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71자)

흰 탑 지하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하진명

오웬의 장갑은 차가웠다⁠. 장갑 너머 손바닥은 따뜻했다⁠. 오웬은 내 손을 한 번 쥐었다 놓았는데⁠, 쥐는 힘이 생각보다 셌다⁠. 쪽빛과 피가 오웬의 흰 장갑에 묻어 손바닥 모양으로 남았다⁠.

“⁠조건이 있다⁠.⁠”

“⁠또요⁠?⁠”

“⁠루벤이 셋째 계단에 손을 대면 그날 벤다⁠. 마탑 안이든 밖이든⁠. 학장의 허락이 있든 없든⁠.⁠” 오웬이 장갑에 묻은 쪽빛을 내려다봤다⁠. “⁠그날은 성녀가 막아도 벤다⁠.⁠”

“⁠그 전에 꺼낼게요⁠.⁠”

“⁠꺼내지 못하면⁠?⁠”

“⁠그때는 당신이 나를 먼저 베야 할 거예요⁠. 내가 그 손을 잡고 있을 테니까⁠.⁠”

오웬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오웬은 장갑을 벗어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쪽빛 손자국이 안쪽으로 접혀 들어갔다⁠.

*

계획은 셋방 식탁에서 짰다⁠. 베티가 해열 약초를 달인 물을 마시며 우리 둘을 번갈아 노려봤다⁠. 베티의 열은 내렸지만 잔소리는 열이 날 때보다 더 날카로웠다⁠.

“⁠흰 탑 지하에 들어가려면 마탑 사람이어야 해요⁠. 성기사 외투로는 다리도 못 건너요⁠.⁠” 내가 말했다⁠. “⁠학관 사무원 옷을 입으세요⁠. 회색 웃옷에 소매 토시⁠. 칼은 두고요⁠.⁠”

“⁠칼 없이는 안 간다⁠.⁠”

“⁠마탑 안에서는 어차피 못 뽑잖아요⁠. 차고 가면 다리에서 걸려요⁠. 안 차고 가면 안 걸려요⁠. 어느 쪽이 업무 효율이 좋을까요⁠?⁠”

오웬이 칼자루를 쥔 채 한참 있었다⁠. 베티가 바느질 바구니를 끌어당겼다⁠.

“⁠일어나 보세요⁠. 치수 재게⁠.⁠”

“⁠치수는⁠…⁠…⁠.⁠”

“⁠학관 사무원 옷을 빌려 와도 성기사님 어깨에는 안 맞아요⁠. 터진 데 덧대야 해요⁠. 일어나세요⁠.⁠”

성기사가 일어섰다⁠. 베티가 줄자 대신 매듭 지은 실을 들고 오웬의 어깨에 댔다⁠. 팔을 들라고 했고⁠, 오웬이 팔을 들었다⁠. 뒤로 돌라고 했고⁠, 오웬이 돌았다⁠. 이 넓은 등을 실로 재며 베티가 혀를 찼다⁠.

“⁠어깨가 문짝이네⁠. 이 어깨로 사무원이라고 하면 누가 믿어요⁠? 등 좀 구부리세요⁠. 사무원은 등이 굽어요⁠. 하루 종일 앉아 있으니까⁠.⁠”

오웬이 등을 구부렸다⁠. 칼을 차고 서른 도시를 지나온 등이 셋방 식탁 앞에서 구부정해졌다⁠. 나는 웃음을 삼키느라 약초 물을 코로 마실 뻔했다⁠.

*

도린의 연구실을 비우는 방법은 내 손에 있었다⁠. 학관 일정 담당은 교수들의 야간 특강 시간을 잡는다⁠. 사흘 뒤 밤 아홉 시⁠, 흰 탑 꼭대기 강당에 신입생 전원 대상 특강을 넣었다⁠. 제목은 「⁠통증과 마력 순환에 관한 기초 강론⁠」 강사는 도린 교수⁠. 학관 회랑에 특강을 알리려면 서기 노인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노인은 허락하기 전에 물었다⁠.

