하 다리

기루 문지기가 된 소림 땡중 · 류청산

해가 지기 한 시진 전부터 혜각은 삼협방 본창고 문 앞에 앉아 있었다⁠.

본창고는 서쪽 물목에서 가장 큰 창고였다⁠. 이층 높이의 판자벽에 기와를 얹었고⁠, 뒤편에 운하로 바로 나가는 수문이 따로 나 있었다⁠. 배는 이 수문 안쪽 물길에 붙어 있었다⁠. 창고 앞문과 수문 사이를 잇는 좁은 둑길이 하나 있었는데⁠, 혜각은 이 둑길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었다⁠. 짐을 배에 실으려면 혜각을 넘어가야 했다⁠.

혜각은 홍월루 대문 앞 혜명처럼 앉아 있었다⁠. 등을 세우고⁠, 손에 백다섯 알 염주를 감고⁠, 눈을 감고⁠. 삼협방 사내들이 몇 번 다가왔다가 물러섰다⁠. 둘이 한꺼번에 덤볐다가 둘 다 운하에 빠졌고⁠, 혜각은 눈을 뜨고 일어나 둘을 차례로 건져서 둑길에 눕혀 놓은 다음 다시 앉았다⁠. 이후로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해가 운하 너머로 기울 무렵 운하 거리에서 등불이 왔다⁠.

처음에는 짐꾼들이었다⁠. 외눈이 앞장섰고⁠, 짐 지는 작대기를 든 사내 마흔이 뒤를 따랐다⁠. 곰배팔을 묻은 사내들이었다⁠. 다음에 홍월루 기녀들이 왔다⁠. 연홍이 비파 대신 등불을 들었고⁠, 금란은 한 손에 등불⁠, 한 손에 요강을 들었다⁠. 내가 이 요강은 왜 들고 왔느냐고 묻자 금란이 말했다⁠. 이게 제일 손에 맞는다고⁠. 다음에 국숫집 할멈이⁠, 두부 장수 과부가⁠, 비단 가게 주인과 이 마누라가⁠, 고깃간 주인이 식칼을 허리에 차고 왔다⁠. 술집 주인도 왔다⁠. 며칠 전만 해도 땡중에게 물을 끼얹던 사람이 술 단지를 지고 왔다⁠. 추울 거라고⁠.

삼봉은 부엌 솥뚜껑을 들고 왔다⁠. 부엌이 타던 밤 혜각이 쌍도객의 칼을 받아 내던 이 솥뚜껑이었다⁠. 등불 든 사람들 사이를 돌며 판을 벌였다⁠. 땡중이 반여혁을 몇 수 만에 이기느냐에⁠.

“⁠영감⁠, 진다에 거는 사람은 없어⁠?⁠”

“⁠하나 있었소⁠. 내가 그놈 동전을 운하에 던졌소⁠.⁠”

은향은 내 곁에 섰다⁠. 등불을 두 손으로 들고⁠. 머리에 매화 비녀가 꽂혀 있었다⁠. 낮에 둑에서 내가 쥐여 준 것을⁠, 이 아이는 그새 꽂고 있었다⁠. 찾으면 꽂으라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아이가 찾을 때까지 꽂고 있겠다는 얼굴이었으니까⁠.

이날 운하 거리에서 본창고까지 온 등불이 백 개를 넘었다⁠. 나는 등불을 셌다⁠. 셈은 백둘에서 멈췄다⁠. 이후로도 등불이 왔는데 더는 세지 않았다⁠.

연홍이 둑길로 내려가 혜각 곁에 섰다⁠. 술집 주인이 지고 온 단지에서 한 사발을 떠다 혜각의 무릎 앞에 내밀었다⁠. 혜각이 눈을 뜨고 사발을 내려다봤다⁠. 술 냄새가 혜각의 코앞에서 김으로 올라갔다⁠. 사발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냄새만 길게 들이쉬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맨정신으로 하겠습니다⁠.⁠”

“⁠계율 지키시게요⁠?⁠”

“⁠아니요⁠. 취하면 손이 무거워집니다⁠. 오늘은 손이 가벼워야 해서요⁠.⁠”

연홍이 이 사발을 제 입으로 가져가 한 번에 비웠다⁠. 그리고 빈 사발을 혜각의 무릎 앞에 엎어 놓았다⁠.