“⁠도린 교수가 이 특강을 하겠다고 했소⁠?⁠”

“⁠하시게 될 거예요⁠. 신입생 전원 앞에서 자기 연구를 말할 기회를 마다할 교수는 없으니까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내 뒤에 선 회색 웃옷의 사내를 올려다봤다⁠. 사내는 등을 구부리고 있었는데⁠, 구부린 등으로도 노인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소매 토시는 팔뚝 중간에서 끝났다⁠.

“⁠새 사무원이오⁠?⁠”

“⁠네⁠. 오늘부터요⁠.⁠”

“⁠이름은⁠?⁠”

“⁠라이언입니다⁠.⁠” 오웬이 말했다⁠. 성을 댄 것까지는 괜찮았다⁠. 다음이 문제였다⁠. 오웬은 접수대 위의 깃펜을 집었는데 단검을 쥐듯 거꾸로 쥐었다⁠.

노인이 깃펜 쥔 손을 한참 봤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이 사무원은 칼 찬 사람처럼 걷소⁠.⁠”

“⁠전에 도축장에서 일했대요⁠.⁠”

오웬이 나를 돌아봤다⁠. 나는 웃으며 오웬의 깃펜을 바로 쥐여 줬다⁠.

특강을 알리러 교수실에 간 것은 나 혼자였다⁠. 도린의 교수실은 흰 탑 두 번째 층 서쪽 끝에 있었고⁠, 문을 열자 마른 약초와 잉크 냄새가 났다⁠. 책상 위에 아래 도시 지도가 펼쳐져 있었는데⁠, 염색 공방 자리마다 작은 돌이 하나씩 올려져 있었다⁠. 도린은 이 돌을 손가락으로 옮기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 방 구석에 루벤이 있었다⁠. 책 더미를 안고 서가 앞에 서 있었다⁠. 얼굴과 손의 쪽빛이 반쯤 빠져 하늘색이 되어 있었다⁠. 나를 보더니 책 더미를 서가에 밀어 넣고 등을 돌렸다⁠. 손목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줄을 가린 붕대였다⁠.

“⁠사흘 뒤 밤 아홉 시⁠, 꼭대기 강당이요⁠. 신입생 전원 대상 특강이에요⁠.⁠” 나는 특강 제목을 읽어 줬다⁠. “⁠교수님 연구를 신입생들한테 알릴 기회예요⁠. 학관에서 공식으로 잡은 일정이고요⁠.⁠”

도린이 웃었다⁠. 지도 위의 돌 하나를 집어 손바닥에서 굴렸다⁠.

“⁠누님이 잡아 주신 일정이라⁠. 영광입니다⁠.⁠” 도린이 돌을 내려놓았다⁠. 아래 도시의 다른 공방 자리에⁠. “⁠하겠습니다⁠. 특강 시간 동안 제 연구실이 비는 것도 알고 계시겠지요⁠.⁠”

“⁠지하 셋째 층은 학관 일정에 안 잡혀 있어서 모르겠는데요⁠.⁠”

“⁠그렇군요⁠.⁠” 도린은 더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이 더 무서웠다⁠.

나는 나오면서 루벤의 등을 봤다⁠. 루벤은 서가에서 책 한 권을 뺐다 넣었다 했다⁠. 같은 책을 세 번⁠. 붕대 감은 손목이 서가 모서리에 닿을 때마다 손을 움찔 거뒀다⁠.

*

사흘 뒤 밤 아홉 시⁠, 흰 탑 꼭대기 강당에서 종이 울렸다⁠. 우리는 동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등잔 대신 일정 담당이 들고 다니는 작은 마정석 등을 들었다⁠. 두 번째 층을 지나자 이 냄새가 다시 올라왔다⁠. 쓴 풀과 쇠 녹인 물⁠, 고름⁠. 오웬이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 냄새를 안다⁠.⁠”

“⁠아래 도시 염색 공방 냄새예요⁠.⁠”