“⁠그럼 이건 끝나고 마셔요⁠. 제가 따를게요⁠. 한 방울도 물 안 타고⁠.⁠”

혜각이 웃었다⁠. 볼에 남은 멍이 웃음을 따라 일그러졌다⁠. 연홍은 둑길을 올라와 내 곁에 섰다⁠. 연홍의 숨에서 술 냄새가 났고⁠, 등불을 쥔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나는 이 손을 내 손으로 덮었다⁠.

*

반여혁은 창고 안에서 나왔다⁠. 처음부터 창고 안에 있었다⁠. 창고 앞문에 서서 둑길 위 혜각을 내려다보고⁠, 이 너머 등불 백 개를 봤다⁠. 부채를 폈다⁠. 한 칸⁠, 두 칸⁠, 끝까지⁠.

“⁠마춘복⁠. 오늘은 사람을 많이 데려왔군⁠.⁠”

혜각이 눈을 뜨고 일어섰다⁠.

“⁠저는 아무도 안 데려왔습니다⁠. 다들 제 발로 오셨습니다⁠.⁠”

“⁠제 발로 온 사람들이 더 무섭지⁠. 데려온 사람은 돌려보내면 되는데⁠.⁠” 반여혁이 둑길로 내려섰다⁠. 반여혁의 뒤에 부방주가 천으로 감은 쇠손바닥을 늘어뜨리고 섰고⁠, 쇠갈고리와 삼협방 사내 서른이 창고 앞을 메웠다⁠. “⁠열여섯 해 전에 자네가 내 자리를 만들어 줬지⁠. 오늘은 내가 자네 자리를 만들어 주겠소⁠. 운하 바닥에⁠.⁠”

반여혁의 부채가 접히면서 들어왔다⁠.

나는 이때까지 반여혁이 칼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늘 남을 시켰다⁠. 그런데 이 부채는 칼이었다⁠. 쇠살이 접힌 채로 혜각의 목을 찔렀고⁠, 혜각이 비키자 부채가 펴지면서 혜각의 볼을 그었다⁠. 볼에 붉은 줄이 생겼다⁠. 반여혁이 웃었다⁠. 부채가 다시 접혔다가 펴질 때마다 쇠살이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가 날 때마다 혜각의 승복 어딘가가 갈라졌다⁠. 어깨⁠, 소매⁠, 허리⁠.

혜각은 막았다⁠. 맨손으로 쇠살을 받을 수 없어서 손목으로⁠, 팔뚝으로 받았다⁠. 받은 자리마다 피가 났다⁠. 등불 백 개 사이에서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삼봉도 판을 접었다⁠.

반여혁의 부채가 혜각의 눈을 노리고 펴졌다⁠. 혜각이 이 부채를 두 손으로 잡았다⁠. 펴진 부채의 쇠살을⁠, 손바닥으로 그러쥐었다⁠. 쇠살 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가 부채 살 사이로 흘러내렸다⁠. 혜각은 놓지 않았다⁠.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쇠살이 휘었다⁠. 한 살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이어서 두 살⁠, 세 살⁠. 부채가 혜각의 손 안에서 구겨진 종이처럼 꺾였다⁠.

혜각은 꺾인 부채를 둑길에 던지고 반여혁의 손목을 잡았다⁠. 다리를 걸었다⁠. 반여혁이 둑길 위에 등을 대고 넘어갔다⁠. 혜각이 이 가슴을 무릎으로 눌렀다⁠. 그리고 오른주먹을 들었다⁠. 피에 젖은 주먹을⁠. 솥뚜껑만 한⁠.

등불 백 개 사이에서 누가 소리쳤다⁠. 쳐라⁠. 다른 목소리가 따라 했다⁠. 쳐라⁠. 짐꾼들이⁠, 고깃간 주인이⁠, 국숫집 할멈이⁠. 외눈은 소리치지 않았다⁠. 나도 소리치지 않았다⁠. 나는 이 주먹을 봤다⁠.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무거워서 떨리는 것이 아니었다⁠.

반여혁이 눌린 채로 웃었다⁠. 입가에 피가 묻어 있었다⁠.

“⁠쳐⁠. 열여섯 해 전처럼⁠. 그러면 내일 아침 이 자리에 다른 놈이 서⁠. 내가 그날 반장 자리에 섰듯이⁠.⁠”

혜각의 주먹이 내려왔다⁠. 반여혁의 가슴 한 치 앞에서 멈췄다⁠. 주먹이 펴졌다⁠. 펴진 손바닥이 반여혁의 가슴에 얹혔다⁠. 홍월루 대문 앞에서 혜명의 손바닥이 반여혁의 가슴 앞에서 멈췄던 이 자리였다⁠.

“⁠압니다⁠.⁠” 혜각이 말했다⁠. “⁠그래서 안 칩니다⁠. 당신 자리를 또 만들어 주지는 않겠습니다⁠.⁠”

혜각은 반여혁을 놓고 일어섰다⁠. 반여혁은 둑길에 누운 채로 한참 하늘을 봤다⁠. 웃음이 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

외눈과 짐꾼들이 창고 앞문 빗장을 작대기로 부쉈다⁠. 삼협방 사내들은 막지 않았다⁠. 부방주가 천 감은 손을 들어 제 사내들을 물렸다⁠.

창고 안은 어두웠다⁠. 등불을 든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가자 안이 차례로 밝아졌다⁠. 쌀자루가 벽을 따라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자루마다 바닥에 둥근 표가 지져져 있었다⁠. 이 자루 더미 아래⁠, 아이들이 있었다⁠. 손목이 새끼줄로 이어진 채로⁠. 이 옆에 스무 살 남짓한 사내 아홉이 발목에 쇠고랑을 찬 채 앉아 있었다⁠. 남쪽 염전과 뱃일에 팔려 갈 사람들이었다⁠.

아이들은 서른하나였다⁠. 첫 배에 몇이 실려 갔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기녀들이 새끼줄을 풀었다⁠. 연홍이 이로 매듭을 물어 당겼고⁠, 금란이 요강을 내려놓고 손톱으로 매듭을 팠다⁠. 국숫집 할멈이 아이 하나씩을 품에 안았다⁠. 고깃간 주인이 식칼로 쇠고랑 자물쇠를 비틀다 칼을 부러뜨렸고⁠, 외눈이 작대기로 쇠고랑을 내리쳐 끊었다⁠.

나는 아이들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맨 앞 아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아이가 나를 쳐다봤다⁠. 이름을 묻는 어른이 처음이라는 얼굴이었다⁠. 아이가 이름을 말했다⁠. 나는 이 이름을 소리 내어 한 번 따라 했다⁠. 다음 아이에게 물었다⁠. 다음⁠, 또 다음⁠. 서른한 번⁠. 서른한 개의 이름을 들었다⁠. 하나도 빼지 않고⁠, 들을 때마다 소리 내어 따라 했다⁠. 셈을 하지 않았다⁠. 이름을 들었다⁠. 정이 들면 셈이 흐려진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날 밤 서른한 번 셈을 놓쳤다⁠.

*

창고 밖이 다시 밝아졌다⁠. 등불이 아니라 횃불이었다⁠. 횃불은 운하 거리 쪽이 아니라 조운 창고 쪽에서 왔다⁠. 관병들이 횃불을 들고 둑길을 메웠다⁠. 이 앞에 검은 옷에 붉은 띠를 두른 포두가⁠, 뒤에 소주 지부의 포졸 스물이 쇠사슬을 들고 섰다⁠. 그리고 뒤에서 관복 입은 사내가 가마에서 내렸다⁠. 조운 관리였다⁠. 둑길에 누워 있던 반여혁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웠다⁠.