“⁠첫 삶에서 웃는 시신 열한 구는 염색 공방 하수로에서 나왔다⁠.⁠” 오웬이 다시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목소리가 계단 벽에 부딪혀 낮게 울렸다⁠. “⁠모두 쪽빛 통에 한 번 담갔다 뺀 몸이었다⁠. 손목이 파래서 처음엔 아무것도 안 보였다⁠. 사흘째에 물이 빠지고서야 손목에 검은 손자국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미 누가 그 통에 몸을 담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조수를 잡은 거예요⁠?⁠”

“⁠조수 방에서 손자국과 같은 크기의 장갑이 나왔다⁠. 조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려 했을 때는 이미 재판이 끝나 있었다⁠.⁠” 오웬이 세 번째 층 마지막 계단에서 멈췄다⁠. “⁠나는 그게 정의라고 생각했다⁠. 두 해 동안⁠.⁠”

세 번째 층 복도 들머리에 경비 마법사 하나가 의자를 놓고 앉아 졸고 있었다⁠. 오웬이 우리 발소리에 눈을 떴다⁠.

“⁠지하 셋째 층은 도린 교수님 허락 없이는⁠…⁠…⁠.⁠”

“⁠학관 일정 담당이에요⁠. 다음 달 승급 시험 준비실로 지하 층 방 쓰임새를 조사하러 왔어요⁠.⁠” 나는 마정석 등을 들어 내 얼굴을 비췄다⁠. “⁠여기 사무원이 방 크기를 잴 거예요⁠. 라이언 씨⁠, 보폭으로 재 주세요⁠.⁠”

오웬이 복도로 내려가 보폭으로 벽을 쟀다⁠. 성큼⁠, 성큼⁠. 기사가 진군하는 보폭이었다⁠. 경비 마법사가 이 걸음을 보다가 나를 봤다⁠.

“⁠사무원이 왜 저렇게 걸어요⁠?⁠”

“⁠도축장 출신이래요⁠.⁠”

경비 마법사는 더 묻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오웬은 복도 끝에서 돌아서며 낮게 말했다⁠. 도축장 얘기는 그만하라고⁠.

세 번째 층 복도는 어두웠다⁠. 왼쪽 문 너머가 병자 스무 명이 누운 이 방이었다⁠. 문틈으로 푸른빛이 새어 나왔고⁠, 안에서 누군가 길게 숨을 쉬었다⁠. 오른쪽 복도 끝에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쇠로 테를 두른 문이었는데 문틈으로 하얀 김이 바닥을 따라 기어 나오고 있었다⁠. 냉기였다⁠.

*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잠글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복도 들머리의 경비가 지키는 한⁠, 여기까지 오는 사람은 도린과 이 조수뿐이었다⁠.

냉실 천장에 얼음 마정석이 박혀 있었다⁠. 손바닥만 한 돌 넷이 하얀 서리를 뿜었고⁠, 이 밑에 돌판 일곱 개가 놓여 있었다⁠. 돌판마다 사람이 누워 있었다⁠. 홑이불로 목까지 덮인 채⁠.

숨을 쉬니 콧속이 얼어붙었다⁠. 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냄새가 났다⁠. 달큰하고 무거운 냄새⁠. 쪽빛 통 냄새가 이 위를 덮고 있었지만 다 덮지 못했다⁠.

나는 첫째 돌판의 홑이불을 걷었다⁠. 염색공이었다⁠. 손가락이 쪽빛이었다⁠. 얼굴은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미간이 펴지고⁠, 눈가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죽은 사람이 웃는 얼굴을 나는 처음 봤다⁠. 장례식장에서 본 할머니는 웃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냥 잠든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잠든 게 아니라 웃다가 멈춘 것 같았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모두 웃고 있었다⁠. 오웬이 반대편 끝에서부터 홑이불을 걷어 왔다⁠. 손목부터 봤다⁠. 몸에 밴 순서였다⁠.

“⁠여기⁠.⁠”

일곱 번째 돌판의 사내는 허리에 판자를 대 묶은 채 누워 있었다⁠. 이 판자를 나는 알았다⁠. 지하 세 번째 층 병자 방⁠, 세 번째 침대⁠. 도린이 오른손 장갑을 벗고 손목을 쥐어 주던 짐꾼⁠. 허리뼈가 으스러졌는데 오늘 밤엔 잠을 잘 거라던 사람⁠. 허리뼈가 으스러졌을 뿐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도린도 웃고 있었다⁠.

나는 도린의 손목을 봤다⁠. 검은 손자국이 손목을 감고 있었다⁠. 병자 방에서 본 다섯 손가락 자국보다 훨씬 진했다⁠. 먹물에 담근 손으로 쥔 것처럼⁠. 무언가 이상했는데⁠, 이 이상한 것이 무엇인지 냉기 때문에 머리가 돌지 않았다⁠. 오웬이 이 손목을 들어 마정석 등에 비췄다⁠. 오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곱⁠.⁠” 오웬이 돌판을 하나씩 짚으며 말했다⁠. “⁠첫 삶의 하수로에서는 열하나였다⁠. 첫눈 사흘 전에⁠.⁠”

“⁠그럼 넷이 더⁠…⁠…⁠.⁠”

“⁠넷은 아직 옆방 침대에 누워 있겠지⁠.⁠” 오웬이 짐꾼의 얼굴 위로 홑이불을 도로 덮었다⁠. 덮는 손이 느렸다⁠. 홑이불 끝을 턱 밑에 반듯하게 접어 넣기까지 했다⁠. 원작에서 오웬이 전사한 동료 기사에게 망토를 덮어 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같은 손이었다⁠. “⁠이번엔 첫눈보다 보름도 더 빠르다⁠.⁠”

냉기가 손가락 끝으로 파고들었다⁠. 늙은 염색공에게서 받은 죽은 마디들이 냉기에 먼저 반응해⁠, 열 손가락 끝이 한꺼번에 바늘로 찌르듯 쑤셨다⁠. 나는 손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루벤을 흰 탑에 밀어 넣은 것은 나였다⁠. 루벤이 들어오자 도린의 일이 빨라졌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서두르지 않는 발소리⁠. 냉실 문이 열렸다⁠.

“⁠특강은 조교가 대신 읽고 있습니다⁠.⁠” 도린이 문간에 서서 말했다⁠. 회색 교수복 위로 냉기가 하얗게 감겼다⁠. “⁠누님이 잡으신 일정이라서요⁠. 신입생 전원 앞에서 제 연구를 말할 기회를 주신다니⁠, 너무 고마워서 오히려 의심이 갔습니다⁠.⁠”

도린이 오웬을 봤다⁠. 회색 웃옷⁠, 짧은 소매 토시⁠, 굽힌 등⁠.

“⁠성기사님⁠, 사무원 옷이 잘 어울리십니다⁠. 칼은 두고 오셨군요⁠. 현명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뭐예요⁠?⁠” 내가 물었다⁠. 내 목소리가 냉기에 갈라졌다⁠.

“⁠교단이 문을 닫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들의 마지막을 편하게 해 드렸습니다⁠.⁠” 도린이 장갑 낀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쌌다⁠. 늘 하던 이 손짓이었다⁠. “⁠웃는 얼굴 보셨지요⁠. 아래 도시에서 저렇게 웃으며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짐꾼은 죽을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날 교수님 입으로 오늘 밤엔 잘 잘 거라고 하셨잖아요⁠. 저 들으라고⁠.⁠”

도린이 일곱 번째 돌판을 봤다⁠. 아주 잠깐⁠, 도린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멈췄다⁠. 그리고 다시 움직였다⁠. 대답 대신 냉실 왼쪽 벽을 장갑 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벽 너머는 병자 방이었다⁠.

“⁠제게 따지시는 동안⁠,⁠” 도린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남의 통증을 말할 때의 이 목소리였다⁠. “⁠옆방에서는 루벤 군이 한 분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습니다⁠. 맨손으로요⁠. 오늘 밤을 못 넘기실 분이라서⁠.⁠”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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