반여혁이 일어서서 옷의 흙을 털었다⁠. 꺾인 부채를 주워 들었다⁠. 접히지 않는 부채를 펴진 그대로 가슴 앞에 들었다⁠. 그러고는 또 웃었다⁠. 이번에는 조운 관리의 곁에서⁠.

“⁠이 창고의 곡식은 조운 창고가 삼협방에 맡긴 나라 곡식이오⁠.⁠” 조운 관리가 횃불 아래에서 말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았는데 다 들렸다⁠. “⁠나라 창고를 부수고 들어간 자들이 있소⁠. 포두⁠, 저 중부터⁠.⁠”

포두가 쇠사슬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나를 보더니 걸음을 늦췄다⁠.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외상에서 한 냥 빼 주신다더니⁠. 나는 포두를 노려봤다⁠. 혜각 앞까지 와서 멈췄다⁠. 쇠사슬을 들고 서서⁠, 감지도 못하고 돌아가지도 못했다⁠.

등불 백 개가 내 뒤에 있었다⁠. 횃불 스물이 반여혁 뒤에 있었다⁠. 이 사이에 둑길이 있었고⁠, 둑길 한가운데 피투성이 땡중이 서 있었다⁠. 손바닥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

이때 다리 위에서 목소리가 내려왔다⁠.

“⁠춘복아⁠.⁠”

서쪽 물목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본창고 앞 둑길 바로 위로 지나갔다⁠. 이 다리 한가운데 잿빛 승복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삿갓을 벗어 들고⁠. 혜명이었다⁠. 북쪽 길로 떠났던 사람이 거기 서 있었다⁠.

운하에 살얼음이 잡히고 있었다⁠. 갈대 언저리부터 물이 하얗게 굳어 들어오고⁠, 횃불이 이 얼음 위에 비쳐 흔들렸다⁠.

“⁠운하가 얼기 시작했다⁠.⁠” 혜명이 말했다⁠. “⁠약속한 때다⁠.⁠”

혜각이 다리 위를 올려다봤다⁠. 횃불을 든 관병들도⁠, 등불을 든 사람들도⁠, 반여혁과 조운 관리도 다리 위를 봤다⁠.

“⁠사형⁠, 지금은 바쁩니다⁠.⁠”

“⁠안다⁠. 다 봤다⁠.⁠” 혜명이 삿갓을 다리 난간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묻는다⁠. 산으로 돌아오든지⁠, 여기서 죽든지 골라라⁠. 소림의 몸으로 나라 창고 앞에서 관병과 맞서는 것을 소림은 두고 볼 수 없다⁠. 돌아오면 내가 데려간다⁠. 안 돌아오면⁠, 오늘 밤 이 다리 위에서 둘 가운데 하나는 걸어서 내려가지 못한다⁠. 이번엔 사형으로 온 게 아니다⁠.⁠”

혜명이 두 손을 모았다가 왼발을 반 걸음 내디뎠다⁠. 홍월루 대문 앞에서 처음 맞섰던 이 자세였다⁠. 다만 이날과 달리 다리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올라오라는 자세였다⁠.

혜각이 나를 돌아봤다⁠. 처음이었다⁠. 싸울 때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행수님⁠, 아이들 이름 다 들으셨습니까⁠?⁠”

“⁠서른하나⁠.⁠”

“⁠그럼 됐습니다⁠.⁠”

혜각은 피 묻은 손을 승복에 닦았다⁠. 손목의 염주를 고쳐 감았다⁠. 그리고 포두 앞을 지나⁠, 반여혁과 조운 관리의 횃불 앞을 지나⁠, 다리로 오르는 돌계단 앞에 섰다⁠. 포두는 쇠사슬을 든 채 길을 비켰다⁠. 반여혁은 꺾인 부채 뒤에서 웃음을 거두고 이 등을 봤다⁠.

혜각이 첫 계단에 발을 올렸다⁠. 다리 위에서 혜명이 혜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얼음 위로 횃불이 흔들렸다⁠. 나는 등불 백 개 앞에 서서⁠, 이 계단을 하나씩 오르는 등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